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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읽는 소식

2020 72주년 4.3문학기행

작성자강봉수|작성시간20.12.07|조회수280 목록 댓글 0

2020 72주년 4.3문학기행- 2020. 12. 6

 

산란이 태역밭

허영헌 눈밭이 피로 벌겅

이번 문학기행에는 코로나19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18명이 함께 했습니다

 

❚4.3문학기행을 떠나며

아직도 이 땅은 4·3이 할퀴고 간 상처가 아물지 않은 곳.

그 토양에서 자양분을 마셔온 작가들이기에

지울 수 없는 업보처럼 기꺼이 짊어지려 한다.

좀 더 치열하지 못했다는 뼈아픈 반성으로,

4·3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문학은 어떻게 만나왔고,

또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를 찾아 문학기행을 떠난다.

그 속에서 전쟁이 아닌 평화를, 분단이 아닌 통일을,

죽임이 아닌 살림으로써의 문학에 대해 돋을새김 하고자

한라산 밀림 속 산란이 전투 현장과 피난민 은거지 등을 찾아 나선다.

 

❚일정 및 프로그램

시 간장 소내 용
~10:00아라축협 주차장집결 및 점검
10:00~10:3031임반 태역밭이동 및 설명
10:30~13:00샛산란이오름유격대 은거지
13:00~15:30산란이오름 궤, 참호
화덕(피난민 은거지)
제례 및 점심
노래공연 및 시낭송 등
15:30~하산뒷풀이

※ 위 일정은 사정에 따라 변동될 수 있습니다.

※ 개인지참: 점심(식수 포함) 등 숲길 이동에 필요한 장비 및 복장

 

❚산란이 오름에 대하여

• 위치: 조천읍 교래리 산137-1번지 일대

• 표고: 792.1m • 비고: 167m • 둘레: 2,633m • 면적: 529,149㎥

• 궤펜이, 궤펭이, 살하니, 고편악(孤片岳) 등으로도 불린다.

• 이 오름은 세 봉우리마다 산상의 원형 화구를 가진 특이한 오름으로, 등성이가 서로 이어져 있는데, 제일 동쪽의 것이 주봉으로 궤펜이오름이라 하면 이 주봉을 지칭하고, 가운데가 tot궤펜이(비고 37m), 제일 서쪽이 섯궤펜이(비고 59m)라고 부른다.

【증언과 자료 1】

 

태역밭에서 때려 죽일 여산이었지요

 

아지트라는 것이 고정적이 아니고 남군에 있다가 적에게 발견이 되면 북군으로 넘어가고 북군에서도 남군으로 넘어가고 어느 지형에 우리가 마땅하게 좋다고 할 수가 없어요. 지형상으로 봐서는 남군쪽이 살기가 좋습니다. 지리도 알고 숲이 넓어요. 한라산과 숲 사이가 넓은 편입니다. 북군의 경우 제주시나 그런 곳은 지형이 별로 좋지를 못합니다. 어승생으로 동쪽으로 가면은 지형이 좋지를 못해요. 그렇지만 어느 곳이든 오래 살지는 못하고 자꾸 자꾸 부대를 이동하니까.

 

하치마키 도로에 매복을 했다가 공격도 하고 그랬지요. 단일화 시기에 7정이었던 무기가 내가 내려올 당시에는 7십 몇 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전에 큰 전과는 올리지 못해서 산사람의 피해가 더 크다고 볼 수 있지만, 우리는 총 맞아가지고 무장부대에 배치가 안 되어서 직접 참여는 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납치해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주로 있었는데, 개월악, 그 머리에 있을 때인데 그때 겨울이었어요. 무장부대에 피해를 가져오려고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눈 위에는 행동이 불리한 편입니다. 자취가 나타나니까. 그런데 눈 위에도 불구하고 행동을 했어요. 학교에서 등사판 같은 것들도 가져오고. 그런데 아래서는 산사람들이 했으면 틀림없이 눈 자국이 있고 눈 자국을 따라가면 잡을 수 있다고 해서 대대병력을 동원하여 토벌을 오는데, 산사람들도 틀림없이 눈 자국을 보고서 따라올 것이라고 보초를 세웠는데 보초를 잘못 세운 끝에 피해를 많이 봤어요.

