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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리문중회

학성이씨 12세 인와공 이경도 묘갈명

작성자이오걸|작성시간26.02.15|조회수40 목록 댓글 0

 

인와공 묘갈명 병서

공의 휘는 경도(敬衜)요, 자는 신겸(愼兼), 호는 인와(忍窩)이며, 학성 이씨이다.

그 선조는 충숙공 이예(李藝)로, 자는 중유, 호는 학파이며 자헌대부 지중추원사 세자좌빈객을 지내고 석계서원에 배향되었다.

그 아들 종실은 가선대부 수군절도사로서 대마도를 세 차례 토벌하였다.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바다에 침몰하니, 조정에서 예관을 보내 초혼하여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5세를 지나 변림에 이르러 훈련원정을 지냈고, 그 아들 우춘은 상서원 직장을 지냈다. 그 아들 겸익은 호를 매헌이라 하였다. 선조 임진왜란 때 맏형 겸수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군자감 봉사에 제수되었으며, 뒤에 가선대부 한성부우윤으로 추증되었다. 관해 임회 선생에게 학문을 배워 학맥이 깊었다.

고조는 창발, 증조는 필성, 조부는 시태로 대대로 문학을 계승하였다.
부친은 몽상이며, 모친은 김해김씨 여구의 딸이다.

공은 영조 4년 무신년 12월 3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뜻과 행실이 맑고 고아하였다. 효행이 지극하여 정성과 공경이 천성에서 우러났다.

정조 2년 무술년에 부친상을 당하자 슬픔이 예를 넘을 만큼 깊었다. 장례 후에는 묘 곁에 여막을 짓고 삼년 동안 밤낮으로 통곡하니 하루같이 하였다. 갑자기 범이 와서 여막 곁을 지키기를 마치 집짐승과 같았으므로, 향리 사람들이 지극한 효성에 감응한 것이라 하였다.

정조 6년 임인년에 다시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앞과 같이 상례를 행하였다. 여막을 철거하지 않고 계속 모셨으며, 또 범이 와서 예전처럼 묘를 지키니 마을 사람들이 더욱 감탄하였다.

순조 7년 정묘년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니 향년 80세였다.

배위는 김해김씨 정하의 딸로,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공이 돌아가신 지 이틀 만에 음식을 끊고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나 함께 묻히기를 이루었다. 고야산 선영 아래 묘좌에 합장하였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효강, 제강, 의강이다. 모두 은전을 받아 통정대부 장예원 판결사에 제수되었다.

효강은 광억·광필·광문 세 아들을 두었고, 제강은 광일·광증·광지·광순 네 아들을 두었으며, 의강은 광호·광한·광염 세 아들을 두었다.

자손이 번성하여 다 기록할 수 없다.

명하여 이르기를, 효는 본성에서 나고, 정성은 하늘을 감동시킨다.

범이 와 묘를 지키니 그 지극한 행실이 밝게 드러났도다. 세 아들이 무성히 번창하여 가문의 명성이 더욱 빛나리라. 시와 예를 대대로 지켜 백대에 전하리라.

기축년 백오절(2009년 한식),

족손 동환 삼가 짓고, 후손 일동 삼가 세우다.

 

 현재 고야 산소에 있는 비문 해석

公의 자(字)는 신겸(愼兼)이고, 호(號)는 인와(忍窩)이다. 매헌(梅軒) 겸익(謙益)의 5세손(世)이고, 몽상(夢祥, 1707~1778)의 장자이다.

인와(忍窩)公께서는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고,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여막(廬幕)을 짓고 3년 동안 여묘(廬墓)하였는데, 시종(始終) 한결같아 사람들이 효자라고 일컬었다. 경사(經史)를 깊이 공부하여 효성과 학문이 돈독(敦篤)하였다고 울산읍지에 실려 있다.

