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세워 가는 교회(에베소서 4:15–16).
주님께서 피로 사신 교회를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은 늘 두 갈래 길 앞에 서게 됩니다. 한 길은 교회를 “내가 기대한 만큼 만족을 주는 공동체”로 바라보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라게 하시고 세워 가시는 몸”으로 경외하며 바라보는 길입니다. 전자는 평가와 비교로 마음이 마르고, 후자는 감사와 회개로 마음이 다시 살아납니다. 오늘 본문은 그 두 번째 길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교회는 인간의 기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이며, 교회의 성장은 성도의 분주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자람이며, 교회의 힘은 사람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머리 되신 주님께 붙어 있는 연합에서 나오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랑으로 세워진다는 말은, 우리가 사랑이라는 미덕을 더해 장식을 붙인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숨 쉬고 움직이며 자라나는 방식 자체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참된 것을 하여”라는 표현은 단지 사실을 말하는 정직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인격이신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며, 복음의 빛 아래서 바르게 보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하는 삶의 전체를 포함합니다. 진리는 차갑게 사람을 베는 칼이 아니라, 죄와 거짓을 끊어 내되 상한 심령을 싸매는 의사의 손길처럼 다가옵니다. 반대로 사랑은 진리를 희미하게 만드는 안개가 아닙니다. 사랑은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 진리를 상대의 영혼에 담아 건네는 방식이며, 진리가 목표로 하는 회복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마음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자리에서 무너집니다.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을 때 교회는 얼음처럼 차가운 정통의 박물관이 되기 쉽고, 사랑만 있고 진리가 없을 때 교회는 달콤한 위로로 죄를 재워 버리는 감정의 모임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말합니다. 교회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며 자랍니다. 사랑과 진리는 서로를 상쇄하는 두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완성하는 한 생명의 두 맥박입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의 성장을 숫자와 속도로 착각합니다. 늘어나는 좌석, 확장되는 프로그램, 커지는 조직, 더 화려해지는 시스템이 곧 성숙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장은 무엇입니까. “그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장은 건물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붙어 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숙은 세련된 운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이 성도들의 삶에 더 선명히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그에게까지”라는 말은 참으로 무섭고도 아름답습니다. 예배만, 봉사만, 교리만, 지식만이 아니라 범사에, 곧 말과 생각과 선택과 가정과 직장과 관계와 돈과 시간과 눈물과 기쁨의 자리마다 그리스도께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성장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 성장을 개인의 단독 등반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곧이어 그는 몸의 비밀을 보여 줍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교회는 머리만 있고 지체가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또 지체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집합체도 아닙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이 내려오고, 그 생명이 각 지체에 흐르며, 각 지체는 자기 분량대로 역사하여 온 몸을 자라게 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은혜의 질서가 있습니다. 근원은 그리스도이시고, 통로는 각 마디의 연결이며, 열매는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지는 자람입니다. 이 질서가 깨지면 교회는 힘을 잃습니다. 그리스도를 근원으로 붙들지 않으면 우리는 종교적 열심만 남고, 연결과 결합을 소홀히 하면 우리는 각자도생의 신앙으로 말라가며, 사랑의 열매가 없으면 우리의 모든 수고는 소음이 됩니다.
“연결되고 결합”된다는 말은 단지 친목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연합, 곧 같은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아 같은 은혜 아래 서고 같은 소망을 바라보는 언약적 결속을 뜻합니다. 교회는 취향 공동체가 아닙니다. 비슷한 성격끼리 모여 편안함을 나누는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원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십자가 아래에서 함께 무릎 꿇어,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가족이 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랑으로 세워진다는 것은, 사랑스러운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랑하기 쉬운 방식으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어 실제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의 파도보다 깊고, 분위기의 온도보다 견고합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생명의 성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의 심장으로 들어갑니다. 교회의 자람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성도는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했고, 스스로를 성화시키는 주인도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힘써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순종의 뿌리는 언제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가 사랑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기에 우리가 역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머리로서 공급하시기에 지체가 살아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랑으로 세워지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 대단해져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실제로 통치하기 시작해서”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게으르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겸손은 사랑을 낳습니다. 내가 은혜로 산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지 못합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비교로 자신을 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을 깎아내려 자기 의를 높이지 않습니다. 은혜는 교회를 향한 시선을 바꿉니다. “왜 저 사람은 저럴까”라는 판단에서 “주님, 저에게도 은혜가 필요합니다”라는 기도로 옮겨 줍니다. 사랑은 바로 그 자리에서 태어납니다.
