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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히 12:14-17)

작성자예수님사랑|작성시간26.06.06|조회수37 목록 댓글 0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히 12:14-17)

 

 

“14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16음행하는 자와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17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4-17)

 

 

사랑하는 학우 여러분,

 

본문 14절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입니다만 특별히 신학 수업을 받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는 제목으로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 화평함을 좇으라

 

먼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화평함이라 하는 것은 단지 전쟁이 없다거나 싸움이 없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전쟁이 없고 싸움이 없는 외적 평화도 중요합니다만, 그런 것만 가지고 우리 인간의 복잡한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집에 가 보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글을 써서 액자에 넣어 걸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면 만사가 다 형통하다”는 뜻인데, 물론 대단히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가정이 평안해야 직장 일이나 인간관계나 공부나 다 잘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가정이 화목하다고 해서 우리 개개인의 문제들, 영적인 문제나 심리적인 문제들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화평’이라 할 때 그것은 근본적인 화평 곧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된 사실에 기초를 둔 화평을 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화목함이 없이는 사람들과 진정으로 화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적인 평화란 오래갈 수 없는 일시적인 타협이나 세력 균형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후 5:20). 하나님과의 화목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마음속 깊이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는 경지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진정 열매 있는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학 수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신학 수업에도 하나님과의 화목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진정한 화목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학 공부도 한낱 호기심의 만족이 되거나, 아니면 학점 따는 수단에 불과하게 됩니다. 한 20년쯤 전에 화란 자유대학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화해를 부인하는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한낱 모범적인 것으로, 그저 쇼크를 주는 것 정도로 설명하는 논문이 정식으로 통과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많은 혼란과 피해를 주는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우리의 신학 수업과 신학 연구도 항상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과 먼저 화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또한 사람들과도 화평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할 수 없지만, 우리로서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람들과 화평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특별히 믿는 사람들이 서로 화평한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화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지켜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중요한 줄은 알고 있지만, 실제로 교회 생활에서 또는 우리 믿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다음 두 가지 상황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로, 우리는 가능한 한 충돌을 피해야 합니다. 정면 대결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정면 돌파’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것은 용기 있고 본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정면 대결은 좋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정면 대결은 피하고, 또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면 우선 가능한 한 들어주고, 또 상대방의 좋은 점부터 먼저 말하고 나서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독교 복음을 먼저 받아들인 네덜란드 사람들을 보면 말이 참 부드럽습니다. 가능하면 ‘좋다’ ‘아름답다’ ‘잘 한다’고 하는 말이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생활에서도 이런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가능하면 상대방이 말할 때에 우선 긍정을 하고 나서 “그렇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고 말함으로써 직접적인 충돌은 피하고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양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양보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늘 갈등과 대립이 있고 이해관계의 충돌이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것이 교리 문제가 아니고 진리 문제가 아닌 이상 조그만 문제에 대해서는 양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요즘은 양보가 중요하다는 것을 많이 깨닫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1987년)에 대통령 선거할 때에 보니 야당 후보들도 양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당신이 양보하시오!”라고 했습니다. “내가 양보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양보하시오!”라고 했는데, 이것은 참된 양보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권리 주장이지 양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참된 양보는 내가 먼저 내가 양보하는 것, 내가 손해보고, 내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교리 문제나 신학 문제, 진리 문제에 대해서 양보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한 치의 양보도 없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다 보면 생기는 사소한 경제 문제, 그저 100원, 200원 따지는 문제 또는 조그만 감정상의 문제나 기분 문제 등에 대해 우리가 양보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특히 감정상의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합니다. 길 가다가 저쪽에 어떤 친구를 보았는데, 그 친구가 인사를 안 하고 지나갔다고 하면 괜히 기분이 나쁘지요. 한국 사람은 그런 것을 못 참습니다. 그래서 “두고 보자. 다음에 만나면 내가 인사하는가 보자.”고 합니다. 그래서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나면 고개를 싹 돌려버립니다. 그러나 이런 조그만 감정상의 문제, 기분 문제, 이런 것도 우리가 양보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로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II. 거룩함을 좇으라

 

