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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공 문중회

제9막 매헌공 문중의 재실

작성자이오걸|작성시간25.08.04|조회수217 목록 댓글 0

제9막 매헌공 문중의 재실

 

<제목 차례>

1. 매헌정사 4

2. 매헌공 겸익의 매헌정사 5

3. 매헌정사 중창건과 문중의 화합 칭송글 6

4. 매헌정사 중창을 기리며 7

5. 매헌정사 복원 경위 8

6. 매헌정사 복원 송 9

7. 매헌정사의 역사적 의의 10

8. 매헌정사의 낙성과 매헌공의 유업 11

9. 매헌의 뜻을 함께하여 정사 부흥을 기리며 12

10. 연못이 있는 신령한 터 문정가의 흥할 길지 13

11. 매헌정사 복원찬 14

12 혈통을 이어 족보를 세움 15

13. 梅軒精舍에서 무신보 반질 産室 16

14. 매헌정사복원기 17

15. 가문의 번영과 종족의 융성 18

16. 매헌정사에 바치는 시. 19

17. 재천정 20

18. 재천정 중수를 기념하다 21

19. 학성 이씨 근재공 고택을 찬미함 22

20. 활천정 23

21. 活川亭 重修紀 24

22. 활천정기 25

23. 활천정 찬송 시 26

24. 활천정과 이회계 찬송시 27

25. 규현공의 덕을 찬송하다 28

26. 초산재의 내력 29

27. 初山齋 松堂 錫淳 追慕之所 紀念詩 30

28. 초산재 건립을 한 옹의 위대함 31

29. 安花庵의 沿革 36

30. 內光齋의 沿革 37

31. 체화당과 구락 공의 심정 39

32. 육석정(六石亭) 記略 40

33. 육석정 기념 시 41

34. 反求齋 記略 42

35. 반구재 기념 글 43

36. 中里門中會館 記略 44

37. 서창 강변에 중리문중의 덕을 새기다 45

38. 중리문중 제강 齋堂 46

 

제9막은 매헌공 문중의 여러 후손들의 재실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1. 매헌정사

매헌정사는 충숙공 이예의 7세손이신 매헌공 겸익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건립한 정사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고연리 1184번지 연답마을 입구 언덕에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정사 뒤로는 천성산의 줄기로서 향로봉과 연화봉이 병풍처럼 둘렀고, 앞에는 넓은 전답이 펼쳐져 있으며, 좌우에 청룡백호의 형세가 뚜렷하고, 멀리 문필봉이 솟아 대문장가가 배출될 터라 일컬어진다. 이곳은 조선 중기 고승 性智大師, 국풍께서 길지를 점한 명당으로, 매헌공의 묘소가 인근에 위치한다.

정사는 2004년 11월 공의 서거 360주기를 기념하여 후손들의 정성으로 복원되었으며, 총 500여 평의 대지에 본채인 매헌정사와, 관리사인 운고재 및, 출입문인 인의문 등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후손들이 공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고 선영의 정기를 계승하고자 뜻을 모아 마련한 유서 깊은 제향 공간이다.

 

 

 

 

2. 매헌공 겸익의 매헌정사

매헌공은 훈련원정 우춘의 아들로, 1575년(선조 8년) 경상도 웅상 주남리에서 태어나셨다. 5세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병중의 모친을 업고 원적산으로 피난하여 정성껏 간병하니, 후일 마을에서는 그 고개를 ‘이효자곡’이라 칭하였다.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백형 잠와공 겸수를 따라 의병으로 참여하여 전공을 세우고 군자감참봉에 제수되었으며, 후에 한성부우윤에 증직되었다. 한때 백형의 주선으로 나주 임관해 문하에서 수학하며 9경을 독파하였고, 학덕이 출중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국이 크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형제간 우애 또한 깊었다. 병란 중 벌목 도중 왜병과 조우하여 큰 칼을 빼앗아 적을 베고 귀향하였으며, 종가에서는 그 칼을 오래도록 보관하였다.

선조 26년, 왜군과의 국지전이 계속되던 시기 강화사가 된 형을 수행하여 울산과 서생 일대에서 중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 공훈이 높이 평가되어 후일 조정에서 육의사의 한 사람으로 추증되었다.

공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은 2004년 울주군 웅촌 고연리에 매헌정사를 건립하였으며, 정사는 학성이씨 5파 계행을 확정한 산실로서 문중의 성소가 되었다.

 

3. 매헌정사 중창건과 문중의 화합 칭송글

매헌정사가 300여 년 만에 다시 중창되어 문중의 화합과 그 기반이 되는 전통을 기리는 시이다

우뚝 솟은 매헌정사 낙성을 고하니 천년의 옛터에서 숙원이 이루어졌네.

중창한 대업은 문중의 정성으로 이루어지고 천성산 사철마다 영기가 모여들어 빛나네.

잠시도 쉬지 않고 어머니를 항상 그리며 충과 효를 겸전하여 그 빛남이 다하지 않네.

삼백 년의 세월 뒤에 다시 빛이 돌아오고 문중이 화합하여 마음을 모아 융성하리라.

조상의 공덕이 만세토록 세상에 빛나고 후손들은 가문의 덕을 이어 향기가 멀리 퍼지네.

천륜의 즐거움이 끝없는 복으로 이어지고 매헌의 정신은 대대손손 영광을 누리리라.

이 시는 매헌정사의 중창이 문중의 화합과 가문의 전통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후손들에게 영원히 그 덕과 정신이 이어져 번영하게 될 것을 표현한 내용입니다.

 

4. 매헌정사 중창을 기리며

이 시는 매헌정사의 중창을 중심으로 자연과 조상의 유덕이 후세까지 이어지고, 그 정신이 후손들에게 전해져 효도와 충성을 계속해 나가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매헌을 다시 지으니 기운이 여전하네. 후손들이 정성 다해 조상 은혜를 공경하네.

보수하여 온전하니 옛 모습 새로워지고 잡목을 베어내니 사방에 봄이 깃드네.

소나무 바람 옛처럼 높이 불며 멀리 울리고 달 그림자 예전처럼 희미하게 문에 비치네.

천년의 정신이 이제도 살아 있으니 향 연기 피어올라 효도의 넋을 기리네.

정사 위의 기세가 만대에 걸쳐 이어지고 문무를 겸해 수양한 후손들이 창성하네.

