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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읽는 소식

5월 회원의날 오라탐방

작성자오라수|작성시간19.05.08|조회수958 목록 댓글 2


















































오라동과 4·3

 

오라동과 4·3

오라동은 모오동(동가름, 오라1), 사평, 연미, 정실, 월구, 공설, 동성마을 등 7개마을이 통합된 행정동이다. 오라동은 제주시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제주시 남쪽 한라산국립공원까지 길게 뻗어가면서 한천의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계곡, 드넓게 펼쳐진 대지에 열안지 오름과 민오름을 껴안아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4·3 당시 제주읍 오라리는 비교적 중산간 마을에 위치해 있어서 4·3 초기부터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 피해가 많았다. 1947년 관덕정 일대에서 발생한 ‘3·1발포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6명의 희생자 중 3(오라1구 허두용 15, 오라3구 양무봉 49, 오라 2(도두) - 박재옥 여인)이 희생자가 발생했다. 19484월 한 달 동안에 무장대와 경찰에 의한 주민 희생과 납치 등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후 428일 국방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회담을 갖고 ‘72시간내 전투 중지등 평화 협상을 진행하였으나 51일 발생한오라리(연미마을) 방화사건으로 인해 미군정은 강경모드로 전환하였다. 경찰과 서청, 대청 단원들이 연미마을 다섯가구 12채의 가옥에 불을 지르고 마을을 떠날 무렵, 경찰은 2대의 트럭을 타고 오라마을로 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주변의 오름이나 하천변의 궤 등지로 피신했고 일부 주민이 희생되었다. 경비대 군인들이 마을에 출현하자 경찰들은 황급히 마을을 떠났다. 미군 촬영반은 이 사건을 비행기와 지상에서 촬영했다. 미군정은 제주4·3 진압의 당위성을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사전에 연출된 영상을 제작했다. 이 영상은 제주도의 메이데이라는 제목으로 제주4·3사건의 초기 상황을 다룬 유일한 영상기록으로 남아 있다.

 

같은 해 12월 중순 연미마을에 있던 오라공립국민학교가 불에 타 전소되었고 교원 3명도 희생되어 학교가 폐교되는 피해를 당했다.

오라리 주민들은 4·3 기간 동안 열안지 오름 등에 피신했으며, 소개가 되지 않았던 오라 1·2·3, 도남 등지에서 소개 생활을 하다가 1950년 봄이 되면서 마을이 복구되기 시작했다. 오라동은 4·3의 전개 과정에서 주민 240여명이 희생 되었으며 어우늘, 해산이, 고지레, 선달뱅디 마을 등은 복구되지 못한 채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오라리 방화사건은 4.28 평화협상을 무산시킨 사건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19458.15 해방직후 오라리 마을 여론은 상해임정에 참여 했던 독립지사와 일제 경찰에 고초를 겪은 사회주의 항일운동가들의 영향으로 2000여명의 주민들이 5.10선거를 거부하고 열안지 오름과 당병이등에서 피신생활을 했다.

19473. 1- 관덕정 경찰발포사건으로 6명이 사망(오라리 주민 3)

19484.11- 정실마을 경찰가족 송인규가 산사람에 의해 사망,

가옥도 불에 탐

19484.21- 오라 2구 이순오 경찰이 쏜 총에 사망

19484.23- 주민 김태중 산사람과 내통했다는 첩보에 의해

경찰에 연행, 사흘 뒤 동산물에서 총살된 시체로 발견, 이로 인해 대청단원 밀고설이 확산되면서 마을 분위기가 격앙됨

4.29- 대동청년 단장, 부단장( 박두인, 고석종) 마을주민에 의해 민오름으로 끌려가고 나서 행불

4.30- 대청단장, 부단장 부인 강공부, 임갑생 마을 주민에 해 민오름으로 끌려간 강공부는 사망, 임갑생 탈출

5. 1- 연미마을 인근제기물에서 강공부 여인 장례식, 이날 장례식에는 주민 없이 34명의 경찰과 서청 대청단원 30명이 참석, 장례식이 끝난 후 경찰은 트럭으로 철수, 서청대청 단원들은 남아 손에 몽둥이를 들고 연미마을로 진입, 산쪽에 가담했던 허두경씨 집을 시작으로 5가옥 10채에 방화, 마을이 불에 타기 시작하자 경찰기동대가 연미마을로 출동했고, 공중에는 헬기가 창공을 선회하며 불타는 오라리를 촬영.

