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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다(로마서 6장 6절~11절)

작성자예수님사랑|작성시간26.06.15|조회수33 목록 댓글 0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다(로마서 6장 6절~11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로마서 6장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 앞에 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신앙생활의 한 윤리적 권면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심장부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맥박입니다. 죄 아래 있던 인간이 어떻게 자유자가 되었는지, 죽음의 그늘 아래 떨던 영혼이 어떻게 부활의 빛 아래 서게 되었는지, 자기 자신에게 묶여 살던 옛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일어나는지를 보여 주는 거룩한 선언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이 한 문장 안에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비극과 하나님의 가장 깊은 은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죄를 조금 지은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죄가 우리의 주인처럼 군림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욕망의 끈에 묶이고, 두려움의 사슬에 매이고, 인정받고자 하는 갈증에 끌려가며, 보이는 것과 시간적인 것만 붙잡다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는 존재였습니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가시적이고 시간적인 것만 붙잡기 때문에 불가시적이고 영원한 것을 놓치곤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삶의 중심에서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고, 세상의 온갖 것들이 우리 영혼을 지배하는 법칙처럼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비극을 폭로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더 깊이 내려갑니다. 복음은 우리 죄의 뿌리까지 내려가고, 우리 옛사람의 심장까지 내려가고, 우리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말합니다. “너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여기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헬라어로 συνεσταυρώθη(쉬네스타우로데)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죽음 안에 참여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멀리 갈보리 언덕 위에만 서 있는 나무가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믿는 자의 존재 한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심판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거기에는 우리의 죄가 있습니다. 우리의 교만이 있습니다. 우리의 불순종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기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아담의 오래된 반역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긍휼이 있습니다.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는 어린양의 순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우리 옛사람에게 종말을 선언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옛사람”이란 단지 과거의 나쁜 습관 몇 가지를 뜻하지 않습니다. 옛사람은 하나님을 떠난 아담 안의 나입니다. 하나님보다 나를 중심에 두고, 은혜보다 공로를 의지하며, 순종보다 자기 뜻을 앞세우고, 영원보다 순간을 사랑하던 나입니다. 겉으로는 종교적일 수 있고, 도덕적일 수 있고, 성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이 그리스도께 굴복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여전히 옛사람의 영역입니다. 인간은 때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자기 척도에 맞추고, 자기 치적에 날개를 달며, 보이지 않는 기념비를 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인간의 자랑이 무너집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율법적 행위도, 종교적 체면도, 세상의 성공도, 오래 쌓아 올린 자기 의도 우리에게 안전보장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은혜는 바로 거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옛사람을 개선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복음은 낡은 인간을 조금 수리하여 괜찮은 사람으로 만드는 종교적 기술이 아닙니다. 복음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계발의 연장이 아니라 부활 생명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계속 말합니다. “이는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여기서 죄의 몸이 죽는다는 것은 우리의 육체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몸은 선한 창조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죄가 우리 몸과 마음과 욕망과 습관을 도구 삼아 우리를 지배해 왔습니다. 눈은 탐욕의 창이 되었고, 입술은 상처의 칼이 되었고, 손은 자기 유익을 붙잡는 도구가 되었고, 마음은 우상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죄는 우리 안에서 왕처럼 명령했고, 우리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종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의 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죄는 아직 우리를 유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를 소유할 권리는 없습니다. 죄는 아직 문 앞에 엎드려 우리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 영혼의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죄의 권세가 꺾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심으로 새 생명의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죄와 싸울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왜 아직도 약할까? 나는 왜 여전히 넘어질까? 나는 정말 구원받은 사람일까?” 그러나 로마서 6장은 우리에게 먼저 감정을 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경험을 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자기 안의 흔들림을 들여다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리스도를 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라고 합니다. 부활의 아침에 무슨 일이 선포되었는지 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확신은 내 마음의 온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얼마나 뜨거운지,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얼마나 결심했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확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그분 안에 있다면, 그분의 죽음은 나의 죽음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나의 생명입니다. 그분의 승리는 나의 소망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 말합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죽은 자에게는 더 이상 옛 주인이 명령할 수 없습니다. 어떤 주인이 종을 붙들고 온갖 명령을 내리다가, 그 종이 죽으면 더 이상 그에게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것처럼, 죄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를 향하여 더 이상 최종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속삭일 수 있습니다. “너는 여전히 내 것이다. 너는 변하지 않았다. 너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더 크게 말합니다.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그는 은혜 아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유혹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죄는 교활합니다. 죄는 늘 아름다운 옷을 입고 찾아옵니다. 죄는 처음부터 파멸의 얼굴로 오지 않습니다. 죄는 “이 정도는 괜찮다”고 말하며 옵니다. 죄는 “너도 행복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며 옵니다. 죄는 “네가 주인이 되어도 된다”고 말하며 옵니다. 그러나 죄의 끝은 언제나 종살이입니다. 죄는 자유를 약속하지만 사슬을 줍니다. 죄는 만족을 약속하지만 더 깊은 갈증을 남깁니다. 죄는 생명을 약속하지만 결국 죽음의 냄새를 풍깁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에게 단지 “죄짓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더 깊이 말합니다. “너는 이미 다른 주인에게 속하였다. 너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너는 십자가에서 사신 바 된 사람이다. 너의 삶은 더 이상 네 것이 아니다.” 이것이 성화의 뿌리입니다. 성화는 두려움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성화는 정죄감에서 깊어지지 않습니다. 성화는 은혜의 토양에서 자랍니다. 내가 사랑받았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내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죄를 미워합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속했기 때문에 옛 주인의 목소리를 거절합니다.

