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새로움의 탐색을 위한 시 세 편
-과학의 세계를 넘나드는 시적 범주론
* 유리컵의 속도 - 최형만
* 하늘에서 열리는 바나나 - 한설아
* 구구선九九船 사람들* - 홍순영
문이레(시인, 문학평론가)
1. 시적 세계관
20세기 저명한 양자 물리학자인 머리 겔만(Murray Gell-Mann)은 “양자역학은 우리 가운데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사용할 줄은 아는 무척 신비롭고 당혹스러운 학문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카를로 로벨리는 “양자 이론은 매우 유용하지만 세계의 실재, 세계상에 대해 말해주는 바는 이해하기 어렵고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주장해 온 논증에 대한 진실은 시대를 지나 단 하나의 정의로 명명될 수 없는 미지에 관한 질문이다. 이와 유사한 시적 세계 또한 어떨까? 우리는 시적 세계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 시 또한 열린 세계의 탐구이며, 무수한 관찰과 감정이 녹아들면서 자기의 화음을 만드는 미완의 과정은 아닐까?.
앎의 가치는 시뿐만 아니라 철학과 과학까지 탐구하고 발전하는 것에서 역사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단지 하나의 정의를 완성하기보다 구조적으로 많은 담론이 ‘지금’의 현상을 분석하면서도 결과에 대한 열린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에 사실상 모든 이론의 무의미가 존재하며, 반대로 시와 철학의 관계나 과학의 의미적인 가치도 함께 존재한다. 시는 하나의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구체적 사실의 영역은 아니지만, 사유를 구체화하는 감각적 요소가 자리하며 시적 질료는 시인의 사유에 의한 규정으로 과학을 활용한다. 마치 세계를 다시 구성하여 차원이 다른 공간을 제시하듯 과학과 철학은 이것의 기본바탕이 된다. 감성은 대상의 자극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지만, 주위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관찰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또 다른 행위를 실천하는 것으로 누구도 아닌 ‘나’의 세계에 관한 탐구며 이때 시적 세계는 나름의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단지 시인이 추구하는 세계관은 과학적 세계관과 다른 결이라는 점이다. 시적 세계는 감성의 주도하에 무한히 넓혀가는 언어의 물질성을 담고 있다. 하지만, 과학과 철학의 세계는 이성 중심의 일반적 정의의 기초 위에서 생성되고 구성한다. 또한 대상을 보는 시각이 직관적이며 감성적이라는 점에서 과학과 다르다. 시적 세계는 시와 시인의 가치관을 분리할 수도 같이 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세계를 사회적 범주에서 바라보기도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시를 언어화하여 다룬다. 시와 시인의 경계는 시와 일상의 경계처럼 그 자리에 멈춰져 있는 게 아니다. 시적 언어는 그것을 읽고 감상하는 것에서 상호관계적인 것에서 벗어나 있다. 시는 시적 세계에서의 구체적인 의미를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그 세계를 취하는 것은 시인도 언어도 아닌 그 시를 읽는 독자들이다.
어느 날 문득 한 구절의 시를 떠올려 보면 생각이 그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는 그 자리에 있지만, 바뀐 것은 우리의 감성이나 환경적 요인이며, 사고의 변화로 인한 생각의 폭이 확장된 것이다. 시를 구상하는 게 시인이라면 시에 감동하고 눈물을 짓는 건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다양한 진리를 추구하면서 실질적인 가치를 얻기 위해 분투하는 시간적 가치는 과학과 철학도 마찬가지로 그 실용적인 의미에서 어쩌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더 선명하게 밝혀주는 나침판이 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시적 깊이를 추구하는 시적 세계관은 관찰과 기법으로 자기의 세계를 열어갈 것이지만, 그 방식은 추상적이거나 사실적이다. 시인이 이미지 구상으로 그 세계의 방향성을 잡는다면 여기엔 철학적 사유가 바탕을 이루며 이를 증명하듯 과학적 뒷받침이 이미지의 관찰을 돕는다. 이는 실재 세계를 접목하는 방식으로 문학적 진실이 사실에 가까운 서사를 바탕으로 하는 한에서 그렇다는 점이다. 다만 상상력이 동원되는 바탕에는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분석하는 눈이 필요하며 사실이나 현상에 대한 직관적 논리가 시적 사유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현실적인 세계로 접근하는 가능성이 열린다.
