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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공 문중회

매헌공 이겸익을 알자

작성자이오걸|작성시간25.10.20|조회수48 목록 댓글 0

매헌공 이겸익을 알자

10세손 이관수

 

1. 임희선생을 찾아간 깊은 뜻

1592년 4월 13일(음력) 양력으로 5월 2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 중의 어머니를 모시고 뒷산(원적산)으로 피신했다.

매헌공이 18세이고 1575년생이다.

어머니는 1593년 8월 4일 산막에서 돌아가신다. 아들 중 겸수, 겸록, 겸광은 전투에 나가고, 겸복과 겸익을 공부하도록 하였다.

흥려박씨 어머니의 당부였다. 전쟁 중인데도 그뜻이 깊었다.

겸익은 겸복형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로서 그 뜻을 세우려면 무술을 익혀야 하고, 선비로서 살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부끄러운 사람이 된다라고 크게 외쳤다고 했다.

그 길이 멀고도 쉽지 않았다. 전라우도 나주에 계시는 임관해공을 찾아가는 것이다. 상주의 신분으로 상상하기 조차 쉽지 않다. 먼곳을 찾아갔으니 두 형제의 모습이 초라하기도 했다

관해공 임회는 그 당시 사대부의 전형이었다. 1562년생으로 아버지는 형조좌랑 임형수이며, 중부 예조좌랑 임길수에 입양되었다. 정철의 사위였다. 여기 주남 출신의 무명의 겸익과 겸복 형제분께서 초라한 모습으로 찾아갔으니 그 당시의 신분으로 비교 하기조차 어렵다. 그래도 먼길을 찾아온 두 형제분을 받아 주었다.

글도 배워야 하고 숙식도 제공 받았다. 그 때부터 매현공 할아버지의 인생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공부를 하면서 그 뜻을 이해하게 되면 그 때마다 일어서서 스승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먼저 인격적인 시험에 들도록 해야 한 것이다. 공부도 잘 해야 하고, 인품도 향상되어야 한다. 그렇게 3년의 과정을 거치면서 4서 5경을 익히게 되었다. 이 내용을 어떻게 글로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임회선생은 매헌공 할아버지의 거울이 되었다.

공부(工夫)란 한자로 工과 夫이다. 工은 농기구이다. 夫는 사람이다. 먹고사는 일이다. 책만 읽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삶과 관련된 것이다. 매헌공 할아버지가 공부의 의미를 파악하고 실천해 나갔다. 그 표본이 관해 임회였다.

그 첫단계가 나주까지 찾아가서 3년이고, 두번째가 여기 양산 (지금 부산시 화명동)에서 10년이다. 매헌공은 그 당시 최고 수준의 공부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대학에 공부의 단계가 있고 공효(功效)의 단계가 있다. 공부는 자신이 해야 되는 과정이고, 공효(功效)는 되는 결과이다. 사제간에 일체가 되었다. 임회공은 매현공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되고, 관해 임회는 여러 현직에 이르게 되었다. 그 다음해 1624년 이괄이 반정논공 불만으로 난을 일으켰다.

인조가 공주까지 피신하게 되어 그에 맞선 관해공께서 희생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이다. 관해공 정씨 부인께서 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매헌공이 가장 우뚝했다고 밝혔다.

 

2. 관해공 임회선생이 양산으로 유배되어 10년간 보필

 

1613년 광해군 5년부터 1623년 인조반정까지 관해공께서 여기 양산(현재 부산시 화명동)에 유배되어 지내게 되었다. 매헌공 할아버지께서 주남에서 양산까지 한 걸음으로 찾아가서 만나게 되었다. 서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재회하게 되었다. 그 감회는 두 사람의 감동이었다. 참으로 뜻깊은 일이었다. 여기서 사제간의 관계가 연속되었다. 매현공 할아버지의 학문의 깊이도 더하여 져서 두분은 그 상대가 되는데 손색이 없었다. 사제간 이렇게 연속되기는 그 예가 드물 것이다. 여기서 매헌공 할아버지의 학덕의 정도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유배 10년을 보필했다.

매헌공 할아버지의 가정 사까지 파악한 임회선생께서 가장 큰 과제였던 배필을 찾는데 앞장서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시사이고 교류가 깊었던 밀양부사 이안눌(1571-1637)의 주선으로 손진사댁의 딸을 부인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매헌공 할아버지는 48세였고 손씨 부인은 20세였다. 그 후손이 정헌, 정의, 정례. 정지. 정신이다. 이분들이 주축이 되어 학성이씨를 만들었다.

 

3. 매헌공 할아버지의 꿈

매헌공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역사적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전쟁이 겹치는 역사적 환난의 시대였다. 그런 난국에도 그 파고를 극복한 분이 매헌공 할아버지다. 그 계기가 관해공 임회 선생을 만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당시 최고 수준의 지식인을 만나서 자기의 뜻을 이룬 삶이다.

그 때까지 학성이씨는 없었다. 최초의 족보인 학성세보가 만들어진 것이 1668년이다. 여기서 학성이라는 성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 족보가 인쇄된 곳이 웅촌 지소에 위치한 운흥사이다. 그 당시 운흥사는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사찰이였다. 70% 이상의 불경이 여기서 인쇄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의 수습도 사명대사가 운흥사에서 기장에 있던 왜장 가또기요마사와 협상했다고 한다.

지금 울산CC가 있는 곳에는 삼학골이라는 명소가 있다. 삼학산이 있고 그 자락에 물이 샘솟는 연못이 있다. 여기에 연결된 곳이 회야강이다.

옛날부터 황새(학)가 무리지어 찾아왔다. 그 이름이 삼학골이다. 그리고 전국에서 기후가 가장 온화한 곳이 여기다. 가까이 6000년전에 이루어진 환호마을의 유적이 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 주남의 뒷산 천성산이다.

매헌공 이겸익할아버지는 자기의 뜻을 펼치고 후손들이 그 의미를 이루도록 천성산 연화봉 산록에 계신다. 학성이씨 후손들의 거울이다.

관행공 임회는 매헌공을 자랑스러운 우리의 선조가 되도록 뒷받침 해준 은인이다.

그 초심이 공부하지 않으면 부끄럽다는 것이다.

매헌공할아버지께서 그 꿈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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