둘째로, “거룩함을 좇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좇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거룩’의 뜻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이 ‘거룩’이란 말은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는 그 개념이 모호했습니다. 순수한 우리말에서 이것은 그저 하나의 ‘고상한’, ‘숭고한’이란 의미로 쓰인 것 같습니다. “그분의 거룩한 뜻을 받들자.”고 말할 때, ‘거룩한’이란 말은 ‘고상한, 숭고한’ 정도의 뜻입니다. 이 ‘거룩’이란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는 원래 ‘자신을 어떤 신에게 바치다’(to devote oneself to any God)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그래서 ‘거룩하다’(holy), ‘성스럽다’(sacred), ‘성별되다’(consecrated)의 뜻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또한 레위기에 보면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다”(레 27:28)고 했기 때문에 ‘바친 것’이 곧 거룩한 것이 됩니다. ‘목축의 첫 새끼’나 ‘땅의 십분 일’, ‘아주 바친 사람’은 다 여호와께 ‘성물(聖物)’이 됩니다(레 27:26-33). 따라서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 바친 것이란 의미에서 ‘거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흐르는 중심 개념은 무엇보다도 ‘정결하다, 깨끗하다’(to be pure, clean)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거룩하다’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깨끗하고, 정결하고, 의로운 것 곧 죄 없는 상태, 흠 없는 상태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함’이란 원래 하나님께 대해 죄 없으시고 의로우시고 크고 두려운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거룩함이 인간에 대해서 사용될 때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와 간섭하심으로 말미암아 실제 생활에서 점차 성결해지는 것, 거룩해지는 것을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곧,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흠도 없고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성결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거룩함, 성결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본질상 거룩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도무지 죄와 함께 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죄를 용납하실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셔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나서 우리를 용납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거룩함’은 성도의 생활에서 중심이 되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사랑’을 강조하는 교회도 많고 ‘은사’를 강조하는 교회도 많지만, ‘거룩함’을 강조하는 교회는 찾아 보기 힘듭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의 소리’를 더 따르고 세속화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도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은 오늘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 훈련받고 계시는 여러분들은 이 거룩한 생활에 특별히 힘쓰셔야 하겠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읽은 책 중에서 『인물 중심의 교회사』란 책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기독 교회사에서 지도자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들 30인의 전기를 보면서 저는 그들에게 공통된 특징 두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첫째는 그들은 한결같이 성결한 생활을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는 것입니다. 기독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사람들은 참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살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시간만 나면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애썼고 성경 말씀을 매우 사랑하였으며, 그리고 생활 속의 조그마한 죄도 회개하면서 죄 짓지 않는 삶을 살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30명의 인물들 중에서 한 두 명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젊은 시절에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들은 젊은 시절에 헬라어와 라틴어 등의 고전어를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교부들과 여러 고전 작품들에 능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것 곧 학적인 능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요구되지는 않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학업에 능한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요구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여러분 모두가 다 잘하면 좋겠지만, 각자 받은 달란트와 사정이 있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모두 다 공부를 잘하시오!”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전 12:12)고 말합니다. 그러나 첫 번째 것 곧 성결한 생활은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성결한 생활, 거룩한 생활은 우리 신학생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한결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남녀노소와 인종간의 차별이 없습니다. 빈부의 차이도 없습니다. 학력의 차이도 없습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우리 모두에게 성결한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성직자가 되려고 하는 여러분은 이 점 곧 성결한 생활에서 남보다 뛰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은 교회에서 영적인 지도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여러분들은 양들을 인도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본문 14절 하반절에서는 좀 더 강경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14절 하반절에 보면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주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주님께 갈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 갈 수 없기 때문에 주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또한 현재 생활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거룩함이 없는 곳에는 주님께서 계시지 아니합니다. 성결한 삶이 없는 곳, 온갖 비윤리적인 타락과 방종이 있는 곳, 더러운 생활이 있는 곳에는 아무리 이적과 은사가 있다고 해도, 아무리 병 고침과 귀신 쫓아내는 것이 있다고 해도, 거기에는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소위 은혜가 아무리 많이 있다고 해도 그곳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주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III. 서로 돌아보라

