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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상산사호를 찾다가..

작성자연수원|작성시간13.03.28|조회수70 목록 댓글 0

 

시조는 부귀영화가 뜬구름일 뿐이라고 말하는데...

 상산사호-진(秦)대에서 한(漢)대에 걸쳐 생존했던 은사(隱士)로서

동원공(東園公), 각리선생(角里先生),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등 네 사람을 말함.

진나라 때 상낙산(商山)에 피난해 있었고 네 사람의 나이가 모두 80 이상인데다가

눈썹이 희었기 때문에 상산사호라고 불렀다.

한고조가 선비를 박대한다고 세상에 나가기를 거절했으나,

후에 장량의 계책에 따라서 태자 유영(劉盈)이 네 사람을 나오게 해서 자신을 보좌하도록 했다.

상산일노(商山逸老)란 상산에 숨어사는 노인이란 뜻으로써 저 유명한 상산사호(商山四皓)를 지칭한 것이다.  기원전 2백년경.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아방궁(阿房宮)을 짓고, 만리장성을 쌓고, 서적을 불사르고, 불평하는 선비들을 묻어 죽이는 등 포학무도한 정치를 하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으며 뜻있는 선비들은 세상을 등지고 심산유곡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


그 시절 섬서성 상현(商顯) 동쪽에 있는 상산(商山)의 깊은 산중에 네 사람의 은사가 난리를 피해 숨어살고 있었으니 그 이름은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각리선생(角里先生), 하황공(夏黃公)이다. 

 

이들은 세상의 근심걱정을 잊어버리기 위해 약초캐고 바둑 두는 것으로써 소일했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상산사호(商山四皓 = 상산에 사는 머리 흰 네 노인)라고 했다.

 

중국의 고전 악부(樂府)에는 상산사호가 나물을 캐면서 불렀다는 노래가사가 ‘사호가(四皓歌) 또는 '채지조(採芝操)'라는 제목으로 후세에 전해오고 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진시황이 죽고 세상은 어지러워져 각처에서 영웅호걸들이 난리를 일으 켰으며 초(楚)나라 항우와 한(漢)나라 유방이 패권을 다투다가 한나라가 승리하여 천하를 평정했다. 한고조 유방은 황제위에 오른 뒤 상산사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초청했으나 상산사호는 황제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더욱 깊은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나는 일정에 따라 임의로 잡아 본 문경대간 제3구간 답사를 계획하면서 오래 전부터 들어왔던 부운령에 대해서 의문점이 있어서 나름대로 서책이나 참조될만한 것을 보았으나 워낙 아둔하여 신통한 해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 의문점은 부운령의 한자 명칭에 관한 것이었다. 현 지도에는 부운령을 한자로 <富雲嶺>이라고 표시하는데 이 한자식 명칭이 다른 곳 어디에서나 공통적으로 나온다면 의문스러워 할 하등의 이유가 없겠지만 문경시문화원에서 발간한 향토자료에 의하면 <浮雲嶺>이라고 표시하면서 우리말식 명칭으로 <뜰비재>라고 소개하고 있음이 매우 혼돈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뜰비재>도 굳이 우리말로 표현한다면 <뜰구름재>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구름<雲>을 지칭하여 <비>라고 한 것은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억지로 가져다 붙인다면 구름이라고 하면 명칭이 길어지니까 구름은 <비>가 내리는 원인으로 보아서 <뜰비재>라고 했는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富雲嶺>이라는 한자 명칭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명칭이다. 앞에서 부곡리<富谷里>의 유래를 얘기하면서 부곡은 조선조 중기(1550년경) 개성 고씨가 마을을 개척하면서 이 고씨가 말을 매었던 골이라 하여 막골 혹은 마곡(馬谷)이라 부르다가 후에 고씨 형제들이 부성(富城)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유래가 있는 것으로 보아 <富雲嶺>은 <부성에 있는 구름고개>라는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확인해 볼 수는 없지만 그 정도로 심증은 해 볼 수는 명칭이다.

    石門이 石門안여  商山이 이고질다.
    紫芝歌 한곡調의 世事를 다 이즌이
    이밧긔 富貴 功名은 浮雲인가 하노라.

