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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발자취를 따라 (베드로전서 2:18–25)

작성자예수님사랑|작성시간26.06.15|조회수32 목록 댓글 0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 (베드로전서 2:18–2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 정당하게 살려고 했는데 돌아오는 모욕, 선하게 행했는데도 받게 되는 억울함, 믿음을 지키려 했는데 오히려 더 깊어진 외로움이 있습니다. 어떤 고난은 우리가 잘못해서 당하는 것이지만, 어떤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자 했기 때문에 찾아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바로 그 자리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는 환한 예배당의 평안한 자리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흩어진 성도들, 낯선 땅에서 조롱받고, 믿음 때문에 오해받고,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억울함을 삼켜야 했던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성도들은 로마 제국 안에서 살아가던 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강하지 않았고, 사회적으로도 주목받지 못했으며, 때로는 가족 안에서도, 일터 안에서도, 지역 사회 안에서도 이방인처럼 취급받았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진 성도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자리는 때때로 종의 자리였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높여주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나 인간의 눈에는 하찮게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환들아”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신약 헬라어로 οἰκέται(오이케타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집안에 속한 종, 주인의 권위 아래 놓여 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소유물로 삼는 죄악된 제도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미화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불의와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 전체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값으로 산 존귀한 존재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악한 구조를 인정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악한 구조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어떻게 그리스도를 붙들며, 어떻게 복음의 빛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여기서 “두려워함”은 사람에 대한 비굴한 공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의 경외입니다. 성도는 사람을 두려워해서 굴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자기 영혼을 죄에 팔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불의가 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억울함이 내 영혼의 왕좌에 앉지 못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원망이 내 입술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단순히 “참아라”가 아닙니다. 만일 이 말씀이 그저 “참고 견디라”는 말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상처 입은 영혼에게 너무 잔인한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는 인내는 체념이 아닙니다. 복음 없는 침묵이 아닙니다. 굴욕을 미덕으로 포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인내는 그리스도께 붙들린 영혼의 거룩한 힘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힘입니다.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자유입니다.

사람은 어리석게도 보이는 것과 시간적인 것만 붙잡으려 합니다. 눈에 보이는 인정, 손에 잡히는 보상, 지금 당장의 억울함을 풀어 줄 판결, 나를 높여 줄 한마디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시적이고 시간적인 것만 붙들다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놓칠 때, 우리의 영혼은 가장 가난해집니다. 한 방울의 영원은 시간의 바다보다 무겁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은 세상의 박수보다 귀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삼킨 한숨은 하나님 나라의 향기가 됩니다.

베드로는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말은 단지 도덕적으로 보기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운 것, 하나님께 기억되는 것,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헬라어로 χάρις(카리스), 곧 은혜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은혜라고 하면 보통 고난이 사라지는 것을 생각합니다. 병이 낫고, 문제가 풀리고, 길이 열리고, 원수가 물러나는 것을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더 깊은 은혜를 말합니다. 부당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 억울함 속에서도 자기 영혼을 죄에게 넘기지 않는 힘, 눈물이 마르지 않는 밤에도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는 능력, 그것이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늘 편한 길로만 데려가지 않습니다. 은혜는 때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발자취 위에 세웁니다. 은혜는 우리를 세상의 박수 속에만 두지 않고, 때로 모욕과 침묵과 오해의 골짜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은혜는 하나님과 인간이 갈라진 사이를 연결하시는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고난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잃지 않는 상태입니다. 은혜는 내 환경이 순식간에 바뀌는 기적일 때도 있지만, 더 깊은 은혜는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내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심기는 기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때때로 텅 빈 공중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고, 기도는 천장에 부딪혀 돌아오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감정의 온도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어제 들었던 말씀을 오늘 다시 듣고, 오늘 붙든 십자가를 내일 다시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은 손에 쥐어지는 소유물이 아니라, 매일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생명의 호흡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의 시선을 한 사람에게로 모읍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서 “본”이라는 단어는 ὑπογραμμός(휘포그람모스)입니다. 어린아이가 글씨를 배울 때 위에 놓인 본을 따라 한 획 한 획 써 내려가듯이, 그리스도께서 먼저 걸어가신 길을 우리가 따라가도록 남겨 놓으신 삶의 모본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추상적인 이론을 주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길을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해석해 주셨을 뿐 아니라 고난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처 입은 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셨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몸에 상처를 받으심으로 우리의 상처를 끌어안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 입에 거짓도 없으셨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약해서 침묵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말씀 한마디로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불러내셨고, 귀신들을 꾸짖어 떠나가게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 입을 여시면 무덤이 열리고, 어둠이 물러가며, 죄인의 마음이 찢어집니다. 그런데 그분이 침묵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의 침묵은 패배자의 침묵이 아니라 구속자의 침묵이었습니다. 그분의 참으심은 무능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동시에 드러난 영원한 승리였습니다.