그렇다면 사랑으로 세워 가는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입니까. 사도는 추상적인 이상을 말하지 않고, 몸의 작동 원리를 말합니다.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마디란 무엇입니까. 단순히 조직의 연결선이 아니라, 은혜의 흐름이 오가는 접촉점입니다. 예배 후의 짧은 인사 한 마디, 기도 제목을 진심으로 묻는 눈빛, 넘어졌을 때 정죄 대신 손을 내미는 태도, 진리를 말하되 상대의 마음을 고려하는 언어, 조용히 찾아가 함께 울어 주는 동행, 말씀 앞에서 자신을 먼저 낮추는 모범, 누군가의 수치를 덮어 주되 죄는 회개로 이끄는 지혜, 상처를 이용하지 않고 보호해 주는 신실함. 이런 것들이 다 마디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디를 통해 도움을 받을 때, 온 몸은 연결되고 결합되어 자라납니다. 교회는 ‘혼자 잘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믿음을 돕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실제적인 도전을 받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입니까. 혹 나는 나도 모르게 “부담”이 되는 사람이 아닙니까. 교회를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내 말과 태도가 누군가의 믿음을 꺾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리를 말한다면서 사실은 내 자존심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한다면서 사실은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을 포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는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거룩한 척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무대가 아니라, 우리의 죄성이 얼마나 깊은지 드러나게 하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게 하는 은혜의 학교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에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상처를 받는 자리에서도 다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아가려는 결단을 뜻합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가 늘 내 마음에 들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화를 드리겠습니다. 어느 겨울, 산길을 걷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눈이 내린 뒤라 길은 미끄럽고 바람은 차가웠습니다. 그는 혼자 걷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느리게 걷는 사람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말에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내 페이스대로 갈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그는 넘어져 발목을 삐었습니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혼자 걷는 게 편한 게 아니라, 혼자 넘어지면 끝나는 것이구나.” 그때 뒤에서 오던 동행이 다가와 조용히 그의 짐을 나눠 들고,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발목을 감싸 주며, 천천히 함께 걸어 내려갔습니다. 그 사람은 그날 산에서 배운 것이 있었습니다. 길을 끝까지 걷게 하는 것은 내 체력만이 아니라, 함께 걷는 이의 사랑이라는 것. 교회가 그렇습니다. 신앙의 길은 늘 미끄럽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넘어집니다. 그때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넘어진 자를 평가하는 혀”가 아니라 “넘어진 자를 일으키는 손”입니다. 그 손은 결코 진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의 목적, 곧 회복과 생명을 위해 사랑으로 붙듭니다. 그 손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자랍니다. 그 손이 그리스도의 손을 닮아갈수록 교회는 빛납니다.
사도는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비교의 독을 끊어 내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자주 분량을 잊고, 남의 역할을 탐내며, 내 역할을 하찮게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분량을 주셨습니다. 어떤 이는 앞에서 가르치는 은사가 있고, 어떤 이는 뒤에서 섬기는 은사가 있으며, 어떤 이는 조용히 중보하는 은사가 있고, 어떤 이는 위로로 마음을 살리는 은사가 있습니다. 분량이 다르다고 가치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몸에서 작은 혈관이 없으면 큰 장기도 살지 못합니다. 교회에서 눈에 띄지 않는 섬김이 없으면, 눈에 띄는 사역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세워 가는 교회는, ‘크게 하는 사람’이 주인공인 교회가 아니라 ‘자기 분량을 기쁨으로 드리는 사람’이 많은 교회입니다. 그때 교회는 놀랍게도 “스스로” 세워집니다. 물론 실제 주체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공급이 각 지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흐르며, 억지로 떠밀지 않아도, 경쟁으로 몰아세우지 않아도, 사랑 안에서 몸이 자라납니다.
여기서 “스스로 세우느니라”라는 말은 인간 중심의 자기계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의 유기적 성장입니다. 씨앗이 땅에 심기면, 비와 햇빛과 영양분을 받아 자라되, 그 자람은 생명 자체의 질서로 일어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말씀과 성례와 기도, 권면과 훈련, 섬김과 나눔이 은혜의 통로가 될 때, 교회는 외부에서 억지로 당겨 올리는 건축이 아니라 내부에서 살아 움직이며 자라나는 성장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성장의 기후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같은 활동도 마르고, 사랑이 있으면 같은 수고도 향기롭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봉사도 거래가 되고, 사랑이 있으면 봉사도 예배가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권면도 폭력이 되고, 사랑이 있으면 권면도 구원이 됩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디서 옵니까. 인간의 의지에서 오지 않습니다. 사랑은 십자가에서 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 주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며,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교회는 사랑을 “생산”하는 공장이 아니라, 사랑을 “받아 흘려보내는”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랑으로 세워진다는 것은 결국 복음이 복음답게 작동하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 은혜로 살며,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하고, 붙들린 사람이 붙들어 주며, 오래 참으심을 받은 사람이 오래 참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개혁주의가 말하는 은혜의 실제입니다. 우리는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새로운 행위를 낳습니다. 그 행위의 핵심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이며, 성령의 역사로 맺히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사랑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늘 회개의 자리로 부름받습니다. 사랑으로 세워 가는 교회는 “문제가 없는 교회”가 아니라 “문제를 복음으로 다루는 교회”입니다. 갈등이 생길 때, 사람을 악마로 만들지 않고 내 마음의 죄를 먼저 보며, 진리 앞에 서되 상대의 영혼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용서를 값싸게 말하지 않되 복수의 불을 꺼뜨리며, 시간을 들여 화해를 추구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단지 성격이 온유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 교회를 사랑으로 세워 주옵소서. 사랑할 수 없는 마음을 사랑하게 하시고,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진리를 지키되 사람을 살리는 지혜를 주옵소서.”
