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착한 일을 하는 착한 사람이다
사도행전 11:22-26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스데반 집사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은 후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허락을 받고 로마 군사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를 향하여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게 됩니다. 이에 예루살렘 교회에 있던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모든 땅으로 흩어집니다(참조, 행 8:1-2). 그런데 그때에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주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 중에 구부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행 11:19-21). 즉, 주 하나님께서 수많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주님을 믿게 하시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인류 역사상 복음이 열방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현상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하나님의 경륜이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교회는 헬라 이방인들이 대거 주 예수님께로 돌아온 역사가 참으로 성령의 역사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장 훌륭한 분들 중에 한 분인 바나바 장로님을 안디옥에 보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바나바 장로님은 사도 바울과 함께 이방인을 향하여 최초의 선교 여행을 떠난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24절을 보니 수도 없이 많은 큰 무리의 이방인들이 바나바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23절을 보니, 그는 초대 교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으로서 이미 예수님를 믿은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계속 믿음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나바 장로님은 안디옥에 오자마자 하나님께서 안디옥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보고 대단히 기뻐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을 “권합니다.” 이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에 든든히 서게 되었음을 본문은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24절에서 바나바 장로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24).
원어로 보면, 바나바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착하다는 원어는 “아가쏘스”입니다.
저는 착하다는 뜻을 지닌 “아가쏘스”라는 단어가 성경 전체에서 어떻게 쓰였는지 궁금하여 찾아보았는데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 중 마태복음에서만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마 5:45)
여기서 선인은 (아가쏘스)한 사람입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여기서 좋은 것은 (아가쏘스)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 7:17)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마 12:34)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마 19:16-17).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1)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누가복음 8장에서는 열매를 많이 내는 (아가쏘스) 땅, 즉, 좋은 땅을 말하며 누가복음 23장 50절에서는 “공회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아가쏘스)를 선하다고 번역하였습니다.
이처럼 성경 전체에서 (아가쏘스)가 쓰인 용도 및 그 번역을 보면 “선한, 올바른, 착한, 쓸모있는, 좋은, 가치가 있는, 유익한 도움을 주는”이라는 뜻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편, 헬라어 사전을 참조해서 성경 전체에서 <아가쏘스>의 의미를 정리하면 “부르신 자의 뜻을 만족시키다, 공동체에 유익하다, 도덕적으로 바르다, 양심이 깨끗하다, 선한 일을 많이 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개념이 (아가쏘스)이며, 이 뜻의 반대 의미는 악함, 못됨, 꾸부러짐, 벗어남, 고약함 등입니다.
현재 이 세상은 착한 사람에 대한 개념을 크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대중매체는 반항적이고 악하고 거칠고 못된 사람을 멋지고 용감한 의리의 영웅들로 묘사하면서 악을 미화시키고 있습니다.
현대 일반 대중의 개념에 따르면 보통 착하다 하면 겁장이를 의미합니다. 최근 드라마나 영화 또는 서적들을 보면 착한 사람을 한심하고 따분하고 실속없고 자기 소신도 없는 멍청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사교성이나 융통성이 없이 혼자 구석텅이에 앉아서 공부나 하는 용감하지 못하고 불의에 대항하지도 못하는 머저리로 묘사합니다. 따라서 이곳 저곳에서 두들겨 맞거나 자기 것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여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늘 피해를 주는 그런 골칫덩어리를 착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큰 돋보기 안경을 끼고 친구도 없고 못생기고 운동도 못하고 즐겁게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을 착한 사람으로 묘사하며 착한 것을 거부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요새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바보야! 착하면 바보가 되는거야. 너도 사납게 네 것을 챙길 줄 알아야지 왜 손해보고 사냐, 요새 세상은 착한 것이 악한 거야! 알아? 이 미련 곰통아!”