5. 2- 9연대 조사반에 의해 박○○ 대청단원 연행, 모슬포 연대본부 영창에 감금되었으나 박진경 중령에 의해 구금 22일만에 석방되자 주민반발에 의해 재 구금되었다가 다시 석방된 후 경찰학교 제9기생으로 입교한 후 경찰로 활동

11.19군경토벌대 정실마을을 불태움, 구아랑 마을도 불태움

12. 5오라1구 모오마을 공회당 알밭에서 주민 7명 총살

12.10월정사 방화

19491. 1연미마을, 어우눌, 해산이 방화

1.25미고문관 오라리에서 남자, 여자, 어린이 시체 97구 발견

4.3 오라동 희생자 243, 수형인명부 등재 81

 

오라동 4·3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2018728오라동 4·3이 개통됐다. ‘오라동 4·32개 코스에 총 12km 구간으로 조성됐다. 1코스는 연미 마을회관을 시점으로 조설대, 어우늘, 월정사 등을 탐방하는 6.5km 구간이다. 2코스는 연미 마을회관, 오라지석묘, 고지레, 선달뱅듸 등으로 이어지는 5.5km 구간으로 이루어졌다.

    

1코스

어우눌 : 43 당시 초토화 작전에 따라 불타 없어진 마을로 해산이와 함께 오라리 연미마을에 속했던 자연마을이다연미마을의 윗지경 서쪽에는 어우눌, 동쪽에는 해산이 마을이 나란히 있었으나 19491월 초순, 죽성에 주둔했던 제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한 날 한시에 방화 소각되었다.  

 

150여 년의 설촌 역사를 지닌 어우눌에는 한때 문음서당(文陰書堂)이 있어 유학자들에 의해 교육이 행해지기도 했다.

 

민오름 : 민오름은 연미마을과 정실마을 사이에 위치한 표고 251m인 말발굽형 화구를 품은 오름이다. 지금은 숲이 울창하지만 4·3 당시에는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오름이었다. 민오름은 제주4·3 당시 유일한 동영상인 제주도 메이데이에 선명하게 등장한다. 194851,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하기 전날 대청단원의 부인 2명이 납치당하여 끌려온 곳이 바로 이 민오름이다. 두 여인중 한명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여 목숨을 부지했지만 나머지 한 여인은 끝내 희생을 당하고 말았다. 또한 민오름 중턱에는 4·3당시 마을주민들이 피신 생활을 하다가 희생된 동굴터가 있다.

 

열안지(列雁旨) : 제주과학고등학교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는 표고 583m인 오라동을 대표하는 오름이다. 오름 전체가 해송과 편백나무 등이 울창한 숲으로 이루고 있고, 남동쪽에는 열안지 물이라는 샘물이 있다. 열안지의 지명은 기러기가 줄을 지어 날아가는 형상에서 유래 했다. 제주4·3 당시 열안지 오름 일대의 숲과 계곡은 오라리 주민들이 피신처이기도 했으며, 많은 주민들이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눈물의 대지이기도 하다.

 

월정사 : 월정사는 1934년 김석윤스님이 범어사 제주포교소 월정암으로 처음 등록하였고, 1938916일 선학원 전신인 조선불교 중앙선리참구원 제1지방분원으로 설치한 제주 최초의 선원이다. 4·3이 일어난 해인 19481210, 토벌대에 의해 월정사 건물 5동이 불태워진다. 1216일에는 월정사 경내에 있던 김석윤스님의 아들 김덕수스님이 토벌대에 끌려가 박성내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집단학살을 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1949223일에는 관음사를 방화하고 내려오던 토벌대에 의해 법당마저 불태워져 월정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다. 4·3이 끝나고 몇몇 스님이 월정사 터에 7평가량의 난민보건주택으로 건물을 짓고 사찰의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1970년대에 대웅전과 요사채 등을 신축하여 지금의 월정사의 모습을 갖췄다.

월정사는 제주 최초의 선원으로서 제주4·3사건 당시 제주도민과 함께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은 사찰이다.

도노미(정실) 본향당 : 이곳은 하르방·할망신 부부를 모시고 있다. 당 옆에는 마을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됐던 샘이 있는데 연꽃잎에 고인 구슬 같은 샘이라 하여 옥련천이라 부른다. 이곳 당에는 궤가 있기 때문에 일제시대에는 일본군 화약보관소로도 이용되었고, 4·3당시에는 정실마을 주민이 이곳에 숨어 살기도 했었다. 하르방·할망신이 마을주민들을 보호해 주어서 인지는 몰라도 이곳에 숨었다가 잡히거나 희생됐다는 이야기는 없다.