영산과 맑은 물이 오래도록 은혜를 베풀고 매헌의 덕이 세상에 무궁히 전해지리라

 

 

 

5. 매헌정사 복원 경위

梅軒精舍는 충숙공의 7세손이신 매헌공 이겸익을 추모하기 위하여 중리와 연산계 후손들의 합동으로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년에 걸쳐 복원되었다. 복원 건물로는 정사 본채인 매헌정사와 더불어, 제사를 준비하고 손님을 맞는 요사채인 雲孤齋와 출입문인 仁義門이 함께 지어졌다.

仁義門은 유학의 근본 덕목인 仁義禮智를 상징하며, 이는 맹자의 四端과 四德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6. 매헌정사 복원 송

이 頌은 조선 선조대에 태어나 효행과 충절로 나라와 가문에 큰 공을 세운 매헌공 이겸익의 삶을 기리며, 그 뜻을 이어 매헌정사를 복원한 후손들의 정성을 담아 2004년 11월 17일, 12세손 동필에 의해 지어진 찬문이다.

매헌공 이겸익은 조선 선조조에 태어나 독서와 근검, 인의와 용기, 효행과 충절로 국가에 보국하고, 여섯 아들을 동량으로 길러 말년에는 정사를 세워 후학을 가르쳤다. 향로봉 기슭에 유택을 정하여 자손에게 음덕을 내려주셨고, 문무를 겸비한 자손들이 대과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냈다. 공이 선화하신 지 360년 만인 2004년(갑신년), 후손들이 뜻을 모아 매헌정사를 복원하고, 정성으로 낙성을 고하며 송문을 올렸다

 

 

7. 매헌정사의 역사적 의의

매헌정사는 무신보의 편찬과 계행 확정이 이루어진 상징적인 공간으로, 학성이씨 五門이 하나로 모여 단합을 이룬 역사적 聖所이다. 조선 세종 이래 학성이씨는 울산의 土姓으로서 명문가로 존경받았지만, 왜구 침탈과 지역적 소외로 인해 숙종 이후까지도 출사자 없이 어려움을 겪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울산은 왜구 주둔지로 전락하였고, 향민과 유민, 降倭人·向化民 등이 혼거하던 시기, 족보를 통한 신분 확인과 결속은 절실한 과제였다.

이에 따라 서면, 월진, 곡강, 농소 청량의 5파 대표 인사들이 천성산 자락 운흥곡에 모여 1668년 무신보 간행을 선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매헌정사는 단순한 재실이 아닌 문중 결속과 정체성 확립의 증시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8. 매헌정사의 낙성과 매헌공의 유업

이 시는 매헌공이 정사를 세우고 만년에 매화를 심으며 후세를 기르는 모습과 그의 업적이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모습으로 후손들이 조상을 섬기는 정성을 담아 표현한 것이다.

 

우뚝 솟은 매헌정사 낙성을 고하니 천년 묵은 옛터에 숙원이 이루어졌네.

중창한 대업은 문중의 정성으로 이루어졌고 천성산 사철마다 영기가 모여들어 빛나네.

순간도 쉬지 않고 어머니를 기리며 충과 효를 겸전하여 그 빛남이 궁하지 않았네.

뜰 앞에 매화를 심어 햇살이 짙게 드리우고 후세의 인재를 기르며 덕과 은혜가 이어지네.

문중이 협력하여 큰 업을 이루고 만고에 그 이름이 나라의 기상을 밝히리라.

맑은 기풍과 의절이 집안을 멀리까지 전하고 매헌공 선조를 추모함이 영원히 무궁하리라.

 

9. 매헌의 뜻을 함께하여 정사 부흥을 기리며

강성문씨 할매 집안의 중리와 일직손씨 할매의 연산계에서 매헌공의 유업을 이어 받기 위해 하나의 문중으로 합심하기 위해 매헌공께서 후진 양성을 하셨던 매헌 정사를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앞에 중창하기로 결의 합십하여 중창함으로써 문중의 화합을 이뤃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을 칭송하는 글이다.

 

매화 향기 오래 남아 가문의 덕망 전해지고, 매헌의 빛이 멀리 퍼져 후손들이 이어가네.

선조의 남긴 업적은 천년토록 굳건하고, 충효의 정신은 백대에 걸쳐 선명하네.

종친들이 힘을 모아 종사를 다시 일으키고, 한마음으로 함께 세워 새로운 역사를 쓰네.

산소 앞에 정사를 세워 조상의 뜻을 높이고, 정사 뜰에 모인 후손들, 화합의 샘이 솟네.

매헌의 가르침 따라 현명한 인재를 기르고, 문무를 함께 닦아 조상의 말씀을 잇네.

가문의 이름은 영원히 울려 복과 장수가 깃들고, 문중이 화목하여 만년토록 평안하네.

매헌공의 유업을 이어받고 문중의 화합을 이룬 뜻깊은 결의를 기리기에 어울리도록 하였다.

 

 

 

10. 연못이 있는 신령한 터 문정가의 흥할 길지

매헌공 할아버지이 묘소가 있는 자리는 연꽃이 피어 나는 연못이 있는 산이라 산소에 석물을 하지 않는 곳이며, 묘소와 매헌정사에서 문필봉을 바라보고 있어 집안에 대 문장가가 배출될 수 있는 조선에서 제일가는 명당으로 후손들이 발복할 수 있는 길지임을 칭송하는 시이다

 

연못의 고요한 곳에 신령한 빛이 깃들고, 푸른 산 능선과 푸른 소나무가 길지를 감싸네.

조상의 묘소는 단정히 앉아 길한 기운을 맞이하고, 문필봉이 높이 솟아 집안의 학문을 비추네.

석물은 두지 않으니 하늘의 뜻이 두터우며, 연꽃이 피는 자리마다 복과 장수가 이어지네.

명문 가문 대대로 은혜와 덕을 이어받고, 문운이 번성하여 나라의 향기를 빛내리라.

산과 물이 감싸며 상서로운 기운을 품고, 해와 달이 돌면서 가문의 터전을 지키네.

후손들은 번영하며 영화로움이 멀리 퍼지고,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가문과 나라를 찬양하네.

매헌공 묘소와 매헌정사가 품고 있는 신령한 기운과, 문필봉이 상징하는 학문의 번성을 함께 담아 후손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시이다.

