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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가르침

작성자연수원|작성시간18.12.17|조회수141 목록 댓글 0

1)<논어>는 동양 최고의 고전이다. 2500년 전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이 책 한 권에 유교와 동양사상의 근본이 모두 담겨 있다. 영어로는 <Analects>라고 옮긴다. '(공자의) 어록'이란 뜻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수많은 금언들의 출처이기도 하다. 완독 기념으로 일단 그것들부터 정리해 본다. 외워두면 반드시 써먹을 데가 있는 명문장들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않은가?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학이 1.1)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꾸미는 자들에겐 인()이 드물구나!"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학이 1.3)

 

... "자기보다 못한 자를 벗하지 말며 잘못이 있으면 고치는 것을 꺼리지 말아야 한다."

...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학이 1.8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자기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학이 1.16)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삼백 편을 한마디로 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다."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 (위정 2.2)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이 되어서는 자립했으며, 마흔이 되어서는 미혹되지 않았고, 쉰이 되어서는 천명(天命)을 알게 되었으며, 예순이 되어서는 귀가 순해졌고,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위정 2.4)

 

자공이 군자에 대하여 여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의 말보다 먼저 실천하고 나서 (말이) 행동을 따르도록 하라."

子貢問君子, 子曰 "先行其言以後從之." (위정 2.13)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야, 너에게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을 가르쳐줄까? 어떤 것을 알면 그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子曰 ",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위정 2.17)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子曰 "朝聞道, 夕死可矣." (이인 4.8)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子曰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이인 4.16)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말에서는 어눌하고 행동에서는 민첩하려고 한다."

子曰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이인 4.24)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

子曰 "德不孤, 必有隣." (이인 4.2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

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옹야 6.20)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 가운데 좋은 것을 가려서 그 점을 따르고 그 가운데 좋지 않은 점을 (가려서) 그 점을 고친다."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술이 7.22)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해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

子曰 "歲寒, 然後知松柏之後彫也." (자한 9.28)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입니다. 풀은 위로 바람이 불어오면 반드시 눕습니다."

...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안연 12.19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만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지만 조화를 이루지는 못한다."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자로 13.23)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 근심이 있다."

子曰 "人無遠慮, 必有近憂." (위령공 15.12)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모두가 그를 미워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고, 모두가 그를 좋아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子曰 "衆惡之, 必察焉. 衆好之, 必察焉." (위령공 15.28)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잘못하고서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바로) 잘못이라고 한다."

子曰 "過而不改, 是謂過矣." (위령공 15.30)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사자성어들이 <논어>에 등장한다. 말의 출처를 아는 건 중요한 일이니 한 번쯤 원문을 찾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위정 2.11)

문일지십(聞一知十, 공야장 5.9)

단표누항(簞瓢陋巷, 옹야 6.11)

요산요수(樂山樂水, 옹야 6.23)

술이부작(述而不作, 술이 7.1)

후생가외(後生可畏, 자한 9.23)

과유불급(過猶不及, 선진 11.16)

극기복례(克己復禮, 안연 12.1)

견리사의 (見利思義, 헌문 14.12)

살신성인(殺身成仁, 위령공 15.9)

우도할계(牛刀割鷄, 양화 17.4)

 

괄호 속 글자들은 출처(-)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선진 11.16>이라는 표시는 <논어>11편인 <선진> 가운데 16장이라는 뜻이다. <논어>는 총 20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편은 다시 수십 개의 장으로 나뉘는데, 각 장을 구분하는 기준이 책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 이러한 숫자들이 무의미하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나는 원문 검색시 대략의 위치라도 찾기 편하도록 이 표시를 달기로 했다. 기준으로 삼은 책은 김원중 교수가 번역한 <논어> (글항아리, 2012)이다.

