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 (에베소서 1:15-23)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 기도합니다. 몸은 쇠사슬에 묶여 있으나 그의 영혼은 하늘 보좌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는 갇힌 자요, 제국의 법 아래 놓인 죄수요, 내일을 보장받지 못한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는 자유인입니다. 로마의 철창도 그의 기도를 가두지 못하고, 제국의 명령도 그의 찬송을 침묵시키지 못하며, 인간의 권세도 그가 바라보는 부활의 주님을 흔들지 못합니다. 세상은 바울을 감옥에 두었으나, 하나님은 바울을 그리스도 안에 두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사람은 장소에 갇힐 수 있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갇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시간 속에서 늙고, 흔들리고, 쇠약해지고, 마침내 죽음 앞에 서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은 시간의 벽을 넘어 영원의 빛을 받아들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화려한 도시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상업과 종교와 권력과 욕망이 뒤섞인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신전의 웅장함에 마음을 빼앗겼고, 손으로 만든 우상 앞에서 두려움과 욕망을 동시에 바쳤으며, 눈에 보이는 번영을 생명의 증거처럼 붙들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도시 한복판에 세워진 교회를 향해 말합니다. 너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더 큰 신전도 아니고, 더 많은 재물도 아니고, 더 넓은 영향력도 아니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가시적이고 시간적인 것만을 붙잡다가 불가시적이고 영원한 것을 놓칩니다. 손에 잡히는 것만 현실이라 여기다가, 정작 모든 현실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자신의 힘으로 세운 기념비를 영원이라 착각하다가, 무너지는 흙 위에 자기 이름을 새기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성은 모든 시간성의 원천입니다. 인간의 시간은 하나님 앞에서 빌려온 호흡이요, 인간의 힘은 하나님의 손바닥 위에 잠시 놓인 그림자이며, 인간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비추지 못하면 결국 먼지로 돌아갈 찬란한 허무일 뿐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기서 “알게 하다”는 단순한 정보의 습득이 아닙니다. 성경의 앎은 머릿속에 저장된 종교 지식이 아니라,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깨어나는 사건입니다. 신약의 헬라어 ἐπίγνωσις(에피그노시스)는 깊고 분명한 인격적 앎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존재가 새롭게 해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내가 누구인지 보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죄가 죄로 보이고, 은혜가 은혜로 보이며, 십자가가 더 이상 종교적 장식이 아니라 나를 살린 하나님의 심장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세상의 무게가 달라지고, 고난의 색이 달라지고, 죽음의 얼굴까지 달라집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이미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있음을 듣고 감사합니다. 그는 그들의 부족함부터 들추지 않습니다.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듣고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참된 목회자의 눈은 부족함을 보지 못하는 눈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족함을 알면서도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눈입니다. 성도 안에 있는 작은 믿음의 불씨를 보고 감사할 줄 아는 눈입니다. 아직 흔들리고, 아직 미숙하고, 아직 세상의 바람에 자주 넘어지지만, 그 영혼 안에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신 새 창조의 증거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그 마음에 부어 주신 하늘의 흔적입니다. 인간의 자연적 마음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굽어 있습니다. 자기 이익, 자기 안전, 자기 명예, 자기 상처, 자기 욕망의 둘레를 빙빙 돕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마음이 다른 성도를 향해 열리고, 연약한 이를 위해 눈물 흘리며, 미운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자기 유익의 장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도덕적 노력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움직이는 표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다고 해서 더 이상 기도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 있기 때문에 더 깊은 앎이 필요하고, 사랑이 있기 때문에 더 밝은 눈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위험한 것은 믿음이 전혀 없을 때만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더 알기를 멈출 때, 사랑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날마다 새로워지지 않을 때, 교회는 조용히 굳어집니다. 신앙은 손에 넣은 물건이 아닙니다. 신앙은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오늘 다시 듣고, 오늘 다시 엎드리고, 오늘 다시 붙드는 은혜의 생명입니다. 어제 들은 말씀을 오늘 새롭게 들어야 하고, 오늘 받은 은혜를 내일 다시 구해야 합니다. 믿음은 결코 인간의 소유물이 되어 안전하게 잠기지 않습니다. 믿음은 날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세워지는 영혼의 방향입니다.
