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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 불꽃을 지키라 (딤전 4:6–16)

작성자예수님사랑|작성시간26.06.15|조회수29 목록 댓글 0

경건의 불꽃을 지키라 (딤전 4:6–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때때로 우리의 귓가에 부드러운 위로처럼 들려오지만, 또 때때로 우리의 영혼 한가운데를 가르는 거룩한 칼날처럼 다가옵니다. 디모데전서 4장 6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은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주어진 사도 바울의 권면이지만, 그 권면은 단지 한 사람의 목회자에게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모두의 영혼 앞에 놓인 거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는지, 무엇으로 훈련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바라보고 견디어야 하는지, 그리고 마지막까지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여기서 “좋은 일꾼”이라는 말은 단순히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바쁘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 길러지고, 복음에 의해 다듬어지고, 그리스도의 손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좋은 일꾼입니다. 세상은 성과를 보지만 하나님은 뿌리를 보십니다. 세상은 사람의 외형과 영향력과 박수 소리를 보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은밀한 식탁을 보십니다. 그 영혼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 무엇을 묵상하고 있는지, 무엇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사랑하는지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인간은 참 이상합니다. 보이는 것 앞에서는 쉽게 떨면서도 보이지 않는 영원 앞에서는 둔감합니다. 시간 안에 피었다가 사라질 것들은 목숨처럼 붙잡으면서, 시간을 창조하시고 시간을 심판하시며 시간을 영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자주 무심합니다. 인간은 자기 이름을 남기기 위해 보이지 않는 기념비를 세우고, 자기 업적에 날개를 달아 오래 날게 하려 하지만, 정작 자기 영혼이 영원 앞에서 얼마나 가난한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붙드는 많은 것들은 결국 시간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갑니다. 젊음도 빠져나가고, 건강도 빠져나가고, 명예도 빠져나가고, 사람들의 인정도 빠져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복음은 낡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오래된 사건이면서 동시에 오늘 우리를 향해 열리는 하나님의 현재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지 고대의 미신적 이야기들을 멀리하라는 뜻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가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신화, 더 많이 가지면 더 깊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신화, 사람에게 인정받으면 영혼의 빈자리가 채워질 수 있다는 신화, 종교적 열심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대신할 수 있다는 신화, 겉모습의 경건으로 하나님 앞의 진실을 감출 수 있다는 신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면에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겉모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연출된 경건을 보시지 않고, 찢어진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무대 위의 종교성을 보시지 않고, 골방의 눈물을 보십니다.

사도는 이어서 말합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여기서 경건은 신앙의 장식품이 아닙니다. 경건은 주일에만 잠시 걸치는 옷이 아닙니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전 존재적 자세입니다. 헬라어로 경건은 εὐσέβεια(유세베이아)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종교적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보는 삶의 방향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되 사랑 안에서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되 거룩함 안에서 사랑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되 방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되 절망하지 않는 삶입니다. 경건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중심을 빼앗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경건은 내 욕망이 왕좌에서 내려오고, 그리스도께서 내 영혼의 보좌에 앉으시는 사건입니다.