 

이제 본격적인 책 이야기를 해 보자. 나는 <논어>를 다 읽고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자의적 체계''함축성'에 있음을 알게 됐다. '자의적 체계'라 함은 책의 구성과 순서 등이 제멋대로라는 뜻이고, '함축성'이란 그 문장들이 다중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일단 각 편의 제목부터 보면, '학이(學而)''위정(爲政)'이니 하는 말들은 본문의 첫 문장에서 따온 글자들(學而時習之, 爲政以德)일 뿐 의미는 전혀 없다. 각 편을 구분하는 주제나 기준도 없다. 각 장의 문장들 역시 연관성이 별로 없고, 길이나 화자(話者)도 제각각이다. 게다가 서사(敍事)가 생략된 게 대부분이라 도대체 언제 어떤 배경에서 나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해석이 분분해 <논어>에 관한 주석서만 수 백권이 나왔고,1) 상대적으로 의미가 분명한 공자의 짧은 말들만 유명해졌다(예를 들면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같은). 일찍이 독일 철학자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논어>에 담긴 내용이 지극히 평범하고 진부하다고 혹평하며 "공자의 명성을 위해 차라리 (서양에) 번역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는 결론을 내렸는데,2) 아마 깊은 공부 없이 단문 위주로 <논어>를 읽었던 모양이다.

 

1) 주희의 <논어집주>, 다산 정약용의 <논어고금주>, 오규 소라이의 <논어징> 등이 고전이고, 근작들 가운데에는 리링의 <집 잃은 개>, 도올 김용옥의 <논어 한글역주> 등이 유명하다.

2)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Lectures on the History of Philosophy vol.1> (Trans. by E.S. Haldane,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95), p.121

 

<논어>는 일관된 체계와 의도를 가지고 '저술된' 게 아니라, 개별 기록들을 나중에 '추리고 묶어낸' 책이다. 맨 처음, 공자의 말씀을 여러 제자들이 각자 죽간(竹簡)에 기록해 두었을 것이다(종이가 발명되기 전이므로... 그래서 간결한 문장이 많은 듯). 스승이 죽은 뒤 그것들을 모두 모아놓고 하나하나 검토하며 이건 빼고 저건 더해 추려냈을 것이고, 그렇게 완성된 편들은 다음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재로 사용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각 편별로 가르치는 주제가 달라 교재 구분도 확실했을 테지만(예를 들면 인()'이인', 예악(禮樂)'팔일', 인물평은 '공야장'편 등), 지금은 그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 '술이부작(述而不作, 그대로 적되 창작하지 않는다)'의 가르침을 제자들은 확실하게 지켜 본래의 기록을 윤색하거나 미화하지 않았다. 그 결과 <논어> 속에는 살아있는 공자의 모습이 생생히 남아있다. 화를 내기도 하고, 초조해하기도 하고, 의심도 하고, 제자들과 농담따먹기도 하는...

 

그 자세한 이야기들은 다음 회로 미루고, 오늘은 일단 공자가 어떤 사회를 꿈꾸고 무엇을 가르쳤는지 기본적인 내용들을 살펴보자.

 

공자(기원전 551-479)는 춘추시대(기원전 770~403) 사람이다. 이 시기는 하(), ()을 잇는 삼대째의 이상국가인 주()가 오랑캐를 피해 낙양(洛陽)으로 쫓겨간 혼란기였다(東周). 본래 주나라는 종법(宗法)과 봉건제를 기반으로 유지된 나라였다. 예를 들어 천자()는 자신이 직접 다스리는 영토 외의 주요 지역에 친족들을 제후로 보내 간접 통치해왔다. 하지만 춘추시대에는 힘있는 제후들이 여기저기에서 독립국처럼 일어나 주 왕실은 이름만 남게 되었고, 각 제후들은 패자가 되기 위해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공자는 바로 이 시기에 주 왕실을 천자로 섬기는 본래의 종법 관계로 돌아가자고 외친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주나라는 (하와 은) 두 왕조를 거울로 삼았으니, 찬란하구나 그 문화여!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子曰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 (팔일 3.14)

 

공자는 체제 수호적인 성격을 가진 '종법'이 부활하면 평화와 안정을 되찾으리라 믿었던 복고주의자요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특히 주나라의 정치가인 주공(周公)을 숭배했다. 주의 왕족(=문왕의 아들=무왕의 동생=성왕의 삼촌)으로, 모든 제도문물을 창시했다고 하는 전설적인 인물... 특히 그가 만든 예법인 '주례(周禮)'는 공자 이데올로기의 근간이었다. 공자는 꿈에서도 자주 주공을 만났다고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구나, 나의 노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더 이상 꿈에 주공을 못 뵌 지가!"

