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돌보는 목자의 마음(사도행전 20: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행전 20장 28절은 목회자의 심장을 그대로 드러내는 한 구절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단순한 직무 지침이 아니라, 교회를 맡기신 하나님의 마음이 목자의 가슴에 새겨지는 순간이며, 동시에 목자를 통해 교회를 지키시고 살리시는 삼위 하나님의 깊은 섭리의 선언입니다. 교회를 돌보는 목자의 마음은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사람의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감독자로 삼으셨다는 말씀처럼, 목자의 마음은 성령의 부르심과 세우심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목자의 마음은 자기 이름을 세우려는 야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먼저 살피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깨어나는 거룩한 책임감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삼가라.” 양 떼를 위하기 전에 “자기”를 위하여 삼가라는 이 순서에는 하나님께서 목회자의 내면을 얼마나 엄중히 다루시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목자의 내면이 무너지면, 양 떼는 방향을 잃습니다. 목자의 마음이 거룩을 잃으면, 양 떼는 복음의 향기를 잃습니다. 목자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빛을 잃으면, 설교의 언어는 화려할지라도 생명의 떨림을 잃고 맙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마음은 매일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자기 의를 경계하고, 자기 연민을 경계하고, 자기 영광을 경계하며, 무엇보다도 은혜의 자리에서만 숨 쉬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신 장면을 떠올리면 더 깊어집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 불러 마지막 고별을 합니다. 그는 눈물로, 간절함으로, 경고와 위로로 그들을 붙듭니다. 이별의 자리에서 사람은 장식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남기는 말은 마음의 뼈와 같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향해 “내가 여러분 중에 들어가서 흉악한 이리가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위협하는 것은 바깥의 박해만이 아닙니다. 안에서 일어나는 왜곡, 지도자의 욕망, 말씀의 변질, 거룩의 타협, 사랑 없는 권위가 교회를 흔듭니다. 그래서 목자의 마음은 낭만이 아니라 경계이며, 감상이 아니라 분별이며, 자기 확신의 과시가 아니라 눈물로 드리는 중보입니다.
목자의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주는 가장 강력한 진실이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가 누구의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은 교회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목사의 교회가 아닙니다. 장로의 교회도, 어떤 가문의 교회도, 어떤 세력의 교회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더 두렵고도 놀라운 표현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말합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피는 대가입니다. 피는 언약의 표입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오기까지 치러진 값이 피라면, 교회는 단지 한 무리의 종교 공동체가 아니라 피로 맺어진 생명의 언약 공동체입니다. 여기에서 목자의 마음이 정해집니다. 교회를 대할 때 가벼울 수 없습니다. 교회를 향해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가진 허물과 상처를 보면서도 목자의 마음은 냉소로 달아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허물투성이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피로 산 것을 우리는 값싸게 다룰 수 없습니다. 교회를 향한 목자의 마음은 결국, 그 피의 가치에 대한 경외심에서 형성됩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빛 아래서 이 구절을 더욱 분명히 보면, 목회는 인간의 능력으로 교회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는” 일입니다. 교회를 존재하게 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의 머리는 사람이나 제도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의 생명은 인간의 조직력이나 이벤트가 아니라 말씀과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마음은 ‘내가 이 교회를 움직인다’는 착각을 버리고, ‘주께서 이 교회를 지키신다’는 믿음으로 무릎 꿇는 마음입니다. 목회자는 주인의 자리에 앉아 지시하는 경영자가 아니라, 주님의 양 떼를 맡은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하고, 주인의 물건을 주인의 마음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목자의 마음은 두 가지를 함께 품습니다. 하나는 엄숙한 책임, 또 하나는 달콤한 위로입니다. 책임은 무겁습니다. 그러나 위로도 깊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것이라면, 교회는 결국 하나님의 손에서 안전합니다. 우리가 지키는 것 같아도, 본질적으로 교회는 주님이 지키십니다. 목자는 그 지키심의 도구로 불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마음은 불안으로 휘청거리는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주권을 붙들고 담대히 섬기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라는 말씀은 목회의 근원을 알려 줍니다. 감독자라는 말은 감시자가 아니라 돌보는 사람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권력의 자리처럼 들릴 수 있지만, 성경의 감독은 양 떼를 위해 깨어 있는 자리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감독은 ‘높아지는 직함’이 아니라 ‘낮아지는 소명’입니다. 성령이 세우셨다는 것은 곧, 목회가 사람의 선출로만 결정되는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운 주권 아래에서 주어지는 부르심임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가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고아처럼 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피로 사신 교회를, 피로 사신 종들을 통해 돌보게 하십니다. 그럴 때 목자의 마음에는 한 가지 거룩한 자기 이해가 자리 잡습니다. “나는 내가 만든 목회자가 아니라, 성령께서 세우신 종이다.” 이 고백은 목회자를 교만에서 구하고, 낙심에서도 구합니다. 교만은 ‘내가 세웠다’는 생각에서 자라나고, 낙심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두려움에서 자라납니다. 그러나 성령이 세우셨다는 진리는 목회자를 이렇게 세웁니다. “주께서 세우셨으니 주께서 붙드신다. 그러므로 나는 충성으로 응답하되, 모든 열매는 주께 맡긴다.” 이 고백 위에 목자의 마음이 안정됩니다.
