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직손씨(一直孫氏) 할머니
가) 손씨 할머니의 혼인
다원마을 일직손씨 할매의 부친은 성균관진사 손시복이시고 6대조 할아버지께서는 격재(格齋) 손조서(1412~1473)이다.
어느 청명한 날 밀양 다원마을 손진사댁 사랑채에선 3맞선이 이루어 진다. 손진사댁 2남 2녀 중 맏딸께서 멀리 울산에서 오신 신랑 될 우리 겸익 할아버지와의 선을 보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선을 보고 그 자리에서 신부 부친이 여부를 물어보니 망설임 없이 하겠다고 하여 부친인 손진사께서 궁합(宮合)을 보고 허혼(許婚)을 하겠다고 말하고 신랑께 돌아가서 납채(納采)의 예로 사주를 인편으로 보내달라고 하고, 겸익 할아버지께서는 울산 웅촌 본가로 돌아와서 사주를 적어 보내는데 가느다란 싸리나무 가지 사이에 사주 봉투를 끼우고 청홍의 실로 타래를 정성껏 만들어 아침 일찍 일어나 사당에 고하고 신부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집에서 혼인날을 정하여 연길(涓吉)을 보내오면서 혼사가 시작되었다.
혼인날이 되어 밀양 다원 마을로 가신 겸익 할아버지께선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랑 신부가 성복(成服)을 하고, 초례상(醮禮床) 차리고 혼인식(婚姻式)을 치르셨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할머니께서 시집으로 오시는 날의 행장은 말 두 필, 가마 두 채, 우마차 한 대,가마꾼을 포함한 20여 명과 함께 2박 3일에 걸쳐 도착하시고, 우귀(于歸)와 현구례를 마치면서 시집오셨다.
나) 일직손씨 할매의 웅촌 시집 생활
겸익 할아버지와 손씨 할머니의 나이 28세의 차이가 있다. 할머니께선 잠시라도 여유의 시간이 없었다. 심씨부인 보상금 창발 융발 할아버지들 분가로 인한 재산을 나누면서 할아버지께서는 가정 경제가 많이 기울어져서 어려웠다.
할머니께서 시집오시면서 지참하고 온 논밭 30~40마지기와 상당한 돈과 패물, 소달구지, 같이 따라온 몸종들을 활용하여 살림살이를 바로 하였다. 할아버지께서는 관직인 군자감참봉직(軍資監參奉職: 군수품 저장과 출납에 관한 일)에 복직하면서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성실히 봉직하셨다.
집안 살림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된 후 제사 문제로 사랑채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할아버지께 청을 드려 창발 할아버지가 모시던 문씨 할머니 제사도 나의 생전까지는 모시도록 허락받고 손씨 할머니께서 모시게 된다. 그 후 창발 할아버지는 한 달에 두 차례 정도 문안 인사를 다녔는데 융발 할아버지께서는 한동안 소원하게 지냈다고 전한다.
다) 인생여정(人生旅程)
밀양 일직손씨 할머니(1603~1641)는 겸익 할아버지보다 4년 먼저 돌아가셨다.
38년의 짧은 인생 여정 속에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을 사셨다. 시집오실 때 같이 왔던 말 두 필 중 한 필을 주고 갔는데 말을 먹일 사료비 문제로 말을 팔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빠듯한 살림살이를 꾸리면서 정원(早卒), 정헌(덕계), 정의(대여), 정례(석천), 정지(초천), 정신(명곡) 여섯 분의 아들을 낳고 교육하는 과정들이 오롯이 할머니의 몫으로 열심히 삶을 펼쳐 나가셨다. 시가의 무인(武人)적인 정서에서 밀양 친정의 격재(格齋) 손조서 육대조 할아버지의 학문을 바탕으로 하는 문인(文人)으로 인성 교육해 나가셨다.
그 후 할머니 후손들께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셨다. 그리고, 겸익 할아버지께서도 봉사직을 물리고 학문에 열중하시는 것도 부모는 물론 처가의 영향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겸익 할아버지와 겸복형님이 함께 멀리 전라도 나주 관해 임회(1562~1624)에게 학문을 닦고 돌아와 매헌정사를 짓고 학문을 계속이어 가면서 후학을 가르친 것을 보면 할머니의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밀양 일직손씨 할머니의 영향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본다. 그에 반하여 오늘의 우리 후손들이 밀양 일직손씨 할머니를 제대로 모시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2. 일직손씨 할매 묘비명
가. 비석에 세겨진 손씨할매 소개
배(配) 일직손씨(一直孫氏)는 격제(格齊) 휘조서공(諱肇瑞公)의 6대손인 휘 시복(諟復)의 여식이고 자식은 육남(六男)으로 정원(廷元)은 조졸(早卒)하고, 정헌(廷憲) 정의(廷義) 정례(廷禮) 정지(廷智) 정신(廷信)을 두었다. 모두 효우(孝友)와 선비로서 칭명(稱名)되었으며 집집마다 손자 증손자를 몇 명씩 두었다.
