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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FC, 그들의 강령과 그들의 현실의 철저한 괴리

작성자우크~|작성시간06.01.30|조회수175 목록 댓글 0

 

 

SFC, 그들의 강령과 그들의 현실의 철저한 괴리

 

SFC 강령

1.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교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

2.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을 우리의 목적으로 한다.

3. 우리의 사명은 다음과 같다.

  •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교회 건설과 국가와 학원의 복음화
  •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

4. 우리의 생활원리는 다음과 같다.

  • 하나님 중심
  • 성경 중심
  • 교회 중심

 

 

1. 서론

위 강령은 SFC가 무려 50년 동안 외쳐왔던 것이다. 처음 시작이야 어찌하였든, 50년이 지난 오늘날 각 교회에 속한 SFC, 각 학원 SFC, 그리고 전국SFC는 과연 위 강령에 비쳐봤을 때 현재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는 우리에게 매우 뜻깊은 질문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SFC의 모습은 그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강령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기에 슬프기 그지 없다. 그들이 위 강령을 부르짖지 않는다면야 강령과 현재의 모습을 살펴볼 이유가 없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위 강령을 부르짖을 때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었다고 고백하였기에 우리는 현재의 모습과 강령이 말하는 바를 비교할 필요가 있다.

 

 2. 우리의 신조

SFC는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그 신조로 채택하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에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에 채택되었을 뿐 아니라, 강령이 1952년 쯤 제정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총회가 196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채택한 것에 비교한다면 SFC는 교회보다 오히려 일찍이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에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박형룡 박사가 신학지남에 '우리의 믿음의 뿌리'라는 글에 밝힌 것을 보면 한국교회는 대륙의 개혁주의와 미국의 청교도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SFC는 매우 일찍이 미국교회의 청교도 신앙을 잘 표현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그들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단순한 학생신앙운동이 아니라 확실한 교리적 표준을 둔 신앙운동이라는 면에서 높이 살만하다. SFC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그 신조로 삼고 있으므로 해서 매우 청교도적인 신앙을 갖고 있으며, 오직 말씀만 근거하는 신앙의 자세를 띠고 있는 것이다. SFC의 청교도적 의지는 신조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슴에 달고 있는 뺏지의 바탕의 푸른 색에도 나타내어 주고 있다.

 

3. 신조와 현실

SFC는 강령 서두에서 그들의 신조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임을 외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므로 그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냥 '웨스트민스터.....' 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이라는 수식어를 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수정된 웨스트민스터를 말한 것이었다'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SFC는 분명히 17세기에 영국의 청교도들이 제정하였고, 미국교회를 통해 보존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신조로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자칭 타칭 SFC운동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알더라도 한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많고, 공부한 적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웨스트민스터가 고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지 모르기 때문에 (하긴 기독교회의 기본신경인 사도신경의 의미조차 모르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인데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외적으로는 '우리의 신조로 한다'라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입술로만 외치는 메아리일 뿐이다.

말씀 만이 하나님을 계시하여 주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용을 모르다보니 '환상' 혹은 '감동'을 통해 받는 느낌들도 하나님의 뜻인양 이해하는 운동원들이 많이 있는 것이고, '성찬에 대하여' 라는 '장'을 읽어본 일이 없으므로 성찬을 행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를 맛보지 못하는 것이며, 거룩하신 선택교리에 대해 배우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이 예정 가운데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신조라고 말하지만 신조와 실제 신앙은 전혀 상통하지 않고 있다.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신조 혹은 성경을 가지고 근거를 대지 못하는 모습은, '말씀대로' 살겠다는 고백이 입술만의 고백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4. 우리의 목적

우리는 복음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며 철저한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여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목적이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마 5:13) 세상의 빛이라(마 5:14)고 말씀하셨으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목적이 된다.