 

보초가 보니까 적이 아주 가까이에 왔단 말입니다. 보초가 발견하면 적이 맞든 안 맞든 총을 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아지트에 있는 사람들이 비상체제를 해가지고 전투 준비할 사람은 전투준비 피할 사람은 피해야 하는데 이 보초는 뛰어와서 구두보고를 했어요. 그런데 적들도 바로 따라왔어요. 총을 안 쏘니까. 구두 보고하는 것을... 그래서 그 때 인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그 아지트에서 몇 사람이 피해를 보았죠. 그때 중면 사람 강창길이라는 사람도 덩치가 큰 사람이고 한데 그 사람도 거기에서 죽고, 그러니까 산에 사람들이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이대로 놔둬선 안 된다. 적들의 기를 꺾어야 한다. 기를 꺾으려면 이것들이 오늘 성과를 올렸으니까 내일 또 온다. 그러면은 우리가 작전을 세워야 한다. 개월악 저 편 밀림지대에 산란이오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오름 밑은 막 넓은 태역밭입니다. 눈이 쌓여 있는 그 태역밭 가운데로 행군을 했습니다. 그 태역밭에서 때려 죽일 여산이었지요.

 

행군을 해놓고 적이 오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적이 그날은 전날보다 엄청난 숫자로 올라왔는데 그때 올 때는 앞에 부대와 뒤에 본부대가 뒤따라오는 형태가 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 산란이오름 태역밭에 들어오는데 다 들어왔으면 우리 편 피해가 없었을 것인데 적이 워낙 군경이 합동해놓으니까 태역밭에 온 것은 소수부대이고 본부대는 후방에 있었어요. 산사람은 그것을 몰랐거든요. 선발대가 태역밭 가운데로 몰리니까 전투 개시 해서 마구 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전투가 붙으니까 눈 위에 태역밭 트인 데로 오는 것을 때려누이는 것이야 문제가 됩니까?

 

경찰은 총을 쏠 때 3개 동작으로 나누어서 쏘는데 산사람들은 1개 동작이니까 빠르고 정확하지요. 산란이 태역밭 허영헌 눈밭이 피로 벌겋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그때는 부상 중이어서 전투에는 참가 안 하고 선전부에 있으면서 전투에 참가한 사람에게 들었는데 피가 벌겅하고, 무장이 널려 있는데 우리가 이 무장만 확보하면은 토벌대 절대 한라산 올라오지 못할 것이다고 얘기하면서 무장을 거두는데 본부대는 그쪽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산 옆으로 해서 산란이오름 위로 올라와서는 기관총 두 개를 걸어놓고 마구 갈겨대는데 여기 사람이 무장을 뺄 수가 있어요? 오름과 태역밭이 붙어 있으니까 바로 옆에서 쏘는 것 같은데 무장을 빼지도 못하고 퇴각을 하는데 퇴각 명령을 다 듣지 못하고 분산되어 있었던 사람들은 총소리에 퇴각 명령을 못 듣고 거기서 다 죽었어요.

전투하는 사람은 죽을 부상이나 든 사람이 아니면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를 합니다. 이것은 단일화 후에지요.

 

선에 까지 안 나간 사람이 이호리 사람 김뭣이 하나하고 안덕 광평 김남규 동생 김봉규하고 이 부락 출신 장정시하고 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죽었어요. 나중에 그 세 사람의 시신을 내가 가서 파 왔는데... 이틀에 걸쳐서 산사람의 피해가 컸어요. 세 사람인가 네 사람이 죽었는데 토벌대는 피해가 더 컸던 것이 맞아요. 산란이 전투에서 군경이 죽은 것은 수십 명이라고 하지요. 양쪽 타격이 컸지만은 아래서는 사람이고 무기고 다 보충을 할 수 있는 것이니까 산사람은 보충이 안 되지요.

 

김남규라는 사람은 선흘에서 죽고, 봉규는 산란이오름서 죽어서 남규 처와 같이 가서 하루에 애월지경으로 이장을 해 왔지요. 그 당시에 전투에 참가했다가 죽으면 경찰이 모가지를 다 잘라 가버렸습니다. 광평리 양뭣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김봉규 처하고 서로 남매간이 되는 사람일 겁니다.

