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의 마음으로 섬기는 삶(요한복음21:15–17).

작성자예수님사랑|작성시간26.06.15|조회수29 목록 댓글 0

목자의 마음으로 섬기는 삶(요한복음21:15–17).

요한복음 21장 15–17절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무너진 제자 베드로를 다시 세우시며, 교회를 섬기는 모든 이에게 “목자의 마음”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무엇으로 유지되며 어떤 열매로 드러나는지를 가장 따뜻하면서도 가장 두렵게 가르치시는 장면입니다. 갈릴리 바닷가의 아침 공기 속에 숯불이 피어오르고, 생선과 떡이 놓였으며, 밤새 빈손으로 지쳤던 제자들이 주님의 손길로 배부름을 얻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실패의 냄새가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숯불은 한 번 더 타오르는 죄책감의 불씨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와 비슷한 숯불 곁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를 사람들 앞에서 망신 주시려 부르신 것이 아니라, 상처 난 양처럼 숨고 싶어 하는 그의 영혼을 드러내어 치료하시려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늘 그러하십니다. 죄를 덮어두지 않으시되, 죄인을 찢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시되, 상처 난 자를 내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단지 “사역자의 직무”를 말하기 전에, 먼저 “회복된 죄인의 심장”을 말합니다. 목자의 마음으로 섬기는 삶은 기질이 아니라 은혜에서 출발하며, 재능이 아니라 사랑에서 자라며, 열심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에서 끝까지 견딥니다.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은 베드로의 과거를 아십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큰소리치던 그 고백을 아십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이 베드로의 귀에는 더 아프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수치심을 위한 칼이 아니라, 거짓 자아를 벗겨 내는 메스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자랑의 자리에서 끌어내리시고, 은혜의 자리로 앉히십니다. 베드로는 이제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무너짐을 알기에 비교는 더 이상 신앙의 언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담담히, 그러나 진실하게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것이 목자의 마음의 첫 출발점입니다. 목자의 마음은 “내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주님이 아신다”에서 시작합니다. 목자의 마음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주님의 전지(全知) 앞에 서는 정직함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럴듯해 보이는 마음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숨길 것 없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그 고백에 즉시 명령을 얹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사랑의 고백은 사랑의 봉사로 곧장 이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질서를 봅니다. 사역은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거래가 아닙니다. 사랑을 얻기 위한 대가도 아닙니다. 이미 사랑받은 자가, 이미 회복된 자가, 그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실패했으니 이제 자격 없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실패의 자리에서 “내 양을 먹이라”라고 부르십니다. 복음은 자격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새 사람을 세워 맡기시는 능력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붙드는 중심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능한 자를 택하셔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죄인을 의롭다 하셔서 당신의 의를 나타내시며, 연약한 자를 붙들어 끝까지 인도하셔서 당신의 신실하심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마음으로 섬기는 삶은, 자기를 과시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한 번만 묻지 않으십니다. 두 번, 세 번 물으십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의 얕은 층만 건드리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말로는 쉽고, 삶으로는 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역을 “업무”로 착각합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질수록, 기도는 밀리고, 말씀은 얇아지고, 영혼은 거칠어집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나는 섬기고 있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나는 소비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주님은 그 지점에서 다시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이 반복하시는 질문은 베드로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뿌리를 다시 내리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양을 먹이는 일은 기술로는 할 수 있어도 오래는 못 하기 때문입니다. 기술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어도 영혼을 살릴 수 없습니다. 열정은 시작하게 할 수 있어도 끝까지 가게 하지는 못합니다. 사랑만이,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목자의 마음을 끝까지 붙듭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이 품은 매우 목회적인 진실을 봅니다. 주님은 “네가 내 양을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양을 사랑하는 마음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양을 사랑한다는 말만으로는 언제든 왜곡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사람의 박수를 구할 수도 있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흐릴 수도 있으며,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자기의 상처를 보상받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역의 근원부터 바로잡으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목자의 마음은 먼저 목자장이신 주님께 붙은 마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서 있을 때에만, 양을 사랑하는 마음이 정결해집니다. 주님께 붙은 사랑이 끊어질 때, 양은 어느 순간 “내 성취”, “내 정체성”, “내 성과”가 되어 버립니다. 그때 목회는 복음의 기쁨이 아니라 자아의 노동이 됩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그 길에서 건져내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주님은 매 질문마다 같은 형태의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먹이는 일과 치는 일, 곧 양육과 보호, 말씀의 공급과 영혼의 돌봄이 함께 있습니다. 먹이는 일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말씀을 살아 있는 영혼에 건네는 일입니다. 치는 일은 단순히 관리하는 일이 아닙니다. 위험을 분별하고, 상처를 살피고, 길을 인도하고, 때로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마음은 “가르치는 마음”만도 아니고 “다정한 마음”만도 아닙니다. 목자의 마음은 진리와 사랑이 갈라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진리를 잃은 사랑은 결국 방임이 되고, 사랑을 잃은 진리는 결국 폭력이 됩니다. 주님은 둘을 함께 묶어 “내 양”이라 부르십니다. 중요한 한 마디가 있습니다. 양은 베드로의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양”이라 하지 않으시고 “내 양”이라 하십니다. 이것이 목자의 마음을 살리는 결정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내 교회”라고 부르고 싶어 합니다. 내 손길로 세웠고, 내 눈물로 섬겼고, 내 시간으로 버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늘 “내 양”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목회를 가볍게 하려는 말이 아니라, 목회를 거룩하게 하려는 말씀입니다. 내 소유가 아니기에 함부로 할 수 없고, 내 소유가 아니기에 지쳐서 포기할 권리도 없지만, 또한 내 소유가 아니기에 내가 전부를 짊어질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양이기에 주님이 책임지시고, 우리는 주님이 맡기신 방식으로 섬길 뿐입니다. 이 질서가 지켜질 때, 목회는 우상이 되지 않고 예배가 됩니다.