   위 시조는 근품재(近品齋)  채헌(蔡? 1715∼1795)의 시조다. <石門歌 二首>로 전해지는 시조로 석문정제영시고(石門亭題詠詩攷)의 8수중에 포함되어 있다. 석문정제영시(石門亭題詠詩)는 근품재 선생이 산북에 소재해 있는 풍광 좋은 곳을 시조로 노래한 것이다. 근품재 선생은 벼슬을 하지 않고 산북에 은거한 학자로 알려져 있고 선생이 지은 시조는 우리 문경에 전해지는 몇 수 안되는 시조들 중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석문정(石門亭)은 정자로 지금의 산북면 이곡리에 1771년 지어진 것으로 1771년은 근품재 선생이 56세 때이다. 석문정이 있는 이곡리는 현재 우리가 서있는 부운령 고개에서 배나무산의 중허리가 되는 좌측으로 가면 상선암이 나오는데 여기서 계속 더 산길로 나가면 나온다. 부운령에서 가까운 거리인 것이다. 지금도 옛길의 자취가 남아 있다고 한다.
   <石門歌 二首>는 중국의 상산사호(商山四皓)를 모르고서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상산사호(商山四皓)는 <상산에 사는 수염이 흰 네 노인>이란 뜻으로 隱者(은자)를 지칭한다. 고사를 잠깐 언급할 것 같으면 기원전 2백년경.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한 뒤 아방궁(阿房宮)을 짓고, 만리장성을 쌓고, 서적을 불사르고, 불평하는 선비들을 묻어 죽이는 등 포학무도한 정치를 하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으며 뜻 있는 선비들은 세상을 등지고 심산유곡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그 시절 섬서성 상현(商顯) 동쪽에 있는 상산(商山)의 깊은 산중에 네 사람의 은사가 난리를 피해 숨어 살고 있었는데 그들 이름은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각리선생(角里先生), 하황공(夏黃公)이었다. 이들은 세상의 근심걱정을 잊어버리기 위해 약초 캐고 바둑 두는 것으로써 소일했는데 세상사람들이 이들을 가르켜서 상산사호(商山四皓)라고 했던 것이다.
   중국의 고전 악부(樂府)에는 상산사호가 나물을 캐면서 불렀다는 노래가사가 사호가(四皓歌)'또는 채지조(採芝操)라는 제목으로 후세에 전해오고 있는데 제목만 전해지지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후. 진시황이 죽고 세상은 어지러워져 각처에서 영웅 호걸들이 난리를 일으켰으며 초(楚)나라 항우와 한(漢)나라 유방이 패권을 다투다가 한나라가 승리하여 천하를 평정했다. 한고조 유방은 황제에 오른 뒤 상산사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초청했으나 상산사호는 황제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더욱 깊은 산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고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근품재 채헌 선생의 <石門歌 二首>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위에 소개한 <石門歌>를 현대적 의미로 다시 써 적고 풀이를 해 보면,

    석문이 석문 아녀 상산(商山)이 이곳이다.
    자지가(紫芝歌) 한 곡조로 세상을 다 잊으니
    이밖에 부귀공명은 부운(浮雲)인가 하노라.

   근품재 선생이 <석문정에 올라보니 석문정은 보통 정자가 아니다. 첩첩산중 골짜기에 있는 정자라서 마치 상산사호가 상산에 은둔해서 지냈던 것처럼 나도 은둔해서 재낼 만한 곳이 이곳이로구나! 나도 상산사호가 나물 캐고 바둑 두던 것처럼 그렇게 세상근심을 다 잊고 지내고 있으니 그 밖의 부귀공명이라는 것은 다 뜬구름과 같은 것이다>라는 해의(解義)를 가지고 있는 노래다. 여기서 상산사호가 부른 노래 제목인 사호가(四皓歌)나 채지조(採芝操)로 하지 않고 자지가(紫芝歌)라고 한 것은 자(紫)가 자주색이라는 뜻도 있지만 신선이라는 뜻도 있어 신선과 같이 세상 일을 초월해 살고 싶다는 선생의 심경을 나타낸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후대에 상산사호가 부른 노래를 자지가(紫芝歌)라고 하기도 했다. 원문에서 <이고질다>의 뜻이 애매한데 <이고지다>라고 했으면 <이곳이다>라고 분명해 질텐데 <지>에 <ㄹ>이 첨가되어 <질>이 되어서 진짜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어떻게 보면 <이골이다>라고 골짜기 의미로 새겨질 듯도 했지만 그냥 <이곳이다>로 새겼다.

