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디아의 회심(행 16:14)
루디아는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원래 두아디라 사람으로서 빌립보에 와서 자색 옷감을 파는 여인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 일행은 드로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즉시 순종하여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마게도냐의 빌립보에 왔습니다. 빌립보는 로마식 도시로서 유대인들이 별로 없었으며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되자 혹 기도처라도 있는가 하여 강가로 나갔다가 여자들 몇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14절 중반에 보면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고 합니다.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잘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호 퀴리오스)는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성령으로 복음 전파의 일을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음을 열었다’는 것은 성령의 사역입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해도 이 성령의 사역이 없으면 소용 없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자장가처럼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 어거스틴은 성령을 가리켜 ‘안에 있는 선생’(magister intus) 또는 ‘내적 선생’(interior magister)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말들의 소리는 귀를 때리지만, 선생은 안에 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배운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말의 소리로써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에 계신 선생이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내는 소리는 헛됩니다.”(요한일서 2장 27절 설교/논문 중). 하나님의 기름 부음 곧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역사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중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 깨닫게 됩니다.
어떤 사람의 설교는 냉랭합니다. 지적으로는 뭔가 준비를 많이 한 것 같은데 감동이 없습니다. 은혜가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말하기를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고 합니다(살전 1:5). 바울은 ‘말씀’(로고스)으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령’과 ‘능력’으로 전하였습니다(고전 2:4).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만 성령이 역사하여 말씀이 효력 있게 전파되겠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개혁교회가 약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개혁신학의 약점도 바로 이것입니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주권’만 말하고 끝납니다. 개혁교회의 설교는 ‘오직 은혜’만 말하고 끝납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하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고신 교회는 어떠합니까? “말씀! 말씀!” 하는데 실제로는 많은 경우에 설교에 감동이 없고 은혜가 없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약해서 그렇습니다. 기도가 약해서 그렇습니다. 물론 고신 교회 안에도 기도 많이 하고 성령의 역사가 강한 교회들도 있습니다만 대체적으로 기도가 약한 것이 현실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1898년에 출판한 『칼빈주의』란 책의 제일 끝부분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칼빈주의도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완전히 무력하다.” 가장 뛰어나고 완벽한 체계인 칼빈주의(= 개혁주의)도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무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옛날의 에올루스하프(Aeolusharp) 악기를 예로 듭니다. 이 현악기의 줄을 조여서 창가에 두면 바람이 불어 올 때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칼빈주의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해야 한다고 카이퍼는 말합니다.
먼저, 하프의 줄을 탱탱하게 조여서 거룩한 시온의 창가에 두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준비를 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먼저 말씀 준비와 신학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창가에 꿇어 앉아 성령의 바람이 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카이퍼가 이런 말을 했는데 너무나 귀하고 은혜로운 말입니다. 대체로 합리주의적이고 사변적인 경향을 띠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러면 그가 속했던 화란개혁교회는 실제로 이렇게 했을까요? 아닙니다. 개혁교회는 대체로 말씀만 강조하고 말았습니다. 원어 공부와 주석 훈련과 신학 공부 특히 교리 공부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는 목사가 되면 원문 분석을 잘해서 설교를 준비합니다. 대개는 교리적인 3대지 설교를 만듭니다. 준비가 다 되면 설교 원고를 타이핑해서 주일 날 강단에 올라가서 원고를 읽습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설교를 준비했는데도 불구하고 설교를 들을 때 감동이 안 됩니다. 지루하고 은혜가 안 됩니다. 기도가 약해서 그렇습니다. 개혁교회는 기도가 약합니다. 우리 고신도 그런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제가 볼 땐 고신은 둘 다 약합니다. 말씀도 약하고 기도도 약합니다. 이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왜 개혁교회는 기도가 약한가? 나아가서 왜 서양교회는 기도가 약한가? 제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찾은 답은, 사실은 제가 찾은 것이 아니라 다른 학자가 연구해 놓은 것을 제가 발견한 것인데, 그것은 헬라 철학의 영향 때문이란 것입니다. (☞ 변종길, “서양 교회와 한국 교회의 기도”. 다음 카페 말씀나라에 있음. 유튜브에 강의 녹화도 있음.)