시적 비유나 상징성은 과학이 다루지 않는 부분으로 현실원칙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 가치의 전복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놓치는 순간, 이해의 차원에서 멀어진다. 철학처럼 과학은 논리적이며 증명이나 검증을 토대로 한 확신적인 직관적 부분이다. 시에서의 순수 형식은 예술적인 미학을 통해 나타나는 자유로운 조화이다. H. 마르쿠제는 예술은 “이성에 통용되는 원칙에 도전한다.”라고 하였다. 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은 “감각적 인식의 완성이 아름다움으로 정의된다면, 이러한 정의는 아직도 본능적 만족과의 내적 관계를 보유할 것이며, 미학적 쾌락은 여전히 쾌락일 것이다.”라는 말로 경험적으로 예술이 미학적 태도에 있음을 보여준다. 시적 진술은 과학적인 부분조차 상상력을 통한 운율이나 감각적인 방식으로 전달한다. 누구도 이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지 않는 비-사실적인 영역으로 시는 가능성의 세계다. 이처럼 시와 과학의 영역이 어쩌면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세계의 탐구, 우리는 변화하는 시간의 진정한 속성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세계를 짐작으로만 파악할 뿐이다. 5월호의 작품에서 세 편을 골라 시적 진술이 대상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과학적 요소가 왜 필요한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2.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재 위치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각적 현상은 시선의 위치로 파악된다는 의미로 대상의 현현을 말해준다. 시는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보다 어느 시점을 보는 가에 집중한다. 시가 어떤 목적으로 의미를 담고자 하는지는 시인의 역량에 달렸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관찰의 특징이 대상의 특정 유형의 규칙성에 있음이다. 어디서, 어떻게 어떠한 위치에서 대상을 보는가는 이런 규칙성이 드러날 때 발생한다.
시선은 계획한 순간을 담기 위해 집중하지만, 우리 앞에 있는 물체의 상태는 “순간의 모습이 아니라 말한다. 물체에서 반사된 빛이 우리의 눈에 들어올 때까지는 어쨌거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물체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과거의 모습이다. 심지어는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이 페이지의 단어들조차 지금의 모습이 아니다. 예로 당신의 눈과 책 사이의 거리가 1피트라면, 당신의 눈에 들어오는 글자는 지금으로부터 10억 분의 1초 전의 모습”1)이라고 한다.
과학적 결과로 알 수 있는 시적 시계는 희박하게나마 이러한 분석 위에서 언어적 상상력을 집중한다. 시는 과학과 다르지만, 시간을 토대로 시인의 직관은 움직인다. 상상력은 독립된 실체가 아닌 상호관계적인 방식에서 발동하여 자기의 세계를 추구하는 미학적 작업으로 언어는 과거와 현재를 상상 안에서 움직이게 하며 보이지 않는 시간 안에서 물체를 드러나게 한다. 모든 부재로서 의미의 효과는 시적이면서도 미학적이다. 고전 물리학에서의 시간은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간다고 믿으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은 ‘지금’뿐이다.”라고 브라이언 그린은 말하였다.
그렇기에 대상을 관측하고 언어로 환원하는 시적 세계에서 여전히 시간의 실효성을 보장하는 것은 시간 관측에서 발생하는 시각적 효과 때문이며, 진술의 신빙성과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해석되는 이미지의 변주다. 시에서 물체를 보는 시각적 관측에 따라 달라지는 시간성과 공간성은 과학적 방식과 어느 정도 같은 맥락에서 움직이지만, 주어진 시간은 같을지 모르지만, 보는 관점은 다르기에. 상징적인 한에서 우리는 시간을 파악한다.
그리고 모든 관점에는 감정이 발생하며 이는 시적 감각의 기본 조건에 전제하는 것으로 주체의 ‘마음’, 즉 감각적 진술이 이미지의 초월성을 부르고 주체적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최형만 시인의 시 「유리컵의 속도」는 컵과 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시간의 정지 현상을 보여준다. 시인은 대상을 관찰하면서 사고한 걸 상상력을 토대로 전체적 알레고리를 형성하였다. ‘빛’을 통한 사고의 전환은 형상에 집중된 것에 머물지 않고 이때 발생하는 시간의 흐름을 단계적으로 파악하면서 진술의 확장성을 보인다. 여기서 우선 대상의 중심이 어디인가를 찾는 게 중요하다. 자기만의 철학적 세계관은 이를 해석할 때 발생하는 언어의 중심 테마에 달려있다. 시인은 물리적 반응을 일으키는 결정체(일정한 대칭적․주기적인 배열을 가진 다면체의 고체가 된 물체)가 의미하는 실질적 현상, ‘컵 속’ 물의 반응에 주시한다. 이는 대상과 상호관계 또는 대상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하는 실질적인 모습을 나타내며 컵과 물은 통과하는 빛으로 시인의 시선을 잡는다. 다각적인 방식의 진술은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립적 요소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암시한다.
