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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춘추시대: 춘추7대 미인, 식규(息?) "절대적 美" 그녀 소문만 듣고 전쟁을 일으킨 초나라 이야기..

작성자연수원|작성시간14.11.26|조회수239 목록 댓글 0

초()나라가 건국한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든 때는 23대 군주인 초장왕(莊王: 23대 군주, 이름은 웅여-) 때였다. 그의 재위 기간은 23년 간이다. 그는 춘추 오패 중 한명이다. 초장왕의 가계(家系)를 설명 하지 않으면 춘추 7대 미녀인 식규(息?)와의 관계를 설명하기 힘들기에 그의 가계를 먼저 이야기 해본다.



그의 아버지는 초목왕(穆王: 22대군주 이름은 웅상신熊商臣)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21대 초성왕웅운熊?, 웅군熊?이라고도 한다)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할아버지 초성왕은 왕위 계승을 태자 웅상신(商臣: 초목왕)을 폐하고 작은 아들 웅직(職)을 세우려고 시도하다가  이에 반발한 장남이자 태자인 웅상신(熊商臣- 초목왕)에 의해 발생한 정변으로 살해 당했다.  



할아버지인 초성왕(웅운-熊?)증조부인 초문왕(楚文王: 19대 이름은 웅자-熊?)과 식규(息?, 도화부인(桃花夫人)이라고 한다.)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며, 형은 초나라 20대 군주 장오 웅간 (楚 莊敖 熊?, 또는 도오(堵敖)라고 한다.)의 동생이다. 형(장오, 웅간)은 아버지 성왕이 죽고 초나라 20대 왕으로 즉위한다. 



그러나 형 장오, 웅간은 즉위 하면서 부터 항상 놀기와 사냥만을 즐겼고, 정사를 돌보는 일에는 관심도 없었다. 사냥하는 동안 동생인 웅(熊? = 웅운-熊?)이 틈을 노려 형을 암살하였다. 어머니인 도화부인(桃花夫人=식규息?)은 이를 이상히 여겼지만 마침내 웅군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초나라 21대 군주 초성왕(楚 成王)이다. 춘추 7대 미녀인 한명인 식규(息?)와 초장왕(莊王)과의 가족관계는 식규(息?) 증조할머니가 된다. 



우선 전설의 중국 상고사에 기록된 절대 미녀가 누구인지를 먼저 설명하고자 한다.  중국 역사를 처음으로 글로 기록한(중국의 상고사) 이후로 부터 춘추시대 까지 9명의 최절정의 미인이 이었다. 그중 춘추시대에만 최절정미인이 7명이 있었다. 이는 자신들의 역사와 말로만 듣고 내려오든 설화를 체계적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그래서 춘추시대를 대표하는 미녀들을 많이 배출한 것 같다.   


그녀들의 절대 미모는 한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것도 모잘라 한 왕조를 멸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름답운 최절정의 9명의 미녀는 시대별로 나열하였다. 그리고 번외로 한명을 추천한다.


다음과 같다. 빨간글씨는 춘추시대 이전 미녀들이고, 파란색 부터 춘추시대 미녀들이다. 이미 블로그에 글로 소개한 미녀도 있고 그렇지 않는 미녀도 있다. 빠진 미녀들을 시간이 허락하는 한 한명씩 소개 하겠다.   


말희(末喜) ->하나라 사람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43

달기(?己) -> 은나라 사람   http://blog.daum.net/toyotaloom/11041018

포사(褒?) -> http://blog.daum.net/toyotaloom/10994329 ,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37

선강(宣姜) ->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36

문강(文姜) ->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40

식규(息?) ->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35

서시(西施) ->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34,   http://blog.daum.net/toyotaloom/10837812

여희(麗姬) ->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41

하회(夏姬) ->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33

동곽강(東郭姜) ->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42





초장왕의 증조 할머니인 식규(息?), 즉 식부인(息夫人)은 춘추시대 식국(息國: 현재 하남성 식현) 군주(君主)의 부인(夫人)이었다. 