베드로는 세 번째 질문 앞에서 근심합니다. “주께서 세 번째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왜 아팠겠습니까. 세 번의 질문은 세 번의 부인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과거의 죄책감에 묶어두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과거의 실패가 더 이상 사탄의 올무가 되지 못하도록, 그 실패를 은혜로 재해석하게 하십니다. 세 번 부인한 혀가, 이제 세 번의 고백으로 새로워집니다. 세 번의 도망이, 이제 세 번의 위임으로 뒤집힙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회개는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죄책감의 주인이 “자기 비난”일 때, 그 기억은 우리를 죽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주인이 “그리스도”일 때, 그 기억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우리를 부드럽게 하고, 우리를 자비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실패를 경험한 자가 더 참된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실패를 모르는 자는 쉽게 정죄하고, 눈물을 모르는 자는 쉽게 차갑고, 은혜를 모르는 자는 쉽게 교만합니다. 그러나 부서진 심장을 주님 손에 맡겨 회복된 자는, 다른 상한 심장을 함부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 손은 조심스러워지고, 그 말은 느려지고, 그 눈은 더 자주 젖습니다. 목자의 마음이란, 결국 은혜를 통과한 마음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예화를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산골 마을에 오래된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비가 많이 오면 강물이 불어나 다리가 자주 흔들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다리를 건널 때마다 불안해했지만, 그 다리 옆에는 늘 한 노인이 서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어린아이 손을 꼭 잡아 주고, 짐 진 사람의 팔을 받쳐 주고, 발이 미끄러지는 이에게 “천천히, 괜찮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어르신은 왜 매일 여기 서 계십니까. 위험한데요.” 노인은 잠시 강물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예전에 저도 이 다리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저를 끌어올려 살려 주었지요. 저는 그 은혜를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누군가가 넘어질까 두려워 여기에 서 있습니다.” 사랑은 기억에서 나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구원받은 기억”에서 나옵니다. 주님께서 나를 끌어올리셨다는 기억, 나를 살리셨다는 기억,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기억이 목자의 마음을 만들고 지탱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이런 은혜를 입었다면, 어떻게 다른 이의 넘어짐 앞에서 냉소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상한 자를 더 상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목자의 마음으로 섬기는 삶은, 나를 살리신 주님의 손을 닮아 가는 삶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감정으로만 남을 때, 섬김은 쉽게 무너집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을 물으시면서 동시에 “먹이라, 치라”라고 행동을 명하십니다. 사랑은 결단이며, 결단은 구체적인 순종으로 드러납니다. 먹이는 일은 무엇보다 말씀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교회가 굶주릴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사람들의 말이 거칠어지고 마음이 메말라지는 것입니다. 말씀의 젖과 단단한 음식이 끊기면, 영혼은 세상의 자극으로 배를 채우려 합니다. 그때 관계는 경쟁이 되고, 신앙은 체험의 쇼핑이 되며, 예배는 취향이 됩니다. 목자의 마음은 그 위험을 압니다. 그래서 목자의 마음은 말씀이 강단에서만 울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삶의 자리에서 한 영혼에게 다가가 “주님은 오늘도 당신을 버리지 않으십니다”라고 속삭입니다. 어떤 영혼은 교리의 문장보다 한 줄의 복음이 더 절실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이, 그의 밤을 지켜 주는 등불이 됩니다. 또 어떤 영혼은 위로보다 진리가 더 필요합니다. 달콤한 말로 그를 눕혀 놓으면 결국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갈 수 있기에, 목자의 마음은 눈물을 삼키며 바른 길로 돌려세웁니다. 사랑은 진리를 말할 용기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말할 때 그 진리는 늘 십자가의 온도를 지녀야 합니다. 십자가는 정죄가 아니라 구원이며, 폭로가 아니라 회복이며, 멸시가 아니라 초청이기 때문입니다.

