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밀알이 되어 / 요 12:23-33
사람들은 이 시대가 가물어 메마른 땅처럼 사랑이 메말랐다고 한다. 정이 메말랐다고 한다. 믿음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가물어 메마른 땅처럼 세상이 삭막하고 각박해졌다고 한다. 강퍅하고 완악해졌다고 한다. 거칠고 무서워졌다고 한다. 아무리 이 시대갸 삭막하고 각박해졌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감동적인 사건이 가끔씩은 방송과 언론 매체를 통하여 전해진다.
40대 후반의 가장이 있었다. 그는 집안의 큰형이었다. 그런 그가 만성신부전증으로 고생하며 투석치료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간암까지 다시 그를 덮쳤다. 그러자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의 아들이 자신의 간과 신장을 아버지에게 주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검사결과 아들은 아버지에게 신장 밖에 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버지의 동생이 큰형에게 간을 주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그 동생은 현역 군인이었고, 만일 이식수술을 받게 되면 군대에서 나가야 했으며, 군에서 제공한 집도 잃어야만 했다. 더구나 동생에게는 어린 아들과 임신 중인 아내가 있는 가장이었다. 그러나 동생은 큰형을 위해 그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수술대에 올랐다. 드디어 세 사람,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아버지의 동생은 나란히 수술실 침대에 올랐다. 수술 결과는 좋았다.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아들이 번저 퇴원을 하던 날, 아버지는 아들을 보며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 다음 동생이 자시 형을 면회왔다. 동생은 중환자실 바깥에 서서 전화기를 들었다. 수술 후 첫 대면이었다. 전화기를 들자마자 형은 동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다. 그러자마자 동생은 그 큰 체구를 들썩여가며 굵은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형이 이렇게 무사히 살아나 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족사랑은 이기주의가 아니라 희생과 헌신이 모든 사랑의 시작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헌신과 희생이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 이것은 진리이다. 그리고 우주의 법칙이다. 그런데 이 진리를 피하려는데 문제가 있다. 내가 헌신하거나 희생하지 아니하면 누군가가 내 대신 희생의 제물이 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희생의 이미를 아는 사람이 된다. 부모의 헌신과 희생이 자녀를 위대하게 만든다. 부모의 헌신과 희생이 가정의 발전과 번영을 이루고 평화와 하목을 이루어낸다.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가정이 된다. 이 세상의 어떤 위대한 일들을 살펴보면 그 일의 배후에는 많은 헌신과 희생의 피가 있었다. 자유, 민주화, 행복, 사랑, 평화, 구원 등 값진 것일수록 커다란 희생의 피를 지불하고 얻어내었다.
텔런트 임동진 장로(지금은 신학을 해서 루터교 준목이 됨)의 간증을 듣게 되면, 그분이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를 잘 믿는 어느 한분의 희생이 있었기에 임동진씨 가정뿐만 아니라 그의 처가 식구들까지도 구원받는 역사가 있었다. 그는 원래 보통이 넘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기에 그 가정 또한 평안할 날이 없었다. 그의 처가는 철저한 불교 가정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아내의 친구되는 사람 중에 신실한 크리스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동진씨가 아직 무명 시절이었을 때 그의 수입은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아내는 돈을 빌려 쓰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뒷감당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빚이 늘어 났다. 그로 인하여 그의 아내는 몸무게가 38kg까지 줄 정도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이때 친구가 나타나서 아무 조건없이 그 빚을 다 갚아 주었다. 말은 ‘천천히 갚도록 하라’는 것이었지만, 받을 생각하지 않고 빌려주었다. 그 친구의 진심을 알게 된 임동진씨의 아내는 감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히 친구가 믿는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여러분, 그 친구라고 해서 돈이 아깝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친구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돈을 아끼지 않았다. 믿음대로 살기 위해서는 그런 희생이 있어야 한다. 정말 자신의 영혼을 귀중하게 여긴다면 어떤 고난이라도 감당할 수가 있다. 아직 우리가 주를 멀리하고 세상을 더 가까이 하는 까닭은 자신의 영혼을 소홀히 여기기 때문이다. 아니면 자신의 영혼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한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똑같다. 그러나 죽는 모양과 성질은 각양각색이다. 아직은 자연사가 많지만 옛날에 비해서 사고사가 엄청나게 많아졌다고 한다. 자연사는 그야말로 제 목숨을 다하고 죽는 것을 말한다. 병이나 사고가 아닌 수명이 다해서 죽는 경우이다. 그러나 사고사는 글자 그대로 사고로 죽는 것을 말한다. 교통사고나 재난 사고, 또는 객사나 횡사, 아니면 자살이나 타살과 같은 비정상적인 죽음을 말한다. 그런데 사고사 중에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생명을 잃어버린 분들도 많지만,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힘쓰다가 돌아가신 분들도 많다. 그런 경우를 순사라 한다. 그래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 순국이고, 직장에서 일하다가 죽게 되면 순직이다. 그리고 신앙을 지키려다가 죽을 경우에는 순교라고 한다. 무릇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순교하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죽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렇다. 사람이 언젠가는 한번 죽을 것,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다가 죽으면 참으로 멋있는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오래 산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아무 의미없이 무가치한 인생을 아무리 오래 산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죽으면 그만인 것이 인생이다. 일번적으로 사람들은 호의호식하고 아름다운 집에서 편안히 오래 살다가 죽는 것을 소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가 그냥 죽으면 그 배불리 먹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 편안하게 산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죽으면 다 그뿐이다. 하지만 순국이나 순직을 하면 그 후손들이 오래오래 기억하면서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신앙을 지키려고 하다가 죽게 되면 더욱 값진 죽음이 된다. 그런 죽음은 영원한 하늘나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그 사람과 그 후손을 영화롭게 해주시리라 믿는다.
