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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일생

작성자연수원|작성시간18.12.17|조회수303 목록 댓글 0

공자의 일생은 신격화되어 객관적인 사실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공자에 관한 최초의 전기는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공자세가>편인데, 이것도 공자 사후 400년이 지나서 완성됐으니(BC.91) 정확하고 완벽한 기록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사마천은 역사가로서 공자의 전기를 쓰기 위해 직접 노나라를 방문해 자료를 구하고 고증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우리는 <논어>의 심층 독서를 위해 공자의 생애가 궁금한 바, <공자세가>의 기록 정도로도 충분할 테니 그것을 1차 자료로 삼기로 한다.

<사기>에는 제후들의 역사인 <세가> 30편이 수록돼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공자세가>편이다.

<공자세가>는 다음과 같은 아리송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陬邑) 생이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 공방숙(孔防叔)인데 방숙은 백하(伯夏)를 낳고 백하는 숙량흘(叔梁紇)을 낳았다. 숙량흘이 안씨(顔氏)와 야합(野合)해 공자를 낳았다.
孔子生魯昌平鄉陬邑, 其先宋人也, 曰孔防叔. 防叔生伯夏, 伯夏生叔梁紇. 紇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

야합? 야합이라니? 이 말은 나쁜 목적으로 서로 결탁했을 때 쓰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본래 '들(野)에서의 합(合)', 즉 남녀가 부정하게 벌이는 성행위를 뜻한다. 우리의 성인이자 군자인 공자님이 이토록 부정하게 태어났단 말인가? 당황한 후세의 학자들이 갖가지 해석을 내놓았지만 시원한 설명은 부족했다. 어쨌든 공자의 부모가 통례에 따른 합당한 결혼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중국 사천성 성도(成都)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굴되었다. 한나라 시대에 무덤을 장식했던 화상석(畵像石) 가운데 하나인데, 거기에 말 그대로 생생한 야합 장면이 묘사돼 있는 것이다.

<상림야합도> 성도 출토 한나라 화상전

중국인들이 '상림야합도(桑林野合图)'라고 부르는 이 낯 뜨거운 그림은 오히려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준다. 고대 중국에서는 천지의 교감을 얻기 위한 공감주술의 의미로 남녀의 집단 성행위를 장려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1) 예를 들어 가뭄이 오래 되면 비가 내리길 빌며 뽕나무 숲(桑林)과 같이 신성한 곳에서 야합 이벤트를 벌였다는 건데,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특히 그 이미지를 무덤 장식을 위한 화상석에 새겨 넣은 것은, 야합이 (화상석의 주된 소재인) 역사적 인물이나 전설 만큼 중요한 의식이었다는 의미다. 공자는 이처럼 신비로운 세레모니(?)를 통해 세상에 태어났다^^        
1) 전호태, <화상석 속의 신화와 역사> (소와당, 2009), pp.256-262


공자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공자세가>에는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은 딱 한 줄 설명이 등장한다.

공자는 어려서 소꿉장난을 할 때, 항상 제사 용기들을 펼쳐 놓고 예를 올렸다.
孔子爲兒嬉戲常陳俎豆, 設禮容.

'조두(俎豆)'란 제사 때 쓰는 나무 그릇을 뜻한다. 공자는 어렸을 때 이런 제기들을 늘어놓고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두예용(俎豆禮容)'이라는 말이 나왔고, 공자가 어려서부터 예를 숭상하는 비범한 아이였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김진여, <조두예용>(1700). 중국 왕진붕의 <공자성적도>를 모방한 작품이다.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어떤 이들은 이 대목에서 공자의 모친이 무녀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애초에 천지의 교감을 위한 주술 의식(야합)을 통해 아이를 가졌고, 그렇게 태어나 아이가 제사 흉내를 내며 놀았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발상이다. 무녀란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니 그 집에 태어난 아이는 늘 제사 광경을 보고 자라 이를 흉내낼 가능성이 많다. 그게 아니라면 가족이나 가까운 이웃에 제사를 직업으로 하는 유(儒)가 있었을 수도 있다(유에 관해서는 지난 회에 설명하였다).

공자는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청소년기에는 어머니도 잃었다고 한다. 이 당시 중요한 에피소드 하나가 <공자세가>에 전해진다.