예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비밀입니다. 우리는 억울함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악을 선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를 덮어놓고 괜찮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종 심판자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영혼은 복수의 감옥에 갇힙니다. 내가 반드시 상대를 무너뜨려야 산다고 믿는 순간, 내 마음은 이미 무너집니다. 그러나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순간, 우리는 이상한 자유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보셨다. 하나님이 아신다. 하나님이 마지막에 바로잡으신다. 그러므로 나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아도 된다. 나는 내 영혼을 미움에게 넘기지 않아도 된다. 나는 십자가 아래에서 다시 사람으로 설 수 있다.

여기에는 깊은 목회적 분별이 필요합니다. 이 말씀은 폭력과 학대와 범죄 속에 있는 사람에게 계속 그 자리에 머물며 당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학대받는 자의 피난처이시며, 교회는 약자를 보호해야 합니다. 불의는 드러나야 하고, 폭력은 멈춰야 하며, 죄는 회개와 책임 앞에 서야 합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악을 방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한 세상 속에서도 성도가 악의 방식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권력 아래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영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억울함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남으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종 고난이 오면 먼저 묻습니다. “왜 나입니까?”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질문은 조금씩 바뀝니다. “주님, 이 고난 속에서 제가 무엇을 붙들어야 합니까?” “주님, 이 억울함 속에서도 제 영혼이 주님을 잃지 않게 하소서.” “주님, 제가 이 상처 때문에 독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고난 자체를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고난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상처를 십자가의 상처와 만나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의 눈물은 절망의 물이 아니라 은혜의 물이 됩니다.