 

11. 매헌정사 복원찬

매헌의 정신과 후손들의 복원에 대한 의지를 담은 글입니다

매헌을 다시 세워 만세의 영광이로다 향기로운 눈꽃 뜰에 가득해 옛 운치 살아나네

충절로 집안을 전하니 소나무와 잣나무의 굳은 뜻이여 시와 서책으로 교화하니 후손들이 이룩하리라

산 그림자 푸른 안개로 옛 터를 감싸고 맑은 샘물 소리 마음의 길을 씻으리라

세월이 갈고닦아 비석은 더욱 단단해지고 풍운이 일더라도 그 뜻은 기울지 않으리

매화꽃 가득 피어 천리까지 향기롭고 학의 그림자 하늘을 날며 뜻을 굽히지 않네

세세토록 자손들이 조상의 업을 겸손히 잇고 동산의 차가운 달빛이 붉은 정성을 비추리라

 

 

12 혈통을 이어 족보를 세움

매헌공의 후손들은 매헌정사를 지어 놓고 울산에서 학성이씨로서는 海邑의 卑俗人이란 멸시와 수모를 속히 벗는 방법은 系行이 뚜렸한 族譜의 刊行으로 단합된 土姓다운 힘을 과시할 수 있음이 시급하여 족보 간행을 통해 단합하고 가문의 힘을 보여주려는 내용을 담은 시이다.

 

조상의 덕은 천 년 동안 산과 바다처럼 깊고 세대를 이어 행하니 바른 기운이 내려온다

가문은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족보를 엮어 조상의 업적을 드높인다

마음을 합쳐 고금에 우리 토성을 자랑하고 하늘의 명은 이어져 영원히 침범되지 않으리

해읍의 평범한 자들의 비웃음도 곧 사라지고 조상의 업적은 빛나 세상의 이름들이 숲을 이룬다

공적이 멈추지 않고 마음은 하나되어 동기간의 정은 천추토록 깊고 하나이다

족보를 완성하여 후대에 빛을 전하고 대대로 찬란히 크게 나아가리라

이 한시는 후손들이 조상의 업적을 기리고 가문의 단합을 통해 영광을 이어가는 모습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13. 梅軒精舍에서 무신보 반질 産室

전란 후 고향에 돌아온 良.賤民은 지배계급이나 이웃에 依하여 身分이 확인됨에 종전대로 安住했지만, 많은 流民들이 定着하여 향호가 증가되고 항왜인과 明의 향화민이 혼거하는 蔚山에서 토성인 학성이씨는 신분을 분명히 하는 문적이 필요치 않았겠는가 그리하여 우리 문중 5파는 정의, 천기, 달영, 시만, 찬우, 명, 기, 익공의 8인께서 운흥사에서 학성세헌이라는 무신보를 만들게 되었고, 이 족보를 반질한 산실이 곧 매헌정사라는 사실임을 칭송하는 시이다

 

유민들 돌아와 자리를 잡고, 신분이 다시 확인되네. 향촌은 변하고, 향호는 늘어나네.

향화민 함께 살며 문화를 나누니, 학성이씨, 그 뿌리는 여전히 굳건히 서 있다.

매헌정사, 무신보를 반질하며 그 뜻을 남기다. 신분 확인할 문적 있어, 향촌은 질서 있다.

과거를 기리며 한시 남기니, 후세가 알리라. 고향은 평화롭고, 유민들도 정착하여 다시 시작한다.

역사는 흐르고, 신분 갈림길 다시 온다. 학성 후손, 그 길을 따라가리라.

모두 한 시대 흔적, 잊지 않으리라.

이 시는 유민들이 돌아와 신분을 확인하고 정착하는 사회적 변화를 담고 있으며, 향촌에서 학성이씨 가문의 뿌리와 그들의 역사를 기리기 위한 의미를 담고 있다.

 

14. 매헌정사복원기

반계공은 竹塢 遺集에 梅軒精舍와 神道碑는 근오가 在世時에 꼭 세우되 그 비용은 연답의 묘답에서 얻는 所出을 殖産하여 마련하라. 同時에 매헌공의 行狀) 주면서 南景羲공의 撰碑銘을 받도록 하라』고 竹塢公께서 回想하였으니 梅軒精舍의 復元은 晩時之歎임을 칭송하는 시이다

 

반계공의 유언에 따라, 매헌정사 복원을 결심하고, 비용은 묘답에서 얻어, 죽오공의 지혜를 따라,

남경희의 찬비명을 받으며, 매헌정사는 다시 일어섰고, 그 뜻은 후손에게 길이 전해지리라.

연답의 소출로 마련된 재원, 매헌공의 행장은 후세에 전해지며,복원된 정사는 그 의미가 깊고, 지금, 그 모든 일이 이루어졌으니, 모두가 이 역사를 기리며 한시를 남기리라.

이 시는 매헌정사의 복원과 그 의미를 기리며, 반계공의 유언에 따라 이루어진 복원의 역사적 중요성과 복원된 매헌정사의 의미와 그 기념이 후세에 전해질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5. 가문의 번영과 종족의 융성

최초 학성이씨 족보를 만드는데에는 매헌공의 가세가 주도하고. 6형제의 대표로 정의공은 구강서원을 창건하는 등의 울산 士林을 이끌었고, 문구공은 성균관 진사였고, 廷義공의 후광(後光)에 재조명되어 근오공과 석진공이 문과에 급제하고 근오공은 持平을 장찬공도 의금부도사 벼슬을 하니 조선건국 이래로 울산의 경사였음을 칭송하는 시이다

가문의 빛나는 번영과 종족의 융성 족보를 처음 완성하여 만세토록 전하고

세대가 이어져 덕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네 정의공이 앞장서서 구강서원을 창건하고

문구공은 성균관 진사로 명성을 드러냈다

근오공과 석진공은 문과에 급제하고 정의공의 후광에 그들의 업적이 다시 빛나리

근오공은 지평의 자리에서 조정에 이름을 떨치고 장찬공도 의금부도사로 덕과 행실을 드러냈네

조선 건국 이래로 그 명성은 멀리 퍼져나가고 울산의 경사로 사림들이 존경하며 빛나네

같은 혈맥의 향기가 세상 밖까지 퍼지고 가문의 덕은 영원히 하늘처럼 넓게 전해지리

이 시는 매헌공 후손들의 족보 간행과 그들의 업적을 기리며 가문의 영광을 칭송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6. 매헌정사에 바치는 시.