효행(行)은 <삼강록(三綱錄)>과 <울산읍지(1899, 1902, 1934)>, <조선환여승람(1932)>, <흥려승람(1937)> 등에 전하며, 묘소(墓所)는 울주군 웅촌면 운암리 선영 하(先塋下) 묘좌(卯坐)향으로 모셔져 있다. 행장(行狀)은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가, 묘갈명(墓碣銘)은 월성(月城) 최병민(崔炳玟)이 찬撰)하였는데, 이후 후손 18세 동환이 2009년에 다시 찬하여 비석을 세웠다. 자(子)에는 8세 창발-9세 필성-10세 시태-11세 몽상-12 경도까지 5대로 외동으로 내려 오다 12세 인와공 할아버지께서 효강(孝綱), 제강(悌剛), 의강(義剛) 3형제를 낳았다. 손(孫) 광억(光億), 증손(曾孫) 종주((宗周), 현손(玄孫) 재형(在衡), 내손(來孫) 우락(禹洛), 곤손(晜孫) 수춘(樹春), 잉손(仍孫) 성걸(成杰), 운손(雲孫)에 채규(埰奎)가 있다. 종손 성걸(成杰)은 일제 강점기에 만주로 이주하여 후손들이 살고 있다.

배 김해김씨는 1728년 8월 7일생이고, 1807년 1월 4일 80세에 졸하셨으며 묘는 합분이다.

 

라) 인와공 비문 내용

전면: 忍窩鹤城李公之墓

좌측면

학파이공의 휘(諱)는 경도(敬衜)이고, 자(字)는 신겸(愼兼), 호(號)는 인와(忍窩), 매헌(梅軒) 겸익(謙益)의 5세손(世孫)으로 몽상(夢祥, 1707~ 1778)의 장자이다.

우측면

公의 휘(諱)는 경도(敬衜)요, 字는 신겸(愼兼)이며, 인와(忍窩)는 또 다른 호(號)이다. 姓은 李氏로 계출(系出)은 鶴城이다. 시조(始祖) 충숙공(忠肅公) 자헌대부지중추원사 세자좌빈객(資憲大夫知中樞院事世子左賓客)으로 諱는 예(藝)요, 字는 중유(仲游) 호(號)는 학파(鶴坡)이며, 석게서원(石溪書院)에 배향(配享)하다 是生(아들)에 휘(諱) 종실(宗實)은 가선대부수군절도사(嘉善大夫水軍節度使)로 대마도(對馬島)를 凡三度(세번)이나 토벌(討伐)하고, 귀국도중(歸國途中 후에 자료를 정리하면서 가던 도중에 풍랑을 만난 것으로 확인되었음) 풍랑(風浪)로 엄해(淹海:바다에 침몰한 다음 날 그 중에서 살아 남은 아전 한사람이 대마도 관청에 알리면서 사고에 대해 조정에 까지 알리게 되었음)하니 조정(朝廷)에서 예관(禮官)을 급파(派遣)하여 초혼장(招魂之葬: 혼을 불러 장사를 지냄)을 하도록 하였다. 이하(以下) 5세(五世)에 휘(諱) 변림(變林)은 훈련원정(訓練院正)이요, 그 아들(是生)에 휘(諱) 우춘(過春)은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이며, 是生(그 아들)에 휘(諱) 겸익(謙益)은 선묘임진왜란(宣廟壬辰倭亂)에 백형(伯兄)을 따라 휘(諱) 겸수(謙受)와 창의(倡義:국난을 당했을 때에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킴)하여 그 공으로 군자감봉사(軍資監奉

후면

事)를 제수(除授)하고 후(後)에 증직(贈職)으로 가선대부한성부우윤(嘉善大夫漢城府右尹)의 은전(恩典: 나라에서 주는 특전)을 받았으며, 호(號)는 梅軒이고, 수업(受業: 학문을 익힘)은 관해(觀海) 林先生에게 학문을 익혔으니 바로 이 사람이 공(公:인와공)의 5대조(五代祖)이다

高祖의 휘(諱)는 창발(昌發)이요, 증조(曾祖)는 필성(筮晟)이며, 祖의 휘(諱)는 시태(時泰)이다. 대대로 문학을 계승하였으며, 부친의 휘(譚)는 몽상(夢祥)이요. 비(妣)는 金海金氏 여구(汝九)의 딸이고 인와공의 모친이다. 인와공은 영조(英祖) 四年 서기 1728년 무신(戊申) 12월 초 3일 탄생하여 周南에서 살았으며, 순조 7년 1807년 丁卯 1월2일 돌아가셨다

公은 유년시절 부터 자태와 심성이 온유하고 지상(志尙: 고상한 마음)이 청아(清雅)하며, 자포복시(自匍匐時:자포자기함)에도 능지애관지도(能知愛觀之道:아주 재치있고 사랑의 길)로 온정(溫情)이 확고하고, 능극진기성(能極盡其誠:모든 일에 정성을 다함)하며, 항상(恒常) 효심(孝心)을 잊지 않았다.