 

※증언자 김봉길(金奉吉): 35년생. 대정)

 

【증언과 자료 2】

 

산란이 전투와 김의봉 토벌작전

 

김의봉을 주축으로 하는 잔비들은 군경토벌대의 집중적인 소탕작전으로 큰 타격을 받고 있었다. 철통같은 방비 때문에 민가에 침투하는 길이 막혀 있었고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식량문제는 굶주린 배를 더욱 조이게 했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쫓기던 쥐가 고양이에게 역습하는 속성대로 자멸을 자초하는 최후발악이 1949년 9월에 일어나고 말았다. 도내 치안이 소강상태를 유지한 지 5개월 만의 일이다.

그해 9월 8일 조천국민학교에 공비들이 습격하여 등사판을 비롯한 부수 기재를 약탈해간 사건이 일어났다. 불온 삐라를 만들어 주민을 선동하기 위한 것이 목숨을 걸고 등사판을 빼앗아간 동기임이 분명했다.

군경토벌대는 즉각 출동, 산속으로 달아나는 적을 쫓아 추격하기 시작했다. 북제주군 조천면과 남제주군 경내에 위치한 속칭 ‘산란이’는 31임반의 중심을 이루며 남쪽에 궤편이오름이 있고 그 뒤쪽이 능선으로 둘러싸여 있어 천연적인 요새를 이룬 곳이었다. 1정보 가량의 평지에는 잔디가 무성하여 공비들의 연병장으로 이용되다시피 했다.

잔비 두목 김의봉은 이곳을 아지트로 잡아 잔비를 지휘하며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조천국민학교를 습격했던 공비들은 토벌대를 그곳으로 유인하면서 지형지물을 이용한 역습을 노렸던 것이다.

흉계를 간파한 토벌대는 즉각 총공격을 감행했다. 1차 전투가 산란이 못 미쳐 능선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 작전에서 6명의 공비가 사살되는 큰 전과가 올려졌다. 아군도 2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게릴라전에서 10대 1을 장담하는 공비의 6명 사살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아군 토벌대는 1차 전투에서 개가를 올린 후 여러 가지 적정을 검토 분석한 끝에 공비들이 지리멸렬한 것이 아니라 악이 난 나머지 보복작전을 획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나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튿날 적의 배후를 찌르기 위한 우회작전이 전개되었다. 공비들은 궤편이오름 부근과 산란이 잔디밭 입구에 보초를 세우는 등 여러 겹의 경계와 함께 요소요소에 매복조를 편성, 아군이 접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토벌대가 적정을 파악하기까지에는 실로 하늘의 도움이 더 없는 역할을 했다. 초가을인데도 산에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하여 삽시간에 사위가 하얀 백설로 뒤덮인 것이다. 아무리 은신술이 익숙한 공비들일망정 눈 위에 남긴 발자국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적정이 파악된 이상 모든 상황은 아군 쪽에 유리하게 이끌어졌다.

포위 공격을 펴려는 토벌대의 시야에 이쪽의 동정을 알리기 위해 뛰어가는 공비의 모습이 보였다. 이에 대비하여 전투태세를 가다듬으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여기저기서 집중사격이 가해졌다. 공비 매복조의 역습이었다. 전우들이 하나 둘 쓰러져갔다.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궤편이오름 북쪽 능선에 설치되어 있는 아군 기관총의 엄호사격을 받으면서 집요한 반격작전이 벌어졌다. 전면공격보다 처음 계획대로 우회작전이 유리하다는 것을 판단한 아군 토벌대는 사방으로 대원들을 분산시키면서 유격전으로 전법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해병대와 경찰 1개조가 계곡을 따라 적의 배후로 접근해갔다. 공비들은 눈앞의 아군을 의식할 뿐 배후를 찌르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 토벌대의 작전에 오히려 그들이 말려든 것이다. 그런데 지형이 불리했다. 하룻밤의 격전이 끝난 후 공비 6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도 많은 전사자를 내는 희생이 따랐다. 산란이전투가 얼마나 불리한 여건 하에 감행된 것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7명으로 구성된 적정조사반이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을 때 계곡 여기저기에는 피아의 시체가 즐비했고 풀섶과 바윗덩이는 피비린내로 물씬했다.