    春困을 못 이긔셔 洗心臺 차자가니
    淡淡한 물결이 마암갓치 말가셔라
    하날긔 타난 셩이 자연이 발까시니
    다시 씌어 무삼하리.

   위의 시조가 <石門歌 二首> 중에 하나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洗心臺歌>라는 제목으로 전해지는 석문정제영시(石門亭題詠詩) 8수중에 포함된 시조이다. 내가 아둔하여 <타난, 셩, 발까시니>는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기가 어렵지만 <타난>은 <불에 타거나 무너진>으로, <셩>은 우리 중세 국어에서 성은 성(聲:소리)이고  셩은 성(城)이므로 城으로 그리고 <발까지니>는 <밝혔으니>로 보고 싶다. 왜냐하면 <발까시니>는 표기의 오류가 아닌가 한다. 우리 문경지방의 방언에서 무엇을 확실하게 들춰내서 드러낸다는 뜻으로 쓰는 <까발리다>를 <까발신다>나 <까발시다>는 표현을 쓰지. <발까신다>는 표현은 없다. 아마도 옮기는 과정에서 <까발>을 뒤집어서 적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보고 현대어 다시 써본다면,

    춘곤을 못 이겨서 세심대를 찾아가니
    담담한 물결이 마음같이 맑았구나
    하늘가에 불탄 성(城)이 자연히 밝혀주니
    다시 써서 무엇하리.

   위 시조는 읽은 느낌은 군더더기 같겠지만 적어보면, 근품재 선생이 노곤한 춘곤증이 나서 마음을 씻어주는 세심대를 찾아갔더니 담담한 물결이 마치 자신이 부귀공명을 떠나 세상근심을 잊고 사는 것같이 보이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이(아마도 배너미산인 것 같다) 만드는 공제선 주변에 있는 불타거나 허물어 없어진 옛 성의 자취를 바라보니 부귀공명이란 것이 다 뜬구름과 같이 부질없다는 것으로 말해 주는 것 같아서 지금의 자신이 상산사호처럼 사는 것을 굳이 노래나 말로 다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내가 근품재 선생의 시조 2수를 위에서 언급해 본 것은 부운령을 가리켜 한자로 표기할 때 <富雲嶺>과 <浮雲嶺>으로 나타나는 것을 이 시조에서 관련시켜 보기 위해서다. <富雲嶺>은 앞에서 <富谷里>의 유래를 얘기하면서 부곡은 조선조 중기(1550년경) 개성 고씨가 마을을 개척하면서 이 고씨가 말을 매었던 골이라 하여 막골 혹은 마곡(馬谷)이라 부르다가 후에 고씨 형제들이 부성(富城)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으로 보아 <富雲嶺>은 <부성에 있는 구름고개>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된다는 얘기했다.
   여기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고씨 형제가 마곡에서 부성(富城)으로 이름을 바꿀 때 그 인근 지역에 옛 성의 자취가 남아있고 자기네들의 삶의 터가 부유한 터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부성(富城)이라고 이름 지었을 것 같기도 하고, 또 문경지에는【호계면 선암리 상선마을에서 부운령(浮雲嶺:뜰비재) 주위가 모두 옛 성이 아닌가 주민들은 추측하고 있다. 상선마을에서 부운령을 오르려고 옛 절터를 지나면 지금도 산신당이 있다. 이 산신당에서 동쪽능선, 즉 산북면 석봉리쪽으로 성 끝(城邊)이라 지금까지도 불리어지고 있으며, 이 부운령 너머에는 마성면 외어리로 통하는 길과 부운령 아래 동쪽으로는 산북면 석봉리 돌당골(돌담골, 석달)로 통하는 길이 있다.】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에는 부운령을 한자로 浮雲嶺라고 표시하면서 <뜰비재>라고 부기하고 있음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렇게 표시된 부운령(浮雲嶺:뜰비재)은 근품재 선생의 <石門歌 二首>에서 보았듯이 첫 번째 시조에서 <浮雲>이 나오고, 두 번째 시조에서는 석문정에서 고씨 형제들이 옛 성(城)터를 근거로 부유한 생활 터전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에서 이름 붙인 것이 부성(富城)인데 부성이 있는 산(배너미산을 비롯한 부운령 주변)에 있는 퇴락한 성의 자취를 바라보니 선생이 보기에는 불타고 무너진 흔적만 남아 있어 부귀공명이 다 부질없는 것임을 나타냈다고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 시조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회자되었다면 그 전에는 <부성에 있는 구름고개>란 뜻을 가진 富雲嶺이 <浮雲嶺>의 뜻으로 발음은 같지만 의미가 다르게 뒤섞이어 부르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추리는 어차피 견강부회일 수밖에 없지만 근거를 찾지 못하니 별 도리가 없고 그렇다고 아무 근거도 없이 같은 장소인 富雲嶺이 浮雲嶺으로 둔갑하여 전해 질리는 없다는 생각에서다.
   아무러나 부운령이 한자로 표기되는 것이야 어떻든 간에 富雲嶺을 浮雲嶺으로 써도 될 것 같다. 우리는 여기서 기념 사진을 한 장 찍고, 나는 부운령에서 석문(이곡리) 쪽의 밋밋한 능선을 잠시 바라보다가 근품재 선생의 석문정제영시(石門亭題詠詩) 팔 수 중에서 나머지 여섯 수를 떠올려 보며 배나무산(선암산, 배너미산)을 향하여 앞서 간 일행을 천천히 따라갔다.