본문은 우리를 십자가의 중심으로 데려갑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것이 복음의 심장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고난의 모범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자이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단지 참고 견디는 모범만 남기셨다면, 우리는 그 앞에서 절망했을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못합니다. 나는 그렇게 거룩하지 못합니다. 나는 억울하면 분노하고, 상처받으면 닫히고, 모욕당하면 복수하고 싶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악, 우리의 교만, 우리의 거짓, 우리의 미움, 우리의 자기 의, 우리의 숨은 우상, 우리의 하나님 없는 삶을 자기 몸에 지고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나무”는 단순한 십자가의 재료가 아닙니다. 구약의 저주 개념이 배경에 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저주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그분이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정죄를 그분이 들으셨습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그분이 마시고, 우리에게는 생명의 잔을 주셨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율법적 모든 행위는 더 이상 인간에게 안전 보장도, 변명도, 평안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의는 찢어진 옷과 같고, 우리의 자랑은 무너지는 모래성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는 영원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복음은 죄책감을 덜어주는 위로 정도가 아닙니다. 복음은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은 새롭게 창조되었고, 현실적인 새 삶으로 옮겨졌습니다.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쇠사슬에 묶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지만, 더 이상 죄가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넘어지지만, 더 이상 절망이 우리의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상처받지만, 더 이상 상처가 우리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여기서 “채찍에 맞음”은 헬라어로 μώλωψ(몰롭스), 매를 맞아 생긴 상처와 멍을 가리킵니다. 놀라운 것은 성경이 우리의 치유를 그리스도의 상처와 연결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상처를 부끄러워합니다. 상처를 숨기고, 강한 척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너의 상처를 가지고 십자가 앞으로 오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상처 입으셨다. 그분의 상처는 너를 정죄하는 상처가 아니라 너를 치유하는 상처다. 그분의 피는 너를 고발하는 피가 아니라 너를 씻는 피다. 그분의 찢기신 몸은 너를 버림받은 자로 만드는 증거가 아니라 너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는 초청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어느 지점에서 길을 잃은 양과 같습니다. 본문은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얼마나 따뜻합니까. 우리는 단지 죄인이었을 뿐 아니라 길 잃은 양이었습니다. 양은 스스로 길을 잘 찾지 못합니다. 양은 약합니다. 쉽게 두려워하고, 쉽게 흩어지고, 쉽게 낭떠러지 가까이 갑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우리를 비웃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어리석으냐”고만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선한 목자가 되어 찾아오셨습니다. 피 흘리는 발로 산과 골짜기를 건너오셨습니다. 가시에 찔리고, 조롱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목자”는 ποιμήν(포이멘)이고, “감독”은 ἐπίσκοπος(에피스코포스)입니다. 목자는 먹이고 인도하는 분이며, 감독은 돌보고 살피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멀리서 명령만 내리시는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살피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눈물을 보시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밤의 탄식을 들으시며, 우리가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마음의 균열을 아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도 돌보지 못하지만, 주님은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십니다. 그분의 눈길은 차갑지 않습니다. 그분의 손길은 거칠지 않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은 정죄가 아니라 회복입니다.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코리 텐 붐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갇혔고, 전쟁 후에는 하나님의 용서와 복음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1947년 독일 뮌헨의 한 교회에서 말씀을 전한 뒤, 자신이 갇혀 있던 수용소의 전직 간수를 마주하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손을 내밀며 용서를 구했고, 그녀는 차가운 마음으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예수님,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 흘러 들어오는 것을 경험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인간 승리의 감동담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용서가 상처 입은 인간 안에서 어떻게 불가능한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복음의 증언입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가볍게 말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값싼 감상이 아닙니다. 용서는 악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가해자의 책임을 지워주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십자가를 통과한 영혼만이 배워가는 고통스러운 은혜입니다. 때로 용서는 감정보다 먼저 순종으로 시작됩니다. 때로 손은 떨리고, 마음은 따라오지 않으며, 눈물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은혜가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조금씩 미움의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단지 구원을 받기 위해 한 번 바라보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억울할 때 바라보고, 실패했을 때 바라보고, 병상에서 바라보고, 자녀 문제로 울 때 바라보고,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바라보고,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워질 때 바라보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 생명의 시간성이 끝나는 자리이며,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우리 삶의 엄숙한 표지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죽음에서 죽음 자체만을 만나지 않습니다. 성도는 죽음 너머에서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할 분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참으로 소망할 이유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생명의 주께서 유한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청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시간 속에 세워졌지만, 그 의미는 영원에 닿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한 시대의 비극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죄인을 살리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시간 속의 영원이 열렸고, 심판 가운데 무죄 선언이 선포되었으며, 죽음 가운데 새 생명이 솟아났습니다. 부활은 계시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예수를 옳다 하신 선언입니다. 부활은 죄와 죽음이 최종 권세가 아니라는 하늘의 판결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십자가만 보며 슬픔에 머무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십자가를 통과하여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눈물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입니다. 무덤 앞에서도 생명의 주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다른 발자취를 보여줍니다. 성공한 사람의 발자취, 복수한 사람의 발자취, 자기 권리를 끝까지 관철한 사람의 발자취, 더 많이 가진 사람의 발자취, 더 높이 올라간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발자취를 보여줍니다. 욕을 당하되 맞대어 욕하지 않으신 발자취, 고난을 당하되 위협하지 않으신 발자취,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신 발자취, 죄인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신 발자취, 잃어버린 양을 찾아 피 흘리며 걸어오신 목자의 발자취입니다.