공자가 (상중이라) 허리에 띠를 두르고 있는데, 계씨(季氏)가 선비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 공자가 나타나자 양호(陽虎)가 물리치며 말하기를 "계씨는 선비들을 초대한 것이지 너 같은 녀석을 초대한 게 아니다." 이에 공자는 물러나고 말았다.
孔子要絰, 季氏饗士, 孔子與往. 陽虎絀曰 "季氏饗士, 非敢饗子也." 孔子由是退.

공자가 살던 시기에 노나라는 계씨 가문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양호는 그 집안의 가신이었는데, 그가 어느 날 열린 잔치에서 공자를 문전박대한 것이다. 공자가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가 선비(士)가 아니라서인지, 아직 미성년자라서인지, 상복 차림이라서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남들 다 가는 마을 잔치에서 까였으니(?) 매우 분했을 것이고 큰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후에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위정 2.4)"고 했는데, 이 사건이 계기가 된 건 아니었을까?

여기서 잠깐 '선비(士)'라는 말에 주목해보자. 이것은 평범한 보통명사가 아니라 당시의 계급 명칭 가운데 하나다. 천자(王)가 맨 위에 있고, 그 아래에 제후(公), 제후 아래에 대부(卿), 대부 아래에 선비(士)가 있었다. 그 아래는 피지배층인 일반 백성들이었는데, 공자는 어쩌면 사(士)에도 끼지 못하는 하층민이었는지 모른다.     

출처 : 김용옥, <논어한글역주 1> (통나무, 2008), p.158

아닌 게 아니라 <공자세가>에 '공자는 가난하고 천했다(孔子貧且賤)'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논어>에도 공자가 제자들에게 직접 "나는 어릴 때 비천하여 다양한 잔재주들을 갖게 되었다(吾少也賤, 故多能鄙事. 자한 9.6)"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으니, 그는 정말 장례 진행이나 하던 천한 집안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공자는 가난하고 평범한 청년기를 보내다가 서른 살에 자립했다
(立, 위정 2.4). <공자세가>에는 그가 일찍부터 계씨 가문에 들어가 창고지기도 하고 목장관리도 했다는 설명이 있지만, 그게 잘못된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어쨌든 그는 34세 때 처음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주나라에 가서 노자(老子)를 만나기도 하였고 제나라의 제후(경공)를 만나기도 했다. <논어>에는 그 당시의 유명한 일화가 하나 실려 있다.     

공자께서 제나라에 계실 때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했다. 말씀하시기를 "음악을 짓는 게 이런 경지까지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 曰 "不圖爲樂之至於斯也." (술이 7.14)

'소(韶)'는 옛날 순임금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음악이다.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이 음악을 들으며 공자는 자신이 꿈꾸는 이상국가를 계속 떠올렸을 것이다. 소를 일러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선하다(子謂韶, 盡美矣, 又盡善也. 팔일 3.25)'라고 극찬한 대목도 있는 걸로 보아('진선진미'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공자는 소에 심취해 깊은 단계까지 간 걸로 보인다. 이는 나중에 예악(禮樂)을 완성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산동성 소원촌(韶院村)에 있는 공자문소처(孔子聞韶處). 공자가 소음악을 들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BC.516년, 공자는 서른 여섯의 나이로 고국에 돌아와 본격적인 아카데미를 연다. 시서예악을 연구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인생의 황금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 공자는 중궁, 염구(염유), 재아, 안회(안연), 자공(단목사)과 같은 뒤어난 제자들을 양성하며 유가사상의 토대를 닦았다. 이러한 학문의 최전성기가 50세 때까지 14년 동안 이어졌다.

BC.501년, 공자는 51세 나이에 처음으로 정식 벼슬길에 오른다. 노나라 제후인 정공(定公)이 그를 중도(中都)의 읍재(邑宰)로 임명한 것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지방 도시의 시장쯤 되는 벼슬인데 공자는 여기에서 두각을 나타내 이후 고속 승진하게 되었다. 당시 상황이 <공자세가>에 기록돼 있다.

정공은 공자를 중도의 재(中都宰)로 삼았는데, 1년 뒤에 사방 모든 곳에서 그(가 다스리는 방식)를 따라했다. 그리하여 공자는 중도의 재에서 사공(司空)이 되었고, 사공에서 또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定公以孔子為中都宰, 一年, 四方皆則之. 由中都宰為司空, 由司空為大司寇.

