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역한 마음과 열린 하늘 (사도행전 7:37~5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마주한 말씀은 스데반의 변론이 아니라, 성령께 붙들린 한 영혼이 역사의 심장부를 향하여 던지는 하나님의 마지막 호소입니다. 사도행전 7장 37절부터 53절까지의 말씀은 단순히 유대 지도자들을 책망하는 고발장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종교의 민낯을 폭로하는 하나님의 빛이며, 성전이라는 이름 아래 감추어 둔 인간의 완고함을 드러내는 영원의 칼이며,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율법의 주인을 거절한 인간 마음의 비극을 향해 울려 퍼지는 하늘의 탄식입니다. 스데반은 자기 목숨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무죄를 증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래된 이스라엘 역사를 펼쳐 보이며, 인간이 얼마나 끈질기게 하나님을 거절해 왔는지를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거절의 정점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의로우신 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이 배반하고 죽였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말씀 앞에 서면 우리는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저 멀리 예루살렘 공회 앞에 서 있던 종교 지도자들의 죄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손에 들고도 성경의 주인을 놓칠 수 있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예배받으실 하나님을 자기 삶의 장식품처럼 취급할 수 있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기도를 말하면서도 실상은 자기 뜻의 성취를 바라고, 은혜를 말하면서도 실상은 자기 안전의 보장을 요구하며, 믿음을 말하면서도 실상은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으려는 우리 영혼의 숨은 반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인간은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을 높인다고 말하면서도 언제나 자기 자신을 잊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자기 이름이 지워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성전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찢어 드리지는 않습니다. 율법을 귀히 여긴다고 말하면서도 율법이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는 무릎 꿇지 않으려 합니다.
스데반은 모세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이 말씀은 신명기 18장의 약속을 가리킵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이 종착점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마지막 빛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오실 분을 향해 서 있던 손가락이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비친 광채는 자기 영광이 아니라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빛을 잠시 반사한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홍해를 가르며 백성을 지나가게 했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와 죽음의 깊은 심연을 가르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모세는 만나를 말했으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셨습니다. 모세는 반석을 쳤으나, 그리스도는 친히 찢기신 반석이 되어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셨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받았으나,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이셨습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 했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어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붙든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은 모세를 붙든 것이 아니라 모세를 오해한 것입니다. 율법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십자가를 거절하는 것은 율법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자기 의의 탑을 쌓은 것입니다. 성전을 귀히 여긴다고 하면서 성전보다 크신 주님을 배척하는 것은 성전을 지킨 것이 아니라 성전을 우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인간은 보이는 것을 붙잡을 때 마음이 안심된다고 생각합니다. 돌로 된 성전, 손에 잡히는 제도, 눈에 보이는 의식, 반복되는 전통, 자랑할 수 있는 혈통, 계산 가능한 공로, 다른 사람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종교적 성취가 있으면 하나님께 가까운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을 붙잡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놓칠 때, 인간이 세운 가장 거룩한 건물도 무가치의 법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인간이 자기 손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치수를 재고, 자기 종교의 자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재단하고, 자기 업적의 돌로 보이지 않는 기념비를 세우는 순간,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질 뿐입니다.
본문 38절은 모세가 “광야 교회” 가운데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교회”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ἐκκλησία(에클레시아)입니다. 이것은 단지 건물을 뜻하지 않습니다. 불러냄을 받은 백성, 하나님께 소집된 공동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워진 백성을 뜻합니다. 광야에는 대리석 성전이 없었습니다. 금으로 장식된 예배당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인도하셨고, 하나님이 먹이셨고, 하나님이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제도의 화려함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인간이 쌓아 올린 장엄함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임재입니다. 광야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곳은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반대로 금으로 덮인 성전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거절하면 그곳은 황량한 광야가 됩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모세를 밀어내고 마음이 애굽으로 향했습니다. 몸은 홍해를 건넜지만 마음은 아직 애굽의 가마솥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발은 약속의 땅을 향해 걸었지만 영혼은 노예 시절의 익숙한 냄새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받았으나 자유의 하나님보다 노예의 안정감을 더 사랑했습니다. 해방의 길에 섰으나 해방하신 주님보다 과거의 양식을 더 신뢰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깊은 비극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애굽의 계산법으로 삽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자유롭게 되었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움의 채찍 소리에 움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본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이 주는 작은 보상과 인정과 평판에 영혼을 팔아넘깁니다.
