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돌봄의 사명(베드로전서5: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거룩한 돌봄의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베드로전서 5장 2–3절 앞에 섭니다. 이 말씀은 단지 목회자 몇 사람에게만 주어진 직무 규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어떤 심장으로 뛰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주님의 숨결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시며, 어떤 방식으로 양들을 살리시고, 어떤 손길로 상한 영혼을 싸매시며, 어떤 마음으로 길 잃은 자를 다시 품으시는지, 그 거룩한 돌봄의 윤곽이 이 두 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듣는 오늘,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향해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의 양이며, 누구의 목자이신 주님께 돌봄을 받고 있는가?” 그리고 이어서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주께서 나를 돌보셨듯, 나는 누군가를 사랑으로 돌보는 손길로 부르심을 받았다.”
베드로는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라”고 말합니다. 양 무리는 “너희 양 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양 무리”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교회는 누구의 것입니까? 목회자의 것이 아니라, 장로의 것이 아니라, 어떤 가문의 것이 아니라, 어떤 세대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봄은 소유의 감각이 아니라 청지기의 두려움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가진 것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 뜻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소유의 마음은 쉽게 지배가 되고, 청지기의 마음은 기꺼이 무릎을 꿇습니다. 소유의 마음은 “내가 결정한다”로 흐르지만, 청지기의 마음은 “주께서 기뻐하시는가”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개혁주의 신앙의 맥이 선명해집니다. 교회의 주권은 인간에게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머리 되신 주께서 당신의 몸을 돌보시는 방식이, 인간의 권력과 강압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과 사랑의 손길이라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돌봄의 사명을 더 이상 기술이나 운영으로 축소할 수 없습니다. 돌봄은 거룩한 소명이며, 예배의 연장입니다. 강단에서 하나님께 올려 드린 마음이 심방 자리에서 무너진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공연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심방의 눈물이 강단의 말씀을 더 뜨겁게 만든다면, 그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베드로는 그 돌봄의 태도를 세 가지 대조로 보여 줍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라,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이 대조들은 단지 행동 지침이 아니라, 복음이 사람 안에서 어떤 새 성품을 빚어내는지를 보여 주는 거울입니다. 억지는 마음의 외부에서 오는 압박이지만, 자원함은 마음의 내부에서 솟는 기쁨입니다. 더러운 이득은 자기중심적 계산이지만, 기꺼이 함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린 자유입니다. 주장함은 위에서 누르는 힘이지만, 본이 됨은 아래에서 받쳐 드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통치 방식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도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셨습니다. 죄인이었던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시고, 마음을 열어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득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낮아지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위에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종의 형체를 입고 우리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러니 거룩한 돌봄은 곧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 가는 길입니다. 돌보는 손길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강해지고, 돌보는 마음이 깊어질수록 교회는 거룩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을 압니다. 돌봄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예측하기 어렵고, 상처는 복잡하며, 관계는 때로 오해로 뒤틀립니다. 누군가를 사랑으로 품었는데 돌아오는 것이 냉담일 때도 있습니다. 기도해 주었는데 더 깊은 어둠으로 내려가는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쉽게 지칩니다. 그리고 지친 마음은 두 방향으로 기울어집니다. 하나는 무관심입니다. “각자 알아서 하라”는 냉기가 교회를 덮습니다. 다른 하나는 통제입니다. “내가 다 정리해 주겠다”는 손이 점점 강압이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두 길을 모두 거절하게 합니다. 무관심도 아니고 통제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사랑으로 돌보되, 성령께 맡기는 길입니다. 사람을 바꾸는 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겸손이 돌봄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양을 “구원자처럼” 끌어안는 것이 아니라, “목자장”이신 예수께로 계속 인도하는 것입니다. 돌봄의 목적은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를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양 무리를 치라”는 말 속에는 먹이는 일이 포함됩니다. 목양은 감정의 위로만이 아니라, 진리의 양식으로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말씀이 사라진 돌봄은 잠깐 달콤할 수 있으나 결국 영혼을 굶깁니다. 반대로 사랑이 빠진 말씀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상처를 더 냅니다. 거룩한 돌봄은 말씀과 사랑이 함께 숨 쉬는 자리입니다. 말씀은 길을 내고, 사랑은 그 길을 걷게 합니다. 말씀은 죄를 드러내고, 사랑은 회개할 용기를 줍니다. 말씀은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은 사람을 세웁니다. 그래서 참된 돌봄은 “말씀을 적용하는 기술”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함께 무릎 꿇는 동행”입니다. 돌봄의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려야 할 말은, 사실 우리가 자주 잊어버리는 그 단순한 문장일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주님이 지금 무엇을 기뻐하실까요?” “우리가 함께 기도해도 되겠습니까?” 이 질문들은 사람을 내 감정의 재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옮깁니다.
