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바위에 아무것도 더하지 말라 |
| 본 문 | 민 20장 1~13절 1.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2.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모여드니라 3.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4.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5.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 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6.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9.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 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3.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 |
| 일 시 | 2026 06 14 주일예배 |
성경을 읽다 보면 어떤 때는 하나님은 참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모세를 생각하면 특히 그러합니다. 모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 품에 안겨 자라지 못하고 남의 손으로 키워지다가 광야로 쫓겨나 40년을 살아갑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안에서 부르시지요. “네가 내 일을 좀 해주어야 하겠다.”라고 하시면서요.
극구 사양을 하는 모세를 억지로 세워 하나님보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더 믿는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와 죽을 고생을 하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향해 40년을 유리방랑합니다.
이제 다 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입니까? 물 달라고 아우성치는 백성을 위해 바위에 지팡이로 두 번 때렸다고 해서 비정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원치도 않는데 억지로 일을 시킬 때는 언제고, 지팡이로 바위 두 번 때린 것이 뭐가 그리 큰 죄인지 40년 광야 고생을 물거품으로 만드시는 것일까요? 성경을 볼 때마다 궁금하고 또 궁금했습니다. 오늘은 이 의문을 풀어가면서 은혜를받고자 합니다.
1. 물이 없는 광야
모세가 지나온 광야는 언제나 인간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광야에서는 멋진 옷차림이나 화장이 소용없습니다. 낮에는 뜨거워 숨조차 쉬기 어렵고, 밤이면 몸이 얼어붙고 빛도 없고 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광야 생활은 그 사람의 믿음의 무게를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물이 있고 먹고 살 것이 풍부하고 가는 길이 보일 때면 모두 하나님을 경배 찬양합니다. 그러나 물이 마르고 먹을 것이 없게 되면 사람은 자기 안에 누구를 왕으로 앉혀 놓고 있었는지를 드러냅니다.
민수기 20장의 이 장면은 바로 그 광야 끝자락에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신 광야 가데스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죽었습니다. 광야 생활 40년에 미리암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이제 늙고 병들고 하나님 곁으로 갑니다. 약속의 땅은 아직 눈앞에 펼쳐지지 않았는데, 출애굽의 세대는 하나둘 사라집니다.
40년을 헤맸습니다. 그럼에도 난국은 아직 계속됩니다. 사람들의 피로도가 극에 달한 상태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다시 모세와 아론에게 모여들어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것은 단순한 목마름의 호소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신 길 전체를 부정하는 절규입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고 말합니다.
이 장면을 오늘에 비추어보면 바로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은혜를 잊으면 세상 생활도 그리움이 됩니다. 광야에서 마늘과 파가 그리운 것처럼 세상이 주는 쾌락을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물이 없어서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물이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잊었기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목마름은 현실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목마름을 없는 일처럼 다루지 않습니다. 문제는 목마름 자체가 아니라, 그 목마름 속에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물을 주십시오. 주께서 홍해를 가르셨고, 만나를 내리셨고, 반석에서 물을 내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입술에서는 기도보다 원망이 먼저 나왔고, 믿음보다 불신이 먼저 나왔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회막 문으로 갑니다. 여호와의 긍휼히 여기심이 다시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백성을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반석은 단단하고 움직이지 않는 바위, 인간의 손으로 생명을 짜낼 수 없는 죽은 물질입니다. 물이 나올 것이라고 어떤 가능성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죽은 바위에서 생수를 내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인간이 가능성을 발견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2. 모세가 저지른 불순종
모세는 회중 앞에 섰을 때 흔들렸습니다. 그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불같은 화가 치밉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말 속에는 깊은 피로와 함께 짜증과 원망이 가득 묻어 있습니다.
그는 오래 참았습니다. 수십 년 동안 백성의 불평을 견뎠습니다. 금송아지의 죄악도 보았고, 정탐꾼 사건의 불신도 보았고, 고라의 반역도 겪었습니다. 그는 그때마다 백성을 위해 중보했고,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져도 좋다고 할 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를 가볍게 비난할 수 없습니다. 이 장면은 한 위대한 종의 무너짐입니다. 거룩한 사명자가 지친 영혼으로 넘어진 자리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두렵습니다.
믿음의 거인도 자기 분노를 하나님의 거룩으로 포장할 수 있습니다. 오래 섬긴 사람도 어느 순간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감정을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분노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상처받은 자아가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이 나오게 하라”고 바위에게 명하라 하셨습니다. 이전 출애굽기 17장에서는 반석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치는 것이 순종이었습니다.
어쩌면 모세는 이전의 일을 생각하고 바위를 지팡이로 내리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말로 명하라고 하셨습니다. 어제의 순종이 오늘의 불순종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믿음은 언제나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어제는 맞았지만, 오늘은 틀립니다. 그러므로 어제 들었던 말씀을 오늘 다시 들어야 하고, 오늘 들은 말씀을 내일 다시 겸손히 받아야 합니다.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물은 많이 솟아났습니다. 갈증에 시달리던 회중과 짐승이 마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장면입니다. 모세가 불순종했는데도 물은 나왔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더욱 두렵게 합니다.
