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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갈라디아서 4장 12–20절)

작성자예수님사랑|작성시간26.06.15|조회수40 목록 댓글 0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갈라디아서 4장 12–20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은 논리의 칼날보다 더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의 언어입니다. 갈라디아서 전체를 보면 바울은 매우 단호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다.” 그의 말은 때로 폭풍처럼 몰아치고, 때로 불붙은 칼처럼 갈라디아 교회의 영혼을 베어 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이르면 그 불의 언어 속에서 갑자기 한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사도는 논쟁을 멈춘 것이 아니라 논쟁의 더 깊은 자리로 내려갑니다. 교리를 버린 것이 아니라 교리가 피가 되고 눈물이 되고 사랑이 되는 자리로 들어갑니다. 진리는 차가운 돌판 위에 새겨진 글자가 아니라,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는 사도의 심장 속에서 뛰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이 한 문장 안에는 복음 사역자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높은 자리에서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는 멀리 서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 곁으로 내려갔습니다.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처럼 되었습니다. 율법의 울타리 안에서 자란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의를 내려놓고 이방인 갈라디아 사람들과 같은 자리까지 내려갔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는 자기 문화와 자랑과 종교적 우월감을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 붙잡힌 사람답게,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낮추신 그 길을 따라 낮아졌습니다.

여기서 복음의 놀라운 신비가 드러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올라오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셨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보이는 것과 손에 잡히는 것과 즉시 얻어지는 것을 붙들기 위해 영원한 것을 놓칩니다. 인간은 자기 이름의 기념비를 세우고, 자기 의의 깃발을 흔들고, 자기 공로의 작은 성을 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성취를 장식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너진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영원하신 말씀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고, 거룩하신 분이 죄인의 거리로 걸어오셨고, 생명의 주께서 십자가의 죽음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복음은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내려오신 은혜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고 말할 때, 그는 단순히 선교 전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사람을 사랑했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영광을 내려놓고 우리와 같이 되셨듯이, 바울도 자기의 종교적 특권과 유대적 자랑을 내려놓고 갈라디아 사람들 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들을 얻기 위해 그들의 자리까지 내려갔습니다. 참 사랑은 언제나 내려갑니다. 참 복음은 언제나 상대의 영혼이 있는 자리까지 찾아갑니다. 높은 곳에서 던지는 말은 사람을 찌를 수는 있어도 살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사랑은 사람을 살립니다.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복음에서 흔들리고 있는데, 바울은 왜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까? 그는 지금 자기 상처를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개인적 모욕보다 그들의 영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복음에서 떠나 율법주의적 가르침에 흔들릴 때, 가장 큰 손해를 입는 사람은 바울이 아닙니다. 가장 큰 손해를 입는 사람은 갈라디아 성도들 자신입니다. 참 목자는 자기 자존심이 상한 것보다 양의 영혼이 병든 것을 더 아파합니다. 참 복음 사역자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했느냐보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붙어 있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목회적 사랑입니다. 사람은 상처를 받으면 방어합니다. 오해를 받으면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배신을 당하면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문을 닫지 않습니다. 그는 다시 마음을 엽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그를 자기 보호의 감옥에서 풀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바울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러므로 그는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과 성도들의 영혼을 위해 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자주 넘어지는 자리가 바로 이곳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말하면서도 너무 쉽게 자기 자존심을 지킵니다. 우리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너무 쉽게 상처를 계산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누군가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마음속에서 작은 법정을 엽니다. 거기서 우리는 스스로 재판장이 되고, 상대를 피고석에 세우며, 내 감정을 증거물로 제출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다른 법정으로 부르십니다. 십자가의 법정입니다. 그곳에서는 죄 없는 주님이 피고가 되셨고, 죄 많은 우리가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정죄받아야 할 우리가 사랑을 받았고, 버림받아야 할 우리가 자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복음을 아는 사람은 자기 상처만 붙들고 살 수 없습니다. 아프지만 사랑합니다. 흔들리지만 다시 품습니다. 눈물이 나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과의 처음 만남을 회상합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바울이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약함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어떤 질병이었는지는 성경이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이 강한 모습으로 그들 앞에 선 것이 아니라 약한 모습으로 섰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승리자의 장엄한 행렬처럼 갈라디아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육체의 약함을 가진 채 들어갔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매력적이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설교자로서의 외적 조건이 부족해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의 몸은 복음의 영광을 가릴 만큼 연약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약함을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찬란한 무대보다 깨어진 질그릇을 더 즐겨 사용하십니다. 왜냐하면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강함을 통해 자기 이름을 세우려 하지만, 하나님은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십니다. 인간은 완전해 보이는 외관으로 사람을 설득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상처 입은 사람의 입술을 통해 은혜를 흐르게 하십니다. 복음은 연출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무대 위에서 꾸며지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복음은 약한 몸, 떨리는 목소리, 눈물 젖은 심장 속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움직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처음에 바울의 약함을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얼마나 아름다운 기억입니까? 그들은 바울의 약함 너머에 있는 복음을 보았습니다. 그의 병든 몸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의 외적인 초라함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때 갈라디아 교회는 복음의 처음 사랑 안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은혜로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순수성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 우리는 얼마나 단순했습니까? 말씀 한 구절에도 눈물이 났습니다. 찬송 한 소절에도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주님의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뜨거웠습니다. 내가 죄인인데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설교자의 말솜씨보다 말씀의 생명을 들었습니다. 예배당의 크기보다 임재의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용서를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어느새 복잡해집니다. 은혜보다 조건을 따지고, 복음보다 형식을 앞세우고, 그리스도보다 사람을 평가합니다. 처음에는 십자가만 보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의 약점이 보이고, 교회의 부족함이 보이고, 내 마음에 맞지 않는 것들이 보입니다.

