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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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수아 리프맨 (Joshua Loth Liebman)의 저서 ‘마음의 평안(Peace of Mind)’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젊은 주인공이 어느 노인을 찾아가자 노인이 묻습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젊은이는 말합니다. “첫째는 건강이고, 둘째는 재물이며, 셋째는 미모이며, 넷째는 재능이고, 다섯째는 권력이고, 여섯째는 명예입니다.” 그러자 이 청년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던 노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청년, 그러나 평안이 없으면 아무 것도 즐길 수 없다네.” 평안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인생에 있어서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인기도, 학벌도, 건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평안이 없이 돈만 있으면 무엇합니까? 평안을 빼앗긴 채로 인기가 많아져도, 평안을 상실해 버린 채로 권력을 잡고 있어도, 평안을 누리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명예를 가지고 있으면 무엇합니까? 평안은 삶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입니다. 평안이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평안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평안이 삶의 중요한 부분임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샬롬!”하고 인사하였습니다. 평안이 있으면 인생에 가장 행복할 수 있기에 이런 인사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평안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제자들은 믿었던 예수께서 돌아가시자 모든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어떤 비전도, 미래도,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아셨습니다. 먹을 것이 아니요, 입을 것이 아니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평안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Peace be with you).’ 여기의 평강은 헬라어로 ‘에이레네’, 히브리어로는 ‘샬롬’입니다. 샬롬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 소장된 모든 복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안녕, 평화, 행복, 안전, 만족을 담고 있는 최상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셨습니다. 구원을 이루시고 대속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 주께서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이루신 자가 주시는 선포가 바로 평강입니다. 사람들은 편안하기 원하지만 하나님은 평안하기를 원하십니다. 환경이 좋고 돈이 많다고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물질적인 공급으로 육체가 누리는 차원이 편안이라면 정신적이고 영적인 공급으로 마음과 영혼이 누리는 것이 평안입니다. 그러기에 참 평안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도 주님이 없으면 평강이 없지만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평강의 삶이 이루어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어떻게 임합니까? 첫째로 믿음으로 인하여 14세기 철학자 쟌 부리당 (Jean Buridan)의 어리석은 당나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마리의 몹시 배가 고픈 당나귀가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당나귀는 건초가 있는 산을 발견하였습니다. 어쩌다가 동시에 오른쪽과 왼쪽에 두 개의 건초가 있는 산을 발견하였습니다. 오른쪽과 왼쪽의 건초는 똑 같았습니다. 그래서 당나귀는 어느 쪽의 건초를 먹을까 하고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오른쪽 산에 있는 건초를 먹으려고 오른 쪽으로 2, 3보 걸어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왼쪽 산의 건초가 맛이 더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왼 쪽으로 가자 이번에는 오른쪽 산의 건초가 맛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이튿날 아침에 당나귀는 두 개의 건초가 있는 산 중간에서 굶어 죽어버렸습니다. 예수를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 믿자니 불안해서 교회에 가기는 가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헌신하자니 문제가 많아집니다.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놓기가 무척이나 아깝습니다. 그래서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마치 당나귀가 굶어 죽은 것처럼 어중간한 신앙의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실종되고 하나님에 대한 열정도 사라집니다. 체험적 믿음이 없이는 예수에게 삶을 전적으로 맡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결단입니다. 반드시 일인칭 단수의 개인적 고백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도마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고 일인칭 단수로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따라가는 신앙으로는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20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보는 순간 흔들리던 믿음이 자리를 잡으며 기쁨이 임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고통이 없는 중에 평강이 아니라, 고통 중에, 염려가운데 평강이 임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모실수록 자신은 낮아지고 주님이 높아집니다. 바로 그 순간 평강이 임합니다. 그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니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민한다고, 무엇을 한다고, 염려한다고 평강을 가져올 수가 있습니까? 염려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걱정해서 잘 된 적이 있습니까? 오로지 인생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이 평강이 임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쪼록 믿음으로 말미암아 걱정과 염려와 불안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주를 향한 믿음을 가질 때 온갖 염려가 물러가고 대신 평강이 임하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전함으로 인하여 존 게디(John Geddie) 선교사가 남태평양 선교에 대한 기도를 하던 중 식인종이 살고 있는 뉴 헤브라이드 군도 안네이티움 섬에 복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잡혀먹을 각오를 하고 섬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의 언어를 배워 성경을 번역하고 그들에게 온갖 사랑을 쏟으며 헌신하였습니다. 그의 사역은 탁월했습니다. 감동을 받은 식인종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그가 설립한 교회 중 한 곳에 있는 비문에 이렇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가 1848년 첫 발을 내 딛었을 때 이 섬에는 단 한 사람의 기독교인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1872년 이 섬을 떠날 때에는 단 한 사람의 불신자도 없게 되었다.” 식인종에게 무슨 평화가 있었겠습니까? 자기가 다른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듯이 다른 사람도 나를 잡아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어떤 평안도 없었습니다. 늘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증거 되어 섬 전체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얼마나 평안해졌습니까? 복음이 전해짐으로 평강이 임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성도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구원의 길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예비하셨습니다.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가서 구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인해 주어진 평강을 유지하기 원한다면 그 복음을 나가서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 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있는 평강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믿는 자 안에 계시는 성령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이웃을 향한 봉사와 전도와 선교입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성령을 소멸하게 되어 내적인 평안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섬기고 전도하고 선교하지 않으면 내면의 평안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복음을 전함으로 평강이 임하고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복음을 들음으로 변화되어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비로소 평강이 임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사함으로 인하여 찰스 스펄젼(Charles Spurgeon) 목사가 어느 날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새장 안에 갇힌 새를 괴롭히고 있는 것을 보고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새를 어떻게 할 거냐?” 아이가 대답합니다. “괴롭히다가 죽여 버릴 거에요.” 스펄전은 새가 불쌍했습니다. 아이에게 돈을 주고 새장 채로 새를 샀습니다. 그리고 새장 문을 열고 새를 날려 보냈습니다. 새에게 자유를 준 것입니다. 그 다음 주일이 부활절이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빈 새장을 들고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원수 악한 마귀는 우리를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엄청난 대가로 지불하고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평강을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평강을 잃은 것이 언제부터입니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부터입니다. 죄를 범한 이후 평강이 사라진 것입니다. 악한 사람에게 평강이 없는 이유는 바닷물이 요동하듯이 내면에 끊임없이 파도가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야말로 평강을 깨는 장본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가 사함 받아야 평강이 임합니다. 본문 23절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음에 평강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부터입니다. 제자들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예수가 붙잡히자 도망을 쳤으며 심지어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눈앞에 계십니다. 그리고 책망이 아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용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내가 너희를 다 용서했다는 말입니다.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용서받는 길뿐입니다. 마음에 죄가 남아있는 한 결코 평안할 수없습니다. 평강이 있으라는 것은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는 것이며 다시는 죄를 기억치 않겠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를 용서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내가 먼저 너희를 용서했으니 너희도 용서하라’ 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사함 받을 때 비로소 평강이 임함을 아시기 바랍니다.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박사는 평생 동안 주머니에 쪽지 한 장을 넣고 다니며 평안을 누렸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빛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품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지키고 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 내가 어디가든 하나님께서 거기 계신다” 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삶 속에서, 가정과 일터에서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이기고 주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리며 살 때 비로소 진정한 승리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평강은 나에게는 은혜요 세상을 향해서는 사명입니다. 부디 평강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를 향한 믿음으로 인하여 평강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주를 전함으로 인하여 평강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죄 사함을 받음으로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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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4-2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