물이 나왔다고 해서 모세의 행동이 옳았던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물을 보고 환호했을지 모릅니다. “역시 모세다. 역시 능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순간 모세의 중심을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물을 주셨지만, 모세의 불순종을 그냥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은혜가 흘렀다고 해서 죄가 가벼워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물을 주셨고, 동시에 당신의 종에게 거룩한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위더러 “물을 내라”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거기에 자기의 행동, 바위를 치는 불순종을 범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 “바위야! 물을 내놓아라!”는 것과 바위를 지팡이로 친 것의 무엇이 다르다고 모세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는지 참 하나님께 서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바위가 물을 내놓도록 다 해놓으시고 모세가 말만 하면 물이 탁 터지게 은혜를 베풀어 놓으셨는데 거기에 자기의 행함을 얹으려는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위는 바로 복음입니다. 17장에서 바위를 치라고 한 바위는 모세의 행함이 있어야 하는 율법이라 한다면 20장의 바위는 행함이 필요없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믿음으로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복음 위에 모세의 행함을 얹었습니다. 바위가 물이 솟아나게 하려면 자기의 두드림이 있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모세는 엄청난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갈증에 헤매는 백성을 위해 바위에 물을 준비하여 말만 하면 될 것을 모세는 거기에 자신의 행함을 얹은 것입니다.
이제 모세가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십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순전히 복음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모세가 당연히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 개인의 아픔보다 하나님의 복음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일러주시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업적 때문에 죄를 눈감지 않으십니다. 이 땅에 매머드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워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저 종일 뿐입니다. 오래 믿은 사람도, 큰 일을 한 사람도 은혜 없이는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공로로 지옥을 면책받는 특권층이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적 행위는 자기 안전의 보장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은혜로 서야 하고, 누구든지 믿음으로 서야 하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거룩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모세를 정죄하기 위한 차가운 기록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뜨거운 초청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종이었지만 완전한 구원자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지금 무엇으로 목마름을 해결하려 하느냐?” 사람은 누구나 광야를 지납니다. 어떤 이는 병상의 광야를 지나고, 어떤 이는 외로움의 광야를 지나며, 어떤 이는 자녀 문제의 광야, 경제적 불안의 광야, 관계의 상처라는 광야를 지납니다.
어떤 광야는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기도할 힘조차 사라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광야는 하나님이 부재하신 장소가 아닙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깊이 만나시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그런 순간이 옵니다. 모든 설명이 멈추고, 사람의 위로가 닿지 않고, 내 힘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칠 수 없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반석에게 말하라.” 이것은 단순히 말의 형식에 관한 명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라는 초청입니다. 네 분노의 지팡이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라. 네 경험과 방식과 고집으로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려 하지 말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라. 은혜의 반석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라. 그분께 구하라. 그분을 바라보라. 그분 안에서 생수가 흐른다.
특별히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일수록 이 말씀 앞에 조심해야 합니다. 모세의 위기는 초신자의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오랜 순종 뒤에 찾아온 위기였습니다. 우리는 큰 사역을 이룬 하나님의 종 중에 많은 사람이 바벨탑과 같은 결론을 맺는 것을 종종 봅니다.
많이 참은 사람이 어느 순간 참았던 세월을 자기 의로 바꿀 수 있습니다. 많이 섬긴 사람이 어느 순간 섬김의 기억을 권리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많이 기도한 사람이 어느 순간 기도한 공로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제가 새겨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내가 얼마나 섬겼는데.” “내가 아니면 누가 했는데.”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이 말들이 마음속에 쌓일 때, 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라고 말하는 모세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교회는 내 것이 아닙니다. 사역도 내 것이 아닙니다. 가정도 내 소유가 아닙니다. 사람의 영혼은 내 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물을 내십니다. 하나님만이 살리십니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3. 모세가 받은 질책과 은혜
그러면 모세는 영원히 그 잘못을 용서받지 못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징계를 받았으나 언약 밖으로 쫓겨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사랑하셨고, 후에 변화산에서 예수 그리스도 곁에 서게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의 깊은 위로와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들어갔습니다. 참 약속의 성취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지만, 회개하는 자를 끝까지 붙드십니다.
징계는 버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징계는 돌아오게 하는 사랑의 손입니다. 우리가 넘어졌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실수했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세처럼 감정에 무너지고, 말에 실패하고, 거룩을 가린 적이 있다 해도, 십자가 앞에는 다시 돌아갈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시 배워야 합니다. 목마를 때 원망보다 기도를 먼저 배워야 합니다. 상처받을 때 분노보다 엎드림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사역할 때 성과보다 낮춤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 옳고 그름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잊고 애굽을 그리워한 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맞으셨기 때문입니다. 참 반석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깨지셨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모래바람 속에서도 다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사람은 이제 끝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아직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가데스의 목마름 속에서도 하나님은 물을 내셨고, 우리의 광야 속에서도 주님은 생명의 샘을 여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손에 들린 지팡이를 내려놓읍시다. 사람을 향해 휘두르던 분노의 지팡이, 나 자신을 몰아붙이던 정죄의 지팡이, 하나님보다 내 방식이 옳다고 믿었던 고집의 지팡이를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섭시다. 거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 죽음 가운데 생명을 일으키시는 하나님, 불순종한 종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은혜의 이야기 안에 세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