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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황『성학십도』(聖學十圖)

작성자신망예|작성시간08.02.09|조회수208 목록 댓글 0
 

『성학십도』(聖學十圖)

저자:이황(이황, 1501~1570)

‘동방의 주자朱子’라 불리는 퇴계 이황이 68세 때 서울생활을 마감하면서 16세의 어린선조를 ‘성군聖君’으로 인도하기 위해 제왕의 길을 말씀드리고 말로 다할 수 없어 글로 올린 것이 『성학십도』다. 여기서 되계는 수신修身이 정치의 근본이 됨과 동시에 수신의 방법과 그 철학적 근거를 밝히고 군주의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고 있다. 퇴계는 성리학의 오체를 열 개의 그림으로 나타낸 다음 자신의 해설을 덧붙이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성리학적 사유의 핵심과 도덕적 명분의 확립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대하는 그의 진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 생애

통 성리학의 완성자. 이름은 황, 퇴계는 호. 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부친은 세상을 떠나고, 30대 초반의 모친은 별로 배우지는 못했으나 매우 현명하고 덕성스러운 여자였다. 21세에 결혼하고 23세(중종 18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과거를 세 번 보아 모두 낙방하는 쓰라린 경험을 맛본다. 당장은 쓰라린 일이었으나 길게 보면 그의 인간수련에 좋은 교훈이기도 했다. 율곡이 과거를 아홉 번 보아 모두 장원급제 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퇴계는 대기만성형이었다. 27세부터 과거에 합격하기 시작했다. 34세에 승문원 부정자라는 최하위직으로 출발하여 49세에 풍기군수를 끝으로 관에서 물러나기를 결심할 때까지 중앙에서 29종의 벼슬을 지냈다. 1545년 을사사화로 일시 파면당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그후 고향에 돌아와 조그만 암자를 짓고 독서와 사색에 열중한다.

 그의 호인 퇴계退溪는 고 이은상 선생에 의하면 “물러나 시냇가에 거처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49세에 은퇴하여 7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왕명으로 4번이나 서울로 올라가 성균관 대사성(국립대 총장),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거쳐 학자 문사로서는 최고이 영예인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왕의 정책결정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 홍문관과 왕의 교서를 작성하는 예문관의 장) 등의 벼슬을 억지로 한다.

 16세의 어린 선조에게 『성학십도』를 올리고 68세에 완전 은퇴하여 『주자서 설요』 등 저술작업과 학문연구, 그리고 제자양성에 전력한다. 그는 특히 『주자전서』에 감동하여 침식을 잊고 연구한 결과 ‘동방의 주자’ 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이와 함께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대표적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발전시켰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로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이理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기氣가 발하여 이理가 기氣를 타는 것은 7정情이라 했다. 그의 학풍은 후에 영남학파를 이루어 이이의 기호학파와 대립, 동서당쟁과 관련이 있고, 그의 학설은 일본유학계와 구한말 위정척사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현실생활과 학문생활을 엄격히 구분하여 최후까지 학자의 태도를 지켰다.

 퇴계는 타고난 학자로서 벼슬에 있을 때나 야野에 있을 대나 손에서 책을 놓는 경우가 없었다 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고 생각하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저술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건강을 해쳐 소화불량․안질․현기증에 시달렸다.그러나 만년에 학문을 대성하고 성인의 경지에 들었을 때는 모든 것을 달관한 탓인지 건강도 저절로 회복되고 수척하던 몸도 원숙한 마음과 더불어 보기좋게 살쪘다고 한다. 제자들은 그를 ‘신명神明,’ 즉 신처럼 존경하고 받들었다.

 

 

 

▣ 조선시대 성리학의 두 흐름


리학은 송나라의 주자朱子에 의해 체계화된 유학사상으로 ‘이理․기氣’의 개념을 통해 우주와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고자 한 유교철학으로 대체로 태극론太極論․이기론理氣論․심성론心性論․성경론誠敬論으로 구분된다.

 조선의 성리학은 ‘주리론主理論’ 과 ‘주기론主氣論’ 의 두 계통으로 발달했다. ‘주리론’ 은 주자의 견해를 보다 충실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의 입장에서 ‘이理’(본질,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흡사)와 ‘기氣’(현상, 플라톤의 현상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흡사)는 서로 다른 것이면서 서로 의지하는 관계에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가 기를 움직이는 본원이라는 견해다. 

 따라서 인간의 심성心性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이理(본연本然의 性)는 순선무악純善無惡한 것이고 기氣(기질의 성)는 가선가악可善可惡한 것이라 하여 역시 이理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 학설은 이언적에서 시작되어 이황에 이르러 집대성 되었는데, 특히 이황은 ‘동방東方의 주자朱子’ 라 불릴 만큼 주자의 교리에 충실했다. 그의 문하에서는 유성룡․김성일․정구 등이 배출되어 영남학파를 형성했으며 일본유학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주기론’은 서경덕이 처음으로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고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울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어 이이에 의해 대성을 보았다. 이것은 우주 만물의 근원을 기氣에 두고 모든 현상들을 이 기氣의 변화․운동으로 보는 입장이었으나 여기서 이理는 기氣를 움직이는 법칙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심성롱心性論에 있어서도 본연의 성(理)보다 기질의 성(氣)을 더욱 중요시 했으며 정치․경제 등 현실인식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 학문은 이이를 비롯해서 성혼․송익필과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등에게 이어져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이후 영남과 기호 두 학파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발전했다.