또한 사랑으로 세워 가는 교회는 진리를 “그리스도께 붙어” 지키는 교회입니다. 진리는 내 편의 무기가 아닙니다. 진리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말할 때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마음을 함께 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누구보다 선명히 말씀하셨으나,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습니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으나, 죄인을 함부로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교회가 진리를 붙든다는 것은 교리적 슬로건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진리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 성품의 중심이 사랑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교회 생활이 마음을 지치게 하십니까. 사람 때문에, 말 때문에, 기대 때문에, 오해 때문에 상처가 있으십니까.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아뢰십시오.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의 전시장이 아니라 죄인들이 은혜로 치료받는 병원입니다. 병원에는 소독약 냄새도 나고, 아픈 소리도 나고, 때로는 서툰 손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병원의 존재 이유는 건강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낫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나를 만족시켜 주는가’보다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 가운데서 나를 사랑으로 빚고 계시는가’를 더 깊이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이 몸의 한 지체로서, 누군가의 믿음이 자라도록 사랑으로 돕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 질문이 바뀌면 교회가 달라집니다. 내가 소비자가 아니라 지체라는 자각이 생기면, 교회는 사랑으로 세워집니다.
사랑으로 세워 가는 교회는 또한 세상 앞에서 복음의 실재를 증언합니다. 세상은 말의 정교함보다 삶의 진실을 봅니다. 서로 물고 뜯는 종교 공동체를 보며 세상은 냉소합니다. 그러나 서로의 짐을 지고, 눈물을 닦아 주고, 죄를 회개로 이끌며, 약한 자를 보호하고, 낙심한 자를 붙들고, 어두운 길을 함께 걸어주는 공동체를 볼 때, 세상은 설명할 수 없는 빛을 봅니다. 그 빛은 우리의 인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임재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몸의 사랑은 머리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길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께 붙으십시오. 교회의 모든 문제를 사람 탓으로만 돌리지 말고,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붙으십시오. 말씀과 기도로, 성례의 은혜로, 회개와 믿음으로 주님께 붙으십시오. 그리고 지체로서 연결되십시오. 혼자 서려 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개인적이지만 결코 개인주의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나’로만 구원하지 않으시고 ‘우리’로 자라게 하십니다. 연결은 귀찮음을 감수하는 사랑이며, 결합은 상처를 감내하는 인내이며, 도움을 주고받는 마디가 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겸손입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분량대로 역사하십시오. 비교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맡기신 자리에서 충성하십시오. 큰 일을 못 한다고 낙심하지 마시고, 작은 일을 한다고 교만하지 마십시오. 지체의 분량은 은혜의 배치입니다. 그 은혜를 따라 움직일 때, 온 몸이 자랍니다.
혹 오늘 마음에 이런 탄식이 있으실지 모릅니다. “목사님, 저는 사랑이 너무 부족합니다. 저는 아직도 쉽게 화가 나고, 쉽게 실망하고, 쉽게 판단합니다.” 성도님, 바로 그 고백이 은혜의 시작입니다. 사랑은 ‘나는 사랑이 많다’는 자만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사랑은 ‘나는 사랑이 없다’는 겸손 위에서 자랍니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받으십시오. 십자가 앞에 오래 머무르십시오. 그리스도의 용서가 내게 얼마나 값비싼지 알게 될 때, 나는 다른 사람을 값싸게 정죄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이 나를 살렸음을 알게 될 때, 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조금 더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품으셨음을 알게 될 때, 나는 내 옆의 연약한 지체를 품는 길을 배웁니다. 그 길이 교회를 사랑으로 세우는 길입니다.
마침내 교회는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질 것입니다. 이것은 낙관적 슬로건이 아니라,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약속입니다. 교회가 흔들릴 때도, 지체가 아플 때도, 때로는 상처가 깊을 때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신부를 끝까지 씻기시고 아름답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깊이 회개하며, 더 진실하게 사랑하며, 더 겸손히 섬기며, 더 견고히 진리를 붙들며, 더 뜨겁게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사랑으로 교회를 세워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 교회가, 우리 가정이, 우리 관계가, 우리 언어가, 우리 마음이,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붙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며 자라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자람이,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향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