 우리의 목적인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개혁주의 전통의 신학에 대해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전제 되지 않는다면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의 확립이라는 것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바른 믿음은 바른 신앙과 생활을 이끌어내 준다. 사실 믿음, 신학, 신앙, 신조 는 다 동일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개혁주의 신앙이라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한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이라는 것은 사도교회의 신앙과는 또 다른 것이다. 사도 시대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구호가 필요하지 않던 시기이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교회에서는 '성경으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구호가 추가된다. 교회 안에 인간이 세운 전통을 철저히 파괴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신앙을 수호하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이다. 우리의 신앙과 생활이란 성경의 정신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정신까지 포함하는 신앙이다.

덧붙이자면, 개혁주의 교회라고 할때에 또 한가지 우리에게 주는 것은 강령 1번에서 말하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외에 3개의 신앙고백도 우리의 신앙고백임을 넌지시 말해주고 있다.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세 교리 표준' 라 하여 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그리고 도르트 신경을 신조로 삼고 있다. SFC는 외적으로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그들의 신경이라고 고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는 '세 교리 표준'까지도 그들의 신경이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5. 우리의 목적과 그들의 목적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우리들은 과연 실천하고 있는가?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교육이다. 강령 1번에서 말하는 신조를 교육하고, 강령 2번에서 말하는 개혁주의 신앙을 바로 교육해야 강령 3번에서 말하는 사명들을 올바로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번과 2번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절대로 3번의 사명 수행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강령의 3번에서 말하는 사명이 곧 개혁주의 신앙의 교회건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신조나 개혁주의를 교육하기보다는 '3단계 7과정'이라는 자체적으로 만든 성경공부 프로그램에 목을 매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신조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라고 고백하고, 목적이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의 확립이라고 말하고, 사명을 개혁주의 신앙의 교회건설이라고 하지만 정작 신조가 무엇인지,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신조를 공부하는 무리에 대해 경계를 가지는 것이 오늘날의 SFC의 모습이다.

현재 SFC의 목적은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의 확립에 있지 않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에 있다. 다시 설명하면, 세상의 빛과 소금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신분임에도 그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세상에 뭔가를 요구하고, 세상이 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이 교회를 어머니에 성도를 자녀에 비유한 것처럼 비유하면 실제로 자기의 어머니(교회)가 썩은 판국에 자기 어머니의 회복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어머니(세상) 걱정하는 것이 현재 SFC가 말하는 그들의 목적이다.

혹 '우리가 언제 그랬소?' 라고 반문한다면, 그에 대한 증거는 SFC 홈페이지 ( http://sfc.info )의 '만남과 나눔' 게시판 64번 글 ( http://sfc.info/finesugar/board/view.php?menu_id=11&no=67&start=70&Mode=&how=&S_date=&S_content=&select_titlehead=show_all )에 올렸던 나의 글 (원문이 '재익이 헛소리' 게시판 31번에 있음) 에 대해 5개월이나 지난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는 SFC 모습을 그 근거로 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덧붙인다면, SFC는 '세 교리 표준'까지도 그들의 신앙고백으로 인정하면서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주장하는 운동원에 대하여 일침을 가하고, 함께 벨직 신앙고백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SFC 안에서 몰아내는 모습을 우리는 여러번 확인하였다.

 

6. 우리의 사명

우리의 사명에 대한 부분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개혁주의 교회건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SFC의 강령은 역사를 통해서 바른 진리를 수호하면서 이어져 내려온 개혁교회의 정신에 충실하다.

개혁주의 교회건설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것의 의미는 개혁교회의 개척과 교회를 개혁해 나감으로서 개혁교회의 모습을 회복케 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개혁교회 건설이라는 사명을 SFC는 조국 땅에서만 해야 할 일로 제한하지 않고 세계라는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수행해야 할 사명으로 인식하였었다.