바울은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기도합니다. 마음에도 눈이 있습니다. 몸의 눈은 사물을 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은 의미를 봅니다. 몸의 눈은 사건을 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은 섭리를 봅니다. 몸의 눈은 십자가에 달린 한 사람의 피 흘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열릴 때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입 맞추는 구원의 중심을 봅니다. 몸의 눈은 무덤을 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열릴 때 우리는 빈 무덤에서 새 창조의 아침을 봅니다. 몸의 눈은 늙어가는 육체를 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열릴 때 우리는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은혜를 봅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모든 것이 왜곡됩니다. 은혜도 부담으로 보이고, 말씀도 무거운 명령으로 보이며, 교회도 사람들의 모임으로만 보이고, 고난도 버림받음의 증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같은 현실 속에서도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눈물은 끝이 아니라 기도의 언어가 되고, 실패는 폐허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시 세우시는 자리로 변하며,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라 영혼이 깊어지는 시간이 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없는 현실을 상상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현실을 보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영혼의 어둠 속에 하나님의 빛을 들이시고, 우리가 지나치던 은혜를 은혜로 알아보게 하시며, 우리가 붙잡고 있던 헛된 안전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인간은 자기 눈으로 보는 것을 절대화하려 합니다. 돈이 보이면 돈이 현실이라 말하고, 병이 보이면 병이 전부라 말하고, 죽음이 보이면 죽음이 끝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한 방울의 영원은 시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물들의 망망대해보다 더 무겁습니다. 한 줄기 하나님의 빛은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권세의 탑보다 더 실재합니다. 한 번의 하나님의 부르심은 세상의 모든 박수보다 더 깊은 운명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들이 세상의 눈으로 자기 인생을 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고, 하나님의 기업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기를 구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첫 번째 빛은 “그의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 의미 없는 존재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교회에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교적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들입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때가 차매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하시고, 성령으로 인치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부르심은 인간의 결심보다 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었다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붙드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돌아왔다고 말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선택했다고 말하기 전에, 은혜가 우리의 길목에 먼저 와 있었습니다.
이 부르심은 단지 구원받은 뒤 천국에 가는 약속만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은 참되고 복된 소망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의 소망은 오늘 우리의 존재 전체를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책감의 감옥에서 불러내십니다. 과거의 상처가 나의 이름이 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실패가 나의 최종 판결이 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세상이 붙여 준 낙인이 나의 정체성이 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라 부르십니다. 사랑받는 자라 부르십니다. 거룩한 백성이라 부르십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 부르십니다. 교회의 지체라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을 알 때 성도는 더 이상 세상의 평가에 자기 영혼을 저당 잡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칭찬에 들뜨지 않고, 사람의 비난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이름이 세상이 나에게 붙이는 모든 이름보다 깊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늘 자기 존재의 근거를 찾습니다. 어떤 이는 성취에서 찾고, 어떤 이는 가족에서 찾고, 어떤 이는 재산에서 찾고, 어떤 이는 젊음과 건강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흔들립니다. 성취는 더 큰 성취 앞에서 초라해지고, 재산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으며, 젊음은 시간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건강은 우리 뜻대로 붙잡히지 않습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의 시간표보다 먼저 와 있는 신적인 정지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계획을 묻지 않고, 우리의 자격을 검토하지 않으며, 우리의 소유 앞에서 고개 숙이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이 만나는 것은 단순한 생물학적 끝이 아닙니다. 죽음 너머에서 인간은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참으로 두려운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 가운데서도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두려움으로만 우리를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복음은 더 깊은 위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지나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죽음은 영원한 단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시간 속으로 받아들이시는 문이 됩니다. 이 은혜로운 초청 앞에서 영혼은 떨립니다. 두려움으로만 떨리는 것이 아니라, 감격으로 떨립니다. “내가 너를 불렀다. 너는 내 것이다.” 이 음성은 시간의 폭풍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두 번째 빛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업을 받는다는 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자기 기업으로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성도를 대단하게 보지 않습니다. 교회는 때로 초라해 보입니다. 성도는 세상 권력의 중심에 있지 않고, 세상의 방식으로 보면 연약하고 부족하고 보잘것없어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 안에서 영광의 풍성함을 보십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산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묻은 사람은 세상의 시장 가격으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값을 치른 영혼은 인간의 기준으로 계산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너무 낮게 보거나 잘못 낮게 봅니다. 겸손이 아니라 절망으로 자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쓸모없다. 나는 실패했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도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를 작게 보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우리를 사셨다면, 우리 안에는 세상이 보지 못하는 영광이 있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시작된 영광, 아직 눈물 속에 감추어져 있지만 반드시 드러날 영광, 아직 질그릇 같은 몸에 담겨 있지만 그리스도의 날에 찬란히 나타날 영광이 있습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가 헛되지 않음을 증언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상처 없는 사람들의 전시장이 아니라, 상처 입은 자들이 십자가 아래서 치유되고 다시 세워지는 은혜의 공동체입니다.
