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4/23 주일말씀 : 안 믿어지는 믿음 - 정삼지 담임목사

작성자제자행전|작성시간17.04.24|조회수1,173 목록 댓글 2

20170423 주일말씀/ 눅24:17-29





안 믿어지는 믿음




                                        설교 : 정삼지 담임목사





  지난 주일은 부활주일이었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이후로 초대교회가 2천년 전부터 부활을 기념해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리는 기초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 분이 다시 사셨기 때문에 오늘 주일이 있고 예배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부활절에 아주 기쁜 낮으로 교회를 가니까, 옆에 있는 어떤 분이 “뭐가 그리 기뻐서 가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2천년 전의 소식이지요.”라고 했는데, 이 분이 깨달음이 왔어요. ‘아~ 2천년 전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그것이 아직도 기쁨이 되고 아직도 승리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소식은 참 기쁨이요. 참 소망이요. 영원한 기쁨이요. 승리입니다.
 
아무리 기쁜 소식도 몇 년이 못갑니다. 때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정말 짜릿한 기쁨이 있기도 합니다. 도저히 잊어버릴 것 같지 않은 기쁨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난리가 날 정도로 큰 사건이었는데, 그것이 몇 년이나 가던가요? 그 대단했던 기쁜 소식이 몇 년 못갑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은 2천년이 지났어요. 그런데 오늘도 우리들에게 큰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고 소망이 됩니다. 우리 주님 오실 때까지 영원한 기쁨이 될 줄 믿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주님이 부활하셨기에 죽음이 힘을 잃어버렸어요. 마귀가 힘을 잃었습니다. 어둠의 권세가 물러갔습니다. 주의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어떤 목사님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어요. 떠나시면서 유언을 했습니다. “내가 이제 하나님 앞에 가는데, 천국에 가면 다 흰옷을 입으니, 나의 장례를 치를 때 흰옷을 입혀 주시오.” 요한계시록에 보면 흰옷을 입습니다. 주님 부활의 현장에도 천사가 흰옷을 입고 왔습니다. 그래서 부활절에는 우리가 흰옷을 입습니다. 내년 부활절 때는 우리 모두 속에 하얀 옷을 입으면 좋겠어요. 목사님의 장례를 치르면서 천여 명의 온 교우들이 하얀 옷을 입었답니다. 그래서 장례식이 장관이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죽음은 천국으로 가는 간이역입니다. 죽음의 세력이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어요. 마귀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천국 가는 준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부활소식에도 슬픈 사람이 있었어요. 왜 주님의 부활 소식이 슬픔이 되었을까요? 참 신기합니다. 그토록 기다렸을 부활일 텐데 말입니다. 교회를 그냥 그럭저럭 다닌 사람도 아니고, 삶을 바쳐서 주님과 함께했고, 소위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부활소식은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그 얼굴에 슬픈 빛을 띠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내가 잘못 알고 잘못 믿었나 보다. 사실이 아닌가 보다.’ 너무 슬퍼서 터덜터덜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의 대화중에 갑자기 어떤 분이 끼어들었습니다. 그 때는 몰랐지만, 그분은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눅24:17). 그 중에 한 사람이 ‘글로바’라 하는 사람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글로바라 하는 제자는 예수님의 아버지의 형제지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육신으로 따지면 예수님의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로 보통관계가 아니었어요. 우리 예수님과 함께하는 제자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삶을 다 바쳤습니다. 최소한 3년을 몽땅 바쳤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못했을까요? 정말 예수님께 모든 삶을 바치고 예수님을 따랐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삶의 충격을 줄 만큼 축복이 되고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슬픈 빛을 띠었습니다.


