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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한문교육자료

[스크랩] 천자문의 유래

작성자연수원|작성시간10.01.16|조회수499 목록 댓글 0

 

1. 천자문이란?

 

 천자문이란 말 그대로 서로 다른 1,000개의 한자(漢字)를 모아 만든 책이다. 서로 다른 4개의 한자(漢字)로 이루어진 구(句) 둘이 서로 연(聯)을 이루고 있는 사언일구(四言一句) 이구일련(二句一聯)의 고체시(古體詩) 형태로 총 250구(句)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용된 1,000개의 글자가 다 다르다. 첫 구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구인 '언재호야(焉哉乎也)'로 끝나며, 천문, 지리, 자연 현상과 역사, 정치, 철학, 문학, 인륜, 도덕 등 문화생활 전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종합교양입문서로 동아시아 각 국에서 한문학습의 기초교제로 이용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문입문서로 일반에 널리 사용되며 한문기초교과서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 문(文)과 자(字)는 글자를 말한다. 글자 중에서도 문(文)은 상형자와 지사자를 자(字)는 문(文)과 문(文)을 결합해 만든 회의자와 형성자를 말하니 천자문(千字文)이란 천(千) 개의 문(文)과 자(字), 곧 천(千) 개의 글자라는 뜻이다. 이는 천자문(千字文)을 거꾸로 읽어 보면 문자천(文字千)이 되는데 이는 곧 글자 천(千) 개가 담겨 진 책이라는 것에서 그 뜻이 더 뚜렷이 드러난다.
2)  문(文)을 문장(文章)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천자문(千字文)이란 천(千) 개의 자(字), 곧 천(千) 개의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文章)이라는 뜻이다.  천자문(千字文)이 4자씩 한 구를 이룬 사언고시(四言古詩) 형태로 총 250구(句)로 되어 있고 각 구 마다 일정한 뜻을 갖는 하나의 문장을 만들고 있으며 구(句) 둘이 서로 대응하며 연(聯)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천자문(千字文)이라 한 것이다. 즉, 천자문(千字文)이 글자 하나 하나의 음과 뜻을 익히기 위한 한자 단어집이 아니라 특정한 뜻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뜻이다. 천자문은 네 글자씩 한 구절을 이루어 250구절로 되어 있는데 홀수구절과 뒤의 짝수구절이 서로 짝을 이루어 대응하고 있으며, 두 번째와 네 번째 구절의 끝 글자가  ‘ㅇ’ 이나 ‘ㄱ’ 혹은 받침이 없는 글자로 운(韻)을 넣은 사언절구(四言絶句)의 한시(漢詩)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2. 천자문의 작자

 

 천자문의 작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중국 양나라 무제 때 주흥사(周興嗣 : 470?∼521?)가 지었다는 설을 통설로 하여 위나라 문제(文帝) 때 태위(太尉) 종요(鍾繇)가 지었다는 설이 주로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  천자문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 첫 사서는 [일본서기(720)]로, 285년 백제의 왕인(王仁)이 [논어] 10권과 함께 [천자문] 1권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백제에는 천자문이 이보다 훨씬 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천자문의 작성연대가 이 보다 훨씬 이 후의 일이고 왕인이 천자문을 전했다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 그 유적이 남아있지 않아 왕인의 천자문이 지금의 천자문과 같은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1) 주흥사(周興嗣)설

 