시적 표상은 추상적인 정서나 관념을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처럼 시인은 ‘빛(가시광선)’이라는 것이 우리의 감각적 언어로 어떻게 인식되는가를 실감 나게 한다. 빛은 물리학에서 ‘전자기파-입자성, 파동성’을 지닌 것으로 여기서 컵의 물에 통과하는 빛을 볼 수 있다. 시인은 컵 안의 ‘스푼(장애물)’이 굴절되어 비취는 현상과 비슷한 것으로 빛이 통과할 때 발생하는 착시적 현상을 시각적으로 포착하면서 이런 맥락에서 빛의 파동성과 입자성, 즉 ‘틴들 현상(Tyndall phenomenon)-가시광선과 파장이 비슷한 미립자가 분산되어 있을 경우, 직진하는 빛이 산란해 그 통로가 빛나 보이는 현상’으로 빛의 방향성에 따라 스며드는 느낌이 다름을 진술한다.
최형만 시인은 시간 개념을 상징적 관계로 이용하여 시적 발상을 실질적인 관계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시간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깨달음은 존재의 수용 조건에서 세심한 관찰로 한층 더 정연한 논리로 취합된다. 물질이 상호관계에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논리로 경험적으로 착실하게 다져온 문학적 수용이다. 이 점은 과학에서 우리가 취하는 실질적인 가치가 아닐까.
컵의 물이 바닥에 닿기 전에
나는 시간을 떨구었다
유리 안의 투명한 빛들이
결정체처럼 흔들렸지
가장자리에서 속도가 멈추자
밀려온 바람이 모든 것을 덮었어
손등 위로 그림자가 맺혔을 땐
그건 햇빛보다 먼저 떠난다는 기척
너는 유리컵의 테두리를 손톱으로 두드렸는데
그 울림은 하루를 예고하는 소리 같았거든
나는 손끝에 닿은 차가움을 따라
흐르는 빛의 무게를 잴 뿐이야
무게는 가벼워서
지워지는 언어 같았지
말을 꺼내려다 삼키는 순간마다
컵 안의 물은 시간을 부수고
표면에는 우리가 하지 않은 말이 맺혔어
전등은 낮에도 켜져 있었고
텅 빈 의자들은 서로를 향해 등을 돌리더군
식탁 아래로 흘러든 햇살이 발끝을 비출 때
그건 마치 다음 장면이 오기 전
카메라가 잠시 머무는 구도처럼 평온했어
아직 그려지지 않은 선을 따라
멈춘 강물 위를 걷듯
투명한 빛을 벗어나는 속도
빛이 컵 안에서 다시 파문을 일으킬 때
나는 끝없이 반복되는 질문을 읽지
물이 바닥에 닿기 전에
마침내 물방울 하나가 미끄러지고
오늘의 균형이 기울었다는 걸 알았어
무엇도 잡히지 않는 속도
유리컵의 시간이었어
-최형만, 「유리컵의 속도」 전문
시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재조명하는 시도다. ‘찰나’처럼 지나간다고 하는 시간 개념을 물리학에서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고 말하듯 시간에 대한 개념을 브라이언 그린은 “아인슈타인의 관점에서 시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주어진 순간에 존재하는 실체’의 의미를 정확하게 정의해야 한다”2)라고 하였다. 예시는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적절한 해석이 아닐까. “바닥에 닿기 전”의 상태를 시는 “시간을 떨구었다”라고 진술한다. 이는 화자의 시선이 ‘시간’에 있지 않고 순간의 인식에 있기 때문이다. “투명한 빛들”은 시간의 찰나적 성격을 도출해 내어 물이 “흔들렸지”처럼 상호관계적으로 작동한다. 이를테면 시에서 빛은 물을 통과하는 순간, 그 본질적인 성격은 실상은 사라지고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컵 속의 물로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물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물질의 회전속도를 시간에 올라탄 빛의 방향성과 대조해 “가장자리에서 속도가 멈추자”라고 의미를 확장한다. 내포된 문장은 즉 “모든 것을 덮었어”라는 것에서 다가올 미래다. 이런 가능성으로 “손끝에 닿은 차가움”이라는 예감이 확증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여 앞의 “밀려온 바람”과 같은 선상에 이별이 놓이며 “흐르는” 물의 이미지로 빛이 이동하면서 이 모든 게 또한 지나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화자가 말하는 “유리컵의 테두리”를 “손톱으로 두드렸”다는 표현은 미래 변화의 암시로 기다림을 부각하면서 빛과 물과 컵의 관계가 다음 단계인 ‘이별’로 건너감을 암시한다. 물질과 사람, 물질과 감정의 순환을 통해 발생하는 흐름의 관계는 이처럼 빛이 생기는 현상에서 “빛의 무게”에서 기척이 사라짐을 알 수 있듯, 다시 기척을 사람의 사라짐으로 “지워지는 언어”로 발생한다는 점, 하여 “말을 꺼내려다 삼키는 순간”에서의 머뭇거림은 ‘지금’의 상황을 암시한다. “물은 시간을 부수고”에서 ‘물’의 이미지는 단순한 물질의 경계를 넘어 기다림을 감지하는 감정의 흐름이 ‘나’의 마음에서 ‘너’에게로 다가가듯 정지된 것이 아닌 행위를 발생시킨다. 여기서 컵의 “표면”은 겉으로 드러난 이들의 모습과도 상통한다.