그 이유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눅24:21). 뿐만 아니라 우리 남자들도 가서 봤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주 기뻐 뛰어야 하는데 슬픔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구절에 그 열쇠가 있습니다. 왜 신앙 생활하는데 기뻐야할 때에 슬픔이 오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그런 적이 없습니까? 엠마오는 그들의 고향입니다. 다 포기하고 다 버리고 이제 고향 땅으로 떠나가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이란 표현을 씁니다. 예수님도 아니고 주님도 아니고 ‘이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사라져 버리면, 용어가 이렇게 바뀌어 버립니다. ‘이 사람이’ 우리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랬습니다. 그 말은 로마 압제에서 구원해줄 분이고, 해방시켜줄 분이라고 우리는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들리는 말로는 죽음에서 부활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기대했던 예수는 우리를 로마압제에서 해방시켜 주고, 진정한 정치적 메시아로 등극해서 로마 절대 권력을 다 물리치고, 당당히 하나님을 제시하고 정복하는 그날을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좌우 정승 한자리씩 하리라고 기대했는데, 그 기대가 철저히 다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했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그 부활소식이 자신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입니다. 부활했다고 그가 로마를 정복할 것인가. 부활했다고 그가 로마 정권을 물리칠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서 슬프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눅24:25-26). 이 진리를 구약 내내 가르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메시아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을 받고 그 후에 영광에 들어가야 할 분임을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 주셨어요. 기대가 욕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장면입니다. 선입관이 잘못되면 신앙도 잘못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메시아, 그것은 그들의 욕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메시아이지 정치적 메시아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정치적인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벗어났을 때, 그들은 다 던져버리고 슬피 울며 고향땅으로 간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우리는 잘 출발합니다. 기대는 좋은 것입니다. 기도하고 기대하며, 믿고 충성하는 신앙, 얼마나 아름답고 깨끗합니까. 오늘 찬양대가 찬양할 때 주님이 기뻐 받으셨다는 그 믿음이 있기에, 이른 아침부터 와서 수고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찬양을 받으신다니, 더 잘 해야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욕심이 들어가면 그 아름다운 일이 흉측하게 변해 버려요. 그래서 봉사가 예배입니다. 영어로 예배를 worship, service라고 합니다. 모든 서비스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예배에 욕심이 들어가 버리면, 흉측하게 변합니다. 부활하셨는데 왜 부활의 소식이 기쁨이 안 되었을까요 욕심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 그 부활의 기쁜 소식, 2천년전에 일어났던 그 부활의 기쁜 소식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힘이 되고 영원히 힘이 될 텐데 욕심이 들어가니까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이 들어가니까 기도할 때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했는데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붙잡혀 가자 감정이 고조되어서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치고 말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칼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칼로 서면 칼로 망한다는 것입니다. 왜 혈기가 납니까? 그것은 욕심입니다. 부활 소식이 영광스러운 기쁨의 소식이 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두 제자에게 욕심이 들어가니까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예수를 잘못 믿었구나. 내가 예수를 잘못 따랐구나. 내 청춘을 바쳤는데 잘못했구나.’하고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낙심이 올까요. 기다리지 못하고 낙심이 오는 이유도 바로 욕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12:3)


피곤은 어쩔 수 없습니다.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피곤이 낙심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낙심한다는 뜻은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예배에 마음이 없어요. 교회 가는데 마음이 없어요. 피곤해서 그럴까요? 아니요. 누구나 피곤합니다. 그러나 피곤이 낙심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만큼 피곤한 분이 어디 있겠어요. 60킬로나 되는 십자가를 끌고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등과 허리에는 채찍으로 내려치고 십자가에까지 달렸어요. 다 벌거벗겨졌어요. 사람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라면, 너부터 구원하라”고 잔인한 말로 침을 뱉고 모욕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셨습니다. 어떻게 그 고통과 피곤함을 참았을까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참 놀라운 비밀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개의치 않는다’는 말은 경멸해 버렸다는 뜻입니다. 자신에게 오는 그 수치와 부끄러움을 경멸해 버리셨어요. 십자가도 참았어요. 그 이유는 그 앞에 있는 기쁨 때문에, 그 기쁨이 더 컸기 때문에 현실에 닥치는 고난과 아픔과 수치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 섬기느라 수고들이 많고, 때로는 피곤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대한 어려움도 이길 수 있는 비법이 있다면, 우리 앞에 놓인 기쁨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제자교회에 주실 영광과 기쁨을 생각하면 참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성춘향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도령이 찾아올 그 때와 그 기쁨을 생각하니까, 사또가 아무리 뭐라 해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 비전을 가져야 하는가. 왜 꿈을 가져야 하는가. 꿈과 비전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답답하고 어려워도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우리를 실망하게 합니다. 그림자를 바라보면 그림자는 늘 변합니다. 그림자를 바라보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무엇을 바라봐야 합니까? 태양을 바라 봐야죠. 교회에 오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 옵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그 욕심 속에는 두 제자들처럼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아로 입성하는 그날 한 자리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놀라운 것은 그 욕심 때문에 그는 함께하시는 주님을 못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욕심은 주님을 못 보게 만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욕심이 들어가면 주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다스려야 합니다. 이 욕심을 다스렸다면 두 제자는 슬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24:15-16). 그냥 동행했다가 아니라, 주님은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비록 내 눈이 가려져서 주님을 몰라본다 할지라도,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셔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심각한 고난을 당하면서 “주님 어디계십니까?” 부르짖었습니다. 심각한 상황 가운데서 주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았어요. 너무도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마지막으로 기도는 하자. “주님 어디 계십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 속에  단어 하나가 나타났어요. ‘No Where’라는 단어입니다. 주님은 역시 어디에도 안 계시는구나. No Where 글짜로 가슴이 철렁했는데, 갑자기 글씨가 바뀌면서 W자가 No 바로 뒤에 붙었어요. 그래서 Now Here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지금 여기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신앙생활이 힘들고 살기가 힘들다면 한 단어만 앞으로 당겨 보십시오, 한 발자국만 디뎌보세요. No가 Now로 바뀝니다. 정말 모든 것이 안 되고 있다면 한 글짜만 당겨보세요. 그러면 Now가 되고, 뒤의 것은 Here로 바뀝니다.
 
