겨자씨 믿음의 자리(누가복음 17:5–10)
주님 앞에 선 제자들이 어느 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이 말은 참으로 정직한 기도입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너무 작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라왔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기적을 보았고, 병든 자가 일어나는 장면도 보았지만, 삶의 깊은 자리에서 그들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용서하라는 말씀 앞에서, 형제가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말씀 앞에서, 제자들은 자기 마음의 바닥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것은 설명이 아니었습니다. 변명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그것은 너무 어렵습니다”라는 불평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의 기도였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리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자부하는 자리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자기 확신의 왕관을 쓰고 등장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오히려 무릎 꿇은 영혼의 떨림 속에서, “주님, 제게는 없습니다. 주님, 제 안에는 모자람뿐입니다. 주님, 저를 붙들어 주십시오”라고 고백하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 위에 세워지는 높은 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앞에 엎드린 낮은 제단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믿음을 더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믿음의 양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믿음의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여기서 믿음은 큰 덩어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은 크기보다 방향의 문제이며, 양보다 생명의 문제입니다. 겨자씨는 작습니다. 손가락 끝에 올려놓아도 잃어버릴 만큼 작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씨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죽은 바위는 아무리 커도 자라지 못하지만, 살아 있는 씨는 작아도 땅을 뚫고 올라옵니다. 주님은 믿음을 거대한 감정이나 화려한 종교적 능력으로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믿음을 작은 씨앗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라는 헬라어는 πίστις(피스티스)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생각의 동의가 아닙니다. 머리로 “그렇다”고 인정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πίστις(피스티스)는 신뢰이며, 맡김이며, 하나님께 자신을 기대는 영혼의 방향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많이 아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 존재를 맡기는 것입니다. 바람 부는 밤에 어린아이가 아버지 품에 기대듯, 영혼이 하나님께 무너져 안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믿음을 어떤 성취의 도구로 오해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내가 원하는 문이 열리고, 믿음이 있으면 내 계획이 순조롭게 되고, 믿음이 있으면 내 이름이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믿음은 하나님을 움직여 내 뜻을 이루게 하는 주문이 아닙니다. 참 믿음은 나를 움직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는 은혜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내 계획 안에 모셔 오는 힘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이끌어 가는 생명입니다.
주님께서 뽕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매우 깊은 뜻을 품고 있습니다. 뽕나무는 뿌리가 깊은 나무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여도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쉽게 뽑히지 않는 나무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그런 뽕나무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뿌리내린 상처가 있습니다. 오래된 미움이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한 이름이 있습니다. 자존심이라는 뿌리, 두려움이라는 뿌리, 탐욕이라는 뿌리, 자기 의라는 뿌리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뽑히지 않는 나무가 서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뽑히지 않습니다. 결심으로도 잠시 흔들릴 뿐입니다. 눈물로도 완전히 제거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겨자씨 한 알만한 참 믿음, 살아 계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믿음이 있을 때, 주님은 그 깊은 뿌리까지 다루십니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눈에 보이는 것과 시간 속에 잠시 머무는 것만 붙잡다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마음속에서 침묵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세상의 것들은 마치 전부인 것처럼 우리를 압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성은 모든 시간성의 원천입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세상의 무게가 아무리 커 보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 방울의 영원은 시간 아래 있는 모든 사물의 망망대해보다 더 무겁습니다. 믿음은 바로 그 영원을 현재 속으로 받아들이는 영혼의 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작아 보여도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능력 있는 것은 믿음 자체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붙드는 분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작은 손이라도 아버지의 손을 붙들면 깊은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손에는 힘이 없지만, 아버지의 손에는 힘이 있습니다. 믿음은 내 손의 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붙드신 하나님의 손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겨자씨 믿음은 작은 믿음이지만, 작고 초라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연결된 믿음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종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밭을 갈거나 양을 치고 돌아온 종에게 주인이 “곧 와 앉아서 먹으라”고 말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오히려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고 하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리고 종이 명한 대로 했다고 해서 주인이 감사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마지막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귀에 조금 낯설고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누군가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수고했으면 칭찬받고 싶습니다. 희생했으면 보상받고 싶습니다. 