[부운령 고개에 있는 이정표이다. 이정표에는 부운령이 해발 800미터로 적혀 있는데 오정산이 810.2미터라면 이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1:25,000 지형도에서 확인해 보니 530미터가 된다. 이정표 기둥에는 방향을 표시를 3개 해 놓았는데 오정산 방향 표시판은 정면에서 사진을 찍어서 보이지 않는다. 부운령이라고 적힌 바로 위에 표시판의 밑 부분이 나타나 있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바로 앞에 배나무산(배너미산)으로 가는 산로가 있다.]


덧붙임으로

   근품재 선생의 석문정제영시(石門亭題詠詩) 팔수 중에서 나머지 여섯 수를 옮겨본다. 중세 국어라서 낯 설은 어휘가 있다. 우리말에 대한 식견이 좁고 둔하여 바른 표현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뜻을 통하는데 다소 도움이 될까 싶어 적어보는 것이니 고견이 있으시면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다. 이는 사견임을 분명히 밝힌다. 또 원문의 시조에는 아래 아(고어에서 점)가 든 글자가 많이 있었음을 참고로 적는다.
(원문출처 : 문경시문화원 발행 문경지 2002년판)

        
      <觀瀾臺歌 : 관란대가>

      물구경 하쟈하고 觀瀾臺 도라가니
      混混한 根源이오 洋洋한 波瀾이라
      亞聖의 하신말삼 딘실노 그런가 하노라.

      물구경 하자하고 관란대 돌아가니
      혼혼한 근원이요 양양한 파란이라
      아성의 하신 말씀 진실로 그런가 하노라

   ※ 물구경을 하려고 관란대를 돌아서 가보았더니 물은 아래로부터 뒤섞이고 도도하게 일어나는 것이 파도 같은 물보라(波瀾)다. 이런 묘사는 맹자(亞聖)가 하신 말씀인데 내가 보니 정말로 그 말이 틀린 데가 없어 그런 것 같다. 여기서 아성(亞聖)은 대성(大聖) 즉 공자 다음 가는 성인이란 뜻으로 맹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石?歌 : 석강가>

      夕陽은 재랄넘고 梧桐의 비올적의
      石?의 가난 사람 거름도 급할시고
      아무리 급히간들 풍우랄 피할손야.

      靑山이 둘너잇고 碧水도 흘너간다.
      風月이 버지되야 白雲의 누어시니
      白鷗야 百年을 함긔노쟈 하노라.