육체의 연단도 유익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몸을 돌보는 일, 삶을 성실히 가꾸는 일, 질서를 세우는 일은 모두 귀합니다. 그러나 육체의 연단은 잠시의 유익을 줍니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경건에는 “금생과 내생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놀라운 균형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이 땅에서 무책임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오늘을 견디게 합니다. 복음은 밥을 먹는 자리에도, 눈물을 삼키는 밤에도, 병상의 고통에도, 실패의 골짜기에도,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새벽에도, 늙어가는 육신의 떨림 속에도 하나님의 현존을 보게 합니다. 동시에 복음은 우리를 이 세상에 가두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눈을 내생의 약속으로 들어 올립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그날을 바라보게 합니다.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엄숙한 법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달력 끝에 조용히 서 있는 검은 문입니다. 누구도 그 문을 피해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젊은이는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고, 건강한 사람은 죽음이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성공한 사람은 자기 업적이 죽음의 침묵을 막아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늘 우리보다 먼저 현장에 와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한계를 폭로하고, 우리의 자랑을 멈추게 하며, 우리의 시간성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죽음은 마지막 주인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 너머에서 생명과 죽음의 주인으로 서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으로 소망해야 할 것도 죽음을 넘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초청 앞에서 영혼은 떨립니다. 우리는 생의 애착 속에서 영원의 연장을 갈구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원하는 영원은 자주 자기 욕망의 무한 연장입니다. 더 오래 살고, 더 많이 누리고, 더 높이 인정받고, 더 깊이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은 인간 욕망의 연장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입니다. 그것은 옛 사람이 더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경건이란 바로 이 새 생명의 숨결을 오늘의 시간 속에서 미리 호흡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복음은 몇몇 사람의 종교적 취향이 아닙니다. 복음은 인간 존재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선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자기 삶을 해석하려 하지만, 그 해석은 늘 조각나고 맙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왜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 끝내 알지 못합니다. 지식은 많아져도 지혜는 말라가고, 정보는 넘쳐도 영혼은 굶주립니다. 인간은 자기 손으로 세계를 밝히려 하지만, 그 빛은 자기 그림자를 더 길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입을 여시면 어둠은 물러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면 무덤의 침묵은 깨지고, 십자가의 어둠 속에서 부활의 새벽이 솟아납니다. 복음은 또 하나의 견해가 아니라 모든 견해를 심판대 앞에 세우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복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던진 질문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던지신 질문이며 동시에 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그 대답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수고는 자기 의를 쌓기 위한 노동이 아닙니다. 신앙의 열심은 하늘의 보상을 사들이기 위한 거래가 아닙니다. 성도의 수고는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사랑의 응답입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관념이 아니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철학적 명제가 아니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며, 죄인을 의롭다 하시고, 무너진 사람을 다시 세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주저앉아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울어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실패해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늙어가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마지막 숨을 내쉬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절망할 권리가 없습니다. 슬퍼할 수는 있습니다. 울 수는 있습니다. 탄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절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교회의 규모에 있지 않고, 우리의 재능에 있지 않고, 우리의 감정의 뜨거움에 있지 않고, 우리의 신앙 이력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이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넓게 선포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회는 복음을 좁은 울타리 안에 감추어 둘 수 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 안에서 구원의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 디모데는 젊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경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저했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안에는 거짓 교훈도 있었고, 나이 많은 이들도 있었고, 복잡한 문제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젊은 사역자 디모데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에게 사람들의 시선을 이기기 위해 더 강한 권위를 연출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더 거친 목소리를 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크게 보이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

이것이 복음의 방식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과장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연출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연출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자신을 크게 보이게 함으로 권위를 얻지 않고, 말씀 앞에 작아짐으로 권위를 얻습니다. 말이 거룩해야 합니다. 행실이 복음에 어울려야 합니다. 사랑이 식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세월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정절, 곧 영혼의 순결함이 지켜져야 합니다. 여기서 “본”이라는 말은 헬라어 τύπος(튀포스)입니다. 이는 찍혀 나온 자국, 모본, 형태를 뜻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손에 찍힌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흔적이 말에 찍히고, 사랑의 자국이 행실에 찍히고, 부활의 소망이 눈물 속에 찍혀야 합니다.

말은 영혼의 문입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왕이 앉아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은혜를 깊이 마신 사람의 말에는 은혜의 향기가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 운 사람의 말에는 남을 정죄하기보다 품으려는 떨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의 말은 타인의 실패를 쉽게 조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잊은 사람의 말은 날카롭고 차갑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긍휼을 입은 죄인인지 잊어버리면, 남에게는 율법의 돌을 던지고 자신에게는 변명의 담요를 덮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말이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십시오. 우리의 입술이 상처를 깊게 하는 칼이 아니라, 상한 심령을 싸매는 기름이 되게 하십시오.

행실은 말의 해석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은혜를 말해도 삶이 은혜를 부정하면, 우리의 말은 공중에서 흩어집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죄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죄를 미워하며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행실의 거룩함은 완전한 자기 의가 아니라 회개의 지속성입니다.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어디로 돌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기 체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기 변명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만 죄인은 다시 살아납니다.

사랑은 경건의 심장입니다. 사랑 없는 경건은 차가운 조각상입니다. 사랑 없는 교리는 칼이 될 수 있고, 사랑 없는 열심은 사람을 태워버릴 수 있으며, 사랑 없는 거룩은 자기 우월감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사랑은 다릅니다. 그 사랑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죄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진리를 흐리지 않으면서도 상한 자를 향해 몸을 낮춥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장식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피 흘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사랑은 감정의 부드러움만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중심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 타인의 영혼을 향해 걸어가는 거룩한 고난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가능성에서 나오는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 선 자의 회개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인간이 자기 최종 발언권을 내려놓는 사건입니다. 믿음은 손에 쥘 수 있는 보장이 아닙니다. 믿음은 거듭거듭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생명의 방향입니다. 어제 들었던 말씀을 오늘 다시 들어야 하고, 오늘 붙든 은혜를 내일 다시 붙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쉬우면서 어렵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누구도 자기 힘으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믿음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은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은혜로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혈과 육의 결론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입니다.