개혁주의 교회 건설은 바른 신학, 신조, 신앙에 근거한 교회로서 교리와 생활이 동일하게 중요시 되며,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에서 비롯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7. 사명대로 한 결과

과연 56년이라는 역사를 지난 SFC는 과연 그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였는가? 한마디로 전혀 그렇지 않다. 이성구 전 간사의 말대로 'SFC는 SFC가 없어지는 것이 그 목적이다' 하지만 SFC는 그동안 한국 땅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개혁주의 교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SFC 깃발 꼽기에 주력하였다. SFC의 할 일은 SFC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적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전국 대학에 SFC라는 이름을 알리기 위해 주력하였고, 세계 여러 나라에 SFC 라는 이름을 내 걸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 현재는 전국의 100개 이상의 대학에 SFC라는 이름을 가진 동아리가 있고, 98년 필리핀을 필두로, 미국(미국의 경우 이민교회의 영향으로 98년 이전부터 있었다.), 일본, 중국 등등 곳곳에 개혁주의 교회가 아닌 SFC를 건설하고 있다. 없어져야 할 SFC만 남고 정작 건설되어야 할 개혁교회는 없는 것이다. 학원 SFC의 숫자가 몇 개이고, 해외 SFC 지부의 숫자가 몇 개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재 SFC의 모습은 그러하지 않은가?

현재 SFC가 지향하고 있는 사명이라는 것은 강령에서 말하는 사명이 아니라 SFC의 깃발 꼽기에 있을 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8. 생활원리

SFC가 말하는 생활원리는 자기들이 정립한 독창적인 것이 절대로 아니다. SFC가 말하는 생활원리에서도 개혁주의 정신은 베여있다. SFC의 생활원리는 개혁교회의 생활원리이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생활원리는 역사적 개혁교회가 그들의 생활원리로 지켜온 것이다.

 1) 하나님 중심

하나님 중심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것은 개혁주의의 가장 첫째되는 정신인 '하나님 절대 주권'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의 구원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절대 주권이 있음을 표현하는 일종의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에 따른 생활원리인 것이다.

 2) 성경 중심

성경 중심 이라는 말에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앙고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는 계시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것인 성경에 대한 바른 신앙에서 기인한다.

필자는 강령 1번과 2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신앙고백과 신조를 매우 강조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로 '신앙고백 지상주의'는 아니다. 신앙고백도 성경 앞에서는 온전치 못한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신앙고백 역시 성경적이지 못할 때에 '성경중심의 신앙'을 근거로 분명히 고쳐나가야 한다.

로마교회의 경우 성경보다 교회를 더 권위있는 것으로 앞세우므로 교회가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는 실수를 범하였다. 개혁교회에서는 로마교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므로 성경의 절대 권위를 인정한다.

 3) 교회중심

교회중심을 이야기할 때 이것은 가장 우선적으로는 영적인 면에서의 교회중심일 것이다. 신앙의 영역에 있어서 교회중심의 신앙이 우선되어야 한다.

두번째로는 외적인 면에서 교회중심의 신앙형태를 말한다. 또한 교회의 치리의 영향 가운데 있어야 한다. 개혁파 신학이 다른 신학사조와 차별적인 것이 바로 '교회론'이다. 이것은 물론 존 칼빈의 영향에 있다. 칼빈이 체계적으로 확립한 예배와 성례에 관한 신학은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교회중심을 말할 때 SFC는 스스로 '우리는 Para-Church 가 아니다' 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3-1) 교회 중심;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

SFC가 가장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전국SFC정기총회에서는 수도 없이 '고신'의 boundary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하는 의견들이 개진되었다. 매우 아이러니컬 하게도 말이다. 최근에는 SFC는 고신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학생선교단체'로서 크게 성장할 수 있다 라는 논리까지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SFC의 여러가지 행동을 통해서 '교회중심'의 생활원리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듯한 모습을 보았으나 확실한 결정적 근거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03년도 10월 7일) 부산대학교 SFC의 큰모임에서 했던 부산지역 SFC 간사인 임귀호 목사의 발언을 통해서 그 증거를 확실히 하였다. 그날 큰 모임에서 임귀호 목사는 '앞으로 SFC가 사단법인을 만들어서 고신에서 떠날려고 준비 중에 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고신에서 떠나면 생기는 단점을 고작 '재정적 문제'만 언급하였다.