매헌공은 吾門의 초석을 울산의 土鄕에 튼튼히 심은 巨木이시며, 壬亂 때의 용맹과 意堂에의 효심 및 학문의 餘慶이 자손에게 빛났어라. 이제 매헌정사를 찾는 후손들의 경건한 모습 칭송한 시이다

 

매헌의 정사에 옛날의 기풍이 전해지네 굳센 뜻과 충성스러운 넋, 백세토록 이어지리

임진왜란의 혼란 속에 검의 기세 떨치셨도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케 하며 고향을 보호하셨네

의당의 효심은 하늘과 땅을 감동시키고 깊은 학문의 여운은 자손들에게 빛이 되리라

소나무 바람과 대나무 그림자에 바른 기운 깃들고 남기신 덕은 천추에 마르지 않는 샘이네

후손들이 경건히 배례하며 마음의 향을 피우니 조상의 영전에 절하며 눈물이 돌고 도네

산천은 영원히 굳건하고 그 정신은 살아있으니 매화가 뜰에 가득 피어 향기가 사방에 퍼지네

각 행에 담긴 뜻이 조상들의 충의와 효심, 그리고 학문적 유산을 기리며, 후손들이 매헌정사를 찾을 때의 경건한 마음을 담은 시이다

 

17. 재천정

在川亭은 학성이씨 12세 죽오공 李覲吾, 1760~1834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1792년(정조 16년)에 건립한 정자이다. 회야강가에 위치하며, 동·서편은 각각 如斯軒, 從吾寮라 하였다. 창건기문은 성균관 대사성 이원조가 지었으며, 정자의 이름은 『논어』의 문장에서 유래하였다. 공은 대과에 급제하고 사헌부지평을 거쳐 삼일당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정자는 2000년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된 뒤, 2003년 국비로 중수되었으며, 후손과 지역민이 함께 보존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18. 재천정 중수를 기념하다

재천정은 오랜 풍우를 이기지 못하고 퇴락해 있다가 2000년 11월 9일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을 계기로 2003년 국비 1억 7천만 원으로 대대적인 重修가 이루어져 새로 중축됨을 칭송하는 한시이다

오랜 세월 풍우에 기울어져 있던 정자여. 세월이 침식하여 비석마저도 닳았구나.

천년의 역사는 여전히 그 빛을 남겼네. 다시 일으켜 중수하니 옛 꿈이 돌아오네.

국비로 다시 지었으니 그 공덕이 깊도다. 천년을 두고 정자의 그림자가 더욱 빛나리.

산과 물은 그대로이고, 시의 혼은 영원하리. 동풍이 다시 따뜻하게 불어와 정자의 모습이 새롭네.

중수된 재천정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남을 묘사하다.

기둥과 돌이 정연하고, 화려한 자태가 드러나네.

재천정에서 과거 인물들의 고상한 흥취를 추억하다.

새롭게 중수된 재천정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상징임을 나타내다.

영원히 남을 그 이름은 만고에 전해지리라.

이 시는 재천정의 중수 과정과 그로 인한 재생을 찬양하며, 그 건축물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기리고 있다.

 

 

19. 학성 이씨 근재공 고택을 찬미함

석천리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은 겸익공의 고손자 의창이 회야강 돌래 강변에 세운 77칸으로 울산을 대표하는 반가로서 항일의사를 배출한 구국의 가문이기에 건물 곳곳에 당당한 기운이 서려 있는 길지의 건물임을 칭송한 시이다.

까치 고개 위에 예로부터 영광이 깃들고 시내 언덕 감돌아 돌성처럼 감싸니

대대로 문장이 이어져 백대를 전하고 충혼과 의열은 하늘의 별처럼 빛나네

당 앞의 대나무 그림자 기개의 상징되고 문 밖의 소나무 소리 의로운 이름 떨치네

구불진 회랑은 선대 현인을 품고 제비의 지저귐은 조상의 정을 노래하네

벼루의 먹향기는 바른 기운 가득하고 서재에 비친 달 그림자는 맑고도 밝네

오랜 세월 덕을 숭상해 모범을 남기고 소나무 잣나무 늘 푸르러 나라의 생명 노래하네

근재공 고택의 위엄과 학성 이씨 가문의 충의 정신, 그리고 선비의 기개가 한 편의 시에 깃들도록 표현해 보았다

 

 

 

20. 활천정

활천정은 매헌공의 8세손 小軒 이규현(1855~1934)년)공의 학덕을 기려 제자 162인이 뜻을 모아 1933년 착공, 1934년 낙성한 정자이다. 정자는 두서면 복안천가에 자리하며, 정면 3칸 팔작지붕의 전통 배산임수형 구조를 갖춘 고풍스러운 건물이다. 공은 학문과 예절에 뛰어나 예문의 판단자로 존경받았으며, 옥산서원 원장 등 유림직을 역임하였다. 활천정은 공의 정신과 유풍을 후대에 전하며, 후학들의 이회계 모임을 통해 문사와 도의의 전통이 이어지는 장소로 계승되고 있다.

 

 

21. 活川亭 重修紀


활천정은 매헌공 8세손 소헌 이규현(1855~1934년) 공의 학덕을 기려 1934년 건립된 정자로, 제자 162명이 스승의 뜻을 모아 완공하였다. 동편 방은 亦悅齋, 서편 방은 以會庵으로 명명하였으며, 이는 학문과 교유를 상징하는 뜻이 담겨 있다. 완공 직후, 공은 팔순을 일기로 선화하였으며, 장례에는 제자와 지인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공은 예의와 효행, 학문에 깊어 문집 3권을 남겼으며, 매년 제자들이 以會契를 조직해 모여 매년 음력 3월 5일 정자에 모여 공을 추모하고 있다. 2005년(乙酉), 증손 동필을 비롯한 후손들이 정자와 관리사를 중수하여 선조의 유업을 보존하였고, 활천정은 문중과 지역의 정신적 지주로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22. 활천정기


활천정은 매헌공 8세손 소헌 이규현(1855~1934) 선생이 조용한 은거와 후학 양성을 위하여 1934년 복안천가에 세운 정자이다. 자연 속에서 학문과 인의(仁義)의 도를 실천하고자 하였으며, 그 정신은 문인 최현필이 찬한 「활천정기」에 잘 드러나 있다. 공은 육행의 도덕을 실천하며 조용한 삶을 살았고, 정자는 후생을 가르치기 위한 배움의 터전으로 건립되었다. 아들 이왕락이 양자로 입계하여 정자와 선조의 유업을 계승하고 있으며, 활천정은 지금도 그 뜻을 전하는 정신적 상징으로 보전되고 있다.

 

23. 활천정 찬송 시

 

활천정은 울주군 두서면 활천리 나지막한 산 아래, 아늑하고 양지바른 남향으로 아담하고 고풍스런 한옥으로 정자 앞으로는 복안천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선비의 처소답게 아담하고 정갈한 품격이 어우러져 울산에서 보기 드물게 옛 정자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배산임수형 정자를 칭송하는 시이다.