“감독하며”라는 말은 단지 관리의 뉘앙스가 아닙니다. 원어의 그림에는 ‘살펴보는 눈’, ‘돌아보는 마음’이 있습니다. 교회는 숫자와 일정으로만 세워지지 않습니다. 이름이 있고, 얼굴이 있고, 사연이 있고, 무너진 밤이 있는 영혼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감독한다는 것은 감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방치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방치하지 않으셨듯, 우리는 서로를 방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방치가 얼마나 잔인한지 우리는 압니다. 상처는 혼자 있을 때 곪고, 죄는 숨을 곳을 찾을 때 강해집니다. 그래서 거룩한 돌봄은 사람을 공개적으로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공간으로 안전하게 이끄는 것입니다. 죄를 죄라 부르되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것, 진리를 말하되 눈물을 함께 흘리는 것, 권면하되 정죄하지 않는 것, 이것이 복음의 돌봄입니다.
베드로는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억지는 결국 원망을 낳습니다. 원망은 돌봄의 얼굴을 굳게 만들고, 굳은 얼굴은 양을 두렵게 합니다. 그러나 자원함은 어떻게 생깁니까. 자원함은 의무감에서 시작되지 않고, 은혜의 기억에서 솟아납니다. 내가 얼마나 돌봄을 받았는지를 잊지 않는 사람에게서 자원함이 나옵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살피셨습니다. 우리가 도망칠 때도 주님은 찾으셨습니다. 우리가 무너질 때도 주님은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는 순간, 돌봄은 부담이 아니라 감사의 표현이 됩니다. “주님, 제가 받은 사랑이 너무 크니, 저도 누군가의 어깨가 되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의 손길에는 억지가 없습니다. 그 손길은 따뜻하고, 그 따뜻함은 사람을 살립니다.
또 베드로는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득은 단지 물질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칭찬의 이득, 영향력의 이득,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드는 이득,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중독적 만족감의 이득도 포함됩니다. 돌봄을 하면서도 사람을 내 자아의 연료로 쓰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돌봄은 그 유혹과 싸웁니다. 왜냐하면 돌봄의 목적은 돌보는 자의 영광이 아니라, 돌봄 받는 자의 구원과 성숙, 그리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자주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이 사람을 돕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 마음의 깊은 곳에서 내가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서 정직해지는 것이 거룩한 길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교묘한지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은혜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 동기가 흐려질 때마다 십자가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얻으려 하느냐? 나는 너를 얻기 위해 내 생명을 주었다.” 그 질문 앞에서 우리의 돌봄은 다시 순전해집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장하지 말고 본이 되라고 합니다. 본이 된다는 것은 완벽함을 과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회개할 줄 아는 삶, 은혜를 의지하는 삶, 말씀 앞에서 자신을 먼저 굴복시키는 삶이 본이 됩니다. 교회가 가장 깊이 무너지는 순간은 지도자가 ‘무오류의 왕좌’에 앉으려 할 때입니다. 반대로 교회가 가장 아름답게 세워지는 순간은 지도자가 ‘은혜가 필요한 죄인’의 자리에서 양들과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할 때입니다. 본이 된다는 것은 “나를 보라”가 아니라 “나와 함께 주님을 보자”입니다. 본이 된다는 것은 사람을 자신에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주님께로 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때 교회는 사람 중심의 조직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로 자랍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반드시 한 가지 복음의 중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돌봄은 우리의 선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돌봄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 그래서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마음이 얼어붙을 때, 우리는 더 노력만 하려고 하지 말고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그 사랑이 죄를 어떻게 이기고 죽음을 어떻게 뚫었는지, 그 사랑이 나 같은 사람을 어떻게 새로 만들었는지, 그 은혜를 다시 마셔야 합니다. 은혜는 영혼의 물입니다. 메마른 돌봄은 결국 상처를 냅니다. 그러나 은혜로 적셔진 돌봄은 무너진 마음에도 생명의 싹을 돋게 합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예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느 작은 교회에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있던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쌓여 예배당 문턱이 두려웠고,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해가 바뀌어도, 절기가 돌아와도, 혼자 방 안에서만 지냈습니다. 어느 날 한 장로님이 그 소식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그 장로님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조용히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놓고는 짧은 손편지를 남겼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소중한 양입니다. 저는 당신을 정죄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함께 주님께 돌아가고 싶습니다. 문을 열어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다음 주에도 다시 오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겠습니다.” 그 다음 주, 그 다음 주에도 장로님은 같은 시간에 왔습니다. 어떤 날은 문이 열리지 않았고, 어떤 날은 잠깐 문틈 사이로 눈물이 보였습니다. 세 번째 방문 때, 그 성도는 문을 조금 열고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장로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이 저를 이렇게까지 하셨습니다. 주님이 제 문 앞에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저는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다만 당신 곁에 서 있고 싶습니다.” 그 성도는 그날 오래 울었고, 몇 달 뒤 다시 예배당에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세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한 장로님의 조용한 발걸음을 통해 그를 불러낸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돌봄입니다. 말이 많아서가 아니라, 사랑이 오래 참아서입니다. 보여 주려는 열심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은혜의 끈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어떤 교회를 꿈꾸고 있습니까. 프로그램이 많고 겉이 화려한 교회입니까, 아니면 영혼의 상처를 품고 말씀으로 먹이며 은혜로 세우는 교회입니까. 거룩한 돌봄의 사명은 교회의 체질을 바꾸는 사명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방식으로 성공을 추구하면, 돌봄은 비용이 됩니다. 그러나 교회가 십자가의 방식으로 사랑을 추구하면, 돌봄은 영광이 됩니다. 세상은 강한 사람을 존경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사랑을 높입니다. 세상은 결과를 자랑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충성을 귀히 여깁니다. 그러므로 돌봄의 성패는 눈에 보이는 속도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한 사람의 마음에 씨앗을 심어 놓고, 오랜 시간이 지나 열매 맺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다림은 믿음의 표현이며, 기다림은 돌봄의 깊이입니다.