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술이 7.5)

 

이쯤에서 <논어> 읽기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할 두 가지 개념을 소환한다. '()''()'.

1. ()

우리는 흔히 예를 '()'이나 '()'와 같은 추상적인 관념의 하나로 생각하는데, 공자가 추구한 예는 그런 게 전혀 아니었다. 다음 문장을 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라의 예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수 있지만, ()나라는 고증하기에 부족하고 은()나라의 예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수 있지만, ()나라는 고증하기에 부족하다.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니, 충족된다면 나는 고증할 수 있을 것이다."

子曰 "夏禮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 (팔일 3.9)

 

이것은 얼핏, 문헌 기록의 중요성에 대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이 속에 공자가 그토록 중시한 예의 정체가 숨어있다. 지금 공자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옛날 하나라와 은나라의 예는 잘 알고 있지만 기나라와 송나라의 예는 모른다는 말을 한다. 여기에서 ''는 공손한 마음가짐이나 태도 따위가 아니라 장례를 치르고 제사를 지내는, 실제의 행동 규칙들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은나라의 제사법과 송나라의 제사법은 분명 달랐을 것이고, 그것들은 문헌이나 기록을 통해 배울 수 있다는 설명이다. 공자는 그러한 예에 관해 평생을 연구한 사람이다. 절은 언제 하고, 술은 어떻게 따르고, 특정 상황에서 옷은 뭘 입고 말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100년 뒤 등장한 맹자가 '인의예지'로 섞어버린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액션과 퍼포먼스들이 공자가 말하는 예의 정체다.

 

자장(제자)이 여쭈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고종(은나라 왕)께서 상을 치를 때 3년 동안 말을 하지 않으셨다'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고종뿐인가? 옛날 사람들이 모두 그랬다. 임금이 돌아가시면 (후대 왕이 3년간 정무를 놓고 상을 치르기 때문에) 모든 관리는 자기 일을 책임지고 총재의 명을 3년간 받았다."

子張曰 "書云, 高宗諒陰, 三年 不言. 何謂也." 子曰 "何必高宗, 古之人皆然. 君薨, 百官總己以聽於冢宰三年." (헌문 14.40)

 

<논어>에는 '3년상'에 관해 제자들과 토론하는 부분이 여러 번 등장한다. 이때마다 공자는 단호한 태도로 이를 지키라고 가르치는데, 그 이유는 옛날 사람들이 그랬기 때문이다. 황당한 이유이긴 하지만 우리는 이 대목에서 공자의 의도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고례(古禮)를 회복해 안정된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고 부지런히 그것을 추구한 사람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 敏以求之者也 - 술이 7.20)"는 유명한 어록에서 '옛것'이란 결국 '고례'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된다. <논어>에 수없이 등장하는 '배워라()'라는 말도 결국은 '예를 공부해라'는 의미이고, 공자 아카데미(?)에서 수백 년간 가르친 메인 커리큘럼도 예였다. 이런 대담한 시각으로 <논어>를 읽으면 한 줄 한 줄이 새롭게 보인다. <논어>는 헤겔이 잘못 읽은 것처럼 밋밋한 도덕 교과서가 아니다. 예를 실천하기 위해 일상에서조차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던 공자의 생생한 모습들을 확인해 보자.

 

공자께서는 상복을 입은 사람, 예복을 입은 사람, 장님을 만났을 때는 비록 그들이 젊어도 반드시 일어나셨고, 그들을 지나가실 때에는 반드시 종종걸음을 하셨다.