구약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은 소리 내어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아뢰고 부르짖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의 기도 습관을 따라 소리 내어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따라갔던 세 제자들은 졸면서도 그 기도를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소리 내어 기도하였는데, 빌립보에서 옥에 갇혔을 때 바울과 실라는 밤중에 소리 내어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죄수들이 그 기도를 들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핍박을 받았을 때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목소리를 높여 기도하였고 그때 땅이 진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차차 약해졌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후기 플라톤주의 철학과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표적인 철학자는 플로티누스(Plotinus)와 포르피리(Porphyry)입니다. 그 핵심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영지주의 사상입니다. 순수한 영인 신에게 나아가는 합당한 수단은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더러운 입술로 기도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영으로, 침묵으로 나아가야 한다. 절대 침묵, 완전한 정숙을 강조합니다. 이런 사상이 기독교회에 들어와서 점차 확대되었으며 중세 교회에서는 침묵기도가 보편화되었습니다. 수도원에서는 침묵기도와 관조를 강조하였습니다.
16세기에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했지만 주로 교리 개혁과 교회 체제 개혁에 치중하였습니다. 물론 예배와 삶의 전반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졌지만 기도생활에는 강조가 덜하였습니다. 개혁교회는 개인기도를 주로 하고 모임에서는 한 사람이 대표기도를 합니다. 전반적으로 조용히 기도하는 것을 좋게 여기고 침묵기도도 합니다. 개혁교회 성도들은 통성기도와 합심기도를 하지 않으며 매우 싫어합니다. 고신 교회도 해방 후 처음에는 뜨거웠는데, 점점 약해지고 조용해졌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대개는 소리를 내지 않거나 아주 작게 냅니다. 음악 소리도 모기소리처럼 작게 틉니다. 그러니 10분쯤 지나면 다 가버리고 없습니다.
그런데 합동측 교회나 통합측 교회의 기도회에 가 보면 제법 크게 왕왕거리며 기도합니다. 그러니 교회가 살아 움직이고 생기가 있습니다. 설교도 대개 쉽고 실제적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신학은 안 좋은데 사람들은 많이 모입니다. 그러나 고신 교회는 사람들이 잘 안 옵니다. 가면 답답하다고 합니다. 꽉 막힌 것 같다고 합니다. (물론 좋은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만 대체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선 기도가 약합니다. 조용합니다. 답답합니다. 그리고 설교가 너무 신학적입니다. 교인들은 아무 관심도 없는데 구조 분석하고 문맥 따지고 하는데 시간을 많이 보냅니다. 또 구속사적 설교를 한답시고 너무 신학적으로 구도에 짜맞춥니다. 너무 객관적으로 치우치고 성도의 실제 삶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청중은 지겹다, 잠 온다고 합니다. 심지어 짜증난다고 합니다. 신학이 잘못된 통합측 설교가 오히려 듣기 편하고 교회 분위기가 좋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현상입니다.
그것은 기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약하니 성령의 역사가 약합니다. 그리고 설교의 내용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고신의 졸업생들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을 전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볼 때 그것도 엉성한 신학입니다. 신학도 진짜 바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드러내어야 하고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배운 지식을 전하니 은혜가 안 되고 감동이 없고 지루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듣고 예수님을 믿고 나아가서 온 집이 믿고 세례받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였고, 밤낮으로 심히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도 잘 전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쉽게, 핵심을 잘 짚어서, 조리 있게, 효과적으로 잘 전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1학년 신학생 여러분,
신학 공부를 막 시작하신 여러분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잘 생각하시고, 기도를 많이 하고 말씀을 잘 배워서 능력 있게 말씀을 전하고 또 성령이 크게 역사하는 귀한 일꾼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