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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기기를 다투는 자(고전 9:24-27)

작성자예수님사랑|작성시간26.06.06|조회수38 목록 댓글 0

이기기를 다투는 자(고전 9:24-27)

 

24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 9:24-27)

 

 

우리 학우 여러분,

 

요즘 우리나라에는 많은 신문이 발행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전국 일간지를 비롯해서 각 지방마다 지방 신문이 있고, 또 각종 경제 신문과 스포츠 신문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게다가 토요신문, 일요신문, 시사 토픽 등 다양한 종류의 신문들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신문들 중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신문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선뜻 대답하기가 곤란할 것 같습니다. 각 신문사마다 말하는 판매 부수가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본다면 그 대답은 분명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스포츠 신문입니다. 전철을 타고 다니면서 전철역에서 판매되는 신문을 보면 아마 열 장 중에 여덟아홉 장은 스포츠 신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홈런을 쳤다느니, 누가 몇 골을 넣었다느니 하는 등의 큰 제목을 칼라로 인쇄해서 가판대에 꽂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 다른 사람들이 읽는 신문을 어깨 너머로 슬쩍 쳐다보면 “아기 곰이 재주를 부린다”느니 하는 기사들이 있는데, “이게 무슨 뜻일까?” 하고 한참 고개를 갸우뚱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운동 경기에서는 저마다 이기기를 다툽니다. 경기에서 일등 하는 자가 상을 받고 우승하는 팀이 환영을 받으며 화제에 오르내리게 됩니다. 2등, 3등 하는 사람은 조금밖에 환영받지 못하고, 꼴등은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닙니다. 야구나 축구에서 진 팀은 자칫하면 감독에게 기합을 받고 토끼뜀을 하게 됩니다. 이에 반해 우승한 팀의 야구 투수는 아무리 얼굴이 못 생기고 미련하게 생겼을지라도 일약 스타가 되고 많은 팬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운동 경기의 원리를 사도 바울도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는 것은 너희들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많이 있어서 다 달음질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한 명이라는 사실을 너희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운동장’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타디온’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흔히 ‘스타디움’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람석이 딸린 원형 또는 타원형의 경기장을 말합니다. 이러한 경기장 시설은 당시 로마제국에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헬라 문명의 일종으로서 주요 도시마다 건설되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소아시아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와 페르시아를 점령한 후에 주요 교통 요지마다 헬라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도시들에 운동장과 극장을 건설하고 또 학교와 신전을 세워서 헬라 문명을 보급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헬라 문명의 특징은 인본주의로서 사람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올림픽 경기의 표어인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citior, altior, fortior)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능한 한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인간중심적인 헬라 문명의 운동 경기는 단체의 협동과 조화를 꾀했던 옛 조선의 운동 경기와는 달리, 끊임없는 기록 갱신 경쟁 때문에 기형적인 신체 발전을 가져오고 비인간적인 훈련과 약물 중독 등의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헬라 문명의 운동 경기의 문제점을 사도 바울도 모르는 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운동 경기의 원리 중에는 영적 세계의 원리와 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4절 하반절에 보면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세계에도 달음질이 있고 이기는 자에게는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달음질하는 선수들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4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복음 전하는 인생을 달음질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상을 얻기 위해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세상의 다른 것들을 다 정리하고 주의 종이 되려고 부름 받아 나선 여러분에게는 본격적인 영적 달음질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왕에 나선 김에 최선을 다해 달려서 상을 많이 타고 또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많이 맺는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는데, 본문 말씀을 따라 세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 모든 일에 절제해야

 

첫째는, 모든 일에 절제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25절에 보면 “이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절제한다’는 단어의 원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자신의 감정, 충동 또는 욕구를 통제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훈련 중에 삼가하는 것, 신체에 해로운 것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서 경기에서 이기려면 오직 하나의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빌 3:12-14).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달리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든지 딴 생각을 해서는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올림픽 경기를 보면, 훈련소에 모아놓고서 집중 훈련을 실시한 동구권이나 한국이 비교적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은 비록 비인간적이긴 하지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집중해서 훈련했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는 것입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할 때에도 성과를 올리려면 집중을 해야 됩니다. 시끄러운 것과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요즘 젊은 학생들 중에는 공부할 때 팝송 음악을 틀지 않으면 공부가 안 된다고 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능률을 올리려면 다른 시끄러운 것들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것들도 제거해야 됩니다. 특별히 여러 잡념들을 없애야만 됩니다. 신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책을 펴나 덮으나 늘 교회 걱정을 하고, 오는 주일에는 무얼 설교할까 고민하고, 말썽부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이런 것들을 늘 생각하고 있으면 공부가 잘될 수 없습니다. 교회 문제라든지 여러 복잡한 것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기도회 때 나와서 하나님께 아뢰고, 그러고 나서는 잊어버려야만 합니다. 우리가 낮 시간에 수업을 듣고 공부하면서 그런 것을 걱정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고, 그 다음부터는 공부에 전념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 공부를 하려면 이야기를 삼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책을 펴놓고서 자꾸만 옆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잡담으로 몇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공부의 성과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능률을 올리려면 집중해야 되고 다른 것들을 삼가야 됩니다.