① 천자문의 작자가 주흥사(周興嗣)라는 이야기는 송나라 때의 서예가이자 학자인 동유(董?)가 지은 [광천서발(廣川書跋)]이라는 책에서부터 기원한다.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양(梁)나라 무제((武帝 ; 재위 502~ 549))는 왕휘지(王羲之)의 서체를 최고로 여겨 그가 남긴 글씨들을 하나 둘 모았는데 그 중 1,000여 자를 뽑아 한 글자씩 탁본을 해서 서첩으로 만들도록 은철석(殷鐵石)에게 명하고 죄를 지은 주흥사(周興嗣 : 470?∼521?)에게 죄를 사하는 조건으로 하루 밤 안으로 그 글자들을 한 번씩만 사용해 시를 짓도록 하였으니 곧, 주흥사(周興嗣)가 4자씩 한 구로 운(韻)을 맞춰서 천개의 글자를 문장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천자문(千字文)이고 이를 짓다 주흥사(周興嗣)가 하룻밤 동안 그만 머리털이 하얗게 다 세었다고 하여 천자문을 일명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② 또, [옥계청화(玉溪淸話)]에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위나라 문제(文帝 : 220∼265) 때 태위(太尉)였던 종요(鍾繇 : 151~230)의 글씨가 새겨진 깨어진 비석을 얻게 되었는데 그 비석의 글씨에 반해 이후 전국을 뒤져 그가 남긴 글씨들을 모으게 되었고 그렇게 하여 모인 1,000여자의 글자들을 가지고 주흥사(周興嗣)에게 차운(次韻)해 글을 짓도록 명하였는데 그 명에 따라 주흥사(周興嗣)가 만든 문장이 바로 천자문이라는 것이다.

 

2) 종요(鍾繇)설  

 

① 여러 사료를 살펴 볼 때 중국의 위 ·촉 ·오 삼국시대 위나라 문제(文帝 : 220∼265) 때 태위(太尉) 종요(鍾繇 : 151~230)가 처음 천자문을 지어다는 설이 주흥사(周興嗣)설 보다는 유력하다.
② 한문고전들에는 ‘자왈(子曰)’, ‘증자왈(曾子曰)’과 지은이의 이름이 언급되는 경우가 있는데 천자문에도 ‘杜稿鍾隸(두고종예)’라는 구절이 있으며 여러 사서나 전적들에서 천자문의 작성시기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 재위 502~ 549) 보다 앞선 시기로 종요(鍾繇)가 활동하던 시기라는 점 때문에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③ 종요(鍾繇)는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신하로 위나라 건국에 공이 커 태위(太尉)로 봉해졌으며 서예에 조예가 깊어 예서체, 해서체, 행서체의 대가로 알려지고 있는 인물로 왕희지가 특히 존경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왕희지는 그가 남긴 글들을 서예로 남겨 놓았고 그의 서체를 흠모하던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왕희지의 전적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종요(鍾繇)가 지은 글들 또한 모아지게 되었는데 그 것이 바로 지금의 천자문의 효시라는 것이다. 즉, 종요(鍾繇)가 만든 천자문은 그의 사후에 오랜세월 전란과 변고를 거치는 과정에서 사장되었다가 송나라 문제(文帝)때 황제의 서고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때는 그 순서가 서로 뒤 바뀌고 틀어져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고 이에 문제는 우군장군(右軍將軍) 왕희지(王羲之)에게 명해 차운(次韻)토록 하였으나 실패하고 대신 그의 글을 귀히 여긴 왕희지가 이를 한 자 한 자 서예작품으로 써 남겨 놓았고 그렇게 왕희지에 의해 다시 기록된 종요(鍾繇)의 글은 이후 제나라 때에 다시 차운(次韻)을 위한 시도가 이어지게 되었으나 다시 실패한 뒤, 위진남북조시대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 주흥사(周興嗣)에 의해 비로소 차운되었고 이후 종요(鍾繇)의 천자문은 차운(次韻)해 글을 지은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3) 편집(編輯)설

 