부인 손씨는 만력(萬曆) 31년 계묘년(1603) 4월 초 8일에 태어나서 20세에 혼인하고 숭정(崇禎) 14년 신사년(1641) 11월 초 10일에 생을 마치니 향년 39세였다. 임오년(1642) 11월 14일 언양읍 구수리 무등마을 천소(泉所) 무동산(舞洞山)에 을좌신향(乙坐辛向)으로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고(考)의 휘는 시복(諟復)이고, 조(祖)의 휘는 호(顥)로 진사였고, 증조의 휘는 상운(祥雲)으로 장사랑(將仕郞)이었으며, 고조의 휘는 세흘(世紇)이었고, 외조 박문효(朴文孝)는 찰방(察訪)이었다. 모두 6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철성(鐵城) 이광계(李光啓)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고령(高靈) 김중석(金重碩)에게 출가하였으며, 장남의 휘는 정원(廷元)으로 결혼 전에 일찍 죽었고 그 다음은 정헌(廷憲), 그 다음은 정의(廷義), 그 다음은 정례(廷禮), 그 다음은 정지(廷智), 그 다음은 정신(廷信)이었다. 내외 증손과 현손은 매우 번성하였다.
격재 선생 휘 조서의 7세손이고 고조의 휘는 세흘(世紇)이며 증조의 휘는 상운(祥雲)이며 장사랑을 지냈다. 조부의 휘는 호(顥)이며 진사를 지내셨고, 아버지는 휘가 시복(諟福)이며 밀양에 거주하셨다. 어머니는 밀성 박씨이며 찰방을 지낸 문효(文孝)의 여식이다.
일직손씨 할매는 만력 계묘년에 태어나시어 계례를 마치고 휘 겸익에게 시집을 오셨다. 부인께서는 숭정 신사 11월 초 10일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향년 39세였다. 묘소는 언양현 동무동(東舞洞) 을좌에 모셨다.
나. 일직손씨 할매 친정 부친 시복(諟復)의 묘비문
성균진사(成均進士) 휘 이당(怡堂) 일직손공(一直孫公) 휘 시복(諟復)의 묘비문(墓碑文)으로 밀양 다원 후록에 소재해 있다.
공의 휘는 시복(諟復) 성균 진사, 호는 이당(怡堂)이시다. 우리 손씨의 본성은 순(荀)씨였으나 비조 휘 응(凝) 벼슬이 상장군 이분에서 몇 대를 내려와 휘 간(幹)에 이르러 고려 현종의 휘와 음이 같다 하여 손(孫)씨로 바꾸어 사성하여 이후로 밀양 일직으로 본관을 삼았다.
이분에서 몇 대를 내려와서 휘 세경(世卿) 벼슬이 상의직장동정이요. 이분의 증손에 이르러 휘 홍량(洪亮) 벼슬이 좌리공신 삼중대광 판삼사사 직성균 시호는 정평(靖平) 안동 타양서원과 밀양 혜산서원에서 선생의 고풍 학덕을 기리는 향사를 받들고 있다.
자녀 2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진원(振元) 증 통정대부요. 차자 맹생(孟生) 무후하다. 장녀는 학성이씨 겸익(謙益)에 출가하고 차녀는 초계전씨 렴(廉)에 출가했다.
다. 일직손씨 할매의 친정 집안 족보
손씨 할매의 친정 집안은 밀양시 산외면 다원1리길 17-18(산외면 다죽리 607)에 살고 있다.
밀양 일직손씨 할매 친정 집안 족보에는 시집간 우리 할매의 아들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양반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일직손씨 할머니, 조선의 며느리로 살아낸 삶의 기록
조선 중후기, 한 여인의 인생 여정이 오늘날 후손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일직손씨(一直孫氏) 손씨 할머니는 1603년 만력 계묘년에 태어나 39세를 일기로 1641년 숭정 신사년에 생을 마쳤다. 짧다면 짧은 생애였지만, 그녀의 삶은 한 집안의 근간을 세우고 문중의 정신을 일으킨 위대한 서사였다.