바울은 8절에서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 말씀은 얼마나 따뜻한 약속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입니다. 십자가가 끝이 아닙니다. 무덤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이 마지막 문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심판하셨고, 부활을 통하여 새 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엄숙한 법처럼 보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비켜갈 수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보다 먼저 현장에 와 있는 신적 정지처럼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시간의 유한성을 언젠가는 죽음으로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더 이상 절망의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인간이 만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죽음 앞에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아, 네가 나를 끝낼 수 없다. 나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은 단지 예수님에게 일어난 기적 하나가 아닙니다. 부활은 새 세계의 시작입니다. 부활 가운데서 성령의 새 세계가 육의 옛 세계와 접촉합니다. 어둠 속에 빛이 들어오고, 절망 속에 소망이 들어오고, 죄의 종살이 가운데 자유가 들어오고, 무덤의 침묵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울려 퍼집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를 시작하셨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단지 죽어서 천국 가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서 부활 생명을 맛보며 사는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약합니다. 여전히 눈물이 있습니다. 여전히 질병과 실패와 관계의 상처와 마음의 어둠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이미 새 생명의 씨앗이 심겨 있습니다. 한 방울의 영원이 시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물들의 망망대해보다 더 무겁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새 생명은 세상의 모든 절망보다 깊고 강합니다.

어떤 사람이 오래된 집을 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겉으로 보기에는 낡고, 벽에는 금이 가고, 창문은 흔들리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합니다. 그런데 그 집의 등기부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 집은 새 주인의 소유입니다. 새 주인은 즉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고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유권은 이미 바뀌었습니다. 낡은 흔적은 남아 있어도, 그 집의 미래는 이전과 다릅니다. 이제 그 집은 새 주인의 계획 아래 들어갔습니다. 성도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옛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유권은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죄의 집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집입니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날마다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고, 마침내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여기에는 복음의 결정적 승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죽지 않으십니다.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사망은 예수님을 붙들 수 없었습니다. 무덤은 그분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로마의 권세도, 유대 지도자들의 음모도, 제자들의 실패도, 지옥의 깊은 권세도 하나님의 아들을 붙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문을 지나 생명의 왕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피하신 것이 아니라 죽음 한가운데로 들어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분은 어둠을 멀리서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어둠 속으로 들어가 빛을 밝히셨습니다. 그분은 죄인을 멀리서 동정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의 자리에 서서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은 다시 죽음 아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분의 승리는 반복되어야 할 불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단번에 이루어진 영원한 승리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줍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삶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고통이 있습니까.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응답이 더딘 문제가 있습니까. 마음속 깊은 곳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부끄러움과 상처가 있습니까. 자신을 볼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한가” 하는 탄식이 올라옵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가 너 자신을 붙들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너를 붙들고 계신다. 네 생명의 근거는 네 결심의 강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나아갈 때 자기 상태를 먼저 봅니다. 마음이 뜨거우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을 것 같고, 마음이 차가우면 멀리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순종을 잘한 날에는 기도할 용기가 생기고, 넘어진 날에는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길을 엽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우리의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근거는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0절에서 말합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단번에”라는 말은 헬라어로 ἐφάπαξ(에파팍스)입니다. 이것은 반복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사건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보충이 필요한 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과거 죄만이 아니라 현재의 연약함과 미래의 넘어짐까지도 그분의 십자가는 능히 담당할 만큼 충분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자주 십자가를 작게 만듭니까. 우리는 내가 많이 울어야 용서받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가 더 괴로워해야 하나님이 받아주실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가 더 오래 자책해야 진실한 회개처럼 여깁니다. 물론 참된 회개에는 애통함이 있습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은 복음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책은 구원이 아닙니다. 절망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둠 속에서 자기 상처만 만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빛 아래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셨고, 이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십니다. 그분의 생명은 온전히 하나님께 향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의 삶도 이제 하나님께 향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방향입니다. 예전에는 내가 중심이었습니다. 내 만족, 내 성공, 내 인정, 내 안전, 내 계획이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직장에서 일하고, 가정을 돌보고,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삶의 중심이 바뀌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가는 자리로 부름받았습니다.