사공은 토목공사 담당관이고 대사구는 법을 집행하는 총책임자다. 공자는 드디어 중앙무대의 고위 관리로 출세한 것이다. 50대 나이가 그리 빠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천출(賤出)로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대단한 성공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리링(李零) 교수는 <집 잃은 개>에서 매우 흥미로운 해석을 내리고 있다. 공자가 "쉰이 되어서 천명(天命)을 알게 되었다(命. 위정 2.4)"고 말한 건, 바로 50세에 자신의 천직이 관리임을 깨달았다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하긴, 아카데미 시절 공자는 주역에 심취해 책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반복해서 읽었으니 어느 날 갑자기 관직의 천명(天命)을 들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공자의 출세가도는 얼마 안 가 장애에 부딪힌다. BC.497년 그의 나이 55세 때 고국인 노나라는 개혁에 실패하고, 심지어 망국의 조짐까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관해 <공자세가>에 기록된 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이웃 제나라에서 노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미녀 가무단 80명을 보냈다. 노나라의 실세였던 계환자(季桓子)는 그들의 공연에 빠져 삼일 동안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 제사를 지낸 뒤 대부들에게 고기를 나눠주지 않을 정도로 예를 잊었다. 이에 실망한 공자는 노나라를 떠났다 - 드디어 그 유명한 공자의 '주유천하(周遊天下)'가 시작된 것이다!

공자는 기원전 497년부터 484년까지, 무려 13년 간이나 열국(列國)을 떠돌아 다녔다. 그의 나이 55세에서 68세까지, 젊은 몸이 아니었다. 많은 제자들이 동행하였지만 결코 편안한 여행은 될 수 없었다. 공자는 (齊), 송(宋), 위(衛), 정(鄭), 초(楚)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을 받아 줄 제후를 구했다. 하지만 뜻을 펼 기회를 잡기는 커녕 고난과 박해를 당해야만 했다. 송나라에서는 살해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쳐야 했고, 광나라에서는 5일 간 감금을 당한 적도 있다. 진-채의 국경에서 모든 제자들과 함께 7일 동안 아무 것도 못 먹고 개고생한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다. 그 자세한 경로와 사연은 <공자세가>에 나와 있는데, 그보다는 그들의 간난신고(艱難辛苦)가 더 중요한 테마가 될 것이다. 공자가 정나라 성문 밖에 혼자 이르렀을 때 '상갓집 개()'와 같다고 전하는 기사나, 시경의 구절을 들어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들판에서 헤매고 있구나(匪兕匪虎 率彼曠野)'라며 여러 제자들에게 탄식하는 기사는 가히 절정이다. 덕치주의를 실현해 보려 하지만 패권에 눈먼 제후들은 아무 관심이 없다. 그래서 관직을 구하지 못한 공자는 매우 초조하다. <논어>에는 당시 상황들이 여러 이야기로 등장하고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1년 안에 웬만큼 이루어내고 3년이면 성공을 거둘 것이다."
子曰 "苟有用我者, 期月而已可也, 三年有成." (자로 13.10)

리링은 이 절의 소제목을 아예 <공자의 정치광고>라고 달기도 했다(<집잃은 개 2>, p.739). 한편 상인 출신이었던 제자 자공과는 이런 대화도 주고 받는다.


자공이 물었다.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궤에 넣어 보관하시겠습니까? 좋은 상인을 구하여 파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을 팔아야지! 그것을 팔아야지! 나는 상인을 기다릴 것이다."
子貢曰 "有美玉於斯, 韞匵而藏諸. 求善賈而沽諸." 子曰 "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 (자한 9.13)

'발분망식(發憤忘食)'이란 말이 있다. 공부나 일을 할 때 뭔가 될 듯 말 듯한 상황에 이르면 약이 올라 밥먹는 것도 잊고 매달리는 걸 뜻한다. 공자가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설명할 때 등장하는 이 표현은 실은 그의 나이 63세, 초나라에 머물던 시절에 생긴 고사다. 그때 초나라 섭공(섭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이 공자를 스카우트 해볼까 고심하며 분위기를 보러 방문했다. 그때 마침 공자는 없고 제자인 자로만 있었는데...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자로는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그 분은 공부에 빠져들면 먹는 것마저 잊어버리고, (도를) 즐기느라 근심마저 잊으며, 늙음이 찾아오는 것마저 모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술이 7.19)

내막을 알면 절박하다. '발분망식(
發憤忘食)'이란 결국, 아깝게 기회를 놓쳐버린 공자가 제자를 야단치며 스스로의 PR포인트로 내놓은 키워드였던 것이다.