목자의 마음은 또한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는 마음입니다. 목회는 몇 사람만 돌보는 일이 아니라 온 양 떼를 돌보는 일입니다. 온 양 떼에는 말 잘 듣는 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양, 길 잃은 양, 까칠한 양, 자꾸 넘어지는 양, 스스로를 미워하는 양, 죄책감에 갇힌 양, 신앙이 식어버린 양, 겉으론 강하지만 속은 무너져 있는 양이 있습니다. 목자의 마음은 그 다양한 영혼을 향해 하나님의 품을 닮아가야 합니다. 어떤 양은 말씀으로 강하게 붙들어야 하고, 어떤 양은 눈물로 감싸야 하며, 어떤 양은 기다림으로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같습니다. 목자의 마음은 양 떼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사람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교회는 때로 목자의 심장을 찢어 놓습니다. 오해가 생기고, 헌신이 왜곡되고, 선한 의도가 의심받고, 애써 지키려던 거룩이 조롱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사도행전 20장 28절이 목자의 마음을 다시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피로 산 교회라면, 그 교회를 향한 목자의 마음은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로 결정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사랑하신 것을 나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이 아끼신 것을 나도 아끼는 마음, 주님이 지키시는 것을 나도 지키는 마음, 그 마음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목자의 마음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또 하나의 결은 “보살피게 하셨느니라”에 담겨 있습니다. 보살피다, 돌보다라는 말은 단지 행정 처리나 일정 관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영혼을 먹이고, 보호하고, 치료하고, 인도하는 일입니다. 양 떼는 풀을 먹지 않으면 굶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말씀으로 먹이는 사람입니다. 설교는 지식을 나열하는 강연이 아니라, 양 떼에게 생명을 나누는 식탁이어야 합니다. 피로 산 교회에 가장 필요한 양식은 결국 피로 세우신 복음입니다. 죄인이 의인 됨은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입니다. 성도가 성장함은 인간의 의지로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입니다. 교회의 거룩은 윤리적 포장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되는 은혜로입니다. 목자의 마음이 복음에서 멀어지면, 교회는 도덕주의로 흐르거나, 반대로 방종으로 흐릅니다. 복음이 떠나면 두 길밖에 없습니다. 자기 의로 자신을 세우려는 종교, 혹은 은혜를 핑계 삼아 죄를 가볍게 여기는 거짓 평안입니다. 그러나 목자의 마음이 복음에 붙들리면, 교회는 죄를 미워하면서도 죄인을 품고, 거룩을 추구하면서도 은혜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개혁주의적인 목회의 숨결입니다. 율법과 복음의 구분을 분명히 하되 분리하지 않고, 은혜로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되 성화의 열매를 외면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전가하시는 하나님을 높이되 그 의의 능력이 삶을 새롭게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자의 마음은 보호자의 마음입니다. 양 떼를 아끼지 않는 이리가 있습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이리는 교회를 노골적으로 공격합니다. 그러나 더 위험한 이리는 때로 진리의 옷을 입고 들어옵니다. 그럴듯한 언어로 복음을 희미하게 하고, 사람의 감정만 자극하여 회개 없는 위로를 팔고, 십자가 없는 부흥을 약속하며,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인간 중심의 쇼로 바꾸려 합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리도 있습니다.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여러분 중에서도” 사람이 일어나 “자기를 따르게 하려” 합니다. 이런 왜곡은 교리적 오류만이 아니라, 관계의 권력화, 섬김의 사유화, 공동체의 분열 조장으로 드러납니다. 목자의 마음은 이럴 때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양 떼를 지키는 분별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부드러움은 결국 잔인함이 됩니다. 왜냐하면 양 떼를 독이 든 풀밭에 풀어 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말한다는 이유로 사랑을 잃는 단호함도 결국 폭력이 됩니다. 왜냐하면 양 떼를 상처로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마음은 진리와 사랑을 함께 붙드는 마음, 단호함과 온유함을 함께 품는 마음, 말씀의 칼과 눈물의 기도를 함께 드는 마음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목자의 마음이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는지 묻게 됩니다. 그 답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면, 그 교회를 돌보는 목자의 마음은 결국 ‘피의 길’을 닮아야 합니다. 물론 목회자가 그리스도의 속죄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속죄는 오직 주님의 단번의 희생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 희생의 향기를 따라갑니다. 목회는 편안한 길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길입니다. 목회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길이 아니라, 주님의 권리를 높이는 길입니다. 목회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길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낮아져도 기쁨으로 섬기는 길입니다. 피로 산 교회를 돌볼 때 목자의 마음은 계산을 내려놓습니다. “이 사람을 돌보면 내게 무엇이 남을까”라는 계산이 아니라, “주께서 이 영혼을 얼마나 값비싸게 사셨는가”라는 경외심으로 돌봅니다. 그 경외심이 목자를 지탱합니다. 사람의 반응이 차가워도, 평가가 억울해도, 고독이 깊어도, 목자의 마음은 주님의 피를 바라보며 다시 일어납니다.