산란이전투는 비록 비싼 댓가를 치렀을망정 재산공비들의 숨통을 조이는 큰 타격을 줬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중대한 정보분석이 따랐다. 조천국민학교를 습격한 후 산간을 따라 공비들이 이곳까지 도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지방 지리에 익숙한 자가 인솔하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공비 두목 김의봉의 정체가 포착된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 대하실록 제주백년

 

 

【증언과 자료 3】

 

볼레 씨까지 먹어 똥을 싸면 벌겋게 나왔다

 

피신처에는 60~70여 가구가 모여들었다. 저마다 얕은 돌담을 쌓고 어욱(억새)을 덮어 하루하루를 견뎠다. 일주일이면 끝날 것 같았던 피신생활은 기약 없이 길어졌다. 12월20일께 피신처가 토벌대에 발각됐다. 작은 마을 규모로 커진 피신처 주민들이 식량이 부족하면 고구마를 캐거나 먹을 것을 챙기러 마을을 오가다 보니 눈 위에 고스란히 흔적이 남게 된 것이다. 토벌대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주민들이 흩어졌다. 거동이 불편한 노약자와 아기를 낳은 산모들은 총부리를 피할 수 없었다. 피신처에서 숨진 주민만 20명이 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토벌대는 솥단지와 그릇들을 깨뜨리고, 양식과 돌담 위로 얼기설기 엮은 어욱에 불을 질렀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근처에서 피신생활을 하는 외할머니를 만나러 가다 군·경 토벌대에 붙잡혔다. 어머니와 함께 지서로 끌려간 주민 30여명은 대부분 표선 백사장에서 총살됐다.

고씨네와 숙부네 가족은 피신처 인근의 궤(동굴)와 수풀 속에 숨어지냈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토벌을 피해 이동하는 나날이 반복됐다. 수망리나 의귀리까지 내려가 구해온 썩은 고구마를 삶아 먹다가, 그것마저 떨어지면 굶었다.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이들에게 볼레(보리수 열매)는 최고의 양식이었다. 고씨는 “씨까지 모두 먹어 똥을 싸면 벌겋게 나왔다. 볼레가 아니었으면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 볼레가 큰 양식이 됐다”고 말했다.

토벌대의 총소리가 나면 해발 600~800m에 있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 병참도로인 ‘하치마키도로’를 넘어 한라산 성판악 쪽으로 피신했다가 내려오곤 했다. 고씨는 “총소리가 나거나 인기척이라도 느껴지면 반대쪽으로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겨울 막내 여동생을 업고 숨을 곳을 찾아다녔다. 추위가 심할 땐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불을 피우기도 했다.

고씨 가족은 성판악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궤펜이오름(해발 792m) 부근까지 피신했다. 토벌대는 산 속에 숨을 만한 곳을 없애려고 마구잡이로 불을 놓았다. 추위가 풀려 눈이 녹을 무렵, 산 위쪽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했다. 조천면 교래리에 주둔했던 2연대의 2개 중대 병력이 성판악부터 아래쪽으로 ‘토끼몰이’하듯 토벌작전을 벌인 것이다. 불에 탄 산 속에서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숙부와 사촌 누나(당시 13), 어머니와 둘째 누나, 누이동생이 토벌대에 붙잡혔다. 이들은 교래리로 갔다가 제주시 주정공장에 수용됐다. 고씨와 사촌 형(당시 17)은 군인들이 닥치자 반대 방향으로 빠져나간 뒤 산에서 만난 주민들과 피신생활을 이어갔다. 신발은 얼기설기 엮은 짚신이 고작이었다. 동상에 걸린 주민들 발에서 고름이 흘렀다.

 

- 남원읍 의귀리 고기정 증언(한겨레신문 2018. 12. 4일자)

 

사려니 숲이라는 습에서

 

문 동 만

 

 

산죽, 같은 손금을 가진 손들이

정강이를 할퀴어댔습니다

붉은 흙길을 걷다 개울을 만나 발을 씻으면

물집으로 부르튼 까만 발들이 생각났고

손이 지은 죄들이 떠올랐습니다

물조차 씻겨내지 못하는 아픔은

시푸른 손들이 만져줘야 나을 때가 있었습니다

깊은 숲일수록 비밀이 선연하고

생각나는 건 사라진 사람들의

마지막 눈동자였거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 저녁밥을 먹을 수 없는

사라진 시간이었거나

깨진 밥그릇과 솥단지 사이에도

시원히 산바람이 일었고

누군가는 제상을 차리고

누군가는 풀밭에 드러눕고

검은 새는 돌아와야 할 사람처럼 머리맡에서

울어 댔습니다

그날의 사람들처럼

바람에 총성에 엎드렸다 일어섰다가는

울었다가 웃었다가는

밥과 술을 나눠먹고

검은 새들도 먹으라고

밥 몇 술을 푸른 숲에 던져 주었습니다

숲이라는 말은 습 같기도 해서

돌아와서도 더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물기 많은 지문 없는 손들과 악수를 하고는

