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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詩

통각(痛覺) - 안도현

작성자이종형|작성시간21.04.18|조회수43 목록 댓글 0
통각(痛覺)


   안도현




개복숭아나무는 행색이 초라해서 처마 아래 들지 못하였다
못에 찔린 가지마다 꽃이 필 것이다 눈보라가 다녀가며 수차례 분홍의 안부를 물었던 부위다


한천사(寒天寺) 철불은 손수 광배와 대좌를 치우고 앉아 있었다
왼쪽 어깨를 감고 내리는 옷자락 만져보고 싶어서
불경스러운 일에 마음이 끌려서


꽃을 든 부처를 보고 나는 웃었다


경전을 읽으면 눈알이 뽑혔고, 경전을 입에 올리면 혀가 뽑혔고, 경전을 손에 잡으면 손목이 짤렸고, 경전이
마르는 냄새를 맡으면 코가 잘렸다, 했지마는
성스러운 기둥을 비천하게 어루만지는 눈보라


나는 겨우 방아깨비의 더듬이를 당겨 지팡이로 쓰거나
고양이의 수염을 뽑아 빗자루를 만들 수 없나 궁리했을 뿐
그 빗자루로 내 발자국 지우지 않았다


바짓단을 털었더니
내가 걸어 다닌 길들이 쏟아져 내린다


유리창에 부딪혀 드러누운 눈송이의 날갯죽지 아래
손끝이 시큰거리던 기억, 나는 따뜻하지 않은 뜨뜻한 종말을 만졌던 거다


돌 주우러 골짜기에 들었을 때에도
돌들이 이 세상 아픈 데를 꾹꾹 누르며 문지르고 있는 것
나만 몰랐다, 한 뼘 남짓 평평한 돌을 들어올릴 때마다
돌 밑의 검은 흙이 울던 것을


한 땀 한 땀 바늘 자국을 내며
기러기는 이불을 꿰매고 있는 거다




             ⸺계간 《문학동네》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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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모닥불』『그대에게 가고 싶다』『외롭고 높고 쓸쓸한』『 바닷가우체국』『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간절하게 참 철없이』『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산문집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백석 평전』외. 현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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