그녀는 진국(陳國: 현재의 하남 회양현)에서 규(?)씨성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용모가 뛰어나서 당시 최고의 미녀에게 붙치는 최상의 찬사가 "복숭화 꽃" 즉, 도화(桃花: 지금으로 말하면 Sexy 하다는 표현(?)이다. 시적으로 표현을 한 것이다. 여자 앞에 '도화'라는 수식어가 따르면 그녀는 Sexy 미가 철철 넘쳤다고 이해하면 빠를 것이다. 


초장왕의 증조모인 식규(息?)는 진(陳)나라에서 식(息)나라로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그기서 그녀는 또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바로 "도화부인(桃花夫人)"이라고.. 


(息)나라로 시집 가기 전 진(陳)나라에서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먼 발치에서만 보려고 수많은 인파가 물려 북새통을 이루웠고, 진나라 남성들은 국력이 약하고 기세가 기울어 가는 식(息)나라로 시집가는 그녀가 불쌍해, 아에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를 한번이라도 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수많은 남성들을 애타게 만들었지는 안봐도 눈에 선 하다.


그녀가 진(陳)나라에서 식(息)나라로 시집을 오게 될 때는 식국(息國)의 국력(國力) 많이 약해질 때였다. 


그의 남편인 식후(息侯)는 나라일 보다 음주가무에 빠져있었고, 기운이 쇠한 나라와 약소국의 비참함에 스스로를 망치고 있었다. 


하지만, 진나라에서 시집 온 그녀를 본 순간 식후(息侯)는 혼이 빠져 나간 것 같았다. 일찍이 그녀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 일줄 상상도 못했다. 그와 그의 나라는 곧 세상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식후(息侯)와 식(息)나라는 "세상 최고의 여인을 아내로 둔 사람과 나라"란 수식어가 따라 붙기 시작했다. 이름도 없는 나라가 갑자기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다 보니 구주(九州: 세계)가 모르는이가 없었다고 한다.


지상 최고의 아내를 둔 식후(息侯)는 가슴속 저 밑에서 뭔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바로 자신감(自心感)이다.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거 무엇을 말이다. 그래서 그녀를 생각하면 뿌듯함이 그녀가 원하는게 뭐든 다 해주고 싶었다. 그는 생각했다. "바로 세상 최고의 여인을 아내로 둔 사람이기에... 뭐든디 가능하다."라고..  


그녀는 남편에게 기울어져 가는 식(息)나라를 미래에 더 큰 나라를 만들기 위해 충언을 했다. 그는 그녀에 말 대로 자신부터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현명하고 어진 사람을 찾아 가까이 하고, 아첨하는 간신배들을 멀리하며, 농업과 경제 체제를 현 실정에 알맞게 개혁하였고, 부실한 군을 개편하여 자주국방에 힘써도록 하였다. 그녀가 식(息)나라로 온 후 (息)나라는 점차 부강해지기 시작했다. 


 BC 684년, 식부인(息夫人=식규)이 오래만에 친정인 진(陳)나라을 방문하려고 하였다. 친청에 가는 길에 우선 언니가 시집가 있는 채국(蔡國)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먼저 채나라로 시집 간 언니인 채부인(蔡夫人)을 보기 위해서 이다. 


형부인 채애후(-哀侯: 13대 군주, 이름은 희헌무 姬獻舞)는 부인 자매를 위해 연회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처제를 환영한다는 핑계로 채애후는 부인 자매를 연회장에 데리고 왔다. 그는 식부인을 보고는 진날에 있는 장인을 원망하였다. 자신의 부인도 결코 떨어지는 미모는 아닌데 동생인 식부인의 미모에 비해서는 반딧불과 태양의 차이라고 생각했고, 손밑에 동서가 되는 식후를 질투하였다. 술이 몇잔 오가는 연회 자리에서 채후(蔡候)는 계속해서 부인(息夫人=식규)를 희롱을 했다.  