습을 말릴 수 없는 그런 숲이 있었습니다

 

 

 

그 계곡 꽃들을 찾아

 

한 희 정

 

 

산허리 잘라낸 길로 조릿대 나직한 길로

아파서 더 붉었을 꽃무더기 찾아간다

숨통이 끊길 듯해도 단숨에 올랐을 길

 

달빛보다 생미 같은 별빛이 더 좋았을

유성 한 줄에다 무슨 기원 했었을까

건천의 고인 물위로 꽃잎 지듯 간 사람들

 

몇 줄의 기록조차 증명되지 않은 채

구전으로 내려오는 산물내 전투현장

핏빛도 세월은 흘러 두견화로 피었구나

 

눈물 밥, 백시루 한쪽 까마귀도 외면하는,

잊을까 무자년 그들 소박한 진설상 앞에

산물내 계곡 언저리 움 트는 눈빛 보았다

 

 

 

노루귀 산천

 

 

김 연 미

 

 

기다림에 지친 숲이 봄으로 갔어요

신동엽의 진달래 산천 아직은 먼 삼월 어귀

노루귀

분홍 노루귀

해방구가 여기네요

 

마지막 산사람이 귀 한 쪽 열어두고

냉전의 뿌리를 베고 잠이 들던 그 자리

지워진 파편자국에 귀만 남아 피네요

 

빈숲에 겨누었던 총부리 거두는 봄

햇살 환한 사람들이 한 줄로 찾아와서

노루귀

하얀 노루귀

무릎 꿇고 있네요

 

 

 

거문오름

 

 

나 종 영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고 그대 잊은 적 없다

 

눈보라 이기고 그대 발치 끝

거문오름에도 봄이 오리니

젖은 꽃잎 시든다고 나 그대 떠난 적 없다

 

비바람 그치면 여기저기

동백꽃 생모가지 떨쿤 자리에

또 다시 동백꽃 붉은 넋 피어나리니

 

역사는 봉화烽火를 기억하는 자의 것

새벽은 앞서서 산에 오르는 자의 몫일지니

 

아직 먼동이 트지 않았다고 그대 잊은 적 없다.

 

 

 

해산명령 1

- 자결

 

김 경 훈

 

1949년 3월경

한라산 유격대에게 해산명령이 내려졌다

 

3명 단위로 하산해서 후일을 도모하라는 것이었다

유격대의 희생을 줄이려는 고육지책이거나

대중운동을 전개하라는 이른바 하방투쟁이기도 했다

‘유격대의 습격-토벌대의 주민학살’이라는

악순환을 끊는 것이기도 했으리라

 

일부는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죽는 사람,

나무에 목매달아서 죽는 사람,

또 일본도로 자결하는 사람…

그들은 하산해서 이용당하고 말려 죽느니

고귀하게 자진한 것이었다

 

한라산을 위해 한라산에 몸을 바친 것이었다

 

 

해산명령 2

- 김양근

 

 

1949년 3월경

한라산 유격대에게 해산명령이 내려졌다

 

많은 수의 대원들이 마을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미 그곳은 토벌대의 아성일 뿐이었다.

대부분 체포당하고 투옥되었다

 

김양근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1930년대 항일투쟁으로 투옥되기도 했었다

어느 기자가 수용소애서 그를 만났다

 

문: 이번 제주도 4.3사건의 동기는 무엇인가?

답: 이것은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전 세계 인민항쟁의 하나이다.

문: 그러나 양민 살상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답: 인민 살상에 대하여는 무어라 변명할 여지가 없다.

문: 지금 전향할 의사가 있는가?

답: 전향할 의사도 없고 석방될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김양근은 1949년 10월 2일 처형되었다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구덩이에 동료들 249명과 함께

60년 이상 처참히 묻혀있었다

4.3의 기개가 고스란히 매몰되었다

항일의 정통 또한 묻혀버렸다

 

 

장편서사시

 

<한라산> 서시

 

이 산 하

1.