시는 “하지 않은 말이 맺혔어”라는 화자의 감정이 “텅 빈 의자들”에서 공(空)의 세계로 넘어감을 볼 수 있다. 의자를 생각하는 우리의 개념, 즉 사람이 앉을 수 있게 만든 그 기능이 쓰임을 다할 때의 생각에 머문다. 상호작용의 관계는 “다음 장면이 오기 전”의 마음의 상태로 불확실한 미래와 마찬가지로 “아직 그려지지 않은” 지금의 순간적 감정이 아닐까? 그렇기에 “그건 햇빛보다 먼저 떠난다는 기척”이며 아쉬움과 미련처럼 서로의 관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빛’은 ‘원자에서 나오는데, 원자는 다른 광원의 빛을 흡수하거나 다른 입자와 부딪칠 때 에너지를 얻는’ 것처럼 물리학에서 빛이 파동으로 설명되듯, 시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파문을 일으킬 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시는 관계의 “균형”이 기울었음을 알 수 있는 상태, 즉 “질문을 읽지”라는 진술로 그 감정의 양태를 짐작할 수 있다. 서로의 중심에 질문이 있다는 것은 “무엇도 잡히지 않는 속도”처럼 감정의 교류가 끊긴 상태의 변화로 이것은 또 다른 ‘시간성’으로 나타나는 현실이 되어 “식탁 아래로 흘러든 햇살”처럼 거부할 수 없는 형태를 취한다.
최형만 시인은 ‘너’와 ‘나’의 관계를 연속적으로 변하는 물질적 이미지와 대조하여 이에 따른 사물의 본질에 주목한다. 이것은 빛 자체의 소멸을 통해 물과 만나듯 이런 물질적 관계가 의미하는 속성 때문이다. 감정의 깊이도 그 차이로 인해 인과적 관계라는 점이다. 하여 상대적으로 많이 생각하는 사람의 어떤 슬픔이 시에 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취하는 모든 행위는 이것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3. 대상의 배치
시적 대상은 구조적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객체다. 시인은 다양한 대상을 이미지로 구사하면서 의미를 창출하지만, 이런 대상도 진술의 신빙성을 담보하는 한에서 의미적 가치가 있다. 그렇기에 작가의 시선은 그가 정하는 공간과 시간의 함축성을 말한다. 대상은 그 위치에 따라 유사성, 동일성, 반복성 등으로 그 관계나 개념을 드러낸다. 대상의 속성은 “상호작용하는 순간에만 존재하며, 그 속성이 한 대상과의 관계에서는 실재하지만, 다른 대상과의 관계에서는 실재하지 않을 수 있다. (…) 이런 예로 물체의 속도는 다른 물체에 대해 갖는 속성이다. 여러분이 유람선의 갑판 위를 걸을 때. 여러분은 유람선에 대해서는 특정한 속도로, 강물에 대해서는 그것과 다른 속도로 걷게 된다. 또한, 지구에 대해서는 또 다른 속도로 걷게 된다. (…)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무언가를 기준점으로 하지 않은 속도란 존재하지 않으며. 속도는 두 대상(당신과 유람선, 당신과 지구, 당신과 태양 등등)에 관한 개념이다.”3)
대상은 시인과 상호적 관계에 있다. 시인의 의도는 작품마다 다르지만, 어느 정도는 거리를 둔 시인의 성격을 보여준다. 객관적 상관물이나 감정이입 등에서 대상의 상태를 볼 수 있듯 추론적 부분으로 대상을 들여다보면 시인의 시적 성향이나 방향성이 보인다. 서정적이거나 현대적 감각은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에서 철학적이며 과학적이고 담론적이며 감성적인 부분들이 갈리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처럼 대상은 다양한 방식에서 시인의 감각을 담는 그릇이다.
시인은 대상의 배치를 통해 친밀감이나 안도감, 불안, 동질감, 이질감 등을 드러내면서 각자의 생각에 나타나는 해석이 단조로움을 벗어난다.