세상은 강한 자를 기업으로 삼습니다. 돈이 되는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 이름이 있는 사람, 유용한 사람을 귀히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약한 자를 품으십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화려한 열매만 보지만, 하나님은 땅속에서 조용히 자라는 뿌리를 보십니다. 사람은 오늘의 모습만 보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마지막 모습을 보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을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죄를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는 십자가 앞에서 가장 정직하게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가 크다고 해서 은혜를 작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실패가 많다고 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무효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이 깊어도 그리스도의 피는 더 깊습니다. 우리의 어둠이 짙어도 부활의 빛은 더 강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세 번째 빛은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입니다. 여기서 능력은 인간의 자기 계발적 힘이 아닙니다. 더 강해지고, 더 성공하고, 더 높아지고, 더 인정받는 세속적 힘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능력을 설명하면서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 오른편에 앉히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의지하는 능력은 막연한 긍정의 힘이 아닙니다. 성도가 의지하는 능력은 무덤을 여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죽음을 통과한 능력입니다.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깨뜨린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낮아짐을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신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능력을 오해합니다. 능력은 내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했더니 병이 즉시 낫고, 어려움이 사라지고, 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을 능력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병을 고치실 수 있고, 길을 여실 수 있으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능력은 그보다 더 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때로 상황을 바꾸기 전에 우리를 바꾸십니다. 고난을 제거하시기 전에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하십니다. 감옥 문을 열기 전에 감옥 안에서도 찬송하게 하십니다. 죽음의 그림자를 없애기 전에 죽음의 그림자 골짜기에서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부활 능력입니다. 부활 능력은 무덤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활 능력은 무덤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더 크시다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예수님 개인에게 일어난 기적이 아닙니다. 부활은 새 창조의 첫 열매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최종 판결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은 예수를 버림받은 자로 판결했습니다. 종교 권력은 그를 신성모독자로 보았고, 정치 권력은 그를 처형할 수 있는 죄수로 취급했으며, 군중은 그를 실패자로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활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옳다. 그가 내 아들이다. 그의 십자가가 구원이다. 그의 피가 새 언약이다. 그의 죽음이 너희의 생명이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찍으신 영원한 인장입니다. 부활 가운데서 성령의 새 세계는 육의 옛 세계와 접촉합니다. 옛 아담의 세계, 죄와 죽음과 두려움과 자기 의의 세계 한가운데,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새 세계가 침투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아직 이 땅을 살지만 이미 새 창조의 시민입니다. 아직 눈물을 흘리지만 이미 위로의 약속 안에 있습니다. 아직 싸우지만 이미 승리자의 편에 서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단지 종교적 위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주적 선언입니다. 세상의 권력들은 스스로 절대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제국은 영원할 것처럼 행세하고, 돈은 모든 문을 여는 열쇠처럼 군림하며, 죽음은 마지막 법처럼 인간을 위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십니다. 병의 이름 위에, 실패의 이름 위에, 죄책의 이름 위에, 우울의 이름 위에, 가난의 이름 위에, 권력의 이름 위에, 죽음의 이름 위에 계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이름보다 예수의 이름이 높습니다. 우리가 붙잡고 싶어 하는 모든 이름보다 예수의 이름이 귀합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모든 이름보다 예수의 이름이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인생은 세상의 보이는 권세 앞에서 최종적으로 굴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권세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질서를 존중하고, 책임 있게 살며, 세상 속에서 정직하게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어떤 세상 권력에도 예배하지 않습니다. 돈을 사용하지만 돈을 섬기지 않습니다. 직분을 감당하지만 직분을 우상화하지 않습니다. 건강을 감사하지만 건강을 구원자로 삼지 않습니다. 가족을 사랑하지만 가족에게 하나님 자리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교회를 섬기지만 교회 활동 자체를 의로 착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있어 겉모습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면에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종교적 연출을 보시고 감탄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는 연출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주님이십니다. 주님 앞에서 모든 가면은 벗겨지고, 모든 자기 의는 침묵하며, 모든 인간의 치적은 십자가의 빛 아래서 제 자리를 찾습니다.