正祖 二年 西紀 1778年 무술(戊戌) 조선공(遭先公:부친) 상(喪) 때에 애훼과제(哀毁過制: 슬픔에 잠기다)하여 기장후(旣葬後:장례후)에도 인여묘하(因廬墓下: 무덤앞)에서 밤낮으로 호읍(號泣: 눈물을 흘리면서 배알함)이 불철(不輟:그치지 아니하다)하니 홀연유일호(忽然有一虎: 갑자기 범이 나타나도)가 래수려측여가축(來守廬側如家畜 : 여막 옆에서 가축(개, 닭 등)과 같이 지내니 인개이지(人皆異之: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다 하였다)하더라.

正祖六年 西紀 1782年 壬寅 존조내간시(存遭內艱時: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도 先公喪(부친 상)과 一如前喪及葬(똑같이 상을 치르다)하고 우(又: 또한) 시려불해(侍廬不解: 모시던 여막을 뜯지 아니하고)하니 又有一虎(또한 범이 내려와도)가 래수여전(來守如前:전과 같이) 부모님 산소 지키기를 한결같이 하거늘 향리(鄕里)가 경탄(驚歎)하여 이위성효소감(以爲誠孝所感: 이 이상 더 효성이 지극할 수가 없다고 할까)이러라 公이 순조(純祖) 七年 西紀 1807年 丁卯에 우연득병(偶然得病: 우연히 병을 얻어)하여 고종우침(考終于寝 깊은 생각에 잠김)하니 英祖 四年 西紀 1728년 戊申 八月 七日 出生하고, 配 金海金氏 정하(鼎夏)女는 公의 몰지(沒之:돌아가심)에 천이온(天而溫: 하늘도 감동)하며 왈오생여부자동년(曰吾生與夫子同年: 나이도 1728년생으로 같은 해이고)하고 사이동일(死以同日: 죽음도 같은날)이고, 이수동혈지원(以遂同穴之願: 죽음도 같은 해 한날 한시에 죽기를 원하였음)이라 하며 축절입이일(逐絕粒二日: 공이 돌아가신지 이틀만에 지아비를 따라 돌아가시니) 역현(亦賢) 의재(矣哉: 이 또한 얼마나 애통한 일이겠는가 오호 통재라) 장간고야전산(葬干古也前山: 장사는 고야산) 선영(先塋) 산에 묘좌(卯坐)로 합폄(合窆)하니 공(共)히 향년(享年) 80이라. 생전(生前)에 3남으로 효강(孝綱), 제강(悌綱), 의강(義綱) 모두 장수(長壽)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장예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의 은전(恩典)을 받았다.

효강(孝綱)은 3남으로 광억(光億), 광필(光弼), 광문(光紋)이요, 제강(悌綱)은 4남으로 광일(光一), 광증(光增), 광지(光枝), 광순(光舜)이며, 의강(義綱)은 3남으로 광호(光浩), 광한(光漢), 광염(光濂)인데 이하 손증(孫曾)은 너무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

공(인와공)은 후손 영의(永義) 기진(基珍), 채욱(埰昱)이 공(公)의 유사(遺事내려오는 사적(事蹟))를 발섭(跋涉 여러 곳에 두루 다니면서)하여 持而來請(이어 받드기를) 바랄 뿐이다

종사(終辭: 끝으로)

 

좌측면

依而敍之(엎드려 사족을 다하여), 繼以銘之曰旣孝旣仁(비를 새겨 받듬이 또한 효이요 亦文亦禮(글로써 예를 다함)로다 有本如是(모든 행실에 근본을 두고 행하니) 가용불달(何用不達 어찌 통달하지 않겠는가)하고 무생삼지(茂生三枝: 세 아들이 왕성하니) 以振家聲(가문의 명예로움으로) 家道熾昌(집안이 번창하며) 子孫繁榮(자손번영)하리라

서기 2009년 己丑 百五節(한식일) 족손(族孫) 동환(東煥) 근찬(謹撰)

후손(後孫) 일동 근견(謹堅)

 

 

효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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