이스라엘은 아론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만들라.” 이것은 단순한 우상 제작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조급함이 만들어 낸 종교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인간은 보이는 신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인간은 자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확신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산 위에서 말씀하시는 동안, 산 아래 인간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언약을 준비하고 계셨으나, 인간은 자기 불안을 달래기 위하여 금붙이를 녹였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려 하셨으나, 백성은 하나님을 자기 욕망의 모양으로 만들어 내려 했습니다.
오늘도 금송아지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금송아지는 고대의 광야에만 서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금송아지는 더 세련된 모습으로 우리 삶 가운데 서 있습니다. 성공이라는 이름의 금송아지, 건강이라는 이름의 금송아지, 자녀라는 이름의 금송아지, 교회 성장이라는 이름의 금송아지, 신앙적 체면이라는 이름의 금송아지, 자기 확신이라는 이름의 금송아지, 남들이 인정해 주는 경건이라는 이름의 금송아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상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축복이라고 부르고, 사명이라고 부르고, 비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깊이 우리 마음을 흔들고, 그것을 잃을까 봐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십자가를 우회하려 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종교적 언어로 포장되어도 금송아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셨다고 스데반은 말합니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때리시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이 그냥 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막으시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우리가 원하는 길로 마음껏 가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뜻대로 되면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없이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은 가장 깊은 포로 상태입니다. 하나님 없이 성공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심판의 예고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편안한 것은 평안이 아니라 영혼의 마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높아지는 것은 영광이 아니라 추락 직전의 현기증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세운 별들을 향해 절하지만, 그 별들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하늘의 군대에게 예배하지만, 그 하늘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피조물일 뿐입니다. 피조물을 붙잡고 창조주를 잃는 순간, 인간의 모든 찬란함은 어둠의 다른 이름이 됩니다.
스데반은 장막과 성전을 말합니다. 광야에는 증거의 장막이 있었습니다. 그 장막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이신 양식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장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장막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도 하나님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신다.” 여기서 “손으로 지은”이라는 표현은 헬라어 χειροποίητος(케이로포이에토스)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을 뜻합니다. 성전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 손으로 만든 것은 아무리 거룩한 목적을 가졌어도 하나님 자신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건물 안에 갇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제도 안에 묶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경건의 형식 속에 감금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인간이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공간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존재의 공간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시간을 드린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의 모든 시간은 하나님께서 빌려주신 은혜의 파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헌금을 드린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의 손에 들어온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흔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예배의 자리로 우리를 불러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한 방울의 영원은 시간의 지배 아래 놓인 모든 사물의 망망대해보다 무겁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한순간은 인간이 쌓아 올린 천 년의 탑보다 깊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전을 의미 있게 하십니다. 예배당이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배당에 모인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말은 성전 파괴의 말이 아니라 성전 완성의 말입니다. 참 성전은 돌로 세워진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납니다. 그분의 몸이 찢어질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그분의 피가 흘러내릴 때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실 때, 하나님께 버림받아 마땅한 우리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길이 열렸습니다. 성전의 제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제사장의 직분은 그리스도의 중보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희생 제물의 피는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안식일의 쉼은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없이 성전을 붙드는 것은 그림자를 붙잡고 실체를 버리는 것이며, 그리스도 없이 율법을 자랑하는 것은 등불을 들고 태양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제 가장 날카로운 말씀을 던집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여기서 “목이 곧다”는 헬라어 표현은 σκληροτράχηλος(스클레로트라켈로스)입니다. 굳은 목, 꺾이지 않는 목, 하나님 앞에서 숙일 줄 모르는 완고함을 뜻합니다. 또한 “할례 받지 못한 마음과 귀”라는 표현은 ἀπερίτμητοι καρδίαις καὶ τοῖς ὠσίν(아페리트메토이 카르디아이ς 카이 토이스 오신)입니다. 몸에는 언약의 표가 있을지라도 마음과 귀가 하나님께 열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몸에는 종교의 표지가 있는데 마음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귀에는 율법의 소리가 들어오는데 영혼은 말씀 앞에 찢어지지 않습니다. 입술에는 하나님이 있는데 중심에는 자기 의가 앉아 있습니다. 손에는 성경이 있는데 발은 순종의 길로 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깊이 물어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베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말씀을 이용하여 남을 베고 있습니까? 십자가가 우리 자아를 죽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십자가를 장식처럼 걸어 놓고 여전히 자기를 살리고 있습니까? 은혜가 우리를 낮추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더 교묘한 자기 자랑을 하고 있습니까? 참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목이 꺾이는 것입니다. 참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자기 의의 옷이 벗겨지고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혀지는 것입니다. 참 예배는 내가 하나님을 소유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소유하시는 시간입니다.