한설아 시인의 시 「하늘에서 열리는 바나나」는 말과 사물의 관계를 대상의 이미지로 드러낸다. 아이들이 처음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순간의 모습처럼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벌어지면서 ‘엄마’라는 단어가 새어 나오듯, 언어는 단적으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의미적 요소다. 이런 사실은 시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영역임을 증명한다. 시인은 추상적이며 감성적인 유희적 발상을 ‘장소성’에 따른 대상의 배치로 혼란을 준다. 언어적 관계는 대상의 배열에 있어 관계의 비틀어짐이 만들어 내는 가상의 세계이지만 이는 시적 언어의 규칙이나 틀을 부수고 나온 자기만의 언어적 세계를 창출하는 미적 감각으로 발전한다. 흔히 시에서 드러나는 단조로움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통하게 하는 건 시에서 나타나는 언어적 구조에 있다. 우리는 시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도 시에 대한 자신만의 감성은 느낄 수 있다. 이는 대상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이미지 활용에 있으며, 이렇게 보는 세상은 단면적 부분뿐만 아니라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한설아 시인은 달콤함을 유발하는 ‘바나나’를 통해 시적 상상을 넘어 언어의 재배치와 그림에서 착안한 감각으로 시각적 효과를 창출한다. 제목에서 환상적 이미지 설정은 대상의 단조로움을 벗어난다. 시인은 말을 기다리듯 의미를 찾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부분을 시적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이런 사고는 실제적인 방향성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이 시적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시인은 암묵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겐 도로는 판타지아 숲 비현실적인 길이에요, 걸어온 공간은 정글이 되거나 정적으로 갈리어 공상의 미로에 갇히곤 하지요
슈가스폿이 생기면 혀에서 뭇별이 팡팡 터진다는 바나나
몇 해 전부터 그녀 손등과 얼굴에도 까만 도트가 생겼지요
하루를 공회전하다 배회방지 팔지에 이끌려온 그녀가 스웨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하아, 하품을 해요
음력 5일은 가끔씩 돌아오는 기억과 초승달이 생성되는 날짜
바나나를 초승달에 갖다 대며 모양 맞추기를 하네요, 보는 사람마다 하나씩 떼어서 권해보는 그녀는 인심 좋은 호인이에요
한 발은 여기에 다른 한 발은 많은 예감에 묶여
언어와 얼굴이 세상이 지워지지만
아트로포스,
그녀가 인사하는 방식을 조금 더 지켜봐 주세요
굴절된 빛이든 온전한 빛이든
생명체는 다시 돌아갈 곳을 아니까요
도안 삐져나온 크레파스 선을 보며
우리는 멸망의 속도를 천천히 벗겨 꾸역꾸역 입에 넣어보는
-한설아, 「하늘에서 열리는 바나나」 전문
낯섦의 미학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열, 도치, 반복 등으로 이뤄지는 수사적 표현은 하나의 사실에 집중하기보다 다양한 관계의 의미망으로 형성된 이미지의 연속성이다. 이것은 단조로운 어순의 형식에 리듬감이나 강조의 느낌으로 상징적인 의미에 도달한다. 이런 구조의 변화는 언어의 상징성을 높인다. 첫 연에서 “도로는 판타지아 숲”이라 진술하는 순간, 이미 이곳이 낯선 곳임을 직시하게 된다. “비현실적인 길”이라 지칭하는 것으로 시적 공간의 비-확정성을 드러내면서 시는 우리를 이상한 나라고 데리고 간다. 미지의 장소, 즉 “공상의 미로”를 열어 놓는다. 왜냐하면 시간은, “걸어온 공간”이라는 지난 과거를 의미하기에 ‘지금’의 모습이 아닌 “몇 해 전부터” 일어나는 일들, 즉 “뭇별이 팡팡 터진다는 바나나”를 보면 알 수 있다. 시는 “슈가스폿(Sugar Spot)-바나나·망고 같은 후숙과일에서 껍질에 생기는 갈색 ~ 검은 반점”으로 그녀의 몸에 나타나는 ‘나이가 들어감’의 전조로 “까만 도트”가 “손등과 얼굴”에 생긴다고 표현한다. 하여 신체적으로 무력한 일상이 “공회전”으로 흘러가듯 그녀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무엇도 어렵다는 걸 암시한다. 이것이 “배회방지 팔지에 이끌려” 자신의 의지를 상실한 그녀가 “하품을 해요”라고 진술하는 이유다.
여기서 우리는 그녀의 기억이 “음력 5일”에 맞춰져 있으며 이것은 “가끔씩” 돌아와 그 기억을 붙잡고 “초승달이 생성되는” 새로운 차원의 생성, 즉 어떤 이야기가 된다. 이렇듯 시각적인 요소로 “바나나를 초승달”에 가져가 “모양 맞추기”를 하는 행위는 이미 앞에서 말한 ‘기억’을 소환하는 것처럼 잠재된 무의식의 의미 전달로 해석된다.