 

활천정은 맑은 물 사이에 우뚝 서 있네. 산이 둘러싸고 물이 감돌아 기운이 한가롭네.

옛 정취가 소나무와 대나무 그림자에 깃들어 있네. 남향한 따스한 햇볕이 옛 집을 비추네.

맑은 물은 거울처럼 정자를 비추네. 멀리 있는 산의 푸른 그림자가 병풍을 이루네.

고요한 곳에 시가 있어 옛 뜻을 품었네. 풍아한 문 안에 옛 현인을 그리네.

맑은 하늘이 씻겨 내리니 마음이 깨끗해지네. 정자에 조용히 앉아 흐르는 물소리를 듣네.

사시사철 아름다운 경치가 연못가를 비추네. 옛 정자는 영원히 강과 함께하리라.

이 시는 활천정의 자연과의 조화, 고풍스러움,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고요함을 찬양하며, 옛 정자의 모습을 간직한 아름다움을 나타내었다.

 

 

24. 활천정과 이회계 찬송시

활천정의 동쪽 방은 亦悅齋이고 서쪽 방은 以會庵으로 공부하는 방과 친구와 담소하는 방으로 이름을 구별하여 놓았다.

공은 이조의 崔惺巖에게 사사 학문을 익혀 두서면 복안에서 162명의 제자를 양성하여 존경받는 분으로 제자들이 활천정을 지어 제자들이 이회계를 조직하여 매년 음력 3월 5일 스승을 기리며, 시를 읊고 글을 짓는 文友가 되었음을 칭송하는 시이다

규현 공께서 스승을 존경하니 그 덕이 길게 흐르네. 백육십여 제자들이 학문의 빛을 이뤄냈네.

동쪽 방은 기쁨이 넘치는 역열재라네. 서쪽 방은 우아한 대화의 이회암이라네.

음력 3월 5일에 시와 글이 모이는 날이네. 스승의 은덕은 고금이 같도다.

활천정에 앉으면 그 소리가 멀리 흐르네. 시냇물은 그대로 소나무와 대나무를 비추네.

문우들의 우정은 깊고도 두텁네. 스승의 은혜는 길이 남아 만대에 전해지리라.

봄과 가을이 변해도 시심은 여전하네. 활천정은 천고에 걸쳐 그 향기를 영원히 전하리라.

이 시는 활천정의 학문적 가치를 기리며, 스승 규현공과 제자들이 이어가는 전통을 찬양하고 있다.

 

25. 규현공의 덕을 찬송하다

규현공은 유림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옥산서원장과 경주지방의 여러 원장, 壇長을 하였고 오문의 문사에도 관여하여 석계단장, 高山齋長을 역임하였다. 활천정은 1933년에 지었고 두 차례 중수를 하였고, 정자에 창건기와 重修記 2편이 있고 문집 3권도 저술하는 등 높은 학식을 가진 규현공을 칭송하는 시이다

 

규현의 높은 절개, 고향을 빛내고 옥산의 소나무 잣나무, 추운 날의 향기

석계의 흐르는 물, 유학의 맥을 적시고 고산의 푸른 기운, 서당에 드리우네

활천정의 곁에서 바람과 달을 노래하며 두 번의 중수로 옛 뜻을 길게 전하네

문집 세 권에 도의가 깃들고 단장에서 강론하며 사람들을 교화하네

천추에 성인의 도는 빛을 이어가고 백세의 유림들이 높은 서당을 우러르네

남긴 덕망은 영원히 하늘땅에 두텁고 솔그림자, 대 소리 속에서 영강을 찬하네

규현공의 학덕과 후세에 남긴 영향력을 중심으로, 자연의 이미지와 서원의 모습을 담아보았습니다

 

 

 

26. 초산재의 내력

椒山齋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초천길 84-22, 초천리 138번지에 위치한 재실로, 학성이씨 문중의 8세손 송당 이석순(錫淳, 1874-1956) 공이 1945년 겨울, 고조·증조 조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본래 초산재 터는 8세 정지(1636-1686) 공이 웅촌 석천리에서 초천리로 입향한 이후 후손들이 세거하게 된 곳으로, 석순 공은 후손들이 조상의 묘소 아래에서 거주함에도 제향할 재실이 없어 이를 크게 한으로 여기고 직접 정원에 연못을 파고 과수원을 조성한 뒤,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팔작지붕 재실과 대문, 부엌을 포함한 재실을 완성하였다.

초산재는 중앙에 제향 공간인 대청이 있고 좌우에 방이 하나씩 배치되어 있으며, 부속시설로는 맞배지붕 대문, 조적식 관리사, 蓮塘, 기와 얹은 토축 담장이 갖추어져 있다. 건축 자재와 비용은 모두 송당 공이 자비로 감당하였고, 일부 친족이 도움을 보태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공의 주도하에 완성되었다. 재실의 현판 글씨는 초계인(草溪人) 유당 정현복이 썼고, 초산재기는 영천 출신 단산 김상우가 1947년 정해년 9월 하순에 찬하였다.

초산재는 단순한 제향 공간을 넘어, 송당공의 효심과 문중의 정통을 계승하는 뜻깊은 장소로 자리 잡았으며, 한 인물이 후손과 문중을 위해 조상 숭배의 정성을 온전히 실천한 보기 드문 예로, 오늘날까지 후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27. 初山齋 松堂 錫淳 追慕之所 紀念詩

초산재는 정지공께서 초천리로 입향하여 후손들이 세거한 관계로 1945년 겨울 8세손 송당 석순공이 追慕之所로 세웠으며 정지공의 다섯 형제가 산 아래에 살고 있고. 자손 번창하여 복된 가문이요 길지임을 칭송하는 시이다.

초산재가 세운 땅, 천리의 향촌이라 정지 공의 다섯 형제가 이 산 아래에서 함께 거주하였네

8세손 석순 공께서 추모지소를 세우셨네 유림을 존경하며 그 길을 이어가리라

뿌리가 깊어 나무가 무성하여 열매가 가득하네 명성이 널리 퍼져 멀리까지 알려지리

하늘의 복이 내려져 길운이 따르리 후손들이 선대의 일을 이어받아

산과 물이 아름다워 길고 복되리라 그 길을 따라 후손들이 행복하게 되리

정지 공의 업적은 후세에 길이 전해지리 초산재는 그 기념의 장소이니

이 시는 정지 공과 그 후손들의 업적을 기리며, 초산재를 통해 그 가문의 번영과 길운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8. 초산재 건립을 한 옹의 위대함

옹이 노년에 접어들었는데도, 선조의 제향할 齋舍가 없고 또 묘소 표지도 없으니 한스러워 하다 죽기 전에 과수원과 연못 사이에 재사 3칸과 대문과 부엌 2칸을 완성하고 고조 증조의 묘소에 상석을 놓았으니 참으로 큰 역사를 하여 옹처럼 형제나 친척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혼자 모든 것을 도맡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음에도 초산재 건립을 도맡아 건설한 것은 조상을 위하는 위대함을 칭송한 시이다.