봉사했으면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헌신했으면 이름이 남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의 사람을 종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여기서 종이라는 헬라어는 δοῦλος(둘로스)입니다. δοῦλος(둘로스)는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뜻이 인생의 중심이 아니라 주인의 뜻이 중심이 된 사람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종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더해 달라는 기도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더 큰 기적을 행하라”가 아니라 “더 깊이 순종하라”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자라면 자랄수록 사람은 자신을 크게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 믿음은 자기를 과시하는 방향으로 자라지 않고, 자기를 내려놓는 방향으로 자랍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압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것마저 사실은 은혜였음을 압니다. 내가 견뎠다고 생각했던 시간도 주님이 붙드셨기 때문에 견딘 것이고, 내가 섬겼다고 생각했던 자리도 주님이 먼저 나를 섬기셨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는 말은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이 말은 절망의 언어가 아닙니다. 이 말은 은혜를 아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무익한”이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ἀχρεῖοι(아크레이오이)입니다. 이는 “쓸모없다”는 식의 인간 존재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 하나님께 어떤 빚을 지우거나 공로를 주장할 수 없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 제가 한 일로 주님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제가 순종했어도 그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제 모든 섬김조차 은혜의 빚 아래 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놀라운 역설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순종하면서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순종하면서 자유롭습니다. “주님이 이미 나를 사랑하셨으니, 내가 기쁨으로 섬깁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율법적 순종은 보상을 요구하지만, 복음적 순종은 은혜에 응답합니다. 율법적 섬김은 사람의 눈을 기다리지만, 복음적 섬김은 주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율법적 헌신은 자기 이름을 남기려 하지만, 복음적 헌신은 그리스도의 이름만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 앞에서도 거래하려 합니다. “하나님, 제가 기도했으니 응답해 주셔야 합니다. 제가 헌신했으니 복을 주셔야 합니다. 제가 오래 참았으니 이제는 제 뜻대로 해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서면 우리의 모든 거래는 무너집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워진 가장 깊은 은혜의 자리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모든 공로는 침묵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의는 낡은 옷처럼 벗겨지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 우리를 덮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발걸음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께 향한 인간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시간 속의 영원이 열리고, 죽음 가운데 새 생명이 솟아나며, 심판 가운데 은혜의 무죄선고가 선포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하여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사건이며, 부활은 그 낮아짐이 헛되지 않았음을 온 우주 앞에 드러내신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결코 자기 과시의 무대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십자가 아래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부활의 빛 아래에서 숨 쉬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향해 흐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도 결국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자기 자랑으로 부풀게 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십자가 앞에서 낮아지게 하시고, 그 낮아짐 속에서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기도한 배경에는 용서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입니다. 상처 준 사람을 기억에서 지우는 것조차 어려운데, 그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누군가 내 인생의 깊은 곳을 찔렀다면, 누군가 내 존엄을 무너뜨렸다면, 누군가 내 눈물의 이유가 되었다면, 용서하라는 말씀은 때로 마음에 칼처럼 들어옵니다. 주님도 그것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용서를 인간의 도덕적 결심으로만 요구하지 않으시고, 믿음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용서는 내 마음이 넓어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용서는 내가 먼저 용서받은 죄인임을 십자가 앞에서 깨달을 때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용서가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악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값싼 관용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덮지 않으셨습니다. 죄의 무게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다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의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재판장의 자리에 앉지 않고, 하나님께 그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한 목회자가 오래전 병원 심방을 갔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성도가 중병으로 침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몸은 쇠약해졌고, 말하는 것조차 힘겨웠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마음을 가장 무겁게 누르는 것은 병보다 오래된 미움이었습니다. 수십 년 전 가족에게 받은 상처가 마음속에 뿌리내려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그 이름만 떠올리면 가슴이 굳어졌습니다. 목회자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지금 주님 앞에 가장 내려놓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 성도는 한참을 울다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미움을 붙든 채 주님 앞에 설까 봐 두렵습니다.” 목회자는 함께 기도했습니다. 특별한 말이 많지 않았습니다. 다만 십자가를 바라보게 했습니다. “주님, 제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제 손으로는 놓을 수 없으니 주님이 제 손을 펴 주십시오.” 며칠 뒤 그 성도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는 말했습니다. “나도 아팠고 너도 아팠겠지. 이제 주님께 맡기자.” 그 한마디를 하고 그는 오래 울었습니다. 병상은 그대로였고, 몸의 고통도 그대로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이상한 평안이 머물렀습니다. 뽕나무가 뽑힌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뽑지 못하던 오래된 뿌리가, 겨자씨 같은 믿음 안에서 주님의 손에 의해 흔들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언제나 삶의 가장 실제적인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믿음은 예배당 안에서만 빛나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믿음은 부엌에서, 병실에서, 가정의 갈등 속에서, 실패한 사업의 잔해 위에서, 자녀를 위해 눈물 흘리는 밤에, 노년의 외로움 속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섬김의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믿음은 큰소리로 증명되지 않고, 조용한 순종으로 증거됩니다. 믿음은 때로 산을 옮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합니다. 굳은 마음 하나를 녹이고, 미움의 뿌리 하나를 뽑고, 상처 입은 영혼 하나를 다시 주님께 돌려세웁니다.