子見齊衰者,冕衣裳者與瞽者, 見之, 雖少必作. 過之必趨. (자한 9.10)

 

공자께서는 마을에 있을 때(평상시)는 공손하고 겸손해 말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종묘와 조정에서는 당당히 말했지만 매우 삼갔다. 조정에서 하급자와 말할 때는 솔직하고 시원스러웠고, 상급자와 말할 때는 온화하고 공손했다. 임금이 있을 때는 긴장하며 떠는 듯 했고 태도가 엄숙하였다.

孔子於鄕黨, 恂恂如也, 似不能言者. 其在宗廟朝廷, 便便言, 唯謹爾. , 與下大夫言, 侃侃如也. 與上大夫言, 誾誾如也. 君在, 踧踖如也, 與與如也. (향당 10.1)

 

궁궐 문을 들어갈 때는 삼가고 두려워하여 마치 용납되지 않는 것처럼 하였다. 문 가운데에 서지 않고 문지방을 밟고 다니지 않았다. 임금의 자리를 지날 때에는 얼굴빛은 긴장하고 발걸음은 종종걸음이었고 말을 잘 할 수 없을 것처럼 하였다. 옷자락을 모으고 대청에 오를 때에는 삼가고 두려워하여 마치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하였다. 물러나 한 계단을 내려오면 얼굴빛을 풀고 환해졌다. 계단을 다 내려오면 마치 새가 날개를 편 듯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원래 위치로 돌아와서는 긴장하며 떠는 듯 했다.

入公門, 鞠躬如也, 如不容. 立不中門, 行不履閾. 過位, 色勃如也, 足躩如也, 其言似不足者. 攝齊升堂, 鞠躬如也, 屛氣似不息者. , 降一等, 逞顔色, 怡怡如也. 沒階, 趨進, 翼如也. 復其位, 踧踖如也. (향당 10.3)

 

2. ()

공자의 사상인 '유가(儒家)'에서 '()'는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예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을 가리킨다. 옛날에는 예가 하도 복잡해 이를 직업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최초의 자전(字典)인 허신(許愼)<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도 '유는 부드럽고, 술사를 가리킨다(, 柔也, 術士之稱)'고 했다. 장례를 주관하고 길흉을 점치는 술사(術士)들을 '()'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들은 음양, 점술, 복서에 능하고 시(), (), ()의 세레모니를 전문적으로 진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공자가 옛 시들을 추려 <시경>을 엮고, 고례를 모아 <예기>를 펴고, <주역>을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읽어대고, 매일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던 건 모두 직업적인 활동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직업은 당연히 우대받지 못했다. ()는 시체를 만지며 염을 하는 천한 사람이요, 가끔 남의 무덤을 파내기도 하는 도굴꾼이라고 여겨졌다. 장례를 진행하며 무덤 구조를 알게 된 덕분에 어디를 파면 물건이 나오는지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유명한 고전 <장자>에도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실려있다.

()는 시와 예로써 남의 무덤을 도굴한다. 대유(大儒)가 아래에 대고 말하기를 "동녘이 밝아온다. 일은 어떻게 돼 가나?" 그러면 소유(小儒)가 답한다. "옷을 아직 다 못벗겼습니다. 입 안에 구슬이 있네요. 시경에 이르기를 '파릇파릇 보리가 무덤가에 돋았네. 살아서 베풀지도 못했는데 죽어서 구슬 물면 뭐하리'라고 했잖아요?" 그러면서 시체의 수염을 잡고 뺨을 누른 다음, 쇠망치로 턱을 쳐서 천천히 볼까지 벌린 뒤, 입 속의 구슬이 다치지 않도록 잘 꺼내간다.

儒以詩禮發冢, 大儒臚傳曰 "東方作矣, 事之何若?" 小儒曰 "未解裙襦, 口中有珠. 詩固有之曰, 靑靑之麥, 生於陵陂. 生不佈施, 死何含珠爲?" 接其鬢壓其顪, 儒以金椎控其頥, 徐別其頰 无傷口中珠. (장자, 잡편 26, 외물4)

 

공자의 본업이 이처럼 천시받는 유()였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긴 하지만 <논어>를 읽는 새로운 시각을 준다. 이런 지식이 없다면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문장들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제사)에서 술을 따르는 의식() 다음은 내가 보고 싶지 않구나."

