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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으로 완주하는 사역(고린도전서4:1–2).

작성자예수님사랑|작성시간26.06.15|조회수27 목록 댓글 0

충성으로 완주하는 사역(고린도전서4:1–2).

고린도전서 4장 1–2절은 사역의 본질을 가장 단정하면서도 가장 무겁게 선언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이 말씀은 사역을 둘러싼 모든 오해를 한 줄로 걷어 냅니다. 사역은 사람의 기분을 관리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명령 아래에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아 전달하는 일입니다. 사역은 재능의 전시가 아니라 위탁의 책임이며, 사역의 성적표는 인기나 성과가 아니라 “충성”입니다. 그러므로 “충성으로 완주하는 사역”이란, 단지 오래 버틴다는 뜻이 아니라, 맡기신 분의 뜻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그 뜻에 맞추어 달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완주를 “탈진하지 않기”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완주는 “변질되지 않기”에 더 가깝습니다. 오래 달렸는데 방향이 바뀌면, 그것은 완주가 아니라 이탈입니다. 끝까지 섰는데 마음이 다른 주인을 섬기면, 그것은 충성이 아니라 자기 보전입니다. 바울은 사역자를 향해 한 가지를 구합니다. 충성. 다른 것은 부수적인 열매일 수 있으나, 이것은 핵심입니다.

먼저 이 말씀은 사역자의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일꾼은 주인의 뜻을 수행하는 종입니다. 주인이 그리스도이시라면, 사역의 중심은 사람의 기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어떤 날은 칭찬이 쏟아져도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야 하고, 어떤 날은 비난이 몰려와도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사역자가 사람의 평가에 매이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여론의 종이 됩니다. 여론은 늘 바뀌고, 분위기는 늘 흔들립니다. 그러면 사역자의 심장도 함께 흔들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사역은 그 변하지 않는 주님께 매이는 것입니다. 이 매임은 속박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며 하루에도 열두 번 흔들리던 영혼이, 한 분의 주를 섬기기로 결단할 때 비로소 가벼워집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드디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로 들어섭니다.

또한 바울은 사역자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합니다. 맡았다는 말은 소유가 아니라 위탁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창작물이 아닙니다. 교리는 우리의 취향이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의 장식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관리할 뿐, 자기 마음대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역의 위기는, 사역자가 청지기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비밀을 자기 명성의 계단으로 바꾸고, 어떤 이는 하나님의 비밀을 세상의 취향에 맞춘 상품으로 바꾸며, 어떤 이는 하나님의 비밀을 사람의 상처를 달래는 도구로만 축소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지 위로의 말이 아니라 구원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중심에는 십자가와 부활이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를 고칠 수 없고, 인간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죄인을 부르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셔서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이며, 교회가 가진 가장 큰 보화입니다. 사역자가 이 비밀을 맡았다는 것은, 그 비밀을 숨기거나 변형하거나 희석할 권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맡았으니 전해야 하고, 맡았으니 지켜야 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합니다. 충성은 단지 성실한 성격이 아닙니다. 충성은 언약적 태도입니다.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서, 주님의 교회 앞에서, 그리고 주님의 날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충성이란, 내 감정이 뜨거울 때만 하는 헌신이 아니라, 감정이 식어도 사명을 붙드는 것입니다. 충성이란, 환경이 유리할 때만 유지되는 신념이 아니라, 환경이 불리해도 말씀을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충성이란, 내 계획이 잘 풀릴 때만 드리는 순종이 아니라, 내 계획이 무너져도 주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충성이란, “주님이 내게 무엇을 주셨는가”에 따라 움직이는 거래가 아니라, “주님이 누구신가”에 따라 자신을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기에서a서 우리는 충성의 대상이 분명해야 함을 배웁니다. 충성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드려야 합니다. 사람에게 충성하면 그 사람의 기분이 곧 나의 기준이 됩니다. 사람에게 충성하면 진리가 관계에 종속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충성하면 관계가 진리에 종속됩니다. 진리에 종속된 관계는 때로 아프지만, 결국 살립니다. 반대로 관계에 종속된 진리는 달콤하지만, 결국 죽입니다. 교회는 진리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진리가 희미해지면 사랑도 진짜가 되지 못합니다. 사랑은 진리 안에서 숨을 쉽니다. 그래서 충성은 냉정함이 아닙니다. 충성은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양을 사랑하기에 양에게 진리를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약을 쓰게 먹이는 의사의 마음처럼, 죄를 책망하는 설교는 사랑이 없으면 폭력이 되고, 사랑이 있으면 치유가 됩니다. 충성은 그 치유를 위해, 자기 감정과 자기 평판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는 용기입니다.