주님은 믿음을 말씀하신 뒤 종의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믿음은 능력을 요구하지만, 그 능력이 교만으로 흐르지 않도록 종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겨자씨 믿음은 뽕나무를 뽑을 수 있지만,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능력과 겸손을 함께 낳습니다. 능력만 있고 겸손이 없으면 위험합니다. 겸손만 말하면서 믿음의 능력을 부정해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살아 있는 믿음을 주시되, 그 믿음이 십자가의 겸손 안에 머물게 하십니다.
오늘 교회가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말하면서도 종의 자리를 피하려 합니다. 축복은 원하지만 섬김은 부담스러워합니다. 은혜는 원하지만 순종은 미룹니다. 능력은 원하지만 낮아짐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의 저편에서 열리는 나라입니다. 십자가를 우회하며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소유, 더 넓은 인정만을 목적한다면, 우리는 부활의 영광도 지나쳐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연출의 대상이 아니십니다. 신앙은 무대가 아니며, 교회는 자기 치적을 세우는 기념비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시간이 임할 때 거룩한 물결이 흐르는 수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겉모습에 속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가면을 보고 박수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은 결과를 보고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방향을 보십니다. 사람은 숫자를 보고 크다 말하지만, 하나님은 겨자씨 안의 생명을 보십니다. 사람은 종의 자리를 낮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를 숨겨 두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종의 길을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병든 자를 만지셨고, 죄인들과 식탁에 앉으셨고, 배신자의 입맞춤을 받으셨고, 침 뱉음을 당하셨고, 채찍에 맞으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주님은 단지 종에 대해 말씀하신 분이 아니라 종의 형체를 입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복음의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우리가 종이라고 고백할 때, 주님은 우리를 종으로만 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 부르셨고, 자녀라 부르셨고, 신부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공로를 주장할 수 없는 무익한 종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이 균형을 잃으면 신앙은 병듭니다. 자신을 종으로만 알고 사랑받는 자녀임을 모르면 신앙은 두려움과 무거움이 됩니다. 반대로 자신을 자녀로만 알고 종의 순종을 잊으면 신앙은 자기중심적 특권 의식이 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둘 다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종입니다. 동시에 그 은혜 때문에 담대히 아버지께 나아가는 자녀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깊이 낮아지면서도 깊이 기뻐합니다. 눈물로 회개하면서도 소망으로 일어섭니다. 자기 의를 버리면서도 그리스도의 의를 붙들고 담대해집니다.
믿음은 언제나 이 두 방향을 함께 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낮아지고, 세상 앞에서는 담대해집니다. 자기 공로 앞에서는 침묵하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는 찬양합니다. 자기 능력 앞에서는 절망하지만,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는 소망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쉽고도 어렵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누구도 자기 힘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믿음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비추실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낡은 영광에서 눈을 돌려 십자가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는 뽑혀야 할 뽕나무가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오래된 죄의 습관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자기 연민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자녀에 대한 집착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돈에 대한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판단만 의지하는 완고함일 수 있습니다. 그 뿌리는 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겨자씨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살아 있다면,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다면, 그 믿음은 우리의 마음속 깊은 뿌리를 향해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가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믿음으로 명령하면 그대로 된다는 식의 약속이 아닙니다. 주님은 믿음을 마술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은혜입니다. 참 믿음은 “내 뜻을 이루소서”에서 멈추지 않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로 나아갑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잔이 지나가기를 기도하셨지만, 마지막에는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절정입니다. 믿음은 고통이 사라지는 것만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은 십자가를 피하는 기술이 아니라, 십자가 너머의 부활을 바라보며 순종하는 생명입니다.
우리 시대는 믿음을 자주 성공의 언어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의 믿음은 십자가의 언어입니다. 우리 시대는 믿음을 자기계발의 에너지로 사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믿음은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우리 시대는 믿음을 더 강한 내가 되는 방법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믿음은 내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강함이 드러나는 은혜입니다. 믿음은 나를 더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 크게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때 인간은 가장 작아지면서 가장 자유로워집니다.
“우리는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이 고백은 차가운 의무감이 아닙니다. 사랑의 언어입니다. 어머니가 밤새 아픈 자녀를 돌보고 나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메마른 의무가 아닙니다. 사랑이 의무를 넘어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은혜의 사람은 자기 헌신을 장부에 적어두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주셨다는 사실이 마음을 사로잡으면, 섬김은 억지 노역이 아니라 은혜의 응답이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께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순종도 귀히 보십니다. 주님은 냉수 한 그릇도 잊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으로 하나님께 청구서를 내미느냐입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시지만, 우리는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상 주시지만, 우리는 공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병에 담으시지만, 우리는 그 눈물로 자기 의의 성을 쌓지 않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질서입니다.