물론 분별은 필요합니다. 진리를 지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분별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잃고, 진리라는 이름으로 은혜를 잃고,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교만을 키운다면,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의 길을 다시 걷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단지 감정이 식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중심에서 미끄러져 인간의 조건과 공로와 외적 표지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고, 그리스도의 의만으로는 불안하여 무엇인가를 더 붙잡으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때 율법주의가 들어옵니다.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두려움입니다. 겉으로는 열심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불안입니다. 겉으로는 신앙의 엄격함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그리스도의 충분하심을 믿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묻습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단순한 책망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기쁨을 찾는 목자의 탄식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 누렸던 그 복, 그 은혜, 그 감격은 어디로 갔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죄 사함의 기쁨을 누리던 그 마음은 어디로 갔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유를 맛보던 그 영혼은 어디로 갔습니까? 바울은 그들의 과거를 미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처음 사랑을 다시 깨우려는 것입니다.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이 말은 그들이 바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바울에게 눈과 관련된 질병이 있었을 가능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핵심은 질병의 종류가 아니라 사랑의 깊이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한때 바울을 위해 자기 눈이라도 내어줄 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울이 진리를 말한다는 이유로 원수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뼈아프게 들립니다. 참된 말은 언제나 달콤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위로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드러냅니다. 복음은 우리를 품지만 동시에 우리의 거짓 안전을 무너뜨립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절정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의가 철저히 실패했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참으로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위로받기 전에 먼저 발가벗겨집니다. 내가 붙들고 있던 자기 의, 자기 공로, 자기 자랑, 자기 열심, 자기 경건의 가면이 벗겨집니다. 하나님은 가면에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연출된 경건을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겉모습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입을 여시면 인간의 숨은 동기가 드러나고, 십자가의 빛이 비치면 마음속 어둠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사람은 때로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불편해합니다. 나를 칭찬해 주는 말은 쉽게 받지만, 나를 그리스도 앞에 세우는 말은 부담스러워합니다. 내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말은 좋아하지만, 내 죄를 회개하게 하는 말은 피하고 싶어 합니다. 내 계획을 축복해 주는 말은 환영하지만, 내 계획이 우상이 되었다고 말하는 말씀은 밀어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사랑은 언제나 진리를 동반합니다. 진리가 없는 사랑은 감상이고, 사랑이 없는 진리는 폭력입니다. 바울의 진리는 차가운 비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해산의 고통을 가진 사랑의 진리였습니다. 그가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한 것은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거짓 교사들의 열심을 폭로합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열심을 낸다”는 말은 헬라어로 ζηλόω, 젤로오라는 단어와 관련됩니다. 이 말은 뜨겁게 추구하고 사모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열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열심이 누구에게로 향하느냐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을 위해 열심을 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그들을 그리스도께 붙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복음의 자유 안으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영향력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 했습니다. 사람을 그리스도께 이끄는 열심은 거룩하지만, 사람을 자기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열심은 위험합니다.