구원에 있어서 유일한 기관인 교회를 떠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고백 위에 세우신 교회에게 주신 권위(마 16:19)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다. 주께서 주신 참 권위를 희생시키는 행위이다.

또한 '우리는 Para-Church 가 아니다'라는 말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 된다.

 '일단 읽어봐' 게시판의 47번 글인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라는 고재수 교수의 글에서 보듯이 개혁주의 세계에서는 학생선교단체 등과 같은 복음주의적 전도방법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의 약점을 인정한다. 개혁주의 세계에서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주신 유일한 기관으로 '교회'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SFC는 그 동안 스스로 Para-Church가 아님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과연 그러한가?

 

9. SFC가 말하는 개혁주의

SFC는 공공연히 자기들이 말하는 개혁주의는 일반적인 개혁주의가 아니라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변혁'이 그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변혁'이라는 것에 매우 초점을 둔다. '컨닝추방운동', '공명선거 운동' 등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SFC의 개혁주의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만 해도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common grace)론'에는 문제가 있으며 문제 있음이 교회적으로 지적되어 왔다. 변종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의 '카이퍼의 문화관 비판'이라는 논문에서도 그러하고, L.J.Joosse 목사가 지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리' (총회출판국 刊, 안재경 목사 譯) 라는 책의 105~107페이지에서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또한 지나친 문화적 낙관에서 비롯된 SFC의 '운동'은 결국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영역인 '교회'에 대해 등한시하게 된다. 실제로 현재 SFC의 모습이 그러하다. 앞서 5번 '우리의 목적과 그들의 목적'에서 비유한 것처럼 자신의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지만 남의 어머니에 관심을 갖는 것이 오늘날 SFC의 모습이다.

 

하지만, 보편교회에서 말하는 개혁주의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관'에 있지 않다. 역사를 통해서 전해져온 전통적 개혁교회를 말한다. 이는 우리가 속한 고신교단이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화란의 개혁교회나 미국의 개혁교회, 호주, 남아공 등의 개혁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10. 결론

 SFC는 과연 강령에 동의하는가? 얼마전 부산대학교 SFC에서 있었던 이른바 '종기행 사건'에서 보듯이 강령에 동의하는 운동원에 대하여 '너희들이 SFC의 4대 트랙에 동의하면 제명하지 않겠다' 라고 SFC는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강령보다 4대 트랙에 대한 동의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논리인지 알수가 없다. 앞에서 말했지만 '신조'를 교육하는 것보다 '3단계 7과정'을 교육하는 것이 좀더 바른 행동인 것처럼 이해되는 것이 오늘날 SFC의 모습이 아닌가?

혹 '신조를 교육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라고 변명한다면, '소교리 문답이 누구를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인줄 아느냐?' 고 나는 되물을 것이다.

SFC에 그래도 아직까지는 자그마한 희망이 남아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 소수의 운동원들 가운데에는 '강령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고 기도하면서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SFC는 학생선교단체가 아니라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통한 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위한 공동체임을 주장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도 이제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이 교육을 통해서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을 통해 전하려는 자들을 무차별하게 짓밟아 버리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약 50여년동안 계속해서 그래왔던 것처럼 수많은 SFC 운동원들이 'SFC 강령'을 외칠 것이다. 강령을 외칠 때에 왠지 모를 가슴뭉클함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뭣도 모르는 가슴뭉클함'이 될 것이다. '손에 잡을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씨알 함석헌의 시 제목 '그대 그 사람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SFC여! 그대 그 강령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라고 묻고 싶다.

 

(2003. 10. 18. 손재익)

 

 

저자 약력: 現 한빛교회 대학부 위원장

                경남종합사회복지관 사회복지사

                부산대학교 사회학과 4학년

                前 부산대학교 SFC 운동원과정 알돌장

                    창원동부지구 SFC 위원장

                    경남지방 SFC 부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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