① 이렇듯 천자문에 대한 저작시기와 저자에 대한 언급이 구구하지만 천자문(千字文)의 작성 시대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라는 것과 그 작자가 주흥사(周興嗣)라는 것이 공통된 내용인 바, 흔히 천자문 하면 주흥사천자문이라 일컬을 정도로 주흥사(周興嗣)를 천자문(千字文)의 원작자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나 이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면, 양(梁)나라 무제(武帝)는 ‘황제보살’이라 칭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한 황제인데 그런 그가 유학의 기초입문서로 철저한 유교적 가치를 표방하고 있는 [천자문]을 짓도록 명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천자문의 작자로 알려진 주흥사의 사(嗣)는 ‘이어서 베낀다’는 의미므로 주흥이라는 사람이 앞서 다른 사람이 지어놓은 [천자문]을 다시 베껴놓은 것이므로 작자가 주흥사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또 천자문(千字文)을 지었다는 주흥사(周興嗣)가 삼천갑자 동방삭이라는 말이 있듯 그가 실재한 인물이었는지 확인할 만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주흥(周興), 또는 주흥사(周興嗣)가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② 또한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일본서기]에 양(梁)나라 무제(武帝 ; 재위 502~ 549) 때 보다 훨신 앞선 시기(285년)에 [천자문]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듯 서책의 명칭과 그 내용이 다를 지라도 천자문의 형태를 한 한자입문서가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러한 여러 류(類)의 한자입문서를 모아 주흥(周興)이라는 자가 새로이 이를 [천자문]으로 편찬하였거나 다른 누군가가 주흥(周興) 또는 주흥사(周興嗣)라는 가명을 사용해 엮은 책을 발행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③ 이는, 송(宋)나라 태종(太宗) 순화(淳化) 3년(992)에 궁중의 비각(秘閣)에 소장된 법첩(法帖)들을 모사(模寫), 판각(板刻)하여 순화각(淳化閣)에 소장케 한 [순화법첩(淳化法帖)=순화비각법첩(淳化閣法帖)또는 줄여서 [순화각첩], [각첩]이라 한다]에서 천자문의 구절 중 진숙열장(辰宿列張)에서 기집분전(旣集墳典)까지의 84자는 한(漢)나라 장제(章帝)의 글이라 하였고, 다시 구양수(歐陽修)는 이를 가리켜 한(漢)나라 장제(章帝)의 진적(眞蹟)으로, 왕희지(王羲之) 때에 시작된 글이 아니며 이는 대개 전세(前世)의 글을 배우는 자들이 많이 외웠다고 하였을 뿐 아니라 [일지록(日知錄)]에도 그렇게 소개되어 있는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④ 이러한 사실들을 놓고 보았을 때 천자문은 어린 학동들을 가르치던 훈장들과 같은 일반 교육자들이나 글쓰기를 좋아하던 서예가들이, 기초한문학습교재 또는 서예교본으로 이용하기 위해 한(漢)나라 장제(章帝)의 글과 같은 좋은 글귀나 명문들을 모아 서책으로 엮어 놓은 것을 이 후의 사람들이 다시 여기에 전대의 다른 명문장들을 새로이 더하거나 모아 엮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문장들이 새로이 더해지고 변형되어 오다,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에 주흥사(周興嗣)라는 이름을 한 자가 시중에 나돌고 있던 그러한 종류의 여러 교재들을 모아 천자문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과 같은 형태를 한 기초한문학습교재 및 서예교본을 완성하게 되었고 이후 시중에 큰 호흥을 받아 세간에 널리 전파되기 시작하다, 당나라 때부터는 일반에 광범위하게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한 천자문이 널리 펴져가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여진다.

 

 

3. 전래와 변천

 

1) 천자문은 당나라 때부터 일반에 광범위하게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서예가들에 의해 서예교본으로 이용되면서 수 많은 판본이 제작되었다. 그러한 습자교본 중 왕희지의 7대손 왕지영(王智永)이 진서(眞書:楷書)와 초서(草書) 두 서체로 만든 [진초천자본(眞草千字本)]이 가장 유명하며 1109년에 새긴 석각(石刻)이 남아 있는데 둔황에서 그 필사본 문서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송대(宋代) 이후 일반적인 기초한문학습교재로 이용되었고 그 이용범위가 확대되어 문서번호를 매길 때 천자문의 순서를 이용해 붙이는 풍습이 생겨났다. 천자문에 없는 글자를 모은 [속(續)천자문]과 [서고천자문(敍古千字文)]과 같은 이종 천자문과 많은 판본들이 발행되었다.