오늘날에도 이 유혹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 않고 묶어 두는 일이 있습니다. 헌신의 이름으로 양심을 조종하고, 순종의 이름으로 두려움을 심고, 영성의 이름으로 사람을 사람에게 종속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데려갑니다. 참된 목회는 성도가 목회자에게 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깊이 뿌리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설교는 설교자의 이름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크게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사람을 교회의 체계 안에 가두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자유롭게 하여 사랑으로 섬기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거짓 열심은 언제나 배타성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에게만 와야 한다.” “우리 방식만이 옳다.” “이 표지를 가져야 완전하다.” 갈라디아 교회의 경우, 거짓 교사들은 할례와 율법 준수를 복음에 덧붙이려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 위에 인간의 표지를 얹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의 파괴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 무엇인가를 더해야 구원이 완전해진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보충되어야 할 구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구주입니다. 십자가는 시작만 해 주는 문이 아니라 구원의 전부를 품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조금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주의는 단지 옛날 유대주의자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마음에도 율법주의가 삽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무엇인가를 증명하려 합니다. 내가 이 정도 기도했으니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만큼 봉사했으니 교회가 나를 알아주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바르게 살았으니 하나님 앞에서 조금은 더 당당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반대로 실패하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죄를 지으면 기도할 자격이 없다고 느낍니다. 넘어지면 하나님이 나를 멀리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두 얼굴입니다. 잘할 때는 교만하게 만들고, 못할 때는 절망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길을 열어 줍니다. 잘했을 때도 십자가 없이는 설 수 없고, 실패했을 때도 십자가 때문에 다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붙듭니다.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를 세웁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바울은 열심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차가운 신앙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무감각한 영혼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열심의 방향입니다. 열심은 불과 같습니다. 불은 집을 따뜻하게 할 수도 있고, 집을 태울 수도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성령께 붙들린 열심은 사람을 살립니다. 그러나 자기 의와 두려움과 인간 숭배에 붙들린 열심은 사람을 태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나의 열심은 그리스도께로 흐르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증명하는 도구가 되었는가? 나의 봉사는 사랑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인정받고 싶은 갈망에서 나오는가? 나의 경건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은혜의 자리인가, 아니면 남보다 낫다는 은밀한 우월감의 옷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보다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인간은 겉으로 보이는 종교적 치수를 재려 하지만, 하나님은 영혼의 방향을 보십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기념비를 세우려 하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제단을 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그리스도께로 흐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생명의 강이 아니라 자기 의의 웅덩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순종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흘러나온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귀히 보십니다. 과부의 두 렙돈이 성전의 큰 금액보다 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양의 크기보다 사랑의 진실을 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울의 마음은 절정에 이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 4장 12절부터 20절까지의 심장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나의 자녀들”이라고 부릅니다. 헬라어로 τεκνία μου, 테크니아 무입니다. 단지 교인을 부르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낳은 자녀를 향한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은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해산하는 수고”라는 말은 ὠδίνω, 오디노입니다. 아이를 낳는 산고를 뜻합니다. 바울은 이미 한 번 그들을 복음으로 낳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상을 이루다”는 표현은 μορφόω, 모르포오와 관련되며, 속사람 안에 어떤 형체가 실제로 형성된다는 뜻을 가집니다. 바울의 목표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단지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바른 교리를 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단지 종교인이 되기 위해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으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 형성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리를 아는 사람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 교리가 우리의 눈물과 선택과 말과 관계와 용서와 인내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들은 사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은혜가 우리를 빚어야 합니다. 마치 태아가 어머니의 몸속에서 형체를 이루어 가듯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고, 욕망이 정화되고, 사랑의 방식이 달라지고, 고난을 해석하는 눈이 새로워지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십자가의 빛 아래에서 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세상에도 착한 사람은 있습니다. 성품이 부드러운 사람도 있고, 예의 바른 사람도 있고, 도덕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형상은 인간적 품성의 세련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 마음입니다. 억울함 속에서도 하나님께 맡길 줄 아는 마음입니다. 실패한 형제를 정죄하기보다 회복을 위해 우는 마음입니다. 나의 의를 드러내기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높이는 마음입니다. 세상의 성공을 절대화하지 않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생명의 주님을 붙드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결국 무엇의 형상을 닮아 가고 있습니까? 사람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닮아 갑니다. 돈을 절대화하면 돈의 얼굴을 닮습니다. 권력을 사랑하면 권력의 냉혹함을 닮습니다. 인정에 목마르면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얼굴이 변합니다. 분노를 오래 품으면 마음의 주름이 분노의 모양으로 굳어집니다. 두려움을 오래 붙들면 삶 전체가 위축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새겨집니다. 십자가를 오래 바라보면 용서의 사람이 됩니다. 부활을 오래 묵상하면 절망 속에서도 소망의 사람이 됩니다. 은혜를 깊이 마시면 다른 사람을 은혜로 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형성은 쉽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해산의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은 고통 없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영혼이 새로워지는 일에는 반드시 산고가 있습니다. 말씀 앞에서 내 죄가 드러나는 아픔이 있습니다. 오래 붙들고 있던 우상을 내려놓는 고통이 있습니다. 내 방식이 꺾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눈물이 있습니다.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랑하고 싶은 순간에 침묵해야 하는 죽음이 있습니다. 붙잡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떨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죽음으로 끝나는 고통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낳는 고통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빚으시는 은혜의 산고입니다.