시는 화자의 시선 안에서 이뤄지는 행동, 즉 “보는 사람마다 하나씩 떼어서 권해보는” 마음에서 그녀의 상태를 짐작하게 한다. 진술은 현상을 통해 시적 발상이 사물과 사람의 관계로 이어지며 ‘바나나, 초승달’이라는 생소한 조합을 만들어 간다. 이는 상상력이 어디서 출발하는가를 보여주는 단서로 작용한다. 시를 쓰는 행위는 어쩌면 예상을 벗어나 움직이는 마음을 조합하는 일이 아닐까.
화자는 삶의 “한 발”을 이중적으로 배치하여 느리게 조금씩 나갈 수 있는 “예감”으로 환원한다. 이는 “언어와 얼굴이 세상이 지워지지만” 아직 남은 생의 미련처럼 어떤 존재에게 다가갈 마지막 소풍을 준비할 시간을 지칭하는 게 아닐까. 하여 운명의 세 여신으로 ‘클로토’, ‘라케시스’와 함께 ‘생명줄을 끊는 여신’인 “아트로포스”의 등장은 “조금 더 지켜봐 주세요”라는 청유의 언어로 그녀를 향한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상황에서 “생명체”들이 “다시 돌아갈 곳”은 정해져 있음을 알기에 누구도 그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이를 지켜보는 시선에는 인간 본연의 측은지심이 있는 것이다.
한설아 시인은 “굴절된 빛이든 온전한 빛이든” 누구나가 맞이하는 인생의 마지막 모습에 집중한다. 이러한 태도에는 “멸망의 속도”를 늦추기보다 ‘재점검’하는 시간으로 ‘나’가 아닌 객관적인 대상, 즉 ‘그녀-화자’의 모습을 보면서 윤리적 판단의 자율성을 의미하며, 이는 불행을 대하는 자세, 삶의 펼쳐짐이 주관적 선택의 영역이 아닌 이상, 삶의 마지막 가치에 집중된 시간이기를 바라는 시인의 의지가 아닐까? 우리의 선택으로 삶은 나아가기도 돌아서기도 한다는 걸 이 시는 보여주는 것이다.
4. 매체를 통한 대상의 포착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이면 흐릿한 날씨 탓에 우리의 기분은 다운되는데 이것은 단순한 날씨의 변화라기보다 일조량의 감소로, 우리 몸의 세로토닌 분비가 감소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햇빛 노출이 줄어든 것에 대한 자율신경계의 반응은 우울감을 느끼는 감성적인 인간으로 변하게 만든다.
시를 쓰는 사람은 이처럼 기후에 민감하듯 주위 환경에도 반응하는 감각의 소유자다. 누구나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시인의 감각은 현상에 반응할 때 시가 더 잘 나타난다. 우리는 시가 어디서 오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시는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반응하면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하여 시인이 시를 찾아다니는가? 아니면 시가 오기를 기다리는가? 둘 중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지만, 어쩌면 이런 질문을 던질 때도 뇌는 시적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시인은 날씨에 기분이 덜 뜨듯 영화나 미술, 조각, 책 등의 다양한 매체에 감동하고 다시 이런 감동을 저장하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다.
시인은 대상을 포착할 경우, 어떻게 대상에 접근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대상이 먼저 머릿속에 와 있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적 감각을 익히며 시인의 감정을 건드리는 에너지의 근원을 찾아다닌다. 이러한 차이로 시인은 철학적 사유의 정점에 도달한다. 우리는 경험이나 관찰로 인한 지식이나 정보를 언어로 기술하는 것에서 시적인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한다. 일기나 감상문 또는 기행문, 기록문이 아닌 이상, 경험은 그것에 대한 나의 감정의 정제된 표출이 이뤄져야만 그 의미가 있다. 시에서 현실 비판적이거나 풍자적인 것은 대부분 현실적 감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실적이다. 시가 감각 위주의 진술이지만, 대상을 구성하는 방식에는 정적인 걸 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작용이 일어나며 이런 과정의 언어는 대상을 누구보다 더 실감 나게 표현할 은유적 발상이 필요하다. 시의 순환적 작동은 대상의 진술이 풍부할수록 오감(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을 두루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움직이지 않는 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언어의 힘이다.
언어의 변이 과정에서 우리는 포착된 대상의 도치를 볼 수 있으며, 공감각적 변형은 대상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에서 발휘되어 단순하지 않으면서도 의미를 깊은 서사를 형성한다. 이것은 심상의 변화를 일으키듯 독자들에게 정서적 울림을 안긴다.