 

해산이 : 연미마을회관에서 동남쪽 방향 민오름 북녘 기슭에 위치해 있던 이 마을은 어우눌과 함께 연미마을에 속한 자연마을이다. 마을 지형이 마치 개가 새끼를 낳은 것처럼 보여 해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19491월 죽성에 주둔했던 제2연대 3대대에 의해 전소되어 사라진 마을이다.

 

2코스

오라1(모오동) 공회당 옛터 : 오라1() 공회당이 있었던 장소로 4·3당시 경찰과 군이 수시로 주둔했다. 토벌대가 마을을 수색한 후 주민들을 집결시켜 삶과 죽음을 결정하던 한이 서린 장소다. 1948115, 끌려나간 주민 7명이 공회당 바로 아랫밭에서 총살을 당했는데,

7명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알 한 방이 몇 명의 몸까지 뚫을 수 있느냐를 실험하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은공회당이 사람 잡는 곳이라하여 토벌대의 악행의 배어 있는 기억을 지우려고 건물을 헐어 버렸다. 지금은 현대식 오라1동 마을회관이 자리잡고 있어 4·3당시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고지레 : 한천 바로 옆에 위치한 고지레 마을은 4·3 당시 10여호, 5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의 고지교가 놓여지기 전에는 한천을 건너는 길이 고지레와 이어져 있었다. 고지레 마을은 194811, 토벌대의 소개령과 초토화 작전으로 불타버린 뒤 복구되지 못했다. 지금은 대부분 농경지로 변해버려 당시 마을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으나 무성한 대나무와 집담 일부가 남아 있어 4·3당시 마을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선달뱅듸 : 설촌한 주민의 이름에서 유래한 선달뱅듸는 4·3당시 7호의 주민이 거주했다. 이 마을은 194811, 토벌대의 소개령과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주민들은 강제로 이주를 해야만 했고 불타버린 마을은 끝내 복구되지 못해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선달뱅듸에는 아직 그네를 매달아 타고 놀던 큰 나무와 마을 주민들이 드나들던 올레와 하천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 4·3 이전의 평화롭던 마을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사평마을 경찰파출소 옛터 : 초토화됐던 마을 일부를 재건하면서 경찰파출소가 들어섰다. 경찰의 감독하에 주민들은 등짐으로 돌을 날라 성을 쌓고 경비를 서야 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경찰들의 비인간적인 모욕을 감내하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경비를 서야하는 고단한 삶을 살았다. 당시 경찰파출소가 있던 자리와 성과 망루는 사라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오라동의 명소

조설대(국가지정 현충시설(국가보훈처, 관리번호 45-1-09)

오라2동 연미마을회관에서 남쪽으로 200여 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는조설대1904년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한다는 굴욕적인 내용의 한일의정서가 강제로 체결하게 되자 19053월 옛 북제주군청 앞에 있던 문연서숙에서 제주의 젊은 유림 12인이 의거를 결의하며集義契를 결성하고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그 치욕을 단죄하고자 125일 오라동 연미마을 망곡단(조설대가 있는 곳)에 모여朝鮮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며 그 결의를 다진 역사의 현장이다.

20102월 국가보훈처가 조설대를 국가지정 현충시설로 지정하였고 오라동에서는 12인의 구국항일혼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오라자연문화유산보전회 조설대관리위원회가 주측이 되어 2013년부터 조설대 집의계애국선구자 경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집의계 선서문 전문 : 吾等半萬年 歷史負戴한 우리 百姓으로서 朝鮮確固不動獨立守古開化 兩黨紛爭奸臣謀利輩 爲政倭寇倭寇侵入之紛爭義擧抗拒하여 忠君愛國禮義道德萬天下百姓들에게 感心이 되도록 行動하며 倭人一刀一劍殺戮할 것을 首領代表 李膺鎬契員과 더불어 宣誓한다.”(광무93)

 

집의계 12: 震翁 이응호(李膺鎬 오라)를 대표로 한 집의계원은 김좌겸(金佐兼 오라), 김병로(金炳潞 이호), 서병수(徐丙壽 대구), 김병귀(金炳龜-토평), 고석구(高錫九 오라), 김석익(金錫翼 이도), 김기수(金基洙 영평), 강철호(姜哲鎬 대정), 김이중(金履仲 거로), 강석종(康錫宗 오라), 임성숙(林成淑 대정)이다.