찬송가 가사 중에 “내가 어둠속에서 헤맬 때에도 주님은 함께 계셔. 내가 시험당하여 괴로울 때도 주님은 함께 계셔. 기뻐 찬양하세. 할렐루야. 주님 나와 함께 계시네.” 인생에서 가장 어두울 때, 그 어둠속에서 찬송도 할 수도 기도할 수 없고 정말로 어려울 때,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 정말로 마음이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실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폈는데,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않겠느냐.”는 말씀이 큰 글씨로 다가오는 거예요.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은 왜 귀를 만드셨을까요. ‘사람이 들으라고 만드셨겠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내 말 들으라고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귀를 지으신 이가 어찌 듣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림자만 보고 살지 말고 태양을 보며 살기 바랍니다. 요셉은 참으로 인생에 의문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억울하지요.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어요. 그런데 인생은 너무 힘든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고 형들이 죽이려고 하고, 그들에게 팔려서 애굽에 노예로 갔어요.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노예로 팔려갔다면, 많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낙심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되었고, 자기뿐만 아니라 보디발의 집도 복을 받았어요. 또 요셉은 성실했고 일을 잘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인집 여자가 달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할 수 없다고 결단하고 겉옷을 벗어놓고 달아났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또 나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는 분 앞에 죄를 범할 수 없다는 신앙 정신이 투철했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것은 감옥행이었습니다. 요셉은 할 말이 많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뭐라고 했는지 보겠습니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39:23). 인생의 비밀이 감옥에 있느냐 궁궐에 있느냐가 아니고, 넓은 평수 아파트에 사느냐 좁은 평수에 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궁궐 속에 있다고 형통한 것이 아니고, 감옥 속에 갇혔다고 불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디든지 범사에 형통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부활하신 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입니다. 여기에 꿈이 있고 희망이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림자는 보는 사람에게는 꿈이 없어요. 그러나 태양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꿈이 있지만, 그림자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 새벽에 이렇게 부르짖습니까? 새벽에 주님은 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나를 외면하고 나를 받아 주지 않지만, 세상에서 내 소망을 찾을 수 없지만, 주님은 나에게 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조지 뮬러 목사님은 “이왕이면 새벽에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두 제자가 욕심을 내려놓았다면, 주님과 함께할 때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겠어요. 욕심이 그들의 눈을 가리니까, ‘예수 잘못 믿었나 보다. 교회 잘못 다녔나 보다. 내가 갖고 있던 신앙이 잘못되었나 보다’하며, 그렇게 돌아서서 고향땅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찾아오셔서 꿈을 주셨어요.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24:16)과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눅24:31)을 연결해 보면, 욕심이 그들의 눈을 가리게 만들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최소한 정치적 메시아가 되기를 바라는 야망이 그들의 눈을 가리웠어요. 교회는 다니고 신앙생활은 하지만 예수인 줄을 몰라봐요. 이런 신앙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해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밝아지니까 예수님이 보이는 거예요. 그렇게 알아보니까 예수님은 떠나시고 없었어요. 이번 부활절 지나고 한 주가 지났는데 우리의 눈이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반전이 일어났어요. 예수님이 보이니까 신앙생활에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전에는 고향땅 엠마오로 가려고 했습니다. 11킬로를 터덜터덜 얼마나 힘이 빠져 있었습니까. 실패자로 돌아가니까 더욱 그랬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눈이 밝아 밝히 보이니까, 당장 돌이켜서 예루살렘으로 간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눅24:32-35). 그들은 “과연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는 ‘과연’이 없어요. 그냥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하니까, ‘살아나 봐야 뭐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주겠어, 부활이 뭔데, 살아났다고 해도 뭐 보이는 것이 없잖아’ 하다가 이제는 “과연 살아나셨다”라고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형제들과 함께 하고, 결국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면 인생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면 신앙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왔던 길을 돌이켜서 제 자리로 빨리 가고 싶어집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난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 분이 과연 살아났다.’ 우리는 이것을 간증이라고 합니다.