지금으로부터 어언 120여 년 전

미국과 유럽 제국주의가 세계의 약소국들을 침략해

식민지쟁탈전을 벌이던 약육강식의 19세기 후반

프랑스 해적선이 대동강을 붉은 피로 물들이고

미국 해적선이 먼 훗날 한국현대사의 무덤을 파듯

평양의 왕릉을 도굴해 조선국왕의 수염을 뽑고

일본이 다시 강화도까지 침략해 쇄국의 빗장을 부수자

이제 조선반도는 영국, 독일, 러시아까지 몰려와

마지막 동북아의 교두보로 치열한 각축장이 되어

서양제국주의 맹수들에게 온몸을 물어뜯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목에 이빨이 박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아플 권리도 약탈당하고 죽을 권리도 약탈당하고

슬플 권리마저 약탈당한 긴 긴 세월 동안

무당에게 홀린 ‘붉은 여우’의 국정농단으로

나라살림은 거덜 나고 민초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앉으나 서나 고통밖에 잃을 게 없는 민초들은

이왕이면 벌떡 일어나 서서 죽기로 결심했으니

황토현에서 치솟아 우금치 고개에서 장렬하게 꺼져버린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그것이요,

멀리 바다 건너 제주도 산방산의 들녘을 삽시간에 불태운

‘이재수 난’의 들불이 그것이다.

그러나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장수들이 참수되고

민초들이 총탄에 겹겹이 쓰러져 겹겹이 포개지자마자

한일합방으로 나라 잃고 하염없이 피눈물만 삼키다가

어느 날 도둑처럼 불쑥 찾아온 1945년 불볕 여름

일제식민지 36년의 치욕과 악몽이 끝나기도 전에

한 손엔 빵과 또 한 손엔 해방군의 탈을 쓰고

발톱까지 무장한 채 이 땅을 점령한 미제국주의자들은

마침내 순결한 조선의 푸른 산하를

두 토막으로 분질러 놓았다.

그리고 다시 40여 년의 기나긴 세월이 흘렀건만

일본총독부가 미국대사관으로 바뀌었을 뿐

미제의 창살 없는 감옥

이 식민지 산하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미제국주의 침략사 120여 년

다시 써야 할 피어린 민족해방투쟁의 한국현대사

압제의 사슬을 이빨로 뚝, 뚝 끊으며

붉은 피로 얼룩진 그 장엄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우리 어찌 잊을 것인가.

바람 부는 대로 쓰러지는 풀잎이 아니라면

결코 그들의 노예가 아니라면

우리 어찌 보고만 있을 것인가.

2.

이 땅은 아메리카의 한 주(州)

그들의 병영에서 짐승처럼 사육되었던 수많은 날들

그 수많은 신음의 밤들을 누가 잊을 것인가.

누가 잊으라고 하는가.

1948년 4월 3일 ‘제2의 모스크바’

밤마다 먼저 간 동지들의 피를 묻고

살을 묻고 뼈를 묻는 혹한의 한라산

그 눈 덮인 산하

붉은 피를 흘리며 끝내 숨져간

이름 없는 혁명전사들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끝내 이어지는 저 붉은 핏자국을 누가 잊는가.

누가 잊을 것을 강요하는가.

동상으로 썩어문드러진 발가락을 자르고

뼈를 깎는 모진 고문과 추위에

여성전사들의 생리마저 얼어붙는 밤

그들은 기어이 갔다.

총알 박힌 다리를 절룩거리며

동지들의 어깨에 매달려

진지로 돌아가다

진지로 돌아가다

끝내 쓰러져버린 그들은 갔다.

아-

기어이 갈 곳으로 가고야 마는가.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의 혁명전사들은 그렇게 갔다.

미제의 각을 뜨다가

적들의 심장에 불을 지르다가

끝내 다 뜨지 못한 채

끝내 다 지르지 못한 채

한줌 피 묻은 뼛가루로 날아갔다.

적과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인공(人共)의 깃발을

그 밑에 죽기를 맹세한 깃발

….

 

3.