이 대목에서 성도 여러분에게도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은 목회자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를 돌보는 목자의 마음을 통해, 성도는 교회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을 배우게 됩니다. 교회는 소비의 대상이 아닙니다. 취향에 맞지 않으면 떠나는 서비스 센터가 아닙니다. 교회는 ‘내가 만족을 얻는 곳’이기 이전에 ‘주님이 피로 사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를 향해 쉽게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교회는 개혁되어야 합니다. 죄는 드러나야 하고, 악은 징계되어야 하며, 거짓은 바로잡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도 교회를 대하는 태도는 경멸이 아니라 경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상처가 있어도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는 연약해도 주님의 신부입니다. 교회는 때로 미성숙해도 주님의 가족입니다. 이 시선을 잃으면, 성도는 교회를 소비하게 되고, 목회자를 종업원처럼 대하게 되며, 결국 공동체는 사랑이 아니라 경쟁으로 무너집니다. 그러나 피의 가치로 교회를 바라보면, 성도는 교회 안에서 자신의 자리도 새롭게 봅니다. 나는 구경꾼이 아니라 지체입니다. 나는 평가자가 아니라 동역자입니다. 나는 비평가가 아니라 기도자입니다. 나는 손님이 아니라 가족입니다. 목자의 마음이 이 진리로 형성되듯, 성도의 마음도 이 진리로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제 한 가지 예화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오랜 세월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교회 재정은 넉넉하지 않았고, 성도들의 형편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큰 갈등이 생겼습니다. 몇몇 성도가 목회자의 결정을 오해하고, 서로 편을 갈라 날카롭게 대립했습니다. 목회자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마음속에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라는 자책과 “왜 나를 이렇게 대하는가”라는 원망이 번갈아 일어났습니다. 결국 어느 깊은 밤, 그는 텅 빈 예배당에 홀로 앉아 울었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강단 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는 무너진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더 이상 못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한 문장이 조용히 떠올랐습니다. “내가 내 피로 산 교회다.” 그는 다시 말씀을 펼쳤고, 사도행전 20장 28절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이 교회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구나. 이 사람들도 내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람이구나. 나는 주인의 사랑을 대신 전하는 청지기일 뿐이구나.” 그 순간 그는 갈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갈등을 대하는 심장이 바뀌었습니다. 원망이 기도로 바뀌고, 자책이 회개로 바뀌고, 두려움이 맡김으로 바뀌었습니다. 다음 주일, 그는 누군가를 겨냥해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십자가를 선포했습니다. “주님이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피로 산 형제를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 설교 후에 즉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아주 서서히, 성도들의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사람의 자존심보다 더 깊이 내려가 죄를 드러내고, 동시에 더 깊이 내려가 은혜로 품어 주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마음이 피의 가치로 돌아올 때, 교회는 다시 숨을 쉽니다. 이것이 교회를 돌보는 목자의 마음이 가진 치유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한 가지를 더 깊이 새겨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삼가라.” 목회자의 자기 관리가 단지 도덕적 청렴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적 자기 점검입니다. 목회자는 자기 의로 설 수 없습니다. 목회자는 누구보다도 더 말씀 앞에서 들켜야 합니다. 설교자가 설교에 의해 먼저 찔리지 않으면, 설교는 칼이 아니라 장식품이 됩니다. 목회자가 회개를 잃으면, 교회는 위선의 공기를 마시게 됩니다. 목회자가 은혜의 감격을 잃으면, 교회는 의무의 무게를 얹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마음은 늘 십자가 앞에서 ‘목회자’라는 직함을 내려놓고, ‘죄인’으로 서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인이 다시 ‘은혜 입은 자’로 일어서서 양 떼를 섬길 때, 그 섬김은 권위가 아니라 향기가 됩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바대로, 목회자의 가장 큰 자산은 자신의 재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함이며, 가장 큰 능력은 기술이 아니라 은혜에 붙들린 성품입니다.