   

   

                                 

▣ 이황의 사상

 

황의 사상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이기이원론적 주리론 理氣二元論的主理論’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과, 기대승과의 ‘4단 7정논쟁,’ ‘성경론誠敬論’ 에 있어서는 ‘경敬’ 사상 등으로 요약된다.



 1. 이황에 의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은 이理와 기氣로 이루어진다. 이理는 무형무질의 정신적인 형이상학적 존재이고, 기氣는 유형유질한 물질적인 형이하학적 존재라고 보았다. 이와 기는 상호의존적이나 이를 기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로 파악했다. 이리하여 이理 우위론적 이기론이 그의 본체론을 장식한다.

 2.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4단端 7정情의 해석을 놓고 기대승과 벌인 4단7정논쟁이다. 4단이란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지단仁之端이요,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지단義之端이요,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지단禮之端이요,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지단知之端 이다”에서 인仁․의義․예禮․지知를 말하며, 7정情은 『예기』의 희喜․로怒․애哀․락樂․애愛․오惡․욕欲을 말한다.

 이황은 심성의 문제를 해명함에 있어 절대적인 이理와 상대적인 기氣로 임했으며 언제나 인간의 심리현상은 이발기수理發氣隨, (理가 작용하여 氣가 理에 따르기도 하고)와 기발이승氣發理乘(氣가 작용하여 理가 그위에 타기도 함)의 이기호발설로써만 설명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순선무악한 4단은 반드시 이理에서 발發해야 하며 가선가악한 7정은 기氣에서만 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대승은 이에 반대하여 이기理氣의 혼륜渾淪이 정情이고 그 정情은 기氣의 작용에 의해서만 발출한다고 보고 이발理發을 인정치 않았다. 또한 4단은 7정에 포함되어 있고 4단과 7정의 근원은 같다고 보아 4단 7정四端七情을 상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즉, 이기理氣는 분리할 수 없고 기氣를 통해서만 이를 알 수 있다고 했다(從氣推理).



3. 그는 평생을 ‘경敬’ 으로 일관했다. “마음을 방만하지 말고 항상 정신을 집중, 통일된 상태로 지녀야 하고 모든 기거동작을 가볍게 하지 말고 모든 일에 조심하고 삼가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따라서 말할 때에도 경敬해야 하고 움직일 때도 경해야 할 것이며 앉아 있을 때에도 모름지기 경해야 한다. 이는 일부러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심신이 숙연해 지고 표리가 하나로 되는 경지가 되는 것이라야 한다.”

 또한 그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이나 선행후지先行後知를 배격하고 지행병전론知行竝進論을 주장했다. 지와 행, 정과 동을 관통하는 하나의 기본이 되는 것이 ‘성聖’ 이며 거기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경敬’ 이라 했다. 

 

 

▣『성학십도』의 내용

1568년(선조1) 서울생활을 영원히 청산하면서 68세의 노대신老大臣은 16세의 선조에게 제왕의 길을 말씀드리고 말로다할 수 없어 글로 올린 것이 『성학십도』였는데, 어린 왕과 늙은 신하의 대면은 감격적인 장면이었다 한다. 선조를 성군으로 인도하기 위해 군왕의 도道에 관한 학문의 요점을 도식圖式으로 설명했다.

 ‘성학’이란  ‘성인을 배우는 학문’ 또는  ‘성왕을 배우는 학문’의 뜻으로, 쉽게 말하면 유학을 가리키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성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학문이 내재되어 있다는 EMt이다. 『성학십도』의 서론에 해당하는 「진성학십도차進聖學十圖箚」에서 이를 확인해보면, “임금이 된 분의 한 마음은 온갖 책임이 모이는 것이며 뭇 욕심과 간사함이 침해하는 곳입니다. 그 마음이 만일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하여 져 방종케 되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들끊는 것과 같아서 그 누구도 이것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임금 한 사람의 용심用心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훌륭한 덕을 쌓아야 한다는 뜻으로 올린 것이다.

 공자 이후 유학에서는 이상적 정치를 군왕의 덕치德治․예치禮治로 생각한 만큼 이황이 그 덕치의 이상실현을 위해 임금에게 덕을 쌓는 심법心法을 가르치고자 지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유학의 근본정신은 언제나 ‘수기치인修己治人’과 ‘내성외왕內聖外王’에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어느 누구나 수양을 하되 현실의 문제를 도외시해서는 안되며, 현실을 다루되 그에 앞서 누구나 성인의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성리학의 경우에 이러한 정신은 더욱 투철하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보면『성학십도』의 저술동기는 다만 군왕 한 사람의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성학십도』는 서론의 뜻이 담긴「진성학십도차」와 10개의 도표와 해설로 되어 있는데, 특히 그 도圖에는 자신의 저작과 앞선 학자들의 것이 섞여있다.「진성학십도차」에서는 왕 한 사람의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경敬의 내면화를 중요시 한다.