子曰 "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 (팔일 3.10)

 

()는 천자()가 조상에 올리는 제사였다. 오직 천자만이 자격이 있었는데, 춘추시대의 제후들은 개나 소나 천자 흉내를 내며 이 제사를 거행했던 모양이다. 공자는 유()로서 체()에 참여했다가, 예가 무너진 현실을 위와 같이 개탄했다. 중요한 건 공자의 그 말씀을 제자들이 적어놓고 교재로 썼다는 사실... 예를 직업으로 다루는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정보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논어> 가운데에는 이처럼 유()와 예()의 코드를 이해하지 못하면 재미없는 문장들이 매우 많다.

 

공자께서는 상을 당한 사람 곁에서 식사를 하실 때는 배부르게 드신 적이 없다. 공자께서는 이날 곡을 하시면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다.

子食於有喪者之側, 未嘗飽也. 子於是日哭, 則不歌. (술이 7.9)

 

맹인악사 면이 나타났다. 계단에 이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계단입니다." 자리에 이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리입니다." 모두 앉자 공자께서 일러주셨다. "아무개는 여기 있고, 아무개는 여기 있습니다." 맹인악사 면이 나가자 자장이 여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악사와 말하는 이치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본래 악사를 돕는 이치이다."

師冕見, 及階, 子曰 "階也." 及席, 子曰 "席也." 皆坐, 子告之曰 "某在斯, 某在斯." 師冕出, 子張問曰 "與師言之道與." 子曰 ", 固相師之道也." (위령공 15.42)

 

위의 기록들은 상가(喪家)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평소 학원 내에서 볼 수 있는 풍경으로, 예악(禮樂)의 실전을 가르치는 공자 아카데미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공자는 위대한 정치가나 교육자이기 전에 단지 한 사람의 유()였다. 하지만 끊임없이 공부해 예()의 달인이 되었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구할 위대한 사상체계도 세웠다. 하지만 당대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는데, 그것은 유()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공자는 한때 제나라 경공이라는 대제후에게 발탁될 뻔 하였다. 하지만 그때 제나라의 재상이었던 안영(晏嬰)이 경공을 말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무릇 유()라는 자들은 말재주를 부려 법으로 규제할 수 없고, 거만하게 멋대로 하여 아래에 두기 어렵습니다. 상례를 숭상해 지나치게 슬퍼하고, 파산할 정도로 후하게 장례를 치르니 풍속으로 삼으면 안됩니다. 유세를 다니며 대가를 달라고 하니 나라를 맡겨서도 안됩니다. 훌륭한 현인들이 사라진 뒤로 주나라는 쇠퇴하였고 예악도 망가졌습니다. 지금 공자는 용모와 복식을 꾸미고, 번잡스럽게 예만 따지고, 세세한 절차만 따르고 있으니 몇 세대가 지나도 그 학문을 끝낼 수 없고, 평생을 다해도 그 예를 궁구할 수 없습니다.

夫儒者滑稽而不可軌法, 倨傲自順, 不可以爲下, 崇喪遂哀, 破産厚葬, 不可以爲俗. 遊說乞貸, 不可以爲國. 自大賢之息, 周室既衰, 禮樂缺有間. 今孔子盛容飾, 繁登降之禮, 趨詳之節, 累世不能殫其學, 當年不能究其禮. (사마천, 사기, 공자세가

결국 공자는 다시 유()로 남아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기로 한다. 그 가르침이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동양 정신의 원류가 되었고, 동아시아 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다음 회에는 곡절 많았던 공자의 일생을 통해 <논어>를 좀 더 깊이 들여다 보자. <>

     

 

논어를 읽으매 읽기 전 어떤 사람이 읽은 후에도 같은 사람이라면 그는 논어를 읽지 않은 것이다 - 정자 讀論語, 未讀時是此等人, 讀了後又只是此等人, 便是不曾讀.- 程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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