자기 주관도 없고 바른 의견도 없이 그냥 아무에게나 비위를 맞추느라 물에 술탄 듯, 물에 술 탄듯 하는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 때문인지 교회 역시 “좋고 선한 착한” 사람들이 되는 것을 신앙과 연관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는 뜻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즉, 착하고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며 신앙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착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의 삶이요, 남모르는 자기 성찰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자신의 인격을 만들어 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착한 사람은 사랑이 충만하며 성령의 열매가 인격 속에 넘칩니다. 악하고 못된 성품을 지니고 태어난 우리 인간들이 착한 삶을 살 수 있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오직 복음의 능력인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좋다고 하지만 착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이는 모순입니다. 착하지 않으면 교회 지도자로서 미달이 될 뿐만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의심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자는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을 때 나타나는 결과인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보면, 다 착하고 선하고 좋은 것들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런 것들은 매우 선하고 착한 좋은 것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가 충만하게 되면 지극히 착하고 선하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착하다는 말은 믿음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인격적으로 온전하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착한 사람이 되려면 모든 선함과 착함과 좋은 것의 근원이신 주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 우리는 선하고 좋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편, 착한 사람이란 그 성품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 있기 때문에 착한 일을 많이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나바 장로님은 이와같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착한 일을 많이 했으며 심성이 예수님을 닮아 온유하고 겸손했습니다. 이미 확인하였지만 바나바의 착함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성도들 중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데 가끔 보면 너무 계산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하고 나아가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고 오로지 세상의 지혜와 방법으로 신앙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착하지가 않고 사납다는 사실입니다. 시기가 많고 분쟁과 악독이 가득하며 비방하며 교만하며 악을 도모하며 권위를 도전하며 무정하며 무자비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착한 신자가 되려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것은 죄를 멀리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으로 나타납니다. 공동체에는 큰 유익을 주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입니다. 이러한 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하고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은 텔레비젼과 스마트 폰, 동영상 등으로 평균 하루에 6시간 이상을 보냅니다. 심지어 하루 종일 거의 모든 시간을 스마트 폰에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적어도 한 주에 한 두 편 이상의 드라마 또는 영화로 시간을 보냅니다. 어떤 사람은 스마트폰에서 채팅 및 게임을 하느라 다른 일들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최근에는 종종 인터넷 게임을 하다가 죽은 사례도 있습니다.
한편 성도들의 성경 읽는 시간은 평균 5분도 안되고 기도하는 시간도 5분도 안됩니다. 심지어 너무나 부끄러운 통계지만 한국 목회자들의 하루 평균 기도 시간을 통계로 알아보니 10분으로 나왔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 묵상과 기도 없이는 참으로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할 수 없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세상에 휩쓸려 버리는 세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더욱 우리가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해야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고 진리를 분변하여 진리를 수호할 수 있으며, 능력있는 복음을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악한 세대에서 착하고 선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자들이 교회와 사회에 있을 때, 24절처럼 하나님께서 제자의 수를 더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십니다. 이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람을 통해 주께서 주의 백성들을 모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아가소쓰>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25절에 보니, <아가쏘스>, 즉 착하고 선하고 좋은 사람 바나바는 위대하고 착한 일을 합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25-26).
바나바는 안디옥의 목회 현장을 보고 나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바울을 찾으러 다소에 갑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박해한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처죽이는데 큰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꺼려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변화는 간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를 성도로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그 때 누가 그를 도와주었습니까? 바나바입니다. 사실 바나바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바울을 도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의 신분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몇달 전만해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감옥에 쳐넣던 사람인데 정말로 그가 개종한 것인지 계략을 행하는 것인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다소에 있는 바울을 찾아간 바나바는 거기에서 쉬고 있는 그에게 자신과 함께 사역하자고 권합니다. 나중에 안디옥으로 바울을 데리고 온 바나바! 그 둘이 일년간 안디옥에서 복음을 위하여 일하자 큰 무리가 더하여졌고, 그후 드디어 최초의 이방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에 바울을 데리고 예루살렘 돌아온 바나바는 거기서도 바울이야말로 진정 주님 안에서 변화된 예수님의 참된 사도라고 다른 사도들 앞에서 권하고 추천하였습니다.
이에 이러한 모든 사건을 돌아보면 바나바 장로님이 없이는 바울이란 사람이 등장할 수도 없으며, 또한 바나바 없이는 바울의 사역에 많은 문제가 있었을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하나님의 일군을 찾아내어 함께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바나바의 착한 마음이 행위로 나타남으로 바울이라는 위대한 인물을 세운 것입니다.
더욱이 착하고 선하고 좋은 사람 바나바 장로님은 사람들 앞에 나서기 보다는 뒤에서 남을 섬기는 특징을 나타냅니다. 성경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특징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남을 섬기는 인격이야말로 대단한 신앙 성품입니다.
바나바 장로님은 바울을 사도들 앞에서 추천한 후 곧바로 바울을 섬기는 자리로 내려 갑니다. 보통 자기보다 나이가 많거나 훌륭한 사람을 섬기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 자기보다 어린 사람을 섬기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나바는 선임자입니다. 한편, 바울은 뒤늦게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섬깁니다. 왜 그를 섬깁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서 그를 섬기는 것입니다. 또한 바나바에게 가장 큰 삶의 목적과 관심은 오직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인데 주께서 그 사역을 바울에게 맡기셨으니 그를 섬기는 것입니다.