한 오래된 실화가 있습니다. 어느 어머니가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매일 밤 같은 자리에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아들은 편지에서 점점 거칠어지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웠고, 나중에는 분노했고, 끝내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답장을 썼습니다. “아들아, 네 마음이 돌처럼 굳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돌을 주님 앞에 가져가거라. 주님은 돌 같은 마음도 살처럼 만드신다.” 전쟁이 끝난 뒤 아들은 돌아왔지만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수가 줄었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고, 가족의 사랑도 밀어냈습니다. 어머니는 그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그의 방문 앞에 따뜻한 물 한 잔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밤 아들이 문을 열고 물었습니다. “어머니, 아직도 저를 기다리십니까?” 어머니는 울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너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 너를 기다리셨다.” 그날 아들은 처음으로 무너져 울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품에서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저는 제가 너무 망가져서 돌아갈 곳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는 망가진 사람이 돌아갈 자리가 항상 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단순한 모성애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울의 마음을 조금 보여 줍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복음에서 흔들리고, 자신을 원수처럼 대하고, 거짓 교사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겼어도 그는 다시 해산의 고통을 감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아래에는 돌아올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망가진 영혼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식어 버린 처음 사랑도 다시 불붙이실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의 사슬에 묶인 양심도 다시 자유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에 중독된 영혼도 다시 하나님 앞에서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은 죽은 것 같은 마음에도 새 숨을 불어넣으시는 분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는 단지 신학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방향을 잃은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충분하심에서 멀어졌습니다. 십자가의 단순한 은혜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의 복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향해 외칩니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의 말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의 예배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의 상처와 기억과 인간관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의 노년과 병상과 죽음의 문턱까지도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성령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언젠가 자기 시간의 유한성을 마주합니다. 젊음은 지나가고, 건강은 흔들리며, 세상에서 붙들던 것들은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빠져나갑니다. 죽음은 누구도 비켜 갈 수 없는 엄숙한 표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마지막 절망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으로 기뻐해야 할 것은, 생명의 주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청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한 방울의 영원은 시간 아래 있는 모든 바다보다 무겁습니다. 그 영원의 문이 십자가에서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시간 속의 인간은 영원의 소망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 사람은 세상의 무너짐 속에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삽니다. 그는 자기 의가 무너져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의 인정이 사라져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아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난이 와도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이 고난 한가운데 함께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완전히 삼켜지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내가 지금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어조를 바꾸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절망의 말이 아니라 목자의 안타까움입니다. 글로 쓰는 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 곁에 있고 싶었습니다. 눈을 보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음성을 낮추어 위로도 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붙잡고 싶었습니다. 그는 갈라디아 교회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답답해했습니다. 참 사랑은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참 사랑은 흔들리는 영혼을 그냥 두지 못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파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다시 말합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도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복음의 기쁨을 잃어버릴 때, 주님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사람의 평가와 자기 의와 종교적 습관 속에 갇힐 때,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흔드십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하지만 속으로는 그리스도 없는 열심에 지쳐 갈 때, 주님은 다시 십자가 앞으로 부르십니다. “너의 복이 어디 있느냐? 네가 처음 은혜를 받았던 그 자리로 돌아오라. 너를 살린 것은 네 열심이 아니라 내 은혜다. 너를 붙든 것은 네 의지가 아니라 내 사랑이다. 너를 의롭다 한 것은 네 공로가 아니라 내 피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우리를 게으르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열심을 낳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두려움에서 나오지 않고 사랑에서 나옵니다.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은 자의 감사에서 나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거래가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에 대한 찬양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복음의 사람은 더 깊이 섬기지만 자기 공로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헌신하지만 사람을 조종하지 않습니다. 더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넘어지는 자를 멸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은혜 없이는 설 수 없는 죄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묻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 그러나 복음은 먼저 묻습니다. “너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신 일을 믿느냐?” 우리는 자주 “내가 얼마나 변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너는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변화는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열매를 맺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성령께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인간의 의지로 조립한 도덕의 장식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자라날 때 맺히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결단은 단순합니다. 