      석양은 재를 넘고 오동에 비올 적에
      석강에 가는 사람 걸음도 급할시고
      아무리 급히 간들 풍우를 피할 건가

      청산이 둘러있고 벽수도 흘러간다
      풍월이 벗이 되고 백운이 누었으니
      백구야 백년을 함께 놀자 하노라

   ※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산북에 있었던 돌다리를 노래한 것 같다. 석강(石? )에서 강(여기서는 한자가 표시 안된다.)은 징검다리 강 자(字)이다. 그렇다면 석강은 <돌을 놓아 만든 징검다리>인 거으로 추정된다.
   저녁이 되어(해가 산을 넘어갔다는 표현은 안 된다 뒤에 비가 온다고 했으므로) 오동나무에 비가 내리고 있는데 돌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발걸음이 급하다. 아무리 급해도 비바람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냥 유유자적하게 갈 것이지.....
   푸른 산이 둘러쳐 있고 맑은 물도 흘러가는구나 바람과 달이 친구가 되고 흰구름이 청산에 걸려 있으니 흰 물새(갈매기 구인데 갈매기는 적당하지 않을 것 같다. 산북에 갈매기는 없으므로)는 날더러 백년을(오래도록) 같이 놀자고 하는구나

       

      <釣臺歌 : 조대가>

      夕陽의 낙대들고 釣臺로 올라가니
      딘실노 저 醉翁이 고기잡비 마암인가.
      綠楊 芳洲의 取適인가 하노라.

      석양에 낚싯대 들고 조대로 올라가니
      진실로 저 취옹이 고기잡이 마음인가
      녹양 방주의 취적인가 하노라

   ※ 저녁 때 낚시를 하려고 낚싯대를 들고 낚시가 잘 되는 조대로 올라갔더니 술에 취한 노인이 보이는데 그 노인은 도저히 고기를 잡지 못할 것 같다. 푸른 버들과 방초로 우거진 섬(모래톱 정도겠다.)이 노인이 선택할 최적지인가 한다.(한 잠 자면서 쉴 수 있으므로) 취적은 좋은 장소를 선택한다는 뜻이다.

       

      <雙僧坊歌 : 쌍승방가>

      문노라 저선사야 어내ㅅ디 雙僧坊이
      빈터만 나마난다 저 션새 대답하되
      小僧도 아디 못하여 귀경 하러 왓나이다.

      묻노라 저선사야 어찌하여 쌍승방이
      빈터만 남았느냐 저 선사가 대답하되
      소승도 알지 못하여 구경하려 왔나이다.

   ※ 산북에 소재 하는 것 중에서 쌍승방이 어디에 위치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화자인 근품재 선생이 어느 선사에게 쌍승방이 어찌해서 빈터만 남아있느냐고 물어보자. 선사가 자기도 알지 못하여 구경만 하러 왔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어내ㅅ디>는 자신 있게 무슨 뜻인지 말할 수 없고 그냥 의미상으로 <어찌하여>라고 새겨 연결시켜 보았다. <귀경>이란 <구경>의 문경식 방언이 재미있다. 200년 전에도 문경에서는 <구경>을 <귀경>이라고 한 모양이다.

       

      <長命洞歌 : 장명동가>

      일흠됴흔 長命골이 天地로 긔약더니
      一夜 風雨의 문허디니 무삼허물 잇도던가
      하물며 사람이야 自作□ 어?손야

      이름좋은 장명골이 천지로 기약터니
      일야풍우에 무너지니 무슨 허물 있다든가
      하물며 사람이야 자작□ 어길건가

※ 산북의 장명동이라는 마을이 어디쯤 위치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명이 길다는 長命(장명)은 이름은 좋지만 다 하늘과 땅의 약속(안배)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하루밤 비바람에 무너져 버렸으니(아마 홍수가 나서 골이 휩쓸린 것 같다) 무슨 잘못됨이 있겠느냐(천지가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뿐인데) 하물며 사람은 自作□ 어길 수가 있을 것인가? 마지막 <自作□>는 문경지에 적혀있는 원문이 불완전하여 무슨 뜻인지 몰라 그대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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