영적인 경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경주에 방해되는 것들을 삼가야 합니다. 세상 걱정과 염려들은 다 그만두어야 합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목회를 하고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자녀 교육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염려와 걱정들은 다 던져버려야만 합니다.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영적인 일, 하나님 나라의 일에만 전념하고, 그것을 늘 생각하고 묵상해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에는 옛날에 좋아하던 것들을 다 던져버려야만 합니다. 스포츠 신문들도 이제는 다 던져버리고, 그런 것 읽을 시간에 성경 말씀을 더 읽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TV 프로그램과 연속극을 좋아했다 할지라도 이제는 그런 것들도 가능한 한 보지 않도록 하고, 시간을 아껴서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섬기는 일에 시간을 투자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을지라도, 이제는 그런 시간에 성도들을 돌아보고 찾아 가서 위로하고 기도해 주고 하는 일에 힘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영적인 경주에서도 승리하려면 ‘절제(節制)’해야 합니다. 여기에 보면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 즉 한 가지도 빼놓지 말고 모든 일에 있어서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 가지 일이 있는데, 열 중에서 아홉을 잘하고 하나만 잘못 해도 실패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것은 다 절제하고 잘하는데 단 한 가지 잠자는 것을 절제하지 못 해서 실패합니다. 아침에 늦잠이 많아서 새벽기도회에 나오지 못하면 목회에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해서 이야기하느라고 공부를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학교에 와서 또는 기숙사에 있으면서 교회 이야기, 세상 이야기, 인생 경험 등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느라고 밤 한 시, 두 시까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절제하지 못하면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고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모든 일에 있어서 절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II. 향방을 바로 정해야

 

둘째로, 우리는 향방을 바로 정해야 합니다. 26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것들을 삼가고 절제를 해서 아무리 열심히 달려갈지라도 방향이 틀리면 소용없습니다. 먼저 올바른 목표를 설정해 놓고서 그것을 향해 달려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잘 달리고 뜀박질을 잘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달려가더라도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면 실격입니다. 달리기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줄 그어놓은 곳으로 가지 않고 가로질러 가서는 일등 했다고 손을 들더라도 그런 것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심판이 와서 “저기 가서 앉으라.”고 합니다. 축구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을 아무리 잘 차고 잘 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대방 골대가 아니라 자기 골대에 공을 차 넣으면 자살골이 되고 맙니다. 그런 것은 안 차 넣은 것만 못합니다.