 10도 중 ①태극도太極圖 ②서명도書銘圖 ③소학도小學圖 ④대학도大學圖 ⑤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의 5도는 천도天道에 입각하여 성학聖學을 설명한 것이고 ⑥심통성정心統性情 ⑦인설仁說 ⑧심학心學 ⑨경제차敬薺箚 ⑩숙홍야매차夙興夜寐箚의 5도는 심성心性에 근원하여 성학을 설명한다. 7개는 옛 현인들이 작성한 것이고 3개(③⑤⑩)는 이황 자신이 작성한 것이다.「십도」의 서술내용은 도표와 함께 앞부분에 경서經書와 주희 및 여러 성현의 글을 인용한 다음 자신의 학설을 전개하고 있다. 이로 보면 본서는 이황의 편집과 저작의 중간 형식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일종의 편저형식을 통하여 그의 사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혹자는 도圖 자체만 가지고 말할 때 본서에는 이황의 독창성이 별로 없다고 주장 할지 모르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시까지의 성리학의 요지를 열 가지로 압축, 체계화 한 것인데, 그 당시의 성리학을 자기류로 체계화한다는 자체가 그의 독창성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이황이 특히 주희의 입장에서 성리학의 요지를 도설의 형식으로 총정리, 체계화한 것이라는 데에 『성학십도』의 저술의의가 크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한권만으로도 이황의 공헌과 그 비중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우리 나라에서 『성학십도』만큼 숭상받은 책도 드물 것이다. 이황의 철학을 대표는  『성학십도』는 선조의 명에 의해 병풍에 씌어져 애중愛重되었고, 그 이후의 역대 임금들도 경연經筵(임금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논하는 일)에서 자주 강의하게 했다. 임금들이 이러했으니 그 신하들의 경우는 말할 필요됴 없으리라.

 중국에서는 청말의 양계초梁啓超 같은 석학으로부터 극찬을 받은 바 있고, 일본에서는 일찍이 1655년부터 이 책이 인쇄되어 유학자들의 필독서로 숭상되었다.


 

▣ 퇴계사상의 영향


떤 학자들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 두 사람을 선택하라면 이황고 정약용을 드는 사람이 많다. 이황은 생전의 두 명의 부인, 형님, 아들 등의 죽음을 맞는 불운을 겪었으나 정신을 가다듬어 학문에 정진했고, 스스로 몰려드는 제자들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깨닫고 사당을 지었다. 이와 같이 그가 평생에 역점을 두었던 일은 크게 두 가지로 학문연구와 교육윤동이 그것이다.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인간의 심성을 구명하는 데 있어 이이와 입장을 달리했으나, 구명된 인간의 심성을 실천으로 연결시켜 도덕적인 인간과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것을 학문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이와 함께 뚜렷한 공헌을 한다. 그는 저술에 매진하면서 때로는 편지로 가르치기도 하고 수양하는 방법을 일러주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학문적 깊이는 임금들의 귀감이 되었고 뒷날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일본의 메이지 유신 때에도 지도이념으로 활용되었다.

 그는 교육자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풍기군수로 재직시 백운동서원을 최초로 국가공인으로 만들었고, 성균관의 대사성자리에 있으면서 학문적 분위기를 성숙시켰으며, 고향에 돌아와 도산서원을 일으켜 본격적인 제자양성에 주력한 결과 정승 10여 명과 판서 30여 명을 배출했다. 그의 제자들은 뒷날 영남학파를 형성하여 중앙의 관제를 주름잡았고 향리의 학문풍토를 조성한다.

 그러나 그가 성균관의 유생을 자기 세력으로 만들고 영남학파를 당쟁에 휘말리게 했다는 비난과, 그가 너무나 큰 학자여서 학파의 흐름이 권위주의적 경향으로 흘러 개혁과 변화를 소홀히하는 보수성을 띠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미래지향성의 결여나 물질경시 현상, 가족주의의 폐단 등은 유교사상의 전반적인 역기능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끝으로 이황의 검소한 일생을 보여주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권율 장군의 아버지인 권철은 영의정을 지낸 당대의 인물로 도산서원으로 이황을 찾은 적이 있었다. 식사 때가 되자 밥상이 나왔는데 보리를 반 이상 섞은 밥에 콩나물국, 반찬으로는 콩자반, 귀한 손님이라고 해서 특별히 마련한 것이 북어 한 토막이 전부였다. 이황은 한 그릇을 다 먹었으나 권철은 체면치레로 몇 술 뜨고 수저를 놓았다. 이튿날도 같은 식사가 나오자 목에 넘어가지 않는 식사 때문에 예정을 앞당겨 떠나기로 했다. 떠나면서 좋은 말씀 한 마디를 부탁했다. 이에 이황은 “촌부가 대감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융숭한 대접을 못해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 식사는 백성들이 먹는 식사에 비하면 진수성찬이올시다. 이것을 드시지 못하면 관官과 민民의 생활이 이처럼 동떨어져서야 어찌 백성이 진심으로 복종하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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