“치라”는 말에는 또한 보호의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늑대가 이빨을 드러내고 오기보다, 양의 가죽을 걸치고 옵니다. 영혼을 살리는 것처럼 말하면서 사실은 영혼을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거짓 가르침이 있습니다. 은혜를 말하면서 회개를 지우고, 사랑을 말하면서 거룩을 조롱하며, 자유를 말하면서 방종을 정당화하는 길이 있습니다. 목자의 마음은 그 흐름 앞에서 사람 눈치를 보며 침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람을 짓밟는 방식도 주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회복시키실 때, 그의 죄를 단호히 다루셨지만 그의 영혼을 부드럽게 만지셨습니다. 목자의 마음은 그 균형을 배웁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사랑하고, 거짓은 거절하되 회복의 길은 열어 두며, 공동체를 지키되 상한 자를 품는 길을 찾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목자의 마음은 인간의 성품만으로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 곧 오래 참음과 자비와 온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기도 없는 삶에서는 익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원하신 것은 “완벽한 지도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순종하는 목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사랑이 완전하지 않음을 압니다. 그럼에도 그는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변명이 아니라 겸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사랑은 늘 미완성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미완성의 사랑을 가지고도 당신의 일을 맡기십니다. 그 이유는, 그 일을 하는 힘이 우리의 사랑의 크기에서 나오지 않고,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더 깊은 자리로 데려가십니다. “나는 누구에게 사랑받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섬김은 죄책감이 아니라 감사로 움직이고, 인정욕구가 아니라 긍휼로 움직이며, 성과주의가 아니라 신실함으로 움직입니다.

목자의 마음으로 섬기는 삶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지점은, “주님과의 관계가 사역보다 먼저”라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이유는 단지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힘을 과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은 기도하는 무릎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험이 왔을 때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를 다시 부르셔서, 사역의 자리로 곧장 밀어 넣지 않으시고 사랑의 질문으로 세우십니다. 주님은 사역자에게 먼저 “일”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면, 늘 돌아가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군중의 박수도 없고 성과의 숫자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 앞에서 “주님,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말씀을 펴고, 죄를 인정하고, 은혜를 다시 받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만 목자의 마음은 살아납니다.