영적 경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목표를 분명히 정해 놓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목표가 잘못된 사람은 차라리 주의 일에 나서지 않는 것이 더 좋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4절에 보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 그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푯대를 향해 전심전력을 다해 달려갈 때 우리는 상을 받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화란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가 활동했던 지역에 한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살던 이웃 동네인 즈볼레(Zwolle)에 있는데 귀국 전에 한번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서술한 중세의 유명한 수도사인 토마스 아 켐피스가 살았던 곳에 가 보니, 옛날에 수도원이 있었던 그 자리는 지금 캠핑장이 되어서 유럽 곳곳에서 사람들이 와서 캠핑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도원이 있던 그 자리는 지금 레스토랑이 되어서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가서 옛날에 토마스 아 켐피스가 활동했던 자리가 어디냐고 물으니, 지금 바로 여기가 그 자리인데 지금 기념비가 하나 남아 있고 다른 것은 다 없어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구석에 기념비가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거기에 보니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있고, 십자가에 생명이 있다.”(In Christo salvus, in cruce vita) 제가 이 구절을 보고 많이 생각했습니다. “과연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로구나. 이것을 토마스가 평생의 모토로 삼고 살았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목표 설정이 잘못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종이 되겠다고 나선 신학생들과 목회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 목표 설정이 분명하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저 입을 열면 그리스도니 십자가니 외치고 설교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주님의 십자가보다 다른 것, 예를 들어 목회 성공을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목회 성공이라는 것을 자기의 마음속에 굳게 새기고, 오직 그것을 향해 매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올바른 의미에서의 목회 성공은 좋고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그리스도보다 더 높은 목표가 될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목회 성공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지 아니하는 방법도 동원하고 십자가 아닌 다른 길도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목표 설정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목회를 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방향 설정이 잘못된 것입니다. 과연 누구를 위해 목회를 하고 있는가? 누구를 위해 이렇게 뛰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해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인가? 목회 성공을 해서 큰 교회를 이루어서 큰 차를 타고 다니고, 노회나 총회에서 힘을 한번 써 보는 것이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목표라면, 그것은 목표 설정이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인간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곧 썩을 면류관을 위해 달려가면 안 됩니다. 우리는 허공을 치는 것 같이 향방 없이 달려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길 곧 썩지 아니할 면류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면류관을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III. 몸을 쳐서 복종해야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의 몸을 쳐서 복종해야 합니다. 27절에 보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경주에서 범사에 절제하고 또 방향을 바로 정해서 달려가려고 하면 우리의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말을 잘 안 듣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목표를 바로 정하고 나아가려고 애를 쓴다고 할지라도 우리 몸은 본성적으로 편안한 것, 안락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 몸은 대개 아침에 늦잠 자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대체로 공부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고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학생들은 놀러 간다고 하면 좋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시험 친다고 하면 “아이쿠, 큰일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련회에 가서 친구들과 함께 지낼 때에는 신이 나서 밤 늦게까지 잠을 안 자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학교에 돌아와서 책을 펴기만 하면 잠이 솔솔 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몸이 본성적으로 편안하고 안락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몸이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고 마음씨가 곱고 인격이 좋아도 우리 몸이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영적으로 좋은 일꾼이 될 수 없고, 영적인 싸움에서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려면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곧,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훈련을 잘 통과해야만 하나님 나라의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했는데, ‘복종시킨다’(둘라고게오, doulagwgevw)는 단어를 살펴보면 ‘종’(둘로스, dou'lo")이란 단어와 ‘이끈다’(아고, a[gw)는 단어가 합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 몸을 복종시키려면 우리 몸을 ‘종’으로 삼아서 ‘끌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몸에게 종이 되어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몸의 주인이 되어서 그것을 다스려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싸움은 곧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교회 목회도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느냐 하는 것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부풀리고 교만해질 때 얼마나 자기 마음을 억누르고 겸손해지느냐? 화가 나고 혈기가 솟아오르고 분통이 터질 때 얼마나 그것을 참고 견디느냐? 하는 것에 따라 목회를 잘하느냐 잘 못하느냐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목회를 잘해서 대접을 받고 칭찬을 받을 때에 얼마나 자기를 억누르고 낮아지고 섬기는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따라 그 사람의 그릇이 정해지고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은 주님의 일을 잘할 수 있고 또한 교회 일도 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여기에 하나 더 이유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사도 중의 사도라 할 수 있는 바울 같은 사람도 복음을 전한 후에 자기가 버림이 될까 두렵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버림받는다’고 하는 것은 불합격품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네가 복음을 많이 전하고 일을 많이 했다만 너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불합격이다. 너는 나에게 합당치 않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자기가 복음을 전한 후에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을까 두려워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많이 전하고 목회에 성공했다 할지라도 절제하지 아니해서 즉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아서 버림받는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참된 주의 종이라면 결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세상에는 거짓 선지자들과 삯군 목자들이 많이 있습니다(마 7:15-23; 고후 3:17; 11:13-15 등). 그래서 이런 경고의 말씀도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가 설교를 잘해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또 큰 교회를 이루고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쳤지만, 자기 자신은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면 이보다 더 비참하고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혹시라도 이런 잘못에 빠지지 않기 위해 늘 조심하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늘 깨어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특별히 성령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하다고 생각할 그때에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 일이 잘되고 모든 일이 성공리에 끝났다 싶을 그때에 우리는 안일해지기 쉽고 방탕해지기 쉽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깨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으로서 범사에 조심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영적인 전투에서 이길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 나선 우리 학우 여러분,

 

여러분 모두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모든 일에 절제하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시기 바랍니다.그래서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고,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으시기 바랍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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