율법적 행위는 십자가 앞에서 인간에게 최종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공로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제가 이만큼 기도했습니다. 이만큼 봉사했습니다. 이만큼 참았습니다. 이만큼 드렸습니다.” 물론 기도와 봉사와 헌신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순간, 귀한 것도 위험해집니다. 은혜의 열매가 자기 의의 재료가 되는 순간, 신앙은 다시 옛 아담의 성취욕으로 돌아갑니다. 율법은 우리를 살리는 사다리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깊은 심연 앞에 서 있는지를 보여 주는 거울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을 보여 줍니다. 그 심연을 넘어서는 발걸음은 인간이 만들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내디디신 발걸음만이 우리를 건너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자리로 내려오셨고, 우리의 죄와 죽음을 짊어지셨고, 우리가 설 수 없는 곳에 서셨으며, 우리가 건널 수 없는 간격을 십자가로 건너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자랑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손을 펴는 가난입니다. 믿음은 자기 의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회개입니다. 믿음은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는 영혼의 방향 전환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가능성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으로 옮겨지는 사건입니다. 심리적으로 보면 믿음은 때로 빈 공중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계산이 끝나지 않았는데 순종해야 하고, 길이 다 보이지 않는데 따라가야 하며, 손에 쥔 보장이 없는데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실제로 빈 공중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혈과 육이 이것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실 때만 우리는 그 손을 압니다.
한 시각 장애 찬송시인이 이런 고백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했지만, 마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보지 못하는 삶이 얼마나 안타깝냐고 물었지만, 그는 언젠가 천국에서 처음으로 보게 될 얼굴이 자기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일 것을 생각하면 감사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세상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결핍이라 말했지만, 그는 그 결핍의 자리에서 더 깊은 빛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의 신비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다 보면서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육신의 눈은 어두워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은 환경의 밝기가 아니라 영혼의 눈이 어디를 향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감옥도 기도의 골방이 되고, 병상도 은혜의 제단이 되며, 노년의 쇠약함도 영원을 배우는 학교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문제 해결도 필요합니다. 병든 몸이 낫기를 기도해야 하고, 어려운 가정이 회복되기를 구해야 하며, 막힌 길이 열리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 제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십시오. 제가 제 인생을 주님의 빛 안에서 보게 해 주십시오. 제가 제 고난을 십자가의 빛 안에서 해석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교회를 사람의 모임으로만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게 해 주십시오. 제가 죽음을 끝으로 보지 않고 부활의 주님 앞에서 다시 보게 해 주십시오.”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복을 받아도 복의 주인을 잊고, 일이 잘되어도 자기 영광에 취하며,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을 자기 삶의 장식품처럼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낚아채 자기 욕망의 치수에 맞추려 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성공의 도장으로 바꾸려 하며, 영원의 빛을 시간의 유리병 속에 가두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두어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호출되는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바울은 마침내 교회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교회는 인간이 만든 종교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은 머리와 분리되어 살 수 없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붙들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활동과 조직과 프로그램이 있어도 생명을 잃습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연결될 때만 교회는 삽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인을 품고,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으로 세상 속에 서는 교회가 참 교회입니다.