스데반은 말합니다.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여기서 “거스르다”는 말은 헬라어 ἀντιπίπτω(안티핍토)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맞서 넘어지듯 대항하다, 정면으로 저항하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거스른다는 것은 단지 감동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 운동을 향하여 인간의 완고한 자아가 정면으로 버티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끄십니다. 성령은 우리 죄를 책망하십니다. 성령은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은 죽은 마음을 살리십니다. 성령은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성령의 손길 앞에서도 자기 왕좌에서 내려오려 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보라”고 하실 때 인간은 “나를 보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 인간은 “나는 괜찮다”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십자가 아래로 내려오라”고 하실 때 인간은 “내가 쌓은 탑 위에 머물겠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가장 큰 위험은 노골적인 불신앙만이 아닙니다. 때로 더 무서운 위험은 종교의 옷을 입은 불순종입니다. 거룩한 언어로 포장된 자기중심성입니다. 예배와 봉사와 직분과 전통과 신학과 경건의 이름으로 자기 마음을 보호하는 완고함입니다. 사람은 죄를 숨기기 위해 세속적인 가면만 쓰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가장 두꺼운 가면은 종교적 가면입니다. 죄인은 술집에서도 길을 잃지만, 성전 뜰에서도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탕자는 먼 나라에서만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집 안에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채 살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큰아들은 집에 있었으나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성전에 있었으나 성전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 안에 있으나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예배의 자리에 있으나 하나님의 마음 앞에 서 있습니까? 말씀을 듣고 있으나 말씀 앞에 무너지고 있습니까?
스데반의 고발은 역사의 비극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의로우신 이가 오실 것을 예고한 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의로우신 이가 오셨을 때 그분마저 배반하고 살해했습니다. 이것이 인간 역사의 깊은 어둠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찾아오셨고 인간은 계속 밀어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인간은 귀를 막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셨고 인간은 돌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셨고 인간은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인간의 죄는 단지 도덕적 실패가 아닙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 줄여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필요할 때 부르는 이름으로 만들고, 불편할 때 침묵시켜 두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복음의 놀라운 역설이 시작됩니다. 인간이 세운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폭로하는 가장 참혹한 증거였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구원의 보좌로 삼으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을 밀어낸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끌어안으셨습니다. 인간이 예수님께 못을 박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문서를 찢으셨습니다. 인간이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않는다”고 외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너희를 위한 구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 반역의 절정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닫아 버린 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열어 놓으신 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깊이 내려올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닙니다. 죄 가운데 죽음 너머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의 시간성 끝에 서 있는 해소할 수 없는 대립이며, 우리의 현존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표지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비켜가지 못합니다. 왕도 죽고, 학자도 죽고, 부자도 죽고, 가난한 자도 죽고, 건강하던 자도 죽고, 병들던 자도 죽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자랑을 한순간에 침묵하게 하는 신적인 정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마지막 주인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운 초청을 주십니다. 유한한 인간의 시간이 끝나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영원한 시간으로 받아들이시고, 썩을 것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죽을 것을 죽지 아니할 것으로 덧입히십니다. 이 은혜로운 초청 앞에서 믿는 영혼은 떨림과 감격을 동시에 경험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에게 마지막 말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말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스데반은 이 복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몸은 사람들 앞에 붙들려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하늘 보좌 앞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심문했지만, 그는 사실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돌을 들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스데반은 열린 하늘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스데반은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수호한다고 생각했지만, 스데반은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의 자유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상황에서 자유롭습니다. 사람의 인정에서 자유롭습니다. 죽음의 위협에서 자유롭습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자유롭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생명을 자기 손에 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 무엇인지 다시 배웁니다. 믿음은 단지 종교적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의 회개입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을 붙들던 손을 놓고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은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가난하게 여기는 새로운 방향 설정입니다. 