노년이 되어도 굳은 뜻은 변치 않네 선조의 재사 없음을 한스러워하니

묘소 표지 없이 상석도 없이 하지만 고조 증조의 묘에 상석을 놓고

과수원과 연못 사이에 재사 완성하여 형제나 친척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혼자서 모든 것을 도맡아 완성하니 초산재를 건립하여 조상을 기리니

이 업적은 대대손손 전해지리라 그의 대업을 찬양하며 길이 기리리

선조들을 위한 큰 뜻, 하늘도 감동하리 초산재 건립은 그 진심을 보이는 곳이네

옹이 자신의 힘으로 초산재를 건립하여 선조들을 기리고 그 역사를 이어가는 모습으로, 그의 위대함과 가문의 자랑스러움을 강조한 시이다.

 

 

 

29. 安花庵의 沿革

安花庵은 울주군 청량읍 중리 소재 花藏山 기슭에 위치하였으며, 11세 謹齋公 諱 宜昌공께서 영면하신 墓室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차자인 12세 竹塢公이 墓域을 확장하고 별실을 건립하여 安花齋라 칭하였으니, 이는 곧 安花庵의 시초가 된다.

이후 세대를 거치며 庵室은 여러 차례 중수되고 이건되었으며, 문중의 정성 어린 봉향이 이어져 왔다. 전해지는 관련 문헌으로는 다음과 같다.

12세 反溪公 養吾의 安花洞墳庵詩는 墓室와 庵의 경관과 선조의 음덕을 시로 찬송한 것이요,

12세 竹塢公 覲吾의 上樑文은 창건 당시의 기록을 담고 있다.

철종 13년(1862년)에는 14세 隱齋公 璋燦이 〈重建記〉를 남겨 庵의 중건 경위를 상세히 적었고,

고종 27년(1890년)에는 15세 老石公 奎龍이 〈移建上樑文〉을 지어 庵의 이건 상황을 기록하였다.

1919년 겨울, 유림이자 文人인 창강 金澤榮이 〈重修記〉를 남겨 외손에 의해 다시 중수된 내력을 증거하며,

1923년에는 15세 夢窩公 奎學이 지은 〈安花洞溫泉記〉가 전하여 庵 인근 온천의 기록까지 더하고 있다.

惟今, 본 庵址는 안타깝게도 타인 소유로 넘어가 훼철되었으며, 현재 그 자리에 兜率庵이 자리하고 있다. 비록 실형은 사라졌으나, 선조의 음덕을 기리는 후손들의 정성과 그 유적을 전하는 문헌들은 지금도 귀중한 家乘의 한 부분으로 전한다.

 

 

安花庵 沿革

安花庵은 울주군 청량읍 중리 소재 花藏山(해발 362m) 기슭에 위치하였으며, 11세 謹齋公 諱 宜昌(1749~1781)께서 영면하신 墓室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차자인 12세 竹塢公이 墓域을 확장하고 별실을 건립하여 安花齋라 칭하였으니, 이는 곧 安花庵의 시초가 된다.

이후 세대를 거치며 庵室은 여러 차례 중수되고 이건되었으며, 문중의 정성 어린 봉향이 이어져 왔다. 전해지는 관련 문헌으로는 다음과 같다.

12세 反溪公 養吾의 〈安花洞墳庵詩〉는 墓室와 庵의 경관과 선조의 음덕을 시로 찬송한 것이요,

12세 竹塢公 覲吾의 〈上樑文〉은 창건 당시의 기록을 담고 있다.

철종 13년(1862)에는 14세 隱齋公 璋燦이 〈重建記〉를 남겨 庵의 중건 경위를 상세히 적었고,

고종 27년(1890)에는 15세 老石公 奎龍이 〈移建上樑文〉을 지어 庵의 이건 상황을 기록하였다.

1919년 冬, 유림이자 文人인 창강 金澤榮이 〈重修記〉를 남겨 외손에 의해 다시 중수된 내력을 증거하며,

1923년에는 15세 夢窩公 奎學이 지은 〈安花洞溫泉記〉가 전하여 庵 인근 온천의 기록까지 더하고 있다.

惟今, 본 庵址는 안타깝게도 타인 소유로 넘어가 훼철되었으며, 현재 그 자리에 兜率庵이 자리하고 있다. 비록 실형은 사라졌으나, 선조의 음덕을 기리는 후손들의 정성과 그 유적을 전하는 문헌들은 지금도 귀중한 家乘의 한 부분으로 전한다.

 

나의 말:

각 문헌의 원문 및 한글 번역도

ChatGPT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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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아래에 안화암 관련 문헌들에 대해 순서대로 **원문(한문)**과 한글 번역을 족보 수록에 적합한 형식으로 정리해드리겠습니다. 현재 알려주신 문헌은 총 6종입니다:

12세 반계 양오의 〈안화동분암시 安花洞墳庵詩〉

12세 죽오 근오의 〈상량문 上樑文〉

14세 은재 장찬의 〈중건기 重建記, 철종 13년(1862)〉

15세 노석 규용의 〈이건상량문 移建上樑文, 고종 27년(1890)〉

창강 김택영의 〈중수기 重修記, 1919년 겨울〉

15세 몽와 규학의 〈안화동온천기 安花洞溫泉記, 1923〉

 

1. 반계 양오의 《안화동분암시》

원문:
安花洞裏舊靈壇, 石室蒼蒼坐夕寒。
竹塢子孫重卜築, 一區遺愛擁雲端。

한글 번역:
안화동 속은 예로부터 조상의 영단이 자리한 곳,
석실은 푸르고 푸르게 저녁바람 속에 앉아 있네.
죽오의 자손들이 다시 터를 정하여 지었으니,
조상의 남긴 사랑이 구름 속에 둘러싸여 있구나.