오늘 본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이 어떤 말씀인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는 24절 말씀이다. 그러면 이 유명한 말씀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아는가? 오늘 본문은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한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헬라인 몇명이 빌립에게 자기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자, 빌립은 그 내용을 안드레에게 얘기했다. 빌립이 선뜻 예수님께 말씀드리지 못하고 안드레에게 먼저 얘기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방인을 예수님께 소개하는 일이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하여간 빌립과 안드레가 같이 예수님께 그 내용을 전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완전히 동문서답을 하신다. ‘선생님, 어떤 헬라인들이 선생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라는 말을 들었으면 어떤 애기를 해야 하는가? ‘이리로 안내하라’라고 하든지, ‘지금은 바쁘니까 다음에 오라고 정중하게 말씀드려라’라고 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지금 유대인들 상대하기도 바쁜데 헬라인을 왜 만나느냐? 소금뿌려서 보내라’라고 하든지, 하여간 이런 얘기를 해야 앞뒤가 맞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그게 아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다. 내가 땅에서 들릴거다’는 등 전혀 엉뚱한 말씀만 하셨다. 특히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36절 하반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라고 되어 있다. 헬라인이 찾아왔다는 얘기를 듣고는 혼자서 길게 말씀하시고서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헬라인들은 예수님을 만나지도 못했다. 대체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헬라인들이 왜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는지 성서에는 그 내용이 나와 있지 않다.
그런데 헬라인들이 찾아왔다는 얘기를 들은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말씀이었으니, 아마 그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던 이유도 ‘영광’과 결부된 내용이라고 짐작을 할 수 있다. 방금 전에 예수님은 수많은 인파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 사람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자기들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깔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을 위한 새로운 왕으로 알았다. 아마 헬라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 같다. 하기야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예수님께 은밀히 부탁하는 제자가 있었다. 또한 자기들 중에 누가 큰 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을 정도였으니 헬라인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셨다. 영광은 영광인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이 아닌 전혀 다른 영광이다. 여기에는 한가지 특이한 사실이 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때가 안되었다는 얘기가 자주 나온다. 요 2: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 7:30절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 8:20절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드디어 ‘때가 왔다’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를 말한다. 그것을 놓고 예수님은 영광을 얻을 때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높이 드러내는 것을 영광이라 했다.
요 10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선한 목자라고 하셨다. 14-15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선한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데 그냥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버려서 인도한다고 했다. 대체 목자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양을 인도한다면 그 양을 어디로 인도하겠는가? 사람들은 목자가 양을 인도한다고 하면 무조건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만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양을 잘 먹이기 위해서 목자가 목숨까지 버린다는 얘기인데 그럴 수는 없다. 부모는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사람이다. 필요하다면 대신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식이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를 잘 하라고 목숨을 내놓는 부모는 없다. 적어도 자식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면 그 일이 자식의 일생에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죽지 않으면 자식에게 자장면을 먹일 수 있는데 간짜장을 먹이기 위해서 죽지는 않는다. 목자가 양을 인도하면서 목숨을 버린다는 얘기도 그렇다. 고작해야 풀이나 먹이고 물이나 마시게 하는 일로 죽을 수는 없다. 적어도 목자가 생명을 버리려면 그렇게 해서 그 양을 데리고 가고 싶은 곳이 그 양에게 그만큼 중요한 곳이라야 한다. 그래서 요 11장에서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는 얘기가 나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친히 말씀하셨다.