 

2) 우리나라로의 전래시기

 

① 이미 앞에서 말했듯 [일본서기]에, 285년 백제의 왕인(王仁)이 [논어] 10권과 함께 [천자문] 1권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에는 천자문이 이보다 훨씬 전에 들어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왕인이 전했다는 천자문이 남아있지 않아 이 때의 천자문이 지금의 천자문과 같은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② 신라 법흥왕 8년(521년)에 중국 남조 양의 승려 원표가 신라 사신으로 오면서 많은 불경과 [천자문]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
③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자에 한글로 그 뜻과 음을 넣어 간행하였는데, 이러한 석음(釋音) 천자문 판본 중 선조 8년(1575년)에 광주에서 간행된 광주판 천자문이 가장 오래되었다(일본 동경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④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천자문은 조선 선조 16년(1583년) 어명에 의해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쓴 [석봉천자문(石峯千字文)]이며, 경북 영주의 박찬성(朴贊成) 소장본과 일본 나이카쿠 문고(內閣文庫) 소장본이 원간본 혹은 이것에 가까운 판본으로 추정된다.
⑤ 천자문의 내용이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가 아닌 중국의 것을 담고 있고 실 생활에 사용되지 않은글자들이 많을 뿐 아니라 초학자들의 한자학습에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에서 조선시대 초기부터 새로운 한자학습서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이어졌다.  이에 조선 초기에는 1500여 자로 구성된 [
유합(合)]이라는 아동용 한자 학습서가 출간되었으며 조선 중기에 [유합(合)]에다 1500자를 더해 3천여 자로 된 [신증유합(新增類合)]이,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다산 정약용의 [아학편(兒學編)]이 만들어졌으며 일제말기에는 우리 것을 지키고자 하는 바램에서 [대동천자문]이 만들어졌다.

 

 

4. 천자문 학습의 어려움

 

1) 천자문은 너무 어렵다.

 

 천자문이 한문입문서로 애용되고 누 천년에 걸쳐 그 생명력을 이어온 까닭은 천자문의 많은 내용이 [사서삼경], [효경], [예기], [춘추], [사기] [고문진보] 등과 같은 주요 한문고전들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사항들을 뽑아 엮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고전들을 익히기 전, 각 고전의 중요내용을 천자문을 학습하며 암기하듯 배워 놓은 뒤 이후 접하게 되는 유학서적을 익힐 때 천자문에서 배웠던 구절의 세부내용과 진정한 의미를 파악해 가게끔 단계별 학습과정의 첫 단계로 천자문이 이용되었기 때문에 천자문을 처음 배울 땐 그 뜻이 진정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학문이 깊어져 갈수록 그 의미를 깨닫게 되면서 천자문의 중요성과 효용성에 눈을 뜨게 되고 이러한 까닭에 초학자가 배우기에는 무척 어려운 글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수 많은 기초 한자학습서들이 명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천년이 넘는 기간동안 천자문은 한자학습교재로서의 생명력을 꿋꿋하게 이어가게된 것이다. 따라서 천자문을 배울 땐 각 각의 구절이 무얼 의미하는지 초학자의 수준으로 알기에 너무나 어렵다. 그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학과 한문학 및 한학 뿐 아니라 과학, 지리, 역사, 수리학 등 학문 전반에 대한 고차원적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천자문에 대한 변변한 해설서가 없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천자문이 너무 쉬워 해설서를 펴낼 필요성을 못 느꼈다기 보다 천자문을 해설할 만큼의 수준을 가진 이가 많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천자문이 하나 하나의 한자를 익히는 단어학습장으로만 이용되었고 또 그런 서적으로 알려지게 된 까닭은 천자문을 가르치던 마을 훈장의 수준으로는 그 의미를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 천자문은 시험을 앞두고 시험과목마다 작성하는 서브노트들을 묶어 놓은 핵심요약집과도 같기에 시험과목들에 대한 철저한 학습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람이 읽을 땐 암호와 같은 수준의 구절들로 밖에 보이지 않기에 한문초학자들이 보기엔 무척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천자문은 아동용 기초한자학습서로 이용하기에는 어려운 내용과 구조로 되어 있다.