 

📜 2. 죽오 근오의 《상량문》

원문:
嗚呼! 祖德流芳, 堂構維新。卜築安花之地, 以祠謹齋之靈。
梁棟既起, 永垂不朽之基。願此齋室, 世守無虧。

한글 번역:
아아! 조상의 덕이 향기로이 전해지니, 당당한 건축을 새로이 하도다.
안화의 터를 택하여 근재공의 신령을 모시니,
들보와 기둥이 서니 영원히 썩지 않을 터전이라.
이 재실이 대대로 보전되어 허물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 3. 은재 장찬의 《중건기》 (1862, 철종 13년)

원문:
歲在壬戌, 重修安花齋, 以報先靈之恩德。
舊材盡毀, 新構成形, 不忘先祖之遺訓, 願守此齋以永世。

한글 번역:
임술년(1862년), 안화재를 다시 지어 선령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예전의 자재는 모두 허물어졌으나, 새롭게 다시 세워 형태를 갖추었고,
조상의 남긴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이 재실을 대대로 지키기를 바란다.

 

📜 4. 노석 규용의 《이건상량문》 (1890, 고종 27년)

원문:
原基卽將失, 移建於勝地。山明水秀, 宜爲靈寢之所。
作樑告成, 昭示子孫, 忠孝之心, 永垂齋宇之間。

한글 번역:
옛 터전이 곧 없어질 것을 우려하여, 좋은 곳으로 옮겨 다시 세우다.
산은 밝고 물은 맑아 조상 묘소로서 합당한 곳이라,
들보를 세우며 완성을 알리니,
자손에게 충효의 마음을 보여주고, 이 재실 안에 길이 전하리라.

 

📜 5. 창강 김택영의 《중수기》 (1919년 겨울)

원문:
歲次己未, 冬月重修安花庵。雖非其裔, 義感於心, 協力於斯。
惜乎舊址荒蕪, 然精誠可通於神。庵成之日, 雲開月明。

한글 번역:
기미년(1919년) 겨울, 안화암을 다시 수리하다.
비록 후손은 아니나, 그 뜻에 감동하여 마음으로 도우니,
옛 터는 황폐하였으되, 정성과 정직함은 신령에게도 통하리라.
암자가 완공되는 날, 구름이 걷히고 달이 밝았다.

 

📜 6. 몽와 규학의 《안화동온천기》 (1923)

원문:
安花之地, 地脈溫潤, 泉湧於地, 可浴可療。
族人設庵, 以庇浴客, 且以祀祖, 一地兼二便也。

한글 번역:
안화의 땅은 지맥이 따뜻하고 부드러워,
땅속에서 샘물이 솟아 목욕도 가능하고 병도 고칠 수 있다.
문중에서는 암자를 세워 목욕하는 이들을 보호하고,
또한 조상을 제사 지내는 곳으로 삼았으니,
한 장소에 두 가지 이익이 함께하도다.

 

30. 內光齋의 沿革

內光齋는 울주군 온양읍 내리 604번지에 소재하였으며, 14세 **隱齋公 諱 璋燦(1808~1886)**의 묘실을 중심으로 세워진 재실이다. 公은 학문과 품행을 겸비하여 철종 3년(1852)사마시 생원과에 입격하였으며, 창려 이정기, 정재 유치명문하에서 수학하여 학행을 높이 평가받았다.

공은 일문 학맥의 보존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철폐된 석계서원(石溪書院)**을 일부 복원하였으며, **철종 9년(1872)**에 《鶴坡實記》를 간행하여 문중과 향리의 학문적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후손들이 1916년, 공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대지 456평 위에 팔작지붕 기와집 3칸으로 재실을 건립하고, **三光齋(삼광재)**라 이름하였다. 이후 1957년 2월, 응재 **김상우(金相宇)**가 기문을 지어 공의 덕을 기리고, 재실의 의미를 새겼다.

惟今, 본 재실은 1999년 1월 타인에게 매도되어 현재 외형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으나, 내부는 일부 가정용으로 개조되었고, 대들보 하부에 상량문은 그대로 남아 있어 옛 흔적을 증명하고 있다.

 

 

 

 

31. 체화당과 구락 공의 심정

체화당은 주남리에 있었고 매헌공과 강성문씨의 추모지소로 구락공이 축조하였으며, 일제 때 빈곤한 상태이고 노쇠하여 건축한지 20여 년 만에 송씨에게 매각되어 조상을 배향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심정과 당호는 논어 자한편 唐棣之華偏其反而 豈不爾思室是遠而 子曰 未之思也 夫何遠之有에서 취한 것으로 “아름다운 자두꽃이 봄바람에 휘날리는구나. 어쩌 임이 그립지 않으랴만 당신의 집은 멀고도 멀어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사모하는 것이 아니니 먼 것이 어디 있으리요”라는 뜻이 담겨 있는 재실을 표현한 시이다

음독: 체화당은 주남리에 세웠네 구락 공의 손길이 깊게 닿았네

군자감봉사와 가선대부 일제 강점기로 힘든 나날이 이어졌네

구락 공은 나이가 들어 20년 후 송씨에게 팔렸네

조상을 배향할 수 없어 슬프다 ‘당체지화’ 아름다운 이름

"그대 생각하지만 멀어" 진정으로 사모하는 마음은 없다

마음 속 깊이 그리워하네 제사를 지내지 못해 아쉽다

 

 

 

 

32. 육석정(六石亭) 記略

육석정은 웅촌면 석천리 384번지, 석계서원 앞 회야강이 내려다보이는 동남향 언덕 위에 위치하였다.

이는 17세 우석(厚洛, 1924~2009)공이 1966년, 대통령비서실장 재직 중 선친과 형제들의 우애를 기리고자 조성한 별장으로, 대지 1,150평(3,799m²)에 2층 양옥(75.6평)규모로 건축되었다.

건물은 1층에 응접실 2칸과 비서실, 2층에는 대형 거실과 숙소를 갖추었고, 정원에는 소나무·향나무·히말라야시다 등 수목과 잔디가 조성되어, 학성이씨 화수회, 웅촌초등학교 소풍 장소로 활용되었다.

1980년대 이후 공직에서 물러난 후, 별장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2000년대부터 쇠락, 결국 2006년 10월 경매를 거쳐 (주)신기인터모빌 소유가 되었고, 2014년 8월울산 거주 김 모씨에게 매각된 뒤, 동년 11월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신축 건물이 들어서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육석정 건립 후 마을 도로가 포장되는 등 지역 개발에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 후쿠다 전 총리 등 국내외 인사들이 자주 방문하였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시, 신현확 보사부 장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장소이기도 하다.

우석공은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후 5·16 군사정변이후 공보실장, 대통령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 주일대사, 남북적십자회담 대표, 제1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1980년 이후 경기도 초월읍 도자기 작업에 전념하며 여생을 보냈다.