정절은 단지 성적 순결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뉘지 않은 마음입니다. 영혼이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박수와 하나님의 미소를 동시에 최종 목적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의 인정을 더 깊이 갈망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높인다고 말하면서도 내 이름이 사라질까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내 공로가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해합니다. 그래서 정절은 날마다 필요한 은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숨은 우상을 드러내시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우리의 유일한 보배가 되게 하셔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읽는 것”은 공적 예배 가운데 성경을 낭독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교회는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교회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말씀 앞에 앉아야 합니다. 사람의 말이 아무리 화려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설교자의 언어가 아무리 시적이고 깊어도, 그 언어는 말씀을 섬길 때만 생명을 얻습니다. 말씀을 떠난 수사는 영혼의 장식품일 뿐입니다. 말씀을 떠난 감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말씀을 떠난 열정은 곧 자기 의의 불꽃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읽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성경이 우리를 읽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숨은 동기를 비추고, 우리의 거짓 평안을 흔들며,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우리의 절망 속으로 은혜를 부어 넣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무너뜨리지만 죽이기 위해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의 거짓 기초를 허뭅니다. 하나님이 입을 여시면 우리의 작은 세계는 갈라집니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던 무덤들이 입을 벌리고, 우리가 영원하다고 생각하던 태양이 멈춘 듯하며, 우리의 교만한 시간이 하나님의 영원 앞에서 멈춰 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나의 생명은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 것임을.

바울은 또 말합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디모데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은사는 사명입니다. 은사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섬김의 도구입니다. 은사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불씨를 방치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도 하나님이 맡기신 은사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가르침의 은사를 받았고, 어떤 이는 위로의 은사를 받았고, 어떤 이는 섬김의 손을 받았고, 어떤 이는 기도의 눈물을 받았습니다. 작은 은사처럼 보이는 것도 하나님 손에 들리면 영혼을 살리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작은 순종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하나님께 드려진 순종은 영원의 무게를 가집니다. 한 방울의 영원은 시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물들의 망망대해보다 무겁습니다.

오래전 한 목회자가 병상에 누운 한 성도를 심방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성도는 평생 이름 없이 교회를 섬긴 분이었습니다. 큰 직분을 자랑하지도 않았고, 많은 사람 앞에 서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손은 늘 주방에서, 예배당 구석에서, 아픈 성도들의 집 앞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목회자가 병상 곁에 앉았을 때, 그는 낡은 성경책을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손가락 힘도 약해져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지만, 성경 곳곳에는 밑줄과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목회자가 물었습니다. “권사님, 무엇이 가장 힘드십니까?” 그분은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몸이 아픈 것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주님을 덜 사랑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도 십자가를 보면 다시 안심이 됩니다. 내가 주님을 붙든 것보다 주님이 나를 붙드신 것이 더 크니까요.” 그 말 앞에서 목회자는 설교하러 갔다가 오히려 설교를 듣고 돌아왔습니다. 경건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람에게 크게 보이는 일이 아니라, 마지막 숨결 가까이에서도 십자가를 가장 큰 위로로 붙드는 것입니다. 은사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세상의 박수 없이도 누군가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남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방치하면 자라지 않습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지만, 은혜 받은 사람의 삶은 무책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훈련합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경건을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갑니다. 성도의 훈련은 노예의 불안이 아니라 자녀의 응답입니다. 새벽에 말씀 앞에 앉는 것,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 분노의 말을 삼키는 것, 작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 상처 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는 것, 예배의 자리를 귀히 여기는 것, 모두가 경건의 연단입니다. 이것들은 우리를 구원하는 공로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영혼 안에서 성령께서 피워내시는 열매입니다.

“성숙함”은 헬라어 προκοπή(프로코페)의 의미와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나아감, 진보, 성장의 뜻을 품고 있습니다. 성도는 멈춰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때로는 더디고,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눈물로 기어가지만, 성령 안에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어제보다 조금 더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어제보다 조금 더 자기 죄를 미워하고, 어제보다 조금 더 이웃을 품고, 어제보다 조금 더 영원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성숙입니다. 성숙은 자기 확신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의존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성숙은 내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말합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이 말씀은 무겁습니다.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피라.”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영혼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남을 가르치면서 자기 영혼을 잃을 수 있습니다. 남을 권면하면서 자기 마음은 굳어질 수 있습니다. 남에게 복음을 말하면서 자기 자신은 복음의 감격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내 말은 복음에 젖어 있는가. 내 분노는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졌는가. 내 열심은 하나님 사랑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서 나오는가. 내 가르침은 사람을 내게 묶는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가. 내 경건은 사람에게 보이려는 경건인가, 하나님 앞에서 떨리는 경건인가.