 

2) 사용빈도가 적은 한자들이 많다

 

 앞서 말했듯 천자문은 주요 한문고전들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사항들을 뽑아 엮어 놓은 책이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초 글자를 가르치기 위한 한자단어집으로 활용하려는 목적보다 한문학과 유학을 공부할 학동들의 학습을 위해 만들어 놓은 단계별 커리큘럼 중 첫 단계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로, 앞으로 배울 과정들의 책들에서 나오는 중요사항들을 뽑아 선행학습을 시키면서 동시에 한자를 익힐 수 있게 하기 위해 천자문을 만들었기 때문에 천자문의 내용은 한문고전들의 내용이고 따라서 어려운 글자들, 실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실용한자들이 아닌 학문용 전문용어들이 들어있는 것이다. 당연히 실생활에서는 사용빈도가 적은 글자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이후 의 학자들이 초학자들이 한자를 배우는데 이용하는 천자문에서 사용하는 한자들이 너무 어렵고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지 않는 글자들이 상당하다는 이유로 천자무의 효용성을 의심하는 이가 많았으나 이는 천자문을 단순히 하나 하나의 한자를 배울 때 사용하는 한자단어집 정도로만 파악하였기 때문에 나온 말들이다. 천자문을 한자단어집으로만 보았다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천자문은 하나 하나의 한자를 익히기 위한 한자학습서로는 그다지 효용성이 높다 말할 수 없고 따라서 그러한 용도로는 조선시대에 나온 [유합(合)]이나 [신증유합]등의 한자학습서가 더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다만 이 둘의 차이는 앞으로 배울 한문학습과정과의 연계성, 선행학습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있다.

 

 

5. 천자문에 얽힌 전설과 야담

 

1) 죄를 짓고 옥에 갇힌 주흥사가 죄를 사해주는 대신 하룻 밤안에 천자의 한자를 가지고 시를 지어 올려야 한다는 무제의 명을 받아 노심초사, 천자문을 짓다가 드디어 998자, 249구의 글을 지었으나 마지막 4자를 짓지 못하여 고심하고 있는데, 홀연히 귀신이 나타나서 어조사인 언재호야를 써 마무리하게 끔 도와주었고, 이를 완성하고 보니 주흥사의 머리털이 하루밤새 하얗게 세었다고 하여 천자무에 백수문(白首文)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2)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조조의 뒤를 이어 조비가 왕이 되었다. 이 때 재상으로 있던 종요가 조비에게 여러 차례 간언을 하다 조비의 미움을 받게 되었는데, 결국에 가서 종요는 또 한차례 간언을 하다 조비에 의해 옥에 갇히게 된다. 이에 신하들이 원로 대신을 옥에 가두는 것은 너무 심한 일이니 그를 석방해 줄 것을 간청하게 된다. 이에 조비는 그가 만약 하룻밤 안으로 한 글자를 두 번 쓰지 않고 1000자의 한자로 사언시구를 짓는다면 옥(獄)에서 풀어주겠노라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종요는 이를 통해 조비의 마음을 다시 한번 돌려 보기 위해 천개의 글자를 사용해 인륜도덕에 관한 내용을 담은 시를 하룻 밤만에 짓게 되는데 그 것이 바로 천자문이고 천자문을 짓느라 노심초사한 종요는 하룻 밤만에 머리가 흰 백발로 변해 있었다. 이에 천자문에는 백수문이라는 별칭이 붙여졌고 종요의 천자문을 받아든 조비는 글에 감동하여 그를 방면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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