믿음은 혈과 육이 지시하는 길이 아니라 성령께서 열어 주시는 길입니다. 믿음은 심리학적으로 보면 허공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계산하는 인간에게 믿음은 불확실한 도약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허무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안으로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손에 잡히는 보장이 아니지만, 하나님 자신을 보장으로 받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붙잡는 힘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누구에게나 쉽고도 어렵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으나, 모든 사람의 자기 의를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배운 사람에게도 어렵고,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도 어렵습니다. 부자에게도 어렵고, 가난한 자에게도 어렵습니다. 설교하는 자에게도 어렵고, 설교 듣는 자에게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이 가진 차이를 가로질러 모든 사람을 십자가 아래 같은 죄인으로 세우기 때문입니다.
어느 노년의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교회 안에서 살았습니다. 예배를 빠지지 않았고, 성경도 많이 읽었고, 교회 일에도 성실했습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 병상에서 그는 목회자의 손을 붙들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제 삶을 안전하게 지켜 주시는 분이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제 와서야 제 손에 쥔 것이 다 풀려 나가니, 주님만 남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 울음은 절망의 울음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붙들고 있던 자기 의와 자기 안전의 끈이 풀려 나가는 울음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제 주님이 저를 붙드시면 됩니다.” 그 말은 짧았지만 깊었습니다. 사람은 많은 것을 붙들고 살다가 결국 하나씩 놓게 됩니다. 건강도 놓고, 재산도 놓고, 이름도 놓고, 자존심도 놓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마저 잠시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 그리스도께 붙들린 사람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의 손에서 모든 것이 빠져나가도, 그를 붙드시는 손은 빠져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종교적 감탄이 아닙니다. 회개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거스른 자리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도 변하지 않는 완고함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의를 의지하는 습관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의 왕좌를 내려놓지 않는 태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성전의 형식을 붙잡고 성전의 주인을 놓친 자리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율법의 외형을 붙잡고 율법이 가리키는 십자가의 은혜를 놓친 자리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베어 내시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 굳은 마음의 표피가 찢어지고, 말씀을 향해 열린 새 마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회개는 우리 힘으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도덕적 결심이 아닙니다. 회개조차 은혜입니다. 굳은 목이 숙여지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닫힌 귀가 열리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십자가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가 되시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믿음 안에서 인간과 그의 세계를 접촉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힘이며 구속의 힘입니다. 마치 오랫동안 얼어 있던 강 위로 봄의 햇살이 내려와 얼음을 깨뜨리듯, 성령은 굳은 마음을 녹이십니다. 마치 깊은 밤에 먼동이 터 오르면 어둠이 자기 자리를 주장하지 못하듯, 성령은 죄의 어둠 속에 갇힌 영혼을 그리스도의 빛 앞으로 이끄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마지막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들여다보인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숨겨 둔 것들이 드러나지만, 그 드러남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품으로 데려가기 위한 은혜의 폭로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데반의 말씀은 무섭지만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의 끝은 인간의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인간의 완고함을 폭로하지만, 그 폭로의 목적은 저주가 아니라 돌이킴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실 때 구원하기 위해 드러내십니다. 의사가 상처를 열어 보이는 것은 환자를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우상을 폭로하시는 것은 우리를 빈손으로 버려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 하나님으로 채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자기 의를 무너뜨리시는 것은 우리를 수치 속에 방치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덮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거짓된 성전을 허무시고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손의 금송아지를 빼앗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귀의 완고함을 찢으시고 복음의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늘 변명할 근거를 찾습니다. “나는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낫다.” “나는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도 알아주실 것이다.” “내가 살아온 고생을 생각하면 이 정도 원망은 괜찮다.” “내가 교회를 위해 수고했으니 내 방식도 존중받아야 한다.” 이렇게 인간은 자기 안에 작은 법정을 세워 놓고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립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인간 법정이 무너집니다. 십자가 앞에서 율법적 행위는 우리에게 어떤 안전보장도, 평안도, 변명도 주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말합니다. “너의 죄가 이토록 깊다.” 동시에 십자가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토록 깊다.” 십자가는 우리의 입을 막고, 동시에 우리의 눈물을 닦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을 끝내고, 동시에 우리의 소망을 시작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죽이고, 동시에 우리를 살립니다.