가. 혼인의 인연, 다원에서 웅촌까지
손씨 할머니의 부친은 성균관 진사 손시복이며, 6대조는 격재 손조서(1412~1473)였다. 명문가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느 청명한 날, 밀양 다원 마을 손진사댁 사랑채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 울산 웅촌에서 온 겸익(謙益) 할아버지와의 선을 본 그 자리에서, 그녀는 주저 없이 혼인을 수락했다.
그날로 부친 손진사는 궁합을 보고 허혼하겠다는 뜻을 전했고, 겸익 할아버지는 본가로 돌아가 사주를 정성껏 준비했다. 싸리나무 가지 사이에 사주봉투를 끼우고, 청홍의 실로 타래를 엮어 아침 일찍 사당에 고한 뒤 신부 집으로 보내는 정성은 당시 유교 가문의 혼례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혼인날, 겸익 할아버지는 밀양으로 향했고, 성복을 갖추고 초례상을 차린 뒤 전통 절차에 따라 혼례를 올렸다. 신부가 시집오는 날에는 가마 두 채, 말 두 필, 우마차 한 대, 가마꾼과 몸종을 포함한 스무 명의 인원이 이틀에 걸쳐 이동했고, 우귀와 현구례를 거쳐 웅촌 시댁에 도착했다.
나. 28세 나이 차를 넘은 살림의 지혜
28세 연상의 남편 겸익 할아버지는 당시 가문의 분가와 재산 분할 문제로 집안 경제가 기울어 있었다. 손씨 할머니는 시집올 때 가져온 논밭 30~40마지기, 금전, 패물, 소달구지, 그리고 몸종들을 이용해 가세를 일으켰다. 남편은 군자감참봉직에 복직하며 성실히 관직에 나아갔고, 아내는 살림을 일구며 문중의 제사까지 맡았다.
한 차례는 창발 할아버지가 모시던 문씨 할머니의 제사를 사랑채에서 듣고, 남편에게 생전에만이라도 제사를 모시게 해달라고 청해 허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가문의 제례 질서와 효의 실천이 함께 살아 있었던 장면이다.
다. 여섯 아들을 키운 문인의 어머니
손씨 할머니는 겸익 할아버지보다 4년 먼저 세상을 떠났으나, 그 짧은 생애 동안 정원(早卒), 정헌(德溪), 정의(大與), 정례(石川), 정지(楚川), 정신(鳴谷) 등 여섯 아들을 낳아 바르게 길렀다. 시가가 무인적 분위기를 띠었다면, 손씨 할머니는 격재 손조서로부터 내려온 문인의 자질을 바탕으로 후손 교육에 힘썼다.
그 영향으로 겸익 할아버지와 장남 겸복은 전라도 나주 임회에서 수학한 뒤 매헌정사를 세워 후학을 길렀으며, 후손 중에는 이름난 인물들이 적지 않게 배출되었다. 이는 문인적 교육의 전통과 어머니로서의 리더십이 조화된 결과라 하겠다.
라. 무등산 언덕에 잠든 삶
1641년 11월 초 10일, 손씨 할머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11월 14일 언양읍 구수리 무등마을 무동산 언덕에 장사되었다. 향년 39세였다. 비문에는 그녀의 가문 계보와 자녀들의 이름이 오롯이 기록되어 있다.
그녀의 친정 부친 손시복 진사의 묘비는 밀양 다원 후록에 남아 있으며, 성균 진사로서의 학문과 가문의 변천사, 자녀들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특히 그녀의 친정 족보에는 시댁 후손까지 기록되어 있어, 양반가로서의 위엄과 유대의식이 잘 드러난다.
마. 오늘의 후손에게 남긴 물음
오늘날 우리는 그녀의 삶을 단순히 한 여성의 가정사로만 볼 수 없다. 이는 한 시대를 살아낸 조선 여인의 위엄이자, 가문과 지역 공동체를 일군 뿌리 깊은 삶의 증거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과연 밀양 일직손씨 할머니를 제대로 기억하고 모시고 있는가?
그 질문은 단순한 회고를 넘어, 오늘날 후손이 감당해야 할 역사적 책임과 자긍심의 시작일 것이다.
4, 외가댁 방문
가. 밀양 다원마을 외가댁 문안 인사말
시복할아버지께 삼가 보고드립니다.
우리는 매헌공 이겸익의 후손으로 2024년 10월 학성이씨 서면파 매헌공문중회를 결성하고, 문중의 내력이 담긴 “매헌공 이겸익”이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우리의 외가 시복할아버지께 인사드리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동안의 세월이 400년이 지났습니다.