믿음은 바로 이 방향 전환입니다. 믿음은 단지 어떤 교리를 머리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의 회개이며,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하여 가난하게 된 자의 기쁨이며, 예수 때문에 자기 생명을 내려놓는 자의 새로운 방향 설정입니다. 믿음은 결코 인간의 업적으로 자랑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빈손으로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 나는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나의 의요, 생명이요, 소망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11절에서 오늘 본문의 절정에 이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여길지어다”는 헬라어로 λογίζεσθε(로기제스테)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상상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없는 것을 있는 척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사실을 사실로 계산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근거하여 자신을 이해하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이 “여김”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감정이 말하는 대로 자신을 규정하기 쉽습니다. 실패하면 “나는 실패자다”라고 여깁니다. 죄에 넘어지면 “나는 여전히 죄의 종이다”라고 여깁니다. 사람에게 거절당하면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계산법을 줍니다. 십자가의 계산법입니다. 부활의 계산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하십니다. “너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 여기라.”

이것은 자기 암시가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의 현실입니다. 성도는 자신을 죄의 눈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과거의 상처로 자신을 정의하지 않고, 십자가의 은혜로 자신을 정의해야 합니다. 세상의 평가로 자기 가치를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 존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담 안에 갇힌 옛사람으로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싸움은 “내가 새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싸움”이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된 자로 살아가는 싸움”입니다. 이것이 복음 중심의 삶입니다. 율법주의는 말합니다. “순종하면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복음은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 순종하라.” 율법주의는 두려움으로 몰아갑니다. 복음은 사랑으로 이끕니다. 율법주의는 실패자를 버립니다. 복음은 실패한 자를 십자가로 부릅니다. 율법주의는 인간의 행위를 중심에 둡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일을 중심에 둡니다.