또한 “온 양 떼”를 돌본다는 것은 균형을 뜻합니다. 목자는 강한 양만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끌고 갈 수 없습니다. 목자는 큰 헌신자만을 편애할 수 없습니다. 목자는 자신의 성향과 맞는 사람만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피로 산 교회는 다양합니다. 연약함도 있고, 강함도 있습니다. 성숙도 있고, 미성숙도 있습니다. 목자의 마음은 이 다양함을 ‘관리’하는 마음이 아니라, ‘돌보아 자라게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기 위해 목자는 말씀으로 양 떼를 훈련해야 합니다. 말씀은 단지 위로만 주지 않습니다. 말씀은 길을 보여 줍니다. 어떤 길은 좁습니다. 어떤 길은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어떤 길은 죄를 끊어야 합니다. 목자의 마음은 성도에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목자의 마음은 성도를 율법으로만 몰아붙이지 않습니다. 성도는 은혜로 삽니다. 성도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성도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목자의 마음은 성도가 넘어졌을 때 “왜 넘어졌느냐”로 끝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다시 일으키신다”를 붙듭니다. 그 균형이 복음적 목양입니다.
이제 결론으로 흐르며, 이 말씀의 핵심을 영혼에 새기고자 합니다. 교회를 돌보는 목자의 마음은 결국 세 가지 깊은 강이 하나로 합쳐져 흐르는 마음입니다. 첫째는 성령의 부르심 앞에서의 두려움입니다. 나는 내가 만든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 세우신 종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피 앞에서의 경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셋째는 양 떼를 향한 사랑의 인내입니다.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고 보살피는 길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눈물과 기도의 장거리 순례입니다. 이 세 강이 합쳐질 때 목자의 마음은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감정은 오르내려도, 중심은 십자가에 고정됩니다. 사람에게 실망해도, 주님께 소망을 둡니다. 교회가 연약해 보여도, 피로 사신 주님의 사랑이 교회를 결국 성숙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목회자가 먼저 자신을 위해 삼가도록,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도록, 복음의 감격을 잃지 않도록, 사람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주님의 피의 가치에 붙들리도록 기도하십시오. 또한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교회를 흠집 내는 말에 마음을 쉽게 내어주지 마십시오. 교회를 향한 냉소가 내 영혼을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교회를 향한 사랑은 단지 따뜻한 감정이 아니라, 피의 가치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도 양 떼로서, 동시에 서로를 돌보는 지체로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십시오. 교회를 돌보는 목자의 마음을 배우는 성도는,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작은 공동체에서도, 누군가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품는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주님이 피로 사신 생명을 귀히 여기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은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다시 데려갑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그 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의 생명은 십자가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살리는 길은 언제나 복음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목회자의 마음이 복음으로 뜨거워질 때, 교회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생명으로 움직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이 복음으로 새로워질 때, 교회는 비평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워집니다. 우리 모두가 피의 값으로 산 공동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깨어 삼가고, 사랑으로 보살피며, 말씀과 기도로 교회를 지켜 가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