예수님 당시 종은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고도 집에 돌아와 다시 주인을 섬겨야 했습니다. 주님은 이 현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태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전체 빛 아래서 보면 놀라운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깨어 있는 종들에게 주인이 돌아와 오히려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는 종의 마땅한 자세를 가르치시고, 누가복음 12장에서는 주인의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주님은 은혜의 식탁에 우리를 앉히십니다. 우리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불러 주십니다. 우리는 공로가 없지만, 주님은 상을 주십니다. 우리는 자격이 없지만, 주님은 품어 주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모든 자랑은 무너집니다. 그러나 십자가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낮아질수록 비참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낮아질수록 은혜의 품을 더 깊이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생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다 알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눈물을 몰라도 괜찮습니다. 아무도 우리의 작은 순종을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이 보십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입을 여시면, 닫힌 무덤도 열리고, 굳은 마음도 살아나며, 절망의 밤도 새벽을 맞습니다. 그분의 말씀 앞에서 깊은 뿌리의 뽕나무도 순종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이 기도는 더 큰 종교적 능력을 달라는 욕심이 아닙니다. 이 기도는 더 깊이 주님을 신뢰하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더 오래 참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더 진실하게 용서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더 겸손히 섬기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보이는 현실보다 더 무겁게 여기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시간의 물결 위에 흔들리는 인생 속에서도 영원의 하나님을 붙들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믿음이 너무 작아서 부끄러운 분이 계십니까? 주님은 작은 믿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겨자씨를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주님께 가져오십시오. “주님, 이것밖에 없습니다. 흔들리는 믿음입니다. 의심 많은 믿음입니다. 눈물 섞인 믿음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가져옵니다.” 주님은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작은 믿음을 붙들어 하나님 나라의 생명으로 자라게 하십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오래된 뽕나무처럼 뽑히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까? 주님께 가져오십시오. 죄의 습관, 분노, 두려움, 상처, 절망, 원망, 불신앙, 자기 의, 무엇이든 주님 앞에 가져오십시오. 여러분의 힘으로 뽑으려다 지쳤다면, 이제 믿음으로 주님께 맡기십시오. 믿음은 문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뿌리 깊은 나무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그 뿌리보다 더 깊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섬김 때문에 지친 분이 계십니까? 주님이 보십니다. 여러분의 기도, 여러분의 인내, 여러분의 눈물, 여러분의 작은 순종을 주님은 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섬김으로 하나님께 권리를 주장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오늘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주님,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제가 한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저를 비참하게 하지 않게 하시고, 은혜 안에서 자유롭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낮아진 마음에 은혜를 부으십니다.
죽음은 인간이 피해 갈 수 없는 이 세상의 엄숙한 표지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언젠가 멈춥니다. 우리가 쌓은 이름도 흐려지고, 붙들었던 것들도 손에서 떨어집니다. 그러나 죽음에서 인간이 만나는 것은 죽음 자체만이 아닙니다. 죽음 너머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죽음을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있는 성도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께서 우리를 영원한 시간 속으로 받아 주시는 은혜의 문입니다. 그 소망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믿음으로 삽니다. 눈물 속에서도 삽니다. 약함 속에서도 섬깁니다.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면서도, 사랑받는 자녀로 다시 일어섭니다.
부활의 그날, 모든 시간은 영원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고, 우리의 눈물과 순종과 믿음의 흔적이 하나님의 빛 가운데 놓일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말할 것입니다. “주님,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 제가 주님을 붙든 줄 알았으나 주님이 저를 붙드셨습니다. 제가 섬긴 줄 알았으나 주님이 먼저 저를 섬기셨습니다. 제가 견딘 줄 알았으나 주님이 저를 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의 흔적이 있는 손으로 우리를 맞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다시 겨자씨 믿음의 자리로 돌아갑시다. 크지 않아도 좋습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살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께 붙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 믿음으로 오늘 용서할 힘을 구하십시오. 그 믿음으로 오늘 순종할 힘을 구하십시오. 그 믿음으로 오늘 섬길 힘을 구하십시오. 그 믿음으로 오래된 뿌리 앞에서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더 큰 자랑을 주시기보다 더 깊은 은혜를 주십니다. 더 높은 자리를 주시기보다 더 거룩한 낮아짐을 주십니다. 더 많은 박수를 주시기보다 더 가까운 주님의 임재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 임재 안에서 우리는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의 끝은 어둠이 아닙니다. 이 고백의 끝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끝은 무덤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끝은 부활입니다. 부활의 끝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눈물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십시오. 마음이 무너졌어도 다시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믿음이 작아 보여도 주님께 가져오십시오. 주님은 겨자씨만 한 믿음을 통해 깊은 뿌리를 뽑으시고, 무너진 영혼을 일으키시며, 종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이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우리를 종의 자리로 낮추시고, 십자가의 은혜로 자유롭게 하시며, 부활의 소망으로 다시 걷게 하소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후에도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