 

마지막으로 “너희는 서로 돌아보라.”고 말합니다(15절).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아볼 내용에 대해서는 17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돌아보고, 쓴 뿌리가 날까 돌아보고, 음행하는 자가 있을까,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며 돌아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화평함과 거룩함으로 좇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개인적인 노력뿐만 아니라 또한 서로서로의 격려와 권면과 돌아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경건 생활도 혼자서 외골수로 나가면 위험합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서 골방이나 기도원에서 기도만 하다가 신비주의로 나가고 맙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골방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서 성경을 연구하다가 이단 사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올바른 경건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 생활이 필요하고 또한 동료들과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돌아볼 내용이 무엇인지 본문을 따라 몇 가지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두려워하라’는 말은 번역상 추가된 것이고, 원래는 ‘돌아보라’는 말에 다 걸립니다. 우리 중에 함께 있지만, 심지어 우리 가운데 함께 있으면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지만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고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대한 믿음과 감사가 없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혹 있지 않은가 돌아보고 서로 격려하며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음에는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또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쓴 뿌리’라고 하는 것은 자기만 쓸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을 쓰게 하는 독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이러한 자가 있지 않을까 서로 돌아보고 염려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신학을 공부하는 여러분들 중에는 이러한 쓴 뿌리가 없을 줄로 압니다만, 만에 하나라도 이러한 자가 나타나면 많은 사람을 더럽히고 해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도 대개는 한 두 명의 사람입니다. 교회 대다수의 성도들은 온순하고 목사의 가르침을 잘 따릅니다. 그러나 혹 한 두 명이 문제를 일으키고 말썽을 일으키면 온 교회가 시끄러워지고 어지럽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쓴 뿌리가 우리 가운데 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서로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조심하고, 형제자매들을 돌아보고, 또한 내 자신이 이런 쓴 뿌리가 되지 않도록 미리 기도해야 된다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음행하는 자가 있는가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여기 음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음행하는 자가 도무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가 음행이나 간음죄는 별 것이 아닌 것처럼 묘사하고, 심지어는 아주 낭만적이고 예술적인 것처럼 묘사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만, 성경은 분명히 이것이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 중에서도 아주 큰 죄라고 말하고 있고, 성경은 이것을 기필코 피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고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망령(妄靈)되다’는 말은 ‘불경건한’, ‘하나님 없는’, ‘경망된’이란 뜻입니다. 한 그릇 식물을 위해서 장자(長子)의 명분을 팔고 만 에서와 같은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에서는 사냥에서 돌아와서 배가 고팠을 때에, 그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리고 말았습니다(창 25:27-34). 이것은 장자의 명분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에서처럼 망령되이 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조그만 물질 때문에, 조그만 사례금의 차이 때문에 교회를 함부로 옮기고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특별히 주의 종이 되겠다고 부름 받아 나선 여러분은 재물(財物)보다도 명분(名分)을 더 중요시 여겨야 하겠습니다. 아무 실속도 없는 명분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귀하고 보배로운 믿음의 명분, 충절의 명분, 건덕의 명분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고 팥죽 한 그릇에 팔고 만 에서는 나중에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지만, 그 잃어버린 복을 다시 찾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어떤 사람이 조그만 물질의 유혹에 넘어가서 믿음을 저버리고, 교회를 떠나든지 혹은 이상한 교회로 가 버린다면 그 사람은 에서와 같이 영원히 하나님의 복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참으로 주의해야 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이 조그만 학점의 유혹에 못 이겨서 잠깐이나마 자기의 양심을 팔고 믿음을 배반하고 부정직한 행동을 한다면, 그 사람은 에서처럼 ‘망령된 자’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나선 여러분은 참으로 귀한 존재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특권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여러분은 사사로이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택함 받은 자들 가운데서 또 택함을 받아서 이 자리까지 나온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맡기고 하나님의 교회를 맡기시고자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감사하고 황송하며, 또한 이 사명을 생각할 때에 두렵고 떨립니다.

 

사랑하는 우리 학우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이 사명을 우리 스스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 막중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도와주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 히브리서의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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