검은 상복을 입고 40년만에 처음 찾은 한라산

내가 나를 운구하듯 걷는 이 학살의 숲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산등성이마다 뼛가루처럼 쌓여있는 흰 눈이며

나뭇가지마다 암호를 주고받는 새들의 울음소리며

삐라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에도

깜짝 놀라 피했던 새가슴이며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오름과 무덤마다

자지러질 듯 반짝이는 별들이며

청보리 일렁이는 생가슴마다 차곡차곡 돌 쌓아

멀리 수장하러 배 떠났던 바다며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허겁지겁 땅을 파헤쳐

씹고 또 씹었던 이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며

마지막 남은 낙엽마저 가솔린 냄새를 풍기며 불탔던

이 학살의 숲은

그러나 아직도 총소리로 가득하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쏘았지만

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

학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하늘에서는 미군 정찰기가 살인예고장을 뿌리고

바다에서는 미군 함대들이 경적을 울리고

지상에서는 미군 장교들과 토벌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모든 처형장을 진두지휘하던 그날

한국판 ‘KKK단’인 서북청년단이 아편에 취한 채

한림의 금악리를 빨갱이 마을로 지목해

80여 명의 남녀 중학생들을 금악벌판으로 끌고 가

집단총살을 하고 바다에 수장한 다음

서귀포 정방폭포와 천지연폭포로 몰려가

빨치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 발가벗겨

나무와 바위에 묶어 표창연습으로 삼다가

마침내 모두 대검으로 젖가슴을 하나씩 천천히 도려내

폭포 속으로 던져버린 그날

석양에 물든 사라봉 봉수대 동백숲에서는

서청에 뒤질세라 더 포악해진 반공청년들이

하나님을 외치며 열아홉 살 처녀들을 윤간해 생매장하고

서귀포 임시감옥에서는 친일경찰이

빨치산과 그 가족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

일제 뺀찌로 혓바닥 뿌리까지 뽑아버린 그날

바로 그날 관덕정 인민광장에서는

온몸이 총탄에 맞아 벌집으로 변한 사람

머리가 돌과 소총 개머리판에 맞아 함몰된 사람

복부가 대검에 찔려 창자가 삐져나온 사람

음부에 긴 쇠꼬챙이가 꽂혀 있는 사람

손톱과 발톱과 이빨과 혓바닥이 모두 뽑힌 사람

손바닥과 발등에 대못이 박혀 있는 사람

두 젖가슴이 모두 잘려나간 사람….

그런 사람들이, 한때는 사람이기도 했던 그런 빨치산들이

십자가 나무기둥에 묶여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이 간나새끼들과 에미나이들이 바로 빨갱이들이다!”

“폭도 빨갱이들의 종말은 이렇다!”

강제로 끌려나와 광장에 운집한 도민들을 향해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 같은 미친(美親)놈들이

팔짱 낀 미군 장교들에게 서로 충성이라도 하듯

니뽄도로 시체들을 쿡쿡 쑤시며 소리쳤다.

처참한 모습에 여기저기서 도민들이 말을 잃고 실신했다.

부모들은 손바닥으로 아이들의 두 눈을 가리기 바빴고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속으로 속으로만 어림잡았다.

저건 김운민

저건 박남해

저건 김병남

저건 양미선

저건 남 진

저건 현애란

저건 이덕구….

통곡도 오열도 없었다.

도대체 사람이어야 통곡이라도 하지,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결코 죽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낱 푸줏간에 걸린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한 개의 총알이 가슴에 박힌 것은

차라리 행복한 죽음이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한라산을 미친 듯이 뒤흔들었다.

“미군은 즉각 철수하라!”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조국통일 만세!”

“제주 빨치산 만세!”

붉은 저녁노을이 꽃상여 따라 관덕정 위로 지고

붉은 파도가 바람 따라 만장기처럼 출렁이며

사라봉 지나 성산 일출봉을 돌다가 피를 토하고

산방산 지나 송악산을 돌다가 다시 피를 토하고

그렇게 제주바다를 한 바퀴 돌면서 피를 토한다.

40년 전의 산은 다시 한 번 빈산이 되고

그 빈산에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살아도 흘러가고

죽어도 흘러가고

마침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흘러갔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산 자들은 더 말이 없는

이 참혹한 한라산

마지막 몇 사람이 기적처럼 살아

이젠 상주가 되어 걷는 이 학살의 숲

옆에서 동지들이 쓰러져 시체가 쌓이고 쌓여도

오래 슬퍼할 시간이 없었던 이 겨울 숲

이제 이 숲은 누가 지키며

지키는 자는 또한 누가 지킬 것인가.

빨갱이라서 죽은 게 아니라 죽어서 빨갱이가 되었던 세월

앞으로도 갈 수 없었고 뒤로도 물러설 수 없었던 세월

죽은 자가 산 자를 운구하듯

운구 된 자가 마지막 생의 수순을 밟듯

걷고 또 걷지만 여전히 맴도는 한라산

동지들이 토벌대의 삽자루에 생매장 당한 이 숲속

동지들이 토벌대의 작두에 목이 잘린 이 숲속

동지들이 토벌대의 총칼에 쫓겨 몸을 던진 이 절벽

이 아득한 숲을 내 어찌 벗어나리.