손씨할머니께서 멀리 울산으로 시집온 해가 1622년입니다.
역사는 현재를 기준한다고 합니다.
그때는 하나의 가정이었으나 이제는 큰 문중이 되었습니다.
시작은 시복할아버지께서 곱게 키운 딸을 겸익 사위에게 혼인이 되도록 허락하신 데서 이루어 졌습니다.
우리는 할머니의 후손으로 뜻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진한 관계도 드문 일이겠지요.
그동안 도리에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여기가 외갓집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푸근하기도 합니다.
시복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셨기에 오늘 우리가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동안 400년이 걸렸고 오는데는 한시간이 걸렸습나다.
멀고도 가까운 곳이라고 할 수 있죠. 할아버지 할머니 반갑죠. 인사드립니다
2025. 5. 4
매헌공문중회 일동
회 장 이 수 춘 올림
밀양 다원마을 외가댁 문안 인사
梅軒後裔拜先靈 매헌후예 배선령
매헌공의 후손이 조상님의 영전에 절을 올립니다.
學姓宗親結義誠 학성종친 결의성
학성이씨 문중이 의롭게 하나로 모였습니다.
四百年間今首至 사백간간 금수지
사백 년의 세월을 지나 오늘에야 처음 찾아뵙습니다.
一書傳世慰幽情 일서전세 위유정
책 한 권에 마음을 담아 조상께 위로를 전합니다.
遠嫁孫姑成大族 원가손고 성대족
손씨할머니의 혼인으로 큰 문중이 시작되었고,
始由佳偶啓門庭 시유가우 계문정
그 아름다운 인연이 문중을 열게 되었습니다.
古來家國皆根本 고래가국 개근본
예로부터 가정과 나라는 근본이 같으며,
血脈千秋不變盟 혈맥천추 불변맹
혈맥은 천추에 변치 않는 맹약입니다.
世路雖遷心未遠 세로수천 심미원
세상이 달라져도 우리의 마음은 멀지 않았고,
外家此地似鄕城 외가지지 사향성
이 외가 땅은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喜見祖容懷往事 희견조용 회왕사
조상님의 모습을 뵈오니 옛일이 떠오르고,
謹將忠悃致文呈 근장충곤 치문정
삼가 충심을 담아 문안을 드립니다.
2025. 5. 4
梅軒公門中會 一同
會長 李 樹 春 拜上
나. 외갓댁에 다녀 와서 연산계 회장 동일
400백여 년 인연 따라 찾아간 그곳에는
400년의 차나무가 있었네
그 차나무 향기 가득한 마을
그 마을 이름이 茶原 마을 이라네
마을 중심 해산서원 책 읽는 소리 중음하게 들리고
서원 아래 큰 기와집이 손진사댁이라네
큰딸 일직손 씨 매헌 할배 아내되어
일가 이루어 인연향기 풍기니
그 향기 아름답고 향기롭도다
外家尋訪詩 (외가에 다녀와서)
追念緣根歷四百 추념연근 역사백
400년 인연의 뿌리를 되새기며,
茶香古木引人客 다향고목 인인객
그 옛 차나무 향기에 이끌려 찾아간다.
村名自古曰茶原 촌명자고 왈다원
마을 이름도 예로부터 다원(茶原)이라 불렸고,
山靜風和心自適 산정풍화 심자적
산은 고요하고 바람은 부드러워 마음이 절로 편안하다.
書聲泠泠出書院 서성령령 출서원
책 읽는 소리 맑고도 곱게 서원에서 울려나오고,
惠山講義重倫格 해산강의 중륜격
혜산서원엔 인륜을 중히 여기는 가르침이 있다
瓦舍高門乃孫齋 와사고문 내손재
서원 아래 기와집은 바로 손진사의 옛집,
風流世胄傳徽赫 풍류세주 전휘혁
고귀한 가문은 멋과 이름을 길이 전해왔다.
長女婚聯李氏門 장녀혼련 이씨문
큰딸이 매헌공 이씨 가문에 시집하여,
梅軒締結百年情 매헌체결 백년정
매헌공과 백년의 인연을 맺고,
芳芬繼世生嘉氣 방분계세 생가기
그 인연 향기롭고 세세대대로 기운을 이뤄,
深感恩光在我靈 심감은광 재아령
그 은혜 깊이 느끼니 내 영혼이 감동하네.
2025.5.4. 연산계 회장 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