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창문을 닦는 사람
남을 원망하는 사람은 세상의 열쇠를 남에게 맡기고 사는 것이다. 반면 자신의 숨은 헛점의 몫을 찾는 사람은 , 스스로 열쇠를 쥐고 사는 사람이다.
비가 내린 다음 날이었다. 앞산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온 세상이 안개에 잠긴 날 같았다. 창문을 열고, 창틀을 털고, 유리를 닦기 시작했다. 다시 바라본 산은 놀랍도록 선명했다. 산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고, 흐렸던 것은 산도, 세상도 아니라 뿌연 창문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창문은 들여다보지 않은 채 산이 흐리고, 세상이 흐리다고만 말할 때가 종종 있다. 일이 꼬이면 환경 탓을 하고, 부모와 형제, 친구를 탓하고, 인간관계가 어그러진 이유가 상대방 탓이라 애써 이유를 붙여 주변으로 떠넘긴다. 또 실패하면 지혜와 노력 부족이 아니라, 늘 운이 없었다고 한다.
물론 세상에는 억울한 일도 있고 , 부당한 일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건건이 상습적으로 모든 원인을 밖에서만 찾는 사람이 어디나 군데군데 독버섯처럼 꼭 있다. 그런 사람은 눈빛이 나쁘고, 표정과 인상도 나쁘다. 그들은 평생 안개 속을 걷게 된다. 이들은 창문을 돌도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산을, 남을 먼저 원망한다. 남을 원망하는 자는 결국 결과는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되어서 사는 셈이다.
예컨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모를때 주변 사람을 원망한다. 부정적이고, 항상 과거에 매몰되어 과거에 집착 된 사람이라서 현실을 현명히 헤쳐나가지 않으며, 미래를 앞당겨 설계하지 못한다.
길을 걷다가 신발 속에 작은 돌멩이가 들어가 발이 아파 걸음이 불편해졌다. 한참 동안 길이 울퉁불퉁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길을 원망하고, 돌을 받아들인 신발을 원망하고, 심지어 날씨까지 탓했다. 그러나 원인은 신발 속 작은 돌멩이 하나였다.
가던 걸음 잠시 멈춰 서서 안에 든 돌을 꺼내야 편하게 갈 수 있다 .
사람의 삶의 길에도 그런 돌멩이가 있다. 그 돌의 이름은 고집일 수도 있고, 성급함일 수도 있고, 필요치 않는 과한 자존심일 수도 있다. 그것을 꺼내지 않은 채 세상만 원망하면 발걸음은 계속 불편할 수밖에 없다. 현미경을 비추어 다 꺼내 내다버려야 자신이 보이고, 원망이 사라진다.
자기의 미련함과 어리석음, 유별나게 독선적이고, 어디서든 튀게 까탈부리고, 느긋하질 못한건 아닌지? 시비가 잦은 성품은 아닌지? 내 탓을 하면서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은 이미 지혜로운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내 탓”은 자신을 깎아내리거나 학대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책임까지 모두 떠안으라는 뜻도 아니다. 어떤 일이 있을 시에, 다만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찾는 일이다. 배가 목적지에 늦게 도착했다고 바다를 탓하기 전에 돛의 방향을 살펴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바람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돛은 조정할 수 있다. 바다를 욕하는 사람보다 돛을 고치는 사람이 먼저 항구에 닿는다.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이 더 많다. 지식을 많이 갖춘 사람도 있고 , 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진짜 머리가 좋은 사람은 자기 안의 문제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남의 허물은 누구나 쉽게 본다. 하지만 자기 그림자를 보는 일은 쉽지 않다.
호수 위를 떠다니는 배는 물 때문에 움직인다. 그러나 배를 가라앉히는 것은 바깥의 물이 아니라 , 배 안으로 들어온 물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밖의 어려움보다 더 위험한 것은 자기 안으로 스며든 핑계, 원망과 고집이다 .
창문을 닦으면 산이 보인다. 돌멩이를 꺼내면 걸음이 가벼워진다.
돛을 바로 세우면 배가 나아간다.
결국 삶을 밝히는 가장 가까운 등불은 남을 향한 손가락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작은 성찰이다.
그 성찰을 시작한 사람은 이미 앞으로 더 빛나게 나아가는 길의 절반을 건넌 사람이며, 자기 탓으로 돌릴 줄 아는 사람은 , 이미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그는 세상을 이기기 전에 먼저 자신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