사랑은 또한 “기꺼이”를 만들어 냅니다. 억지로 하는 섬김은 결국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공동체를 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에서 나온 섬김은 피곤해도 향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화려한 언변보다 오래 남고, 눈에 띄는 업적보다 깊게 스며듭니다. 병든 자의 곁에 앉아 침묵으로 함께 있어 주는 시간,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에 한 영혼의 이름을 불러 기도하는 무릎, 낙심한 자에게 말씀 한 절을 품어 건네는 손길, 상처를 준 사람을 위해 눈물로 용서를 구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목자의 마음의 진짜 언어입니다. 세상은 큰 일을 칭찬하지만, 하늘은 작은 신실함을 기억합니다.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실 때, 반드시 “큰 무대”를 뜻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마리 어린 양에게 젖을 먹이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교회의 생명을 그렇게 이어 가십니다. 거대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랑의 손길로.

사랑이 흔들릴 때, 다시 들려야 할 한 문장이 있습니다. “내 양.” 양이 주님의 것이라면, 우리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만큼 사랑하려 애써야 합니다. 주님은 양을 위해 피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마음은 계산을 멈추는 마음입니다. “내가 얼마나 손해를 보았는가”를 세는 대신, “주님이 얼마나 주셨는가”를 기억합니다. 물론 이것이 자기 파괴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양을 섬긴다는 이유로 자기 몸과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결코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목자의 마음은 자기 생명도 주님께 맡깁니다. 쉼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경계를 세우며, 동역을 소중히 여기고, 교회가 한 사람의 어깨 위에만 서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균형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중심은 하나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가.”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순전해집니다.

사랑은 공동체를 “내가 바꾸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섬기는 주님의 백성”으로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목자의 마음은 지배하지 않습니다. 조종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자기 뜻대로 만들려는 욕망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습니다. 대신 말씀으로 양을 먹이고, 기도로 양을 품고, 인내로 양의 걸음을 기다립니다. 성장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은혜의 역사는 계절처럼 진행됩니다. 봄에 씨를 뿌렸다고 여름의 열매를 억지로 당겨올 수 없습니다. 목자의 마음은 조급함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때를 신뢰합니다. 그 신뢰가 없으면, 우리는 방법을 우상화하고 결과를 하나님처럼 섬기게 됩니다. 그러나 목자의 마음은 주님의 주권을 믿습니다. 믿음은 결과가 아니라 주님께 붙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은 “성공”이 아니라 “충성”을 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것이 사람 앞에서 가장 복된 열매를 남깁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장면은 베드로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목회자가 아니니 이 말씀은 내 것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교회를 한 사람의 직분자만으로 세우지 않으십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는 어떤 자리에서든 누군가를 돌보도록 부름 받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작은 영혼을 먹이는 목자입니다. 교사는 학생의 마음을 품는 목자입니다. 구역장과 순장과 리더는 작은 무리의 숨결을 살피는 목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믿음의 길에서 먼저 걸어간 성도는 뒤따르는 성도를 격려하는 목자입니다. 목자의 마음은 직함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들립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를 다시 살리는 질문입니다. 사랑의 근원으로 돌아오게 하는 질문입니다.

사랑의 고백은 결국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양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상처 난 자를 멀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진리를 십자가 없이 휘두를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섬김을 자기 영광의 도구로 삼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넘어지는 자를 정죄하기 전에 주님이 나를 어떻게 일으키셨는지 먼저 기억하게 됩니다. 그래서 목자의 마음으로 섬기는 삶은, 결국 십자가의 삶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 주님의 양을 위하여 자기 시간을 쪼개고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기 권리를 내려놓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어둡기만 한 길이 아닙니다. 그 길 끝에는 부활하신 주님이 서 계십니다. 갈릴리의 아침처럼,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고 먹이시고 맡기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떨리는 고백으로 말할 때, “주님,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은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그 음성이 우리를 살리고, 그 사명이 우리를 빛나게 하며, 그 사랑이 우리를 끝까지 이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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