그렇다고 복음이 방종을 허락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복음은 죄를 미워하게 합니다. 은혜를 깊이 아는 사람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피 흘리셨다는 사실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죄와 장난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죄의 달콤한 속삭임 속에서 피 묻은 주님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은혜는 죄를 덮어 주는 핑계가 아니라 죄의 권세를 끊는 능력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쉽게 신앙을 자기 위안의 도구로만 만들려 합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뜻을 중심에 놓고,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고난 없는 영광을 꿈꾸고, 은혜를 말하면서도 회개 없는 평안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거짓 평안을 깨뜨립니다. 복음은 우리의 자기중심성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붙들고 있던 작은 우상들을 내려놓게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참된 자유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의 저편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이 붙드는 종교적 자랑, 세속적 영광, 자기 의의 성전, 보이는 성공의 제단, 이런 옛것들의 저편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은 모든 옛 질서를 지나갑니다. 그분은 인간의 가능성 한가운데 오셨지만, 인간이 스스로 열 수 없는 하나님의 가능성을 열어 주셨습니다. 역사 가운데 역사적인 분으로 오셨고, 시간 가운데 시간적인 생애를 사셨지만, 그분 안에는 영원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찬 시간성이 있었고, 말씀하시는 신성으로 가득 찬 인간성이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산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만 경건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말 한마디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상처 준 사람을 향한 마음이 십자가 아래에서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돈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욕망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너의 종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외로움 속에서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실패 속에서도 “나의 정체성은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의 작은 자리에서 부활 생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잠시 십자가 앞에 서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을 때 나를 용서하신 주님의 피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절망이 마음을 덮을 때 빈 무덤의 아침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도할 힘이 없을 때에도 “주님, 나를 붙들어 주십시오”라고 작은 숨처럼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 작은 부르짖음도 성령께서 받으십니다. 그 작은 순종도 하나님 나라의 씨앗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오늘 여러분 가운데 오래된 죄책감에 묶여 있는 분이 있습니까. “나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도 나에게 실망하셨을 것”이라고 여기는 분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십자가는 늦은 자를 부르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부활은 끝났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입니다. 하나님께는 겉모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면에 속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무너진 자리로 찾아오십니다. 숨기고 싶은 자리, 부끄러운 자리,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고 생각한 자리, 바로 그곳에 십자가의 은혜가 임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흔적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오늘도 아침의 빛이 우리를 깨우고, 말씀 한 구절이 마음을 두드리고, 누군가의 기도가 우리를 붙들고, 예배의 자리에서 성령의 바람이 조용히 지나갑니다. 그러나 가장 선명한 하나님의 흔적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싶다면, 십자가를 보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용서받았는지 알고 싶다면, 십자가를 보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십자가와 빈 무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말합니다. “너의 죄는 가볍지 않다.” 부활은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다.” 십자가는 말합니다. “옛사람은 죽어야 한다.” 부활은 말합니다. “새사람이 살아났다.” 십자가는 말합니다. “너는 네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부활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의 생명이 되셨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 자신을 새롭게 여기십시오. 죄가 여러분에게 옛 이름을 부를 때, 복음의 이름으로 대답하십시오. 죄가 “너는 내 것이다”라고 말할 때,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다”라고 대답하십시오. 절망이 “너는 끝났다”라고 말할 때, “나의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라고 대답하십시오. 자기 정죄가 “너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위해 흘려졌다”라고 대답하십시오.

이 여김은 매일의 믿음입니다. 어제 들은 말씀을 오늘 다시 들어야 하고, 오늘 붙든 복음을 내일 다시 붙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손에 쥐어 보관하는 물건이 아니라, 날마다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는 살아 있는 호흡입니다. 믿음은 누구에게나 쉽고도 어렵습니다. 쉬운 것은 빈손으로 받기 때문이고, 어려운 것은 끝까지 자기 의를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마치 잔이 서로 맞닿듯이 우리 삶에 가까이 오셔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실제로 접촉하게 하시는 창조의 힘이요 구속의 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다시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눈물이 있어도 붙드십시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어도 붙드십시오. 마음이 식어 있는 것 같아도 붙드십시오. 죄와 싸우다 지친 영혼이라도 붙드십시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은 우리를 끝까지 붙드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약속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위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결단의 근거입니다.

오늘 우리는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결단은 이를 악무는 자기 의지의 결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 앞에 무릎 꿇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주님, 나는 이미 주님의 것입니다. 나를 다시 죄의 종으로 내어 주지 않겠습니다. 내 눈을 주님께 드립니다. 내 입술을 주님께 드립니다. 내 마음과 시간과 관계와 물질과 남은 생애를 주님께 드립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고백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고, 우리가 흔들릴 때마다 빈 무덤의 빛을 바라보고, 우리가 울 때마다 부활의 주님 품에 안기기를 바랍니다. 죽음이 생명을 이기지 못합니다. 죄가 은혜를 이기지 못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의 실패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보다 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일어나십시오. 눈물 속에서도 일어나십시오. 십자가를 붙들고 일어나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정죄의 자리에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네 힘으로 살아 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 안에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죄의 낡은 집으로 돌아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의 새 아침을 향해 걷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 걸어갈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의 권세를 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새 생명 가운데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신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유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것이 오늘도 우리를 다시 살게 하는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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