그래서 복음은 다른 진리들 가운데 하나로 서 있지 않습니다. 복음은 인간이 진리라고 부르는 모든 것을 질문대 앞에 세웁니다. 성공은 너를 구원할 수 있는가? 도덕은 너를 의롭게 할 수 있는가? 종교적 열심은 너의 죄를 씻을 수 있는가? 전통은 너를 하나님 앞에 세울 수 있는가? 성전은 너를 대신하여 죽을 수 있는가? 율법은 너에게 새 마음을 줄 수 있는가? 복음은 묻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질문의 대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께 향한 인간의 유일한 중보이시며, 하나님 자신의 대답입니다. 그분은 우리 삶의 한계를 넘어서는 발걸음이요, 우리 존재의 의미를 뒤집는 새 창조의 현실입니다. 아담이 서 있던 실패의 자리에도 그리스도의 빛은 증언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선과 악을 자기 손에 쥐려던 그 자리 너머에서 하나님의 팔은 이미 구원의 역사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말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반복되는 인간 실패의 역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더 깊이 보면 그것은 실패보다 강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이 넘어졌어도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요셉이 팔렸어도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모세가 거절당했어도 하나님은 백성을 건지셨습니다. 광야에서 백성이 우상을 만들었어도 하나님은 언약을 완전히 폐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지자들이 박해를 받았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의로우신 이가 배반당하고 죽임당했지만, 하나님은 그 죽음을 부활의 문으로 바꾸셨습니다. 인간의 죄가 깊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깊은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인간의 반역이 높아질수록 하나님의 긍휼은 더 낮은 자리로 임하셨습니다. 인간이 닫은 문 앞에서 하나님은 십자가로 새 길을 내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화려한 종교가 아닙니다. 더 정교한 자기 포장이 아닙니다. 더 세련된 신앙 언어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께서 여시는 회개의 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 아래로 내려가는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 제가 목이 곧은 자입니다. 제가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자입니다. 제가 성령을 거슬렀습니다. 제가 보이는 것을 붙잡느라 보이지 않는 주님을 놓쳤습니다. 제가 성전을 말하면서 성전의 주인을 잊었습니다. 제가 율법을 말하면서 은혜를 잊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실상은 저 자신을 섬겼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정직한 마음입니다.
그 고백의 자리에 주님은 가까이 오십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회개하는 죄인을 밀어내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목이 곧은 자들을 위해 자신의 목을 숙이셨습니다. 귀가 닫힌 자들을 위해 모욕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마음이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심장이 창에 찔리셨습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자들을 위해 성령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율법을 범한 자들을 위해 율법 아래 나셨고, 저주받아 마땅한 자들을 위해 나무에 달려 저주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우리가 성전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으로 참 성전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으로 우리의 의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이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죽음 가운데 들어가 죽음을 죽이셨습니다.