신앙에는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난 간증이 있어야 되요. 그래서 말로만 듣던 살아났다가 “과연 살아났다”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분들이 기도할 때 그 기도는 마음을 울려요. 주님을 진짜 만난 사람들의 찬송은 마음을 울려요. 주님을 진짜 만나고 바치는 헌금은 주님께 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옥합을 깨트린 것 아닙니까? 제자들은 왜 그 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허비하냐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를 풀어서 주님의 발을 닦고 옥합을 깨트립니다. 과연 주님의 주님 되심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헌금이 아깝지 않습니다. 내 인생을 다 바치라 해도 기쁨으로 바치게 됩니다. 우리 모두 다 과연 살아계신 주님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만났으면 좋겠어요.


어제 우리는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무슬림 국가에서 전도하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무슬림 국가에서 17년을 선교했는데 한 사람도 전도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 분은  그 곳에서 전도하다가 잡혀 끌려가 얼마나 맞았는지 정신을 잃었고, 몸의 마비 증세까지 왔어요. 그래도 무죄를 받았습니다. 또 한 번은 어떤 사람들이 교회에 등록을 했는데, 알고 보니 국가 당국 요원이었어요. 기독교를 증거하는 것에 정보를 알아내려고 온 것입니다. 선교사님이 성경 신구약을 강해하고 난 후, 그들이 마호멧과 코란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질문에 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목숨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 날은 주께서 진실을 말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코란과 마호멧에 대해서 분명히 얘기했어요. “성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코란을 믿는 당신들은 폭력하고 살인을 한다. 성경과 코란은 다르다. 마호멧은 성경에는 없다”고 말입니다. 결국 3년 넘게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이 홀로 무슬림 최고의 법정에 서 있고, 기자들은 꽉 들어차고 딱 눈을 든 순간, 하나님의 큰 손이 재판장위에 올려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하나님이 그것을 보여주셨어요. 뭔가 일어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어느 목사님은 그날 아침 “틀림없이 반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의 한 교회 성도들이 3년이 넘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금식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선고의 날, 법정최고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순간에, 그 나라 최고의 검사가 구형을 낭독하는 거예요. 요지는 코란을 모독하고 마호멧을 모독한 죄로 법정 최고형을 구형했습니다. 무슬림 국가로서 당연한 판결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한 마디는 충격이었습니다. 검사는 이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코란을 믿는 무슬림들은 폭력을 행한다. 마호멧은 성경에 없다. 그러므로 무죄를 구형합니다.” 그 나라 최고의 검사의 입에서 나온 이 말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아무도 대답이 없는 거예요. 두 사람의 재판관과 헌법 학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검사가 무죄를 구형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판사는 사실을 기록한 것을 확인 한 후, “기록된 그대로 무죄를 선고합니다.”하고 서둘러 나가버렸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이처럼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의 반전이 어디에서 일어나요? 욕심가지고 일어납니까? 아니에요. 욕심은 우리를 슬프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욕심은 만족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도 욕심 있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지 못해요. 그저 실패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반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 사탄마귀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면 인생의 반전이 일어나요. 안 되는 일이 되고, 주 안에서 바라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과연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할렐루야! 그 주님이 믿어져서 눈이 밝아지고 주님을 만나서 인생의 반전이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섬김이2 | 작성시간 17.04.24 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항상 힘이 됩니다.
  • 작성자갈렙 | 작성시간 17.04.25 아멘~~
    나의 기대가 욕심이 되지 않게 하시고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신앙의 대반전을
    이루는 역사를 반드시 경험하길 원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