그러나 깊습니다.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은혜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그리스도의 충분하심을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보다 큰 은혜, 우리의 실패보다 깊은 사랑, 우리의 죽음보다 강한 부활의 소망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주옵소서. 내 마음의 완고함을 깨뜨려 주옵소서. 내 열심을 정결하게 하옵소서. 내 신앙의 가면을 벗겨 주옵소서. 내 안에 십자가의 사랑이 흐르게 하옵소서. 내 가정과 말과 선택과 눈물 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성도 여러분, 주님은 아직 우리를 빚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해서 절망하지 마십시오. 도자기가 물레 위에서 흔들린다고 해서 토기장이가 버린 것은 아닙니다. 쇠가 불 속에 들어간다고 해서 대장장이가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가지치기를 당한다고 해서 농부가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빚으십니다. 때로는 말씀으로 우리를 깨뜨리시고, 때로는 고난으로 우리를 낮추시며, 때로는 기다림으로 우리의 욕망을 정화하시고, 때로는 눈물로 우리의 교만을 씻으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손길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죽고, 날마다 은혜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어제 들었던 복음을 오늘 다시 듣고, 오늘 붙든 은혜를 내일 다시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은 한 번 손에 쥐어 영원히 관리하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믿음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날마다 서는 관계입니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의 교만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실패로 내일의 소망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은 오늘도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끄십니다. 말씀은 오늘도 우리의 영혼을 깨웁니다. 십자가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합니다. “다 이루었다.” 부활은 오늘도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마음이 갈라디아 성도들처럼 처음 복음의 기쁨에서 멀어져 있습니까? 혹시 은혜보다 의무가 더 크게 느껴지고, 사랑보다 부담이 더 크게 느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자유가 아니라 짐처럼 느껴집니까? 그렇다면 오늘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에게 더 무거운 멍에를 얹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자유케 하러 오셨습니다. 율법의 정죄에서, 사람의 평가에서, 자기 증명의 피로에서, 과거의 수치에서,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케 하러 오셨습니다. 그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사랑의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유가 아니라, 이제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새 생명의 자유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누군가를 향해 바울과 같은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까? 자녀를 위해, 배우자를 위해, 교회를 위해, 오래 기도한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고 있습니까? 포기하지 마십시오. 참 사랑은 즉각적인 결과로만 측정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산고가 생명을 기다리듯이, 영혼을 위한 기도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여러분의 눈물이 땅에 떨어져 사라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그 눈물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벽에 부딪히는 것 같아도, 성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십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가장 완고한 마음도 녹일 수 있고, 부활의 능력은 가장 죽은 것 같은 영혼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해산의 고통을 겪기 전에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더 깊은 해산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반사하는 작은 거울일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새 생명으로 낳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기 위해 버림받은 자의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자유를 위해 종의 형체를 입으셨고, 우리의 생명을 위해 죽음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가벼운 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유는 값싼 감정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막연한 위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열린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그 십자가 앞에 섭니다. 거기서 우리의 가면은 벗겨지고, 우리의 자랑은 침묵하며, 우리의 상처는 주님의 상처 안에서 새 의미를 얻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율법적 행위는 우리에게 어떤 안전 보장도 줄 수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의는 설 자리를 잃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은혜가 우리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다. 너는 내 은혜로 산다. 너의 생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눈물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작아도 주님은 크십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식었어도 주님의 사랑은 식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열심이 흔들려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안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많은 부분이 있어도, 성령께서는 그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주님은 우리를 붙드실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이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지막 기도는 이것입니다. “주 예수여, 내 안에 오셔서 나를 다시 빚어 주옵소서. 내 신앙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옷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진실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내 열심이 나를 높이는 불이 아니라 이웃을 살리는 성령의 불이 되게 하옵소서. 내가 율법의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복음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은혜는 아직 마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피는 아직도 죄인을 부르고, 부활의 빛은 아직도 어둠 속의 영혼을 깨웁니다. 그러니 다시 주님께 돌아오십시오. 처음 사랑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는 복음의 깊은 안식으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손에 여러분 자신을 맡기십시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날까지 우리는 울며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다리며, 사랑으로 섬기고, 십자가를 붙들고 걸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서는 날, 우리의 모든 해산의 고통은 영광의 찬송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붙든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은혜였고, 우리를 변화시킨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으며, 우리의 마지막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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