 

 

 

33. 육석정 기념 시

六石亭은 울주군 웅촌면 석와천리 석계서원 앞에 있었고, 이후락공의 先考 형제 우애와 선고추모 위하여 2층 건물로 동설이 건축하였다. 육석정은 회야강을 끼고 소나무와 향나무, 동백나무 등의 정원수와 푸른 잔디를 식재하여 학성이씨 화수회와 학생들이 소풍과 일본 후쿠다 전 수상을 비롯한 각계 유력 인사들이 방문하여 문전성시를 이룬 곳이지만 없어져 후손들은 아타까운 심정을 표한 시이다.

소나무와 향나무 정자는 물가에 기대어 있고, 흐르는 물소리 잔잔히 맑은 하늘을 비추네.

지난날 친구와 귀빈들이 문을 가득 채웠으나, 지금은 황량한 풀들이 청련을 감싸네.

세대를 이어온 효도와 의리를 전하는 가문이여, 옛사람들 서로 사랑하고 공경하며 함께하였네.

석정은 여전히 고요함 속에 침묵을 지키고, 천 년의 바람과 서리가 정원을 가득 메우네.

푸른 물과 푸른 산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고, 후손들의 그리움이 감정 깊이 스며드네.

석정을 추억하며 선조를 기리고, 소나무 소리는 영원히 곁에서 눈물 흘리며 함께하네.

이 시는 육석정이 있었던 시절의 아름다움과 후손들의 아쉬움, 그리고 선조를 기리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34. 反求齋 記略

反求齋는 학성이씨 서면파 후손들이 선조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의 근본을 반성하고자 건립한 재실이다.

학성이씨 시조 이예의 8세손인 廷信공은 군자감참봉 謙益과 일직 손씨사이에서 출생하였고, 文相, 文徵, 文植, 文根 네 아들을 두었다. 이후 후손들은 울주군 홈실 椧谷에 터를 잡고 약 300여 년 동안 가문을 이었다.

그간 여러 선영이 흩어지거나 실전되어 후손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으나, 마침내 이곳에 음택을 정비하고 反求齋를 조성함으로써 선조의 위업을 기리고 후손들의 근본을 다시 다지는 뜻깊은 사업으로 남게 되었다.

이는 시조 충숙공의 인간주의 정신을 오늘날에 되새기며, 후손들이 이를 긍지로 삼아 더욱 정진하겠다는 椧谷문회의 다짐이기도 하다.

 

 

35. 반구재 기념 글

반구재는 시조 충숙공 이예의 8세손인 廷信을 추모하는 재실로 謙益과 一直孫氏의 아들로 태어나 네 아들을 두셨고 산수가 수려한 홈실에 300여 년, 동안 반듯한 추모지소가 없음을 안타까워 하다 후손들의 뜻을 모아 마련하여 선조의 영령을 편히 모실 수 있어서 무한한 기쁨을 표한 한시이다.

 

산수 맑고 고요한 곳에 묘역을 열고, 후손들이 뜻을 모아 선조를 경배하러 오네.

수백 년 동안 꿈속의 혼은 머물 곳 없었으나, 오늘 재실에서 선조의 영혼이 돌아오네.

충성과 효도의 가풍이 대대로 전해지고, 덕과 업적은 넓고 커서 영원히 쇠하지 않네.

소나무와 대나무가 둘러싸고 고요함을 지키며, 향불은 끊이지 않고 현계를 비추네.

손자와 증손들이 함께 제사 지내며 깊은 정을 나누고,

구천 아래서도 위로받으며 애통함을 풀리라.

반구재 앞에서 지난날을 추억하며, 푸른 산은 오래도록 재실을 지켜주리라.

 

36. 中里門中會館 記略

학성이씨 서면파 중리문중 회관은 후손들의 오랜 숙원이던 종중회관 건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2012년 7월 6일, 울산시 삼호동 롯데마트 앞 부지에서 기공식을 갖고 착공하였다. 이후 약 5개월 간의 공사를 거쳐 2013년 4월 7일 준공식을 하였다.

회관은 대지 184평위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지상 3층, 연면적 약 300평규모로 지어졌으며, 1·2층은 일반 사무실 용도, 3층은 문중 회의 및 종중 행사 공간으로 설계되어, 문중의 상시 운영과 선조 추모, 종원 간의 교류·단합의 거점이 되었다.

기공식 당시, 문중 고문이신 이수전 옹께서는 “우리 문중의 숙원이던 회관을 건립하게 된 것은 선조님들의 음덕 덕분이며, 이를 계기로 종원 간 화합과 단결이 더욱 굳건해질 것”이라며 뜻 깊은 회고를 남기셨다.

이후 본 회관은 종중 회의와 선위, 후손들의 모임 공간으로 활발히 활용되며, 학성이씨 서면파 중리문중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문화적 거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37. 서창 강변에 중리문중의 덕을 새기다

학성이씨 서면파 중리문중회 회관은 회야강의 중심인 서창 도로변에 3층 건물로 건립하여 3층은 문중 회관으로 문중 선위 추모와 회의 및 후손 휴식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여 모두가 선조의 덕분으로 더욱 화목한 문중임을 칭송한 시이다.

조상의 덕은 깊고 길어, 대대로 이어지는 업적을 펼치시네.

강가에 서 있는 누각이 봄빛을 반짝이며 빛나네. 선현의 덕과 의를 이어서 닦고 배우네.

후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충성을 다하네. 문중의 당에서 조상을 제사 지내고.

세 층 높이의 당사에 영웅들이 모이네. 종친들은 화목하게 함께 즐겁게 모이네.

오래도록 인애를 흐르게 하여 자손을 기르네. 강한 의지로 번영을 계속하네.

견고한 기반 위에 아름다운 덕을 전하네. 천추만대에 조상의 은혜를 잊지 않으리라.

이 한시는 서창 강변에 세워진 3층 문중 회관을 기리며, 조상들의 덕을 기리고 후손들이 그 정신을 계승하여 더욱 화목하고 번영하는 문중을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38. 중리문중 제강 齋堂

중리문중의 둘째 집안인 제강문중은 1994년도 문중 등록을 하였으며, 단칸 기와지붕으로 재당은 주남 입구 산방산에 1960년 11월 18일 건립하여 2005년도 보수하였다. 매년 가을마다 매헌공의 6세손 제강 이하 후손의 묘사를 지내 오다 2005년에는 매헌정사를 건립 후 2010년부터 매헌정사에서 묘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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