교회는 완성된 천국 그 자체는 아니지만,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표지입니다. 교회는 시간 속에 세워진 영원의 전초기지입니다. 교회는 약한 사람들의 모임 같지만, 부활의 주님께 연결된 몸입니다. 교회는 때로 상처를 주고받고, 부족함을 드러내며, 세상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면서도 교회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완전함 위에 서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위에 서 있습니다. 교회의 소망은 교회의 능력에 있지 않고,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교회를 향해 묻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세상만큼 돈이 있느냐, 세상만큼 힘이 있느냐, 세상만큼 매혹적인 언어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교회는 겸손히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온 자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하신 주님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인치심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부르심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안에 두신 영광의 풍성함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을 이기신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이 보물을 잃으면 교회는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아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이 보물을 붙들면 교회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도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이 다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진짜 생명, 우리의 최종 영광, 우리의 완성될 모습은 아직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눈물 속에 감추어져 있고, 연약함 속에 감추어져 있으며, 실패와 회개의 반복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눈물 속에서도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흔들리는 마음으로라도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믿음이 작아 보일 때에도 그 작은 믿음을 들고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 오늘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히시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화려한 불빛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자기 의의 낡은 옷을 붙들고 십자가의 의를 놓치지 않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고난의 밤이 길다고 해서 부활의 아침을 의심하지 않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해도 생명의 주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그 골짜기에 들어가셨고, 우리를 위해 그 길을 통과하셨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기억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영광의 아버지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내 마음의 눈을 밝히소서. 부르심의 소망을 보게 하소서. 성도 안에 있는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보게 하소서.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 하소서. 그 능력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능력임을 믿게 하소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소서.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께 붙어 살게 하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지친 이름을 부르시고, 죄로 얼룩진 이름을 부르시고, 세상에 눌려 작아진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은 정죄의 소리가 아니라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의 음성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 내가 너를 위해 살아났다. 내가 너를 내 몸의 지체로 삼았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이 음성을 듣는 자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눈물이 있어도 일어섭니다. 상처가 있어도 일어섭니다. 나이가 들어 몸이 약해져도 일어섭니다. 실패의 기억이 따라와도 일어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일으키는 힘은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다시 십자가 앞에 섭시다. 우리의 자랑을 내려놓고, 우리의 두려움을 내려놓고, 우리의 낡은 자기 의를 내려놓고, 그리스도만 붙듭시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폭로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죄보다 더 큰 사랑을 선포합니다. 부활은 우리의 죽음을 직면하게 하지만 동시에 죽음보다 더 큰 생명을 보여 줍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자기 몸 된 교회를 붙드시고, 약한 지체를 세우시며,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가는 성도를 부르십니다. 그분의 부르심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분의 기업 안에 영광이 있습니다. 그분의 능력 안에 새 생명이 있습니다.
눈물 속에서도 다시 믿음으로 일어나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마음의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세상이 모든 것을 끝이라고 말할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아직 끝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시간은 저물어도 하나님의 은혜는 저물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은 쇠하여도 그리스도의 생명은 쇠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길은 막혀도 하나님의 부르심은 막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 모든 시간이 영원의 빛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모든 눈물이 하나님의 손에 닦이며,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만물 위에 충만한 영광으로 드러나실 때,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붙든 것이 헛되지 않았고, 우리가 흘린 눈물이 버려지지 않았고, 우리가 기다린 소망이 부끄럽지 않았음을. 그날까지 교회는 기도합니다. 그날까지 성도는 믿습니다. 그날까지 우리는 십자가를 붙들고 부활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머리이시며 만물 위에 충만하신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