홍순영 시인의 시 「구구선九九船 사람들*」 에서는 음의 움직임이 보인다. 언어의 배열은 점점 더 강하게 또는 점점 약하게 소리를 끌고 가듯이 청각 이미지로 반복해서 나타난다. 이는 단순한 배열이 아니라 음의 강약을 통한 의태어의 역할을 조종한다. 시적 생동감은 제목이 주는 이미지, 즉 ‘구구-99%의 사람들’에서도 나타나듯이 이것은 ‘100%의 정점’에서 보이는 모자람이 아닌 자본주의적 위계질서에서 상위 ‘1%’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기준점으로 삼은 것에서 비롯된다. 그 세계로 올라가지 못한 아래의 사람들을 나머지로 분류한다는 의미는 지금의 현실이 어쩌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과 만족하는 사람의 기준이 다르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다. 이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어디에 있냐에 따라 달라지기에 아주 중요한 요소다. 시는 이를 에둘러 말하듯 누구나가 자기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하지만 정작 ‘나’의 가치의 기준이 ‘나’에게 있지 않음을 말해준다.
시각적 구체성에서 생성되는 에너지는 ‘판소리’의 기능을 말해준다. 시인은 다양한 청각적, 시각적 요소를 이미지 묘사로 드러내면서 언어적으로 그리는 소리의 깊이를 보여준다. 하여 눈으로 보는 게 아닌, 마음으로 읽는 것에 몰두하게 한다. 이때 드러나는 세계는 가시적인 요소의 사물이 움직이는 현상을 목격하게 한다. 단순히 단어의 반복이 아닌 의미를 끌고 가는 이미지의 생성시간으로 볼 수 있다.
홍순영 시인은 원작 ‘레미제라블’의 서사를 각색한 ‘판소리’의 무대를 보면서 자기의 세계를 다시금 재창조한다. 예술의 다양성은 자족적인 생각의 생산에서 이뤄지는 자기만의 감성으로 세계를 인식하기에 다른 분위기의 서사가 나온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피상적인 소통이 아니라 시적 세계의 내밀한 소통의 영역에 해당한다.
사람들이 노래하는 소리 들었어?
들었지, 이야기와 함께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수군거리더군
때로는 설렘이었다가, 끝내 목메는 슬픔이었다가
그렇게 밀려왔다, 밀려간다고 하더군
모두들 열심히 노를 저었지
뭍은 멀지 않은 듯 보였고
바닥을,
바닥을 들여다본 적 있나
그 흔한 바닥을,
한 번이라도 말야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섞이고 섞여
눈앞에서 탁류 범람하며 소용돌이치네
침몰하는 배 안에서는
가만있으라 섬뜩한 목소리 출렁였고
갑판 위, 스스로 불꽃이 되려던 소년의 외침이 불타올랐지
쫓겨 다니는 사람들 골목에 널브러지고
그 위로 판자촌 우르르
둥, 둥, 둥,
북소리는 뱃고동을 닮았다는 걸 그날 알았어
쓰러지며, 익사하면서도
노를 놓지 않던 사람들이 저기 밀려오고 있네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것을 기어이 움직이려고
바닥을 차고, 밀어올리고, 끌어당기는 사람들
1%의 감옥에 갇히는 건 천국의 영역일까
갖지 못한 천국을 버릴 수 있을까
영원히 1%가 될 수 없는 사람들
끝나지 않는 노래를 끌고
오늘도 뭍으로, 뭍으로
저항의 동아줄은 끊어지지 않네
타락한 저항*만이 삭아갈 뿐이네
우리가 밀고 왔던
부서진 시간의 갑판 위로
빛 한줄기
툭, 투둑 떨어지네
* 구구선 사람들-판소리 레미제라블 공연 제목으로 구구선의 구구는 결코 1%가 될 수 없는 99%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 이라영 저서명
-홍순영, 「구구선九九船 사람들*」 전문
시는 세상이 ‘한 척의 배’라는 배경 설명에서 삶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 세계는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신념이 실재하는 것인가? 사람들이 카프카의 ‘성(城)’의 주인공처럼 어딘지도 모를 곳을 향해 그곳이 ‘허상’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나가는 ‘반복된 삶을 사는 게 아닐까?’라고 질문한다. 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이런 현상들은 살아있음의 증거로 수많은 입자를 구성하는 존재적 가치가 된다. 시는 자기의 세계가 있다고 믿는 가치관으로부터 이런 “이야기와 함께” 레미제라블의 의미를 파악한다. 어떤 시대를 살고, 나의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 하여 시는 “노를 저었지”라고 진술한다. 무엇보다 도착지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감정이 “설렘이었다가, 끝내 목메는 슬픔”이라는 것에서 미지의 영역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누구도 단정할 수 없기에, 다만 “뭍은 멀지 않은 듯 보였고”에서 예측만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은 “바닥을 들여다본 적 있나”라는 물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의 추락을 암시한다. 누구도 미래를 향해 갈 때 ‘바닥’을 먼저 생각하지 않듯. “그 흔한 바닥”은 반어적인 표현으로 외부적인 조건에 의한 좌절을 담고 있다. 이를 전제로 다시 내 것과 아닌 것 사이의 악순환을 겪는 “소용돌이”로 시는 세상을 인식하게 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 생성이 이뤄진다.
