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응성 장군 묘
변협 장군.변응성 장군 전기와 묘소 사진15장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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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협 장군.변응성 장군 전기와 묘소
원주변씨 시조 호국인물 원천부원군 대은 변안열 장군
7세 참판공파 변협장군과 변응성 장군묘를 참배하고
영상으로 담고 선조님의 전기를 올린다
첨추공파20세 일춘 변용구
1.위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산26-4
2.교통
운길산역에서 도보2~30분
3.상세설명
원주변씨 대동보 권1, 90페이지 참판공파 7세손
邊協 장군
본관 원주(原州), 자 화중(和中), 호 남호(南湖), 시호 양정(襄靖)이다. 1548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乙卯倭變) 때 해남(海南) 현감으로 왜구(倭寇)를 격파한 공을 세워 장흥(長興) 부사가 되었다. 그후 제주(濟州) 목사가 되어 1565년 조정의 명에 따라 유배 중인 도대선사(都大禪師) 보우(普雨)를 참형(斬刑)하였다. 1587년(선조 20) 전라우방어사로서 녹도(鹿島)·가리포(加里浦)의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공조판서 겸 도총관·포도대장에 이르렀다.
일찍이 이이(李珥)에게 《주역(周易)》을 배웠고, 천문·지리·수학에도 정통하였다. 변방 산천도로의 형세를 도표로 만들어 적침에 대비하고 천문을 괸측하여 변란을 예측하기도 하였다. 그가 죽은 지 2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선조는 변협과 같은 장군이 없음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개설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화중(和中), 호는 남호(南湖). 아버지는 중추부경력(中樞府經歷) 변계윤(邊季胤)이며, 어머니는 참판 최자반(崔子泮)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재주와 용맹이 뛰어났다. 1548년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1555년(명종 10)에 해남현감이 되었다.
이 때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나 왜선(倭船) 600여 척이 전라도에 침범, 병사(兵使) 원적(元績), 장흥부사 한온(韓蘊)을 죽이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을 생포하였다.
그리고 연이어 난포(蘭浦)·마도(馬島)·장흥부병영(長興府兵營)·강진현(康津縣)·가리포(加里浦)를 함락하고 해남으로 침입했는데, 변협은 이를 격퇴한 공으로 장흥부사가 되었다.
또 이 때 왜적의 포로가 되었던 명나라 사람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 명나라로부터 은과 비단을 상으로 받았다. 1563년(명종 18) 만포첨사(滿浦僉使)를 지낸 뒤, 이듬해 제주목사가 되었는데 1565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고 보우(普雨)가 제주도에 귀양오자 조정의 명에 따라 참살하였다.
1587년(선조 20) 전라우방어사(全羅右防禦使)가 되어 녹도(鹿島)·가리포의 왜구를 격퇴했으며, 그 뒤 공조판서 겸 도총관과 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파주목사(坡州牧使)로 재직할 때 이이(李珥)로부터 『주역계몽(周易啓蒙)』을 강론받았으며, 천문·지리·산수에도 정통하였다.
변방 10여 군현을 순시해 산천 도로의 형세를 조사하고 도표로 만들어 적침에 대비하였다. 또, 천문을 관측해 변란을 예측하기도 했는데, 변협이 죽은 지 2년 뒤에 과연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란 때 신립(申砬)이 군사를 이끌고 문경새재로 떠날 때 적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 본 선조가 변협을 양장(良將)이라 칭찬하며, 변협이 없음을 아쉬워하였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변협(邊協))]
邊應星 장군
개설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기중(機仲). 아버지는 공조판서 겸 도총관 변협(邊恊)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였고, 강계부사를 역임한 끝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물러가 있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먼저 경주를 점령하여 부임하지 못하고, 8월 가평 전투에서 적과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쳤다는 이유로 백의종군하였다. 이듬해 2월 유성룡(柳成龍)이 그의 죄를 변호하여 경기방어사가 되었다. 이천부사(利川府使)가 되어서는 여주목사 원호(元豪)와 협력하여 남한강에서 적을 무찔렀다. 1594년 광주·이천·양주의 산간에 출몰하는 토적(土賊)을 토벌하였으며, 한강 상류 용진(龍津)에 승군을 동원하여 목책(木柵)을 구축하여 병졸을 훈련하였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용진과 여주 파사성(婆娑城)을 수비하였다. 광해군 때에 훈련대장과 판윤에까지 승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박응서(朴應犀)의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혜(襄惠)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변응성(邊應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