이 두 내용을 연결하면 어떻게 되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되 목숨을 버려서 인도하시는데 사망과 죽음에서부터 부활과 생명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익히 들어온 말씀이다.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전체를 위한 희생이나 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강조하는 것 같지 않은가? 자기는 나름대로 열심히 어떤 봉사를 하는데, 주변에서는 전혀 알아주지 않아서 낙심될 때 ‘그래,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야. 내가 희생해야지...’ 이런 마음을 먹을 수 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의 수고를 위로할 때도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본문에 있는 말씀은 ‘조그만 희생을 감수하면 나중에 얻는 이익이 크다.’ ‘지금은 효과가 보이지 않지만 나중에는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정도의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씨로 심어 우리를 열매로 거두기를 원하신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법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심는 것과 거두는 것, 곧 씨와 열매는 본질적으로 같다는 뜻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만큼 놀라운 사건이다. 예수님이 씨이고 우리가 열매라는 얘기는 우리와 예수님이 동격이 된다는 뜻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얘기는 본래 상태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하나 추가한다는 얘기가 어니라 존재 자체가 바뀌는 것이고, 출생 자체를 다시 하는 것이다. 성서는 이 사실을 놓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과거의 모습에서 조금 바뀌거나 개선된 것이 아니라 다시 만들어졌다. ‘죽으면 천당간다’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누리는 모든 것을 같이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을 가리켜서 흔히 독생자라고 한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니까 독생자가 맞다. 하지만 성서에는 독생자라는 표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롬 8: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을 가리켜서 맏아들이라고 한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고 할 때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할 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독생자인데, 하나님게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예수님을 모델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맏아들이다. 맏아들이 되려면 아들이 한명이면 안된다. 밑으로 줄줄이 동생들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바로 그렇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의 신분이다. 우리가 흔히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예수 믿으면 천당간다’라고 피상적으로 하는 얘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얻은 구원을 1/1만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표현이다. 요일 3:1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베푸셨는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예수님과 우리를 같은 항렬에 세울만큼 사랑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제대로 실감할 수도 없다. 다만 감탄할 뿐이다. 성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가리켜서 친구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이 얘기가 어느 정도 엄청난 얘기인지 알겠나?
신대원 다닐 때의 일이다. 신대원은 학생들 간의 나이 차이가 많다. 저도 대학 졸업하고 군대 갔다온 후 신학을 했기 때문에 나이가 조금 많은 편에 속했다. 그러나 나이 많은 사람이 워낙 많기 때문에 나이 많다는 말을 할 형편은 아니었다. 하여간 저보다 여섯 살 정도 적은 동기들도 있었고, 열여덟살 정도 많은 동기도 있었다. 열여덟 정도 많으면 형님뻘도 아니고 삼촌뻘이다.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다가 그분이 저에게 친구라고 불렀다. 제가 깜작 놀라서 ‘예? 친구요?’ 그랬더니 그분은 ‘동기를 친구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느냐?’라고 하면서 막무가내였다. 제가 그때 좀 난처했다. 아무리 동기라고 해도 나이 차이가 스물이 가까운데 어떻게 친구가 되겠나?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친구라고 하셨다. 우리와 주님과 레벨이 같다는 뜻이다. 우리로서는 도무지 얼굴을 들 수 없을만큼 송구스러운 얘기이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주님께서 한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으니, 주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열매인 우리가 주님과 똑같은 밀알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우리가 그만큼 고귀한 신분이다.
그런데 그 디음 얘기가 이상하다. 요 12:25-26절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 다음에 이런 말이 왜 나와야 하나? 간단하다. 우리는 주님을 씨앗으로 해서 열매 맺어진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영생보다 자기 생명을 더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보다 자기를 섬기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본래 씨와 열매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어야 한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말을 생각해 보라. 심은 콩이나 거기서 나온 콩이나 같은 콩이다. 심은 팥이나 거기서 나온 팥이나 같은 팥이다. 품질에 차이가 없다. 완두콩을 심었는데 강낭콩이 나거나, 붉은 팥을 심었는데 검은 팥이 날 수 없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바로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허락하셨던 모든 것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주장하는 것은 여전히 옛습관이다. 우리는 영생보다 자기 생명에만 관심이 있고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자기 욕심을 섬기는데만 마음이 있다. 다른 사람을 흉볼 때 개, 돼지만도 못하다는 말을 한다. 사람에게 개, 돼지만도 못하다고 하면 대단한 모욕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얘기는 본래는 개, 돼지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개, 돼지가 되었다가 사람이 되었으면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나? 사람이 되었다는 자체만으로 감사하면서, 이전의 모든 모습을 청산하고 사람답게 살아가려고 애를 써야 한다. 그런데 신도들은 그렇지 않다.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늘 옛날 생각만 한다. ‘내가 옛날에 개였을 때는 체면을 볼 필요가 없어서 참 편했는데...’ ‘내가 옛날에 돼지였을 적에는 지금보다 많이 먹을 수 있었는데...’라고 신세타령하기 바쁘다. 도무지 예수님을 씨앗으로 해서 열매맺어진 모습, 예수님과 더불어 생명을 나누는 모습이 없다.