 

방선문 (제주시 종천길 39-1 (오라2) 명승 92)

방선문은 오라2동과 오등동의 경계 지점인 한천에 있는 바위로 바위가 문처럼 뚫려있어 사람이 지나 다니게 되어 있다.

이 바위를 동민들은 들렁궤라 불렀다. 구멍이 뚫려서 들린 바위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방선문은 선녀들이 찾아와 노는 문이라는 뜻과 신선이 사는 한라산을 들어가는 입구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곳은 기암괴석이 골짜기 양쪽에 우뚝 솟아 있어 마치 병풍같이 둘려져 있고, 두 줄기의 냇물이 합치는 곳에 깎아 세운 듯한 돌문이 방선문이다. 봄이면 방선문 계곡은 진달래꽃과 철쭉꽃이 만발한다. 영주 10경 중에 하나인 영구춘화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 일대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다 바위에 새긴 마애명이 50여 군데에 있다.

 

방선문 올레길

제주시 중심을 흐르는 한천을 따라 걷는 오라동 한천 올레길은 2009년에 오라동 주민자치위원회 특성화 사업으로 제주보건소 남쪽 고지교에서 방선문까지 한천을 따라 약 5km 조성된 숲길이다.

고지교에서 연북3, 한라도서관, 제주아트센터, 한북교, 정실오거리, 제주교도소, 방선문으로 이어지는 이 코스는 지역주민 스스로 만든 올레길로 유명하며, 하천 숲길을 따라 걷다 하천을 건너기도 하고,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는 코스로 길 안내가 잘 되어있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에 있어 접근성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새소리, 물소리 등 자연친화적인 숲길을 편안하게 걸을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중간에 제주불교성지순례길(절로 가는 길)도 만나며, 오라올레길 종점인 방선문에서는 다시 열안지오름까지 4.2km 구간도 조성되어 있다.

하천을 따라 이어지는 올레 길엔 장송(長松)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장송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잡관목이 어우러져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한여름에도 얼굴을 그을릴 걱정이 없는 완연한 숲 그 자태이다. 하천에는 다람쥐 굴이라는 구멍뚫린 바위와 묵직한 형상의 기암,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소()가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다.

 

면암 최익현 유배길

조선 말기 일본의 침략 아래 위정척사 사상을 자주적인 민족주의 사상으로 체계화하였으며, 유학의 거봉인 동시에 독립운동의 선구자로서 항일 운동에 앞장서 조선 선비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불리는 勉菴 崔益鉉(1833~1906), 그는 흥선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하고 고종의 친정(親政)과 흥선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하였다. 이는 흥선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하였다는 이유로 1873124일 제주에 유배되었다.

 

제주로 유배온 면암은 안달삼·김희정·강기석·김용징·김치용·김양수·김훈 등과 교유하였고, 1874(고종 11) 327일 이기온과 함께 한라산에 등산하였다. 그는 제주의 유림들이 항일운동의 의지를 다지는데 영향을 주었다. 구국항일의 비밀결사체 집의계는 그의 영향을 받아 결성되었고 1905년 연미마을 망곡단에 모여망국의 설움을 설욕한다는 의지를 바위에 새기게 된다. 조설대가 그 역사적 현장이고 이기온과 함께 한라산을 등정하기 위해 들렀던 곳이 방선문 계곡이다.

면암 유배길은 그의 정신을 짚어가며 유배의 자취를 음미하는 길이다. 2012512일 개통된 면암 유배길은 연미마을 회관에서 시작해 방선문까지 5km에 이른다. 면암은 제주시 칠성통에서 13개월의 유배시간을 보내다 유배가 풀렸을 때 방선문과 죽성마을을 거치는 등산로로 한라산 등반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는 당시 한라산의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고 방선문에는 최익현과 그 때 길 안내를 했던 제주의 유림 이기온의 이름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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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홍경희 | 작성시간 19.05.08 사진으로 다시 오라길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발바닥이 화끈거리는 분들이 계시겠네요! ㅎㅎ
    강봉수 선생님, 애쓰셨습니다!
  • 작성자김항신 | 작성시간 19.05.08 오라동4.3의 역사길
    못갔지만 덕분에 탐독 잘 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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