여기서 “살피라”는 명령은 영적 자기 점검의 부르심입니다. 헬라어 ἔπεχε(에페케)는 주의를 기울이다, 붙들다, 마음을 두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신앙은 무심함 속에서 보존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마음을 두되 자기 집착으로가 아니라 회개의 정직함으로 두어야 합니다. 가르침에 마음을 두되 지식의 자랑으로가 아니라 복음의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 두어야 합니다. 교회는 말씀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말씀이 흐려지면 십자가가 장식이 되고, 은혜가 감정이 되고, 경건이 문화가 되며, 신앙은 인간의 자기 위로로 축소됩니다. 그러나 말씀 위에 서면 교회는 작아 보여도 강합니다. 가난해 보여도 부요합니다. 눈물 속에 있어도 소망이 있습니다.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는 말은 디모데가 구원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충실한 사역과 경건한 삶을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한 사람의 순전한 믿음은 다른 영혼에게 길이 됩니다. 한 사람의 눈물 어린 기도는 누군가에게 돌아올 집의 등불이 됩니다. 한 사람의 말씀에 대한 충성은 세대의 어둠 속에서 복음의 불씨가 됩니다. 부모의 경건은 자녀에게 보이지 않는 유산이 되고, 목회자의 눈물은 성도의 영혼에 남는 흔적이 되며, 성도의 작은 순종은 교회의 거룩한 물길을 지키는 수로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양육받고 있습니까. 우리의 영혼은 믿음의 말씀으로 자라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불안과 비교와 욕망으로 야위어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경건을 연단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신앙의 이름으로 자기 뜻을 포장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라질 것들 위에 마음의 집을 짓고 있습니까. 우리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서 그리스도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고 있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모든 자기 증명은 멈춥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의로움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에게 내려온 깊은 강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율법적 행위는 우리에게 안전 보장도, 변명도, 평안도 줄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깊은 심연 앞에 세웁니다. 그러나 그 심연을 건너오신 분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는 역사 가운데 역사적이셨고, 시간 가운데 시간적이셨으며, 인간 가운데 참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간성 안에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했습니다. 그의 생애는 근원과 종말을 가리키는 거룩한 표지였고, 그의 십자가는 심판 가운데서 열리는 무죄선고였으며, 그의 부활은 죽음 가운데서 솟아오른 새 창조의 첫 빛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경건의 뿌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경건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무거운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 사이를 살아가는 성도의 숨결입니다. 우리는 이미 임한 은혜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영광 사이에서 삽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있지만 영원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성령께 붙들려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싸우지만 정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가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생명의 주님께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십시오. 말씀으로 다시 양육받으십시오. 경건의 불꽃을 다시 살리십시오. 오래 식어 있던 기도의 자리를 다시 펴십시오. 주님께 드리지 못했던 마음의 방을 다시 여십시오. 사람의 시선 때문에 눌려 있던 사명을 다시 붙드십시오. 젊음 때문에 업신여김을 받는 이도, 늙음 때문에 쓸모없다고 느끼는 이도, 실패 때문에 숨고 싶은 이도, 상처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은 이도, 오늘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오. 주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끄러움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은혜의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믿음 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힘이요 구속의 힘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끄시고,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게 하시며, 십자가를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생명으로 붙들게 하십니다. 우리의 경건은 성령 없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불가능한 자에게 가능한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면, 우리의 작은 순종도 영원의 씨앗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면, 우리의 눈물도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면, 우리의 남은 생애가 아무리 짧아도 그 시간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빛나는 시간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조용히 결단합시다.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믿음의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경건을 연단하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둡시다.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새깁시다. 우리 자신과 가르침을 살피며 끝까지 이 길을 걸어갑시다. 우리가 끝까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는 그리스도의 손을 믿읍시다.

눈물이 있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했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워도 소망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마지막 날,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고, 눈물의 씨앗이 영광의 열매로 피어나며, 시간 속에서 떨던 우리의 믿음이 영원 안에서 찬송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날까지 경건의 불꽃을 지키십시오. 말씀의 양식을 먹으십시오.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그리고 다시 일어나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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