그리고 충성은 “완주”를 요구합니다. 사역의 길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입니다. 시작이 화려하다고 끝이 영광스럽지 않습니다. 시작이 작아도 끝이 거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주는 자동으로 되지 않습니다. 완주는 날마다의 선택으로 만들어집니다. “오늘도 말씀을 왜곡하지 않겠습니다.” “오늘도 사람의 환심보다 주님의 미소를 더 귀하게 여기겠습니다.” “오늘도 기도 없는 열심으로 나를 속이지 않겠습니다.” “오늘도 결과를 주님의 손에 맡기고, 내가 맡은 충성을 지키겠습니다.” 이런 작은 선택들이 쌓여, 한 사람의 사역을 형성합니다. 우리는 종종 큰 결단을 기다리지만, 하나님은 작은 충성을 통해 큰 사람을 빚으십니다. 커다란 업적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함입니다.

사역은 늘 평가에 노출됩니다. 교인들은 사역자를 보고, 비교하고, 말합니다. 숫자와 분위기와 프로그램과 겉모습은 쉽게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역을 보는 올바른 기준을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여길지어다”라는 문장으로 제시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항상 바르지 않기에, 사역자도, 교회도, 사역을 보는 관점을 성경으로 교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사역자를 “유능한 기획자”로 여깁니다. 그래서 사역이 프로젝트가 되고, 교회가 조직이 되고, 성도가 고객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역자를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의 청지기”로 여깁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는 그분의 피로 산 양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은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하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을 전하고 ‘영혼을 돌보는’ 일입니다. 여기서 충성은 사람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능숙함이 아니라, 말씀을 바르게 나누는 정직함입니다.

이 충성은 복음적이며 개혁주의적인 신학 위에 굳게 서야만 지속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자기 영광을 갈망합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죄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역자가 충성으로 완주하려면, 자신이 무엇으로 서는지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나를 지탱한다는 사실, 내가 나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나를 의롭게 한다는 사실, 내가 사역의 주인이 아니라 위탁받은 청지기라는 사실, 그리고 최종 심판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심장에 새겨져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주권은 사역자를 살립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속했고, 부흥도 하나님께 속했으며, 구원도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조급함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동시에 이 주권은 사역자를 두렵게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시기에, 우리는 함부로 말씀을 다루지 못합니다. 이 건강한 두려움이 충성을 지키게 합니다.

충성으로 완주하는 사역에는 반드시 “내적 싸움”이 있습니다. 피곤함이 오고, 오해가 오고, 비난이 오고, 열매가 보이지 않는 시간이 옵니다. 그때 유혹이 찾아옵니다. 말씀을 조금만 부드럽게 바꾸면 덜 다치지 않을까. 회개를 덜 말하면 더 편해지지 않을까. 죄를 죄라 부르지 않으면 갈등이 줄지 않을까. 복음의 날카로움을 줄이면 사람들이 더 모이지 않을까. 그러나 그 길은 결국 청지기의 길이 아니라 주인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비밀을 자기 방식으로 바꾸기 시작하면, 그는 충성을 잃고 “자기 종교”를 만들게 됩니다. 충성은 유혹을 이기는 힘입니다. 유혹을 이기는 힘은 단지 의지가 아니라, 더 큰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깨닫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진리를 희석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값싼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죄의 값을 십자가에서 치르셨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드러내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사역자의 기준입니다. 십자가는 충성의 심장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만이, 사람의 박수 없이도 달릴 수 있습니다.

사역의 완주를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길도 분명합니다. 첫째는 말씀의 은혜입니다. 청지기는 창고를 채우는 사람이 아니라, 창고에서 정한 때에 양식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많이 아는 것과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은 다릅니다. 말씀에 사로잡힌 사역자는, 자신이 먼저 말씀 앞에서 무너지고 다시 세워집니다. 설교는 강단 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사역자의 무릎에서 시작되어, 사역자의 삶을 통과해, 성도의 마음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므로 충성의 첫 자리는 은밀한 자리입니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말씀을 붙들고, 남이 칭찬하지 않는 곳에서 회개하며, 남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자리입니다. 그 은밀함이 무너지면, 공개적 사역은 결국 연기처럼 됩니다.

둘째는 기도의 은혜입니다. 충성은 내 능력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붙드심으로 지속됩니다. 기도는 사역자의 호흡입니다. 호흡이 멈추면 활동이 잠시 가능해 보여도, 결국 죽음이 찾아옵니다. 기도 없는 사역은 겉으로는 화려할 수 있으나 속은 말라갑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결과를 맡기는 행위입니다. “주님, 제가 할 일은 충성뿐입니다. 열매는 주님께 속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순간, 사역자는 자기 신격화에서 벗어납니다. 교회는 사역자의 어깨 위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집니다. 기도는 그 반석을 확인하는 행위입니다.