다음 행에서 그 정체를 드러내는 사건의 실마리, 즉 저항을 의미하는 “불꽃이 되려던 소년의 외침”은 아마도 ‘꿈’이나 ‘희망’이 아니라 그 반대의 의미인 영혼 또는 신체에 불을 싸지르는 행위를 말한다. 과거 민중의 삶처럼 집이나 공간에서 “쫓겨 다니는 사람들”처럼 부유하는 인간의 모습, 여기선 가난을 이유로 삶의 가장 밑바닥인 “판자촌 우르르” 무너지듯 위태위태한 현실을 나타낸다.
망망대해에 “둥, 둥, 둥,” 울리는 “북소리”는 다가올 위험을 암시하듯 “뱃고동을 닮았다”라고 진술하면서 어긋난 사건의 다발성으로 인간의 부조리 현상을 예고한다. 즉 “쓰러지며, 익사하면서도” 예측 불가능한 어떤 믿음이 있기에 “노를 놓지 않던 사람들”은 죽음으로 그 사실에 화답한다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 다가올 미래의 ‘어떤 시간’은 불안한 사회적 조건들이 만들어 낸 ‘사건’으로 고정되어 지금의 우리 앞에 있는 이런 현상을 데리다는 “하나의 ‘시대epoche’라는 것은 ‘거기에서부터 날짜를 셈하게 되는 모종의 위대한 사건으로 고정되었거나 주목할 만하게 만들어진 시점, 즉 ‘새로운 사태가 출현하게 된 시간’, 그리고 ‘(지질학적, 역사적 따위의) 한 시기’를 가리킨다. 그것은 ‘떠받침’, ‘떠 있음’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epoche’에서 유래했다.”4)라는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구원의 손길로 이끄는 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만들어 가는, 누군가는 해야 한다고 믿는 정의의 실현은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화의 물결이 있고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것”을 “밀어 올리고, 끌어당기는” 노력이 있어야 가능함을 시는 보여준다.
시는 우리의 행동이 “익사하면서도”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성향을 들여다보며 “1%의 감옥”에 갇히는 게 “천국의 영역”이라면 차라리 벗어나는 게 현명하다고 지적한다. 이런 억압의 논리로 “저항의 동아줄”은 질서에서 밀려 난 이미지로 부각하면서 반지성주의를 비판하는 듯한 어조로 우리들이 처한 지금의 상황을 직시하게 한다. 여기서 “시간의 갑판”은 누구에게나 동등한 배분으로 누구도 온전히 갖지 못하는 것에 반기를 들듯 억압된 현실에서도 “빛 한줄기”의 가치로 현실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니라 이미 그 현실의 중심에 있는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홍순영의 시는 ‘판소리 레미제라블’을 시간의 정지, 삶으로서의 공포가 아니라 자유의 의지를 이야기한다. 개척한다는 말이 있듯 현실은 세상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에 그 미래가 있기에 시인은 이 지점에서 지금의 상황을 돌아보게 한다.
5. 중심
시대의 불안감은 기본적으로 자본에 대한 고민이 아닐까? 사람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가치 기준은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나면서 지금의 사태를 낳았다. 자원이 풍부하진 않아도 과거 세대보다 더 많이 먹고 소비하는 인간의 불안은 이런 불안감을 물질과 감정으로 발산하는 것에 문제점이 있다. 흔히 소비의 축이 기본적 타인과의 비교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현실은 가진 것에 대한 가치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의 가치보다 낮게 측정되기 때문이다. 비교의 중심에 늘 타인에 대한 질투의 감정이 잠재된 개인은 자기를 지배하는 어떤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욕망과는 다른 개념의 상대적 빈곤으로 그 기준을 매기는 일에 논리적 사고가 필요하다.
과학과 철학은 이런 의미에서 인간으로 변모해 가는 중심에 작동한다. 이때의 중심이 세상의 겉모습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완결되지 않는 현실 안에서의 특별한 자각으로 내일을 연다. 시간은 순간적이라 말하지만, 이를 인식하는 건 예속이 아닌 가치적 문제다. 하여 사물의 몸짓, 언어, 사건, 우리 시선의 뿌리를 정하는 일은 세상을 다르게, 차이 나게, 새롭게 도전하는 일이다.
각주>>
1) 브라이언 그린, 『우주의 구조』, 박병철 옮김, P. 205.
2) 브라이언 그린, 『우주의 구조』, 박병철 옮김, P. 204.
3) 카를로 로벨리,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이중원 감수, 김정훈 옮김, p.104.
4)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오문석 옮김, 앨피 출판사, p.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