구약 인물 중에서 제게 큰 위로와 도전을 주는 사람 중에 다윗의 친구 요나단이 있습니다. 요나단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매우 착하고 위대한 사람인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는 바로 자신의 시기심을 다스렸다는 점에서 위대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요나단은 사실 법적으로 사울의 뒤를 이를 왕자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다윗을 가장 많이 경계하고 가장 많이 대적하고 미워해야했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기득권과 자격과 능력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봅니다. 다윗을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뜻을 읽어낼 수 있었다는 것도 요나단의 위대함 중에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뜻을 안 이후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기꺼이 다윗 앞에서 자신을 낮춥니다. 스스로 다윗 아래로 내려가 다윗을 돕고 섬깁니다(참조, 삼상 18:1-4, 삼상 20:15-16).
사실 이러한 모습이 쉽습니까? 인간의 본성상 쉽지 않습니다. 이는 요나단이 하나님을 향하여 깊은 신앙과 함께 착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저는 구약에서 바나바 장로와 가장 많이 비슷한 사람을 요나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곧, 요나단은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착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나바와 바울의 관계는 우리에게 있어서 목회자와 성도들의 바른 관계를 보여줍니다. 교우들은 주의 종들을 앞으로 내세우고 뒤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그 일 때문에 주의 종을 섬기며 돕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목사라는 사람에게 잘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맡기신 복음의 사명을 귀하게 여기고 그 사역에 동참하기 위하여 돕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세우신 사역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고 제자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것 같이 주님의 양들을 섬기며 그들을 위하여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의 교회가 든든히 서갑니다.
이제 23절을 보니 착하고 선하고 좋은 사람 바나바는 “권하는 자”였습니다. 본 뜻은 위로자, 격려자란 뜻입니다.
사도행전 4장 36-37절을 보면 바나바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예루 살렘 교회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의 활동이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요셉이라는 사람은 점점 더 사람들 사이에서 알려지고 결국, 위로자, 격려자라는 별명까지 얻게 됩니다. 그가 바로 바나바 장로님입니다.
사도행전을 통하여 바나바의 행적을 연구하면, 그는 항상 위로가 필요한 자들 편에 서서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쏟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의 격려하는 삶을 보고 많은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합니다.
[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 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4-25).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것과 바른 것을 자꾸 권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로자, 격려자는 교회 공동체에서 엔진의 오일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윤활하게 합니다. 윤활류가 없으면 기계가 열이 나서 타 버릴텐데, 그러나 윤활제로 인하여 기계는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조직은 기계와 같습니다. 어떤 조직이던 그 조직 안에 격려자 또는 위로자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조직이 미움으로 가득할 것인지, 아니면 서로 사랑하며 하나가 될 것인지가 결정납니다. 특히 외로움과 좌절을 경험하고 있는 성도들에 대하여는, 위로자 또는 격려자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날카로운 뾰족한 혀로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는 사람들 가운데 웃는 얼굴과 따스한 마음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주님의 착한 백성은 공동체를 온전하게 하고 밝게 만듭니다. 오늘 바나바 장로와 같은 착한 성도들이 공동체 조직의 윤활류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나바 장로님은 자신의 재산을 다 주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도왔습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 이하를 보면 초대 교회는 서로 물질을 통용하고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한 것이 나타납니다.
[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행 4:32-37).
우리는 이 구절을 쉽게 읽지만 사실 전 재산을 주 앞에 바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솔직히 귀한 물질을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것은 정말 참된 신앙이
아니면 못하는 것입니다.
한 청년 관원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때 예수님의 대답은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누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자 청년은 마음이 괴로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즉, 그 부자 청년은 자신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했지만, 물질에 대하여는 양보하지 못함으로 그의 신앙이 거짓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는 참제자와 참신앙은 물질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물질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6:20-21).
물질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평소에 물질을 통해 착한 일을 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바울이 소유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딤전 6:17-19)
바나바는 착한 사람으로서 그의 물질을 전부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밭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드렸습니다. 곧, 복음 사역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는 그분은 전심으로 복음 사역과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가장 위대하고 착한 일에 자신을 헌신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착한 일을 하는 자가 착한 사람이며, 착한 사람만이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온전한 헌신입니다. 온전한 헌신은 하나님 때문에 늘 착한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바나바와 같은 착한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큰 무리를 하나님의 교회에 더하십니다.
주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착한 일을 위해 착한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착한 마음으로 평생 착한 일에 힘쓴 자들을 주께서 친히 만나실 때 온 우주에 그들을 칭찬하시며 선포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우리 모두 남은 평생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착한 마음으로 착한 일에 힘쓰다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뵈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영원한 칭찬을 받는 자리에 서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