이 발자취는 넓은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생명의 길입니다. 이 발자취는 세상의 박수와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쁨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발자취는 자아를 높이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혼을 살리는 길입니다. 이 발자취는 옛 인간에게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새롭게 창조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였던 십자가가,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지금 억울한 일을 겪고 있습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눈물로 견디고 있습니까. 선하게 하려 했는데 오히려 오해를 받고 있습니까. 가정에서, 일터에서, 관계 속에서, 교회 안팎에서 마음이 무너지는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께서 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단지 멀리서 “참아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먼저 그 길을 걸었다. 내가 너를 위하여 고난을 받았다. 내가 네 죄를 담당했다. 내가 채찍에 맞아 너를 낫게 했다. 네가 길 잃은 양처럼 헤맬 때 내가 너를 찾아왔다. 이제 너는 혼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인내는 외로운 인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인내입니다. 성도의 눈물은 버려진 눈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병에 담기는 눈물입니다. 성도의 고난은 무의미한 고난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빛 아래에서 새롭게 해석되는 고난입니다. 물론 우리는 고난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고난 자체를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어둠을 찬양하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도 빛 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상처를 자랑하지 않지만, 상처 입은 우리를 고치시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자랑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본질이요 창조자와 구속자로서 모든 질문의 완전한 답이십니다. 인간이 제시하는 선과 악의 저편에서 하나님의 팔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 계시지 않으면, 온갖 무가치한 것들이 우리를 대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 계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위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담대함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시 일어설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십자가 앞에 섭니다. 내가 당한 억울함만 붙들고 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섭니다. 내가 받은 상처만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고치신 주님의 상처를 바라봅니다. 내가 흘린 눈물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어린양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고백합니다. “주님, 제 영혼의 목자여, 제가 돌아왔습니다. 길 잃은 양 같은 저를 다시 품어 주십시오. 제 안의 분노를 십자가 아래 내려놓게 하시고, 제 안의 원망을 은혜로 씻어 주시고, 제 안의 두려움을 부활의 소망으로 덮어 주십시오. 제가 악에게 지지 않게 하시고,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십시오. 제가 상처 입은 사람으로 끝나지 않게 하시고, 십자가 은혜로 살아난 사람으로 서게 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믿음은 흔들립니다. 오늘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지고, 오래된 상처가 다시 살아나며, 억울한 기억이 밤을 흔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목자이십니다. 주님은 여전히 감독이십니다. 주님은 여전히 십자가의 주님이시며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놓칠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가 길을 잃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찾으십니다. 우리가 울 때에도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이제 다시 일어나십시오. 눈물이 있어도 일어나십시오. 상처가 있어도 일어나십시오. 아직 다 이해되지 않아도 일어나십시오. 십자가를 붙들고 일어나십시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한 걸음만 더 걸으십시오. 오늘의 한 걸음이 작아 보여도, 그 걸음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의 순종이 보잘것없어 보여도, 하나님은 그 순종을 아름답다 하십니다. 오늘의 기도가 떨리는 숨처럼 약해도, 성령께서 그 탄식을 붙들어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리십니다.

마지막 날, 모든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인간의 평가가 끝나고 하나님의 판단이 서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흘린 눈물이 헛되지 않았음을, 십자가를 붙들고 견딘 시간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았던 슬픔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 기억되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의 목자 되신 주님께서 우리 눈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길 잃은 양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 씻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다시 주님께 돌아갑시다. 우리의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갑시다. 그분의 십자가 아래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삽시다. 그분의 채찍 맞은 상처 아래에서 우리의 상처를 치유받읍시다. 그분의 침묵 안에서 우리의 분노를 내려놓고, 그분의 부활 안에서 우리의 소망을 다시 세웁시다. 세상은 우리의 고난을 다 설명하지 못하지만, 십자가는 우리의 고난을 품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눈물을 다 닦아 주지 못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아십니다. 세상은 우리를 잊을 수 있지만, 목자 되신 주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양이다. 내가 너를 위하여 피 흘렸다. 내가 너를 찾아왔다. 이제 내 발자취를 따라오라.” 이 음성을 듣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눈물 속에서도 다시 십자가를 붙들고 믿음으로 일어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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