셋째는 공동체의 은혜입니다. 충성은 혼자서 지키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동역자, 장로, 믿음의 선배, 정직한 책망을 줄 수 있는 친구가 사역자에게 필요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달리는 사역자는 어느 순간 자기 마음대로 말씀을 다루게 됩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우리를 겸손케 합니다. 개혁주의 전통이 강조해 온 교회의 질서와 권징은 사람을 억누르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거룩하게 보존하기 위함입니다. 충성으로 완주하는 사역자는 권면을 환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지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예화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오래전에 한 작은 마을에 등대지기가 있었습니다. 폭풍이 잦은 바닷가라 등대 불빛은 생명줄이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의 젊은이들이 등대에 모여 말했습니다. “등대지기님, 불빛이 너무 강해서 밤바다가 삭막해 보입니다. 따뜻한 색으로 바꾸면 어떨까요? 또 배들이 요즘은 장비가 좋으니, 불빛을 조금만 줄여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기름도 절약되고, 사람들이 등대지기님을 더 좋아할 겁니다.” 등대지기는 잠시 흔들렸습니다. 박수와 인정은 달콤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거센 안개와 폭풍이 몰려왔습니다. 그는 결국 원래의 밝기로 불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암초를 가까스로 피한 배의 선장이 눈물로 말했습니다. “불빛이 조금만 약했더라면 우리는 모두 바다에 묻혔을 것입니다.” 사역은 등대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더 부드럽게, 더 감각적으로, 더 덜 불편하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느 밤, 한 영혼이 죄의 암초 앞에서 흔들릴 때, 복음의 빛이 희미하면 그 영혼은 상처를 입습니다. 충성은 불빛을 지키는 일입니다. 불빛의 주인은 등대지기가 아니라 바다를 맡기신 주인입니다. 그래서 등대지기는 사람의 기분이 아니라 주인의 명령을 따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이 결국 사람을 삽니다.

그렇다면 충성으로 완주하는 사역자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말씀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설교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셔야 합니다. 도덕적 교훈만 남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자기계발의 지혜만 남으면 강단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대속, 부활의 승리,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설교의 심장이어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언약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성경이 한 분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사실을 붙듭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4장의 “하나님의 비밀”은 단지 감춰진 정보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구원의 경륜입니다. 이 경륜을 맡은 청지기는,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지 않습니다. 청지기는 문을 열어 빛을 들이는 사람이지, 빛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충성은 늘 자기 비움으로 나타납니다. 자기 자랑을 내려놓고, 자기 의를 내려놓고, 자기 억울함을 주님께 맡기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충성은 인내로 나타납니다. 사역의 길에는 즉각적인 열매가 보이지 않는 계절이 있습니다. 씨앗은 땅속에서 한동안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자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충성은 “보이지 않는 역사”를 믿고, 말씀과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역자는 자신의 교만이 벗겨지고, 자신의 의존이 드러나고, 자신의 참된 동기가 시험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은 사역자를 성공으로 망치지 않으시고, 때로 지연과 약함으로 정결하게 하십니다. 충성으로 완주하는 사역은 결국 “내가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신실하셔서” 가능합니다. 우리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드십니다. 우리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달릴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충성은 은혜의 다른 이름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만이 충성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은 사역의 최종 평가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람의 평가는 부분적이고, 시간에 따라 바뀌며, 종종 불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충성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니 사역자는 두 가지를 동시에 가져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는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담대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는 자신을 과장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소명을 부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는 칭찬에 취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는 책망에 무너지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의 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에 서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주님은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너는 얼마나 유명했느냐.” “너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았느냐.” 주님은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맡긴 복음을 너는 지켰느냐.” “내가 맡긴 양들을 너는 사랑했느냐.” “너는 끝까지 나의 종으로 남았느냐.” 그 물음 앞에서 우리는 오늘을 삽니다. 그러므로 충성으로 완주하는 사역은, 매일 종말론적으로 사는 사역입니다. 마지막 날을 기억하며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날을 기억하면, 오늘의 오해는 지나가는 안개처럼 작아지고, 오늘의 고난은 잠깐의 연단처럼 의미를 얻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날 주님께서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실 때, 그 한마디가 모든 눈물과 땀을 영광으로 바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모든 일꾼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화려함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충성을 맡기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길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말씀을 배반하지 않길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언제나 강하길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약할 때에도 주님의 은혜를 붙들길 원하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저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제가 구할 것은 충성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걸어갑시다. 환호 속에서도 진리를 지키고, 침묵 속에서도 기도를 지키며, 상처 속에서도 사랑을 지키고, 어둠 속에서도 복음의 빛을 지키는 걸음으로 끝까지 달려갑시다. 우리의 완주는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그 신실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넘어졌다면 회개로 다시 일어나십시오. 지쳤다면 은혜의 샘으로 돌아가십시오. 흔들린다면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자신의 종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충성의 길에서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 손에 붙들린 사람은 결국 완주합니다. 그리고 그 완주는 우리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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