또한 우리는 돌봄의 균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흐리면 안 되고, 진리를 말한다는 이유로 사랑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참된 돌봄은 죄를 덮어 주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건져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서 건져 내는 방식은 폭력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복음은 죄인을 죽이지 않고 죄를 죽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버리지 않고 옛 사람을 벗겨 냅니다. 그러므로 돌봄은 회개로 이끄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회개는 두려움이 아니라, 은혜의 빛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돌아와도 된다”는 확신이 있을 때, 사람은 죄의 숨김에서 걸어 나옵니다. 이것이 교회의 품입니다. 교회의 품은 죄를 정당화하는 품이 아니라, 죄인을 새롭게 하는 품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돌봄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모든 태도는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 모습입니다. 자원함으로 십자가를 지신 주님, 이득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 군림이 아니라 본이 되심으로 우리를 이끄신 주님, 그 주님이 목자장이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의 문맥 속에서 우리는 압니다. 그 목자장은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에서 흩어지고 약해 보이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양”으로 붙드시고, 마침내 영광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러니 거룩한 돌봄의 사명은 낙심의 자리가 아니라 소망의 자리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때로 보이지 않는 전쟁처럼 느껴질지라도, 목자장이신 주께서 친히 당신의 양을 책임지십니다. 우리는 그 책임의 손 안에서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치면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내가 무너질 것 같을 때, “내가 교회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교회를 붙드신다”는 확신이 우리를 다시 세웁니다. 이것이 개혁주의적 위로입니다. 구원도, 성화도, 교회의 보존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돌봄은 공로가 아니라 은혜의 통로입니다.
이제 우리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거룩한 돌봄은 누군가의 직책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물론 말씀은 특별히 감독의 직무를 맡은 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만, 그 정신은 공동체 전체를 향합니다. 어떤 교회는 목회자 한 사람에게 모든 돌봄을 몰아주고, 성도는 관객처럼 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를 “서로 지체”라고 부릅니다. 지체는 서로 돌봅니다. 아픈 지체를 외면하는 몸은 병든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돌봄의 문화’를 회복해야 합니다. 인사만 하는 교회가 아니라, 마음을 묻는 교회. 안부만 묻는 교회가 아니라, 짐을 함께 지는 교회. 문제를 소문내는 교회가 아니라, 기도로 품는 교회. 빠른 판단으로 낙인찍는 교회가 아니라, 회복을 기다리는 교회. 이것이 거룩한 공동체의 향기입니다.
돌봄은 거창한 것에서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작은 관심이 씨앗이 됩니다. 한 번 더 이름을 불러 주는 일, 한 번 더 손을 잡아 주는 일, 한 번 더 기도 제목을 물어 주는 일, 한 번 더 말씀 한 구절로 마음을 들어 올려 주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를 돌보는 내가 먼저 말씀 앞에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돌봄은 나의 영적 상태를 숨길 수 없는 사역입니다. 내 안에 은혜의 샘이 마르면, 결국 나는 사람을 힘으로 다루게 됩니다. 그러나 내 안에 은혜의 샘이 흐르면, 나는 사람을 사랑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를 먼저 돌보아 주옵소서. 제 마음의 깊은 곳에 복음의 물을 다시 부어 주옵소서. 그 은혜로 제가 누군가의 영혼을 살리는 손이 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돌봄이 필요한 양입니다. 동시에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향한 돌봄의 부르심 아래 서 있습니다. 목자장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고, 지금도 우리를 살피시며, 결국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맙시다. 돌봄은 우리의 능력으로 완성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흘러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자원함으로, 기꺼이, 본이 되어, 주님의 양 무리를 섬길 때,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고, 상처 입은 자들은 주님의 품을 다시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우리는 쇠하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주께로부터 받을 것입니다. 그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섬깁시다. 눈물이 씨앗이 될 것입니다. 기도가 길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이 교회 가운데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