오래 전의 일이다. 어떤 사람이 차에서 내리면서 혼잣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골목에 노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도무지 운전을 할 수가 없네.’ 그 얘기가 상당히 이상하게 들렸다. 골목에서 노는 애들 때문에 운전을 못하는 겁니까? 아니면 골목에서 다니는 차 때문에 애들이 마음 놓고 놀지 못하는 겁니까? 무엇이 무엇을 방해하고 있는가?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이런 오해가 상당히 많다. 말씀대로 살 것을 권면하면 그 얘기가 맞는 말이라고 인정하기는 하면서도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한다. ‘목사님, 그렇게 살면 사흘도 못살고 다 굶어죽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렇게 삽니까?’라는 생각을 다 한다. 대체 무엇 때문에 무엇을 못하는가? 무엇이 무엇을 방해하는가? 현실 생활이 신앙을 방해하는가, 신앙이 현실생활을 방해하는가? 운전을 하는 어른은 골목길에서 노는 아이들의 마음을 모른다. 그래서 자기가 골목에서 노는 애들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골목에서 노는 애들이 자기가 운전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자기에게는 골목에서 노는 것보다 운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과 현실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를 믿는 문제보다 하루하루를 살아가 는 문제가 더 중요한 사람은 신앙이 현실생활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바쁘다는 이유로 예배를 빼먹는 것은 당연한 일로 알면서, 예배 때문에 돈을 덜 버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줄 안다. 그런데 교회에서 듣기에 신앙이 가장 중요하다고 들었다. 적어도 명분을 얘기하면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예수를 믿는 사람치고 ‘신앙이 뭐냐? 그것도 어차피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따지는 것 아니냐?‘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못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그렇게 산다. 그래서 이상한 타협을 한다. 신앙생활은 자기가 안하고 목회자에게 하게 한다. 자기들은 바쁘니까 신앙생활은 목사가 대표로 알아서 해주면 자기들은 자기들이 정한 틀 안에서만 샌앙생활을 하겠다고 한다. 사실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 유희이다. 그래서 교회가 이상하게 되었다. 교회에서조차도 성실한 신앙생활을 얘기하지 못한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까지도 모든 관심이 세상에만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교인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라. ‘저 사람은 어쩌면 저렇게 겸손할까?’ ‘아무개는 마치 자존심도 없는 사람같다.’ 이런 것은 전혀 부러워하지도 않고 애깃거리도 되지 않는다. ‘누구네가 몇 평 아파트로 이사했다더라’가 유일한 관심이다.
학교에서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공부 잘하는 학생을 부러워한다. 체육시간에는 운동 못하는 학생들이 운동 잘하는 학생들을 부러워하고, 노래방에 가면 노래 못부르는 사람들이 노래 잘부르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교회 오래 다닌 사람이나 초신자를 막론하고 신앙 좋은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고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한다. 신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되엇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서 그렇다. 성서는 우리에게 모든 복락과 특권과 승리를 약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것도 누리지 못한채 세상을 기웃거리기 바쁘다. 어딘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이런 애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나? ‘그렇구나. 앞으로는 정신차리고 예수 믿어야겠구나!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주님을 사랑해야겠구나!’라는 결심을 촉구하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순간적인 결심이나 충동으로 좌우될만큼 가볍지 않다. 학교다닐 적에 성적표 받으면서 ‘오늘부터는 공부 열심히 해야지’라는 결심을 여러번 해보았지요?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나? 결심한 그대로 공부했는가?
예수를 믿는 문제가 그렇다. 신앙은 일회적인 결심으로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인생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하는 긴 과정이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우리로 하여금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사랑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자기 욕심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우리의 전 인생 속에서 이 일이 이루어지게 된다. 비록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나 능이 없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친히 이 일을 이루신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죽음에서 부활하실만큼 능력이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행한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006, 종려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