부활은 이 모든 것의 하나님의 아멘입니다. 부활은 십자가가 실패가 아니라 승리였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단지 순교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이라는 계시입니다. 부활은 성령의 새 세계가 육의 옛 세계와 접촉한 사건입니다. 부활 가운데 마지막 날의 빛이 오늘 우리의 어둠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부활은 모든 시간으로 하여금 영원을 향해 방향을 바꾸게 합니다. 부활은 감추어진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고,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감추어진 새 생명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아직 눈물 속에 살지만, 눈물이 마지막이 아님을 압니다. 우리는 아직 죽음의 그늘을 지나지만, 죽음이 마지막 주인이 아님을 압니다. 우리는 아직 죄와 싸우지만, 죄가 마지막 왕이 아님을 압니다. 우리는 아직 연약하지만,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보이는 것이 흔들릴 때 보이지 않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손으로 지은 것들이 무너질 때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처소를 바라보십시오. 사람의 인정이 사라질 때 아버지의 은혜를 붙드십시오. 자기 의가 무너질 때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으십시오. 죄가 드러날 때 절망으로 도망하지 말고 십자가 아래로 달려가십시오. 성령께서 마음을 찌르실 때 귀를 막지 말고 무릎을 꿇으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 찌르시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찌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여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의 옷을 벗기고 은혜의 옷을 입히시려 하십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지만 패배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의 육체는 무너졌지만 그의 증언은 교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의 피는 땅에 떨어졌지만 복음은 더 멀리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울마저 붙드셔서 바울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불가사의입니다. 오늘 성령을 거스르는 자도 주님의 은혜가 임하면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돌을 들고 있는 손도 주님의 빛을 만나면 기도의 손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교만한 마음도 십자가 앞에 무너지면 복음의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며,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의 완고함을 보며 절망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연약함을 보며 포기하지 않습니다. 시대의 어두움을 보며 두려움에 삼켜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십자가의 복음으로 죄인을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목이 곧은 자의 목을 숙이시고, 닫힌 귀를 여시고, 굳은 마음을 살같이 부드럽게 하십니다. 우리의 소망은 인간의 가능성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교회의 완벽함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결심의 강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를 붙드시는 성령의 능력에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 모두 조용히 주님께 나아갑시다. “주님, 내 안의 금송아지를 깨뜨려 주옵소서. 내 안의 성전 우상을 무너뜨려 주옵소서. 내 안의 율법적 자랑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게 하옵소서. 내 마음과 귀에 할례를 행하여 주옵소서. 성령을 거스르던 나를 돌이켜 성령께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보이는 것을 붙들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종교의 껍데기를 붙들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잃지 않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죄 많은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씻으시고, 지친 우리를 은혜의 품에 안으시며, 넘어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물이 있어도 다시 일어서십시오. 부끄러움이 있어도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오. 실패가 있어도 은혜를 붙드십시오. 죽음의 그림자가 길어 보여도 부활의 빛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붙든 주님은 무덤에 갇힌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오늘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보다 크시고, 우리의 실패보다 깊으시며, 우리의 죽음보다 강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끄실 때, 우리의 완고한 마음은 은혜의 눈물로 녹아내리고, 우리의 닫힌 귀는 복음의 음성을 듣게 되며, 우리의 굳은 목은 십자가 앞에서 낮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낮아진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참된 자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피하지 않는 자유, 자기 의를 붙들지 않는 자유, 보이는 것에 종노릇하지 않는 자유, 죽음 앞에서도 생명의 주를 바라보는 자유 말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시면 닫힌 무덤도 열리고, 어둠의 밤도 물러가고, 죄인의 심장도 새로워집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을 보라. 십자가를 보라. 은혜를 보라. 돌아오라.” 이 음성을 듣는 자는 복됩니다. 이 음성 앞에 무릎 꿇는 자는 삽니다. 이 음성을 따라 십자가로 나아가는 자는 결코 버림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믿음으로 일어서십시오. 다시 사랑으로 걸어가십시오. 다시 소망으로 견디십시오. 성령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십자가가 우리를 덮으며,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 앞서 가십니다. 우리의 마지막 말은 죄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지막 말은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지막 말은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지막 말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 부활의 소망, 그리고 영원토록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