이 지극한 절벽을 내 어찌 벗어나리.

생의 절벽은 곧 나의 궁극이요

나의 궁극은 곧 생의 절벽일지니

그 백척간두에서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그 백척간두에서 내가 나를 위해 죽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한 발짝 진일보할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진일보한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과연 나의 존재근원은 어디서 비롯된 핏자국이란 말인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올해도 한라산의 물길은 여전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

흘러가면서 스스로 부서져 길을 만들 것이니.

그렇게 낮은 방향으로만 흘러흘러 길을 만들 것이니.

능히능히 그러할 것이니.

해마다 꽃 필수록 아픈 4월은 어김없이 다시 오는데

누가 그날의 제주바다를 기억하지 않는가.

누가 그날의 한라산을 추억으로만 기억하는가.

4.

돌려주자.

오늘도 노란 유채꽃이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는

아- 피의 섬 제주도, 그 4․3이여.

우리의 심장에서 피어나는 이 진달래꽃을

그 누가 꺾을 수 있으랴.

돌려주자.

친일매국노의 대를 이은 친미매국노들을 죽창에 꽂아

친일자본가의 대를 이은 친미자본가들을 횃불에 태워

그들에게 돌려주자.

그리고 꽃 피는 광주코뮌의 전사들을 학살한

저 피 묻은 5월의 원수들을 찢어서

갈가리 찢어서

‘조국 아메리카’의 후예들에게 돌려주자.

그리하여 역사가 고발하듯

태생부터 수천만의 인디언들을 학살하더니

태생부터 수백만의 흑인노예들을 학살하더니

그것도 모자라 태평양 건너 한반도까지 서부개척을 하더니

멀쩡한 땅을 남북으로 갈라 늙은 허수아비를 조종하더니

늙은 김구를 시켜 젊은 김일성을 폭탄테러로 없애려하더니

수백만의 양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무차별 살상하더니

평양 상공을 날며 움직이는 것들은 모조리 총질을 해대더니

대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네이팜탄으로 불태워버리더니

나치 같은 홀로코스트로 북녘을 병영국가로 만들더니

마침내 성조기의 51번째 별을 그리듯 휴전선을 그어

자유와 평화라는 이름으로 남한을 반공인질로 잡아

우리가 간신히 다시 일어나 간절히 다시 꽃 피울 때마다

가차 없이 민주주의의 동맥을 끊어온 너희 양키들은 들어라.

우리 한반도 인민들의 피가 더욱 붉은 것은

우리의 사상이 빨갱이에 물든 탓이 아니라

바로 너희 학살의 원흉들 때문임을

바로 너희 학살의 부역자들 때문임을

그리고 침묵하라.

어둠과 야만의 20세기, ‘자비로운 학살’을 주장하며

세계 곳곳의 전쟁터와 대량학살의 현장을 지휘하고도

국제법상 단 한 번도 전범으로 재판 받지 않은

세계 악의 축이자 근원인 우리의 가증스런 ‘혈맹우방’이여.

당신들이 발톱을 감춘 채 인간의 정의를 외치는 한

당신들이 총구를 감춘 채 인류의 평화를 외치는 한

우리는 잠들 수가 없다.

당신들의 춤추는 칼날 위에서

우리는 결코 잠들 수가 없다.

그 누구도 잠들 수 없는 이 해방의 산하에

아직도 펄펄 끓는 노동자 농민들의 붉은 피가 있어

아직도 미제와 맞짱 뜨는 세계 유일의 동지가 있어

민족해방의 이름으로

조국통일의 이름으로

저 간악한 미제의 각을 뜨고

저 미친(美親) 매판자본의 심장에 불벼락을 안겨주자.

가슴에 폭탄 한 다발씩 품고 적들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아직도 눈 감지 못한 동지들의 원한을 갚아주자.

그리하여 노동자 농민들의 여윈 손들이

마침내 혁명의 숲을 이룰 때까지

결코 용서하지도 말고 결코 잊지도 말자.

 

5.

거듭 말하노니

한국현대사 앞에서는 우리는 모두 상주이다.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여행지들은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뜬 별들은 여전히 눈부시고

그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별들과 꽃들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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