영화 <공자 - 춘추전국시대> 중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구나!" 자공이 말했다. "왜 스승님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나는 아래에서 배워 높은 경지까지 이르렀다. 이런 나를 알아주는 이는 저 하늘일 것이다."
子曰 "莫我知也夫." 子貢曰 "何爲其莫知子也."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 (헌문 14.35)

결국 공자는 아무 소득없이 다시 귀국한다(BC.484). 어느덧 68세가 되었다. 이듬해에 아들 리(
鯉)가 죽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애제자 안회가 세상을 떴다. <논어>는 그때 공자의 슬픔도 전하고 있다.   

안연이 죽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顔淵死, 子曰 "噫! 天喪予. 天喪予." (선진 11.9)

안연이 죽자 공자께서 통곡하셨다. 모시던 제자가 말했다. "스승님 통곡하시는군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통곡? 이 사람을 위해 통곡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통곡하겠느냐?"
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 "子慟矣." 曰 "有慟乎. 非夫人之爲慟而誰爲." (선진 11.10)


 
공자는 말년에 노나라의 역사서인 <춘추>를 엮었고 제자들도 계속 가르쳤다. 이제 그의 사상은 완전하게 무르익은 인문학이자 정치철학이었다. 제자들은 나날이 늘어 유약, 자하, 증삼, 자장 등이 공문(公門)으로 모여들었다. 기원전 479년, 공자는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제자들은 노나라 도성의 북쪽 사수(泗水) 가에 장례를 지내고 3년 동안 상을 치렀다. 사마천은 <공자세가>의 마지막을 이렇게 끝낸다.

노나라에 가서 공자의 묘당, 수레, 의복, 예기(禮器)를 참관했고, 여러 유생들이 그 집에서 때때로 예를 익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경모하는 마음이 일어 머뭇거리며 떠날 수가 없었다. 역대로 천하에는 군왕에서 현인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살아있을 때만 영예로웠고 죽으면 끝이었다. 공자는 포의(布衣)였지만 10여 세(世)가 지나도 학자들이 종주로 삼는다. 천자와 왕후로부터 나라 안에서 육예(六藝)를 말하는 이들은 모두 공자를 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그는 참으로 지극한 성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適魯, 觀仲尼廟堂車服禮器, 諸生以時習禮其家, 余祗回留之不能去云. 天下君王至於賢人眾矣, 當時則榮, 沒則已焉. 孔子布衣, 傳十餘世, 學者宗之. 自天子王侯, 中國言六藝者折中於夫子, 可謂至聖矣.

죽어서 고향에 묻힌 공자 - 산동성 취푸(曲阜)의 공자묘

돌이켜보니 공자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미천하게 태어나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였고,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가진 것 다 버리고 도전도 해 보았고, 그 꿈을 이루지 못해 초조하게 탄식도 해 보았다. 평생을 포의(布衣)로 살았지만 삶은 떳떳하였고 제자들은 많았다. 어찌 보면 살아서 별 것 아니었던 한 사람의 생각은 죽어서 점점 커지고, 깊어지고, 강해져서, 결국 인류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대사상이 되었다. <논어>의 위대함은 바로 그런 공자의 '삶'과 '사상'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거친 밥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우니 그 속에 즐거움도 있다. 의롭지 못한 부(富)와 귀(貴)는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 (술이 7.16) 

飯疎食飮水 반소사음수
曲肱而枕之 곡굉이침지
樂亦在其中矣 낙역재기중의
不義而富且貴 불의이부차귀
於我與浮雲  어아여부운 


공자 개인의 뜻이 하나의 큰 이데올로기로 될 수 있었던 건 모두 그의 제자들 덕분이다. 그의 제자들이 없었다면 '유교'라는 사상은 아예 이름조차 불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회에는 공자와 그 제자들에 관해 알아보기로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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