이에 참다못한 식부인(息夫人=식규)는 화가 나서 연회장을 빠져 나오고 언니에게 말도 없이 다시 식(息)나라로 가버렸다. 그녀는 남편인 식후에게 울면서 언니가 있는 채(蔡)나라에 가서 형부인 채후(蔡候)에게 희롱 당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식후(息候)는 곧장 안면있는 초(楚)나라 문왕(文王: 19대 이름은 웅자熊?)에게 가 자초지종(終)을 설명하고 초(楚)나라를 부추겨 채(蔡)나라를 치게 하였다. 약소국인 채(蔡)나라는 강대국 초(楚)나라에게는 쨉도 되지 않았다. 


채후(蔡候)는 초(楚)나라에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초문왕(楚文王)은 '예의가 없고, 남에 부인을 회롱한 죄'등을 물어 채후(蔡候)를 삶아 죽여 채(蔡)나라 종묘(宗廟)에 제사를 지내고자 하였으나, 채후(蔡候)가 평소 잘알고 지내는 초나라 대부 '육권(?拳)'에게 많은 보물을 주며 자신(自身)을 구명(求命)하게 하였다. 


육권(?拳)은 초문왕(楚文王)에게 몇가지 이유를 들어 채후(蔡候)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설명을 하자 이에 초문왕(楚文王)은 육권(?拳)의 간언(諫言)을 따랐다. 문왕은 채후(蔡候)를 죽이려든 마음을 돌려 채후(蔡候)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초문왕(楚文王)은 채후(蔡候)를 돌려보내면서 연회를 베풀어 채후(蔡候)를 위로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채후(蔡候)가 공순히 초문왕(楚文王)에게 묻기를..


"초왕(楚王)께서는 천하 절세의 미인을 본 적이 있소?" 


"우리 초(楚)나라에도 미녀들은 많이 있소. 그런데 갑자기 왠 미녀 이야기요??"


(楚)나라의 힘으로 봉변(逢變)을 당하게 한 식후(息候)에게 앙심(怏心)을 품은 채후(蔡候)는 초문왕(楚文王)에게 자신이 본 '식부인(息夫人 = 식규)'의 절대적 아름다움을 자신 아는 모든지식을 동원해 미사여구(美辭麗句)하여 일장 연설하기 시작했다.  


 "저는 아직 처제인 "식규(息?)"와 같은 미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의 눈은 추수(秋水)와 같이 맑고 잔잔하며, 뺨은 복사처럼 붉어서 그 자태는 선녀라도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허리는 버들가지와 하늘하늘 거리며.... 손과 손가락, 발, 눈, 코,입, 치아, 목소리,피부, 가슴, 머리카락까지 그녀의 절대 아름다움을 초문왕(楚文王)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갔다.  채후(蔡候)의 이야기에 초문왕(楚文王)은 "식규(息?)"에 대한 궁금증과 상상력에 자기도 모르게 몸이 달았다. 


초문왕(楚文王)은 채(蔡)나라와 합세하여 식규(息?)를 얻기 위해 식(息)나라와 전쟁을 하게 된다. (息)나라는 양국(兩國)을 당할 수 가 없었다. 전쟁에 패한 식(息)나라 군주인 식후(息候)를 산골마을 여수(汝水)에 안치(安置) 시켰고, 그에게 작은 식읍(食邑)을 주어 식사(息祀)에게 제를 지낼 수 있게 해 주며. 식(息)나라를 초(楚)나라 군현(郡縣)으로 복속시켜 버렸다. 


그리고 식(息)나라를 점령한 초문왕(楚文王)은 재빨리 식규를 보러 갔었다. 과연, 채후(蔡候)의 말이 사실이었다. 초문왕초문왕(楚文王)은 그녀를 본 순간 얼어버렸고, 머리가 텅빈 것 처럼 하얀 백지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아무말을 하지 않았고 이 상황에 그저 울고만 있었다.그녀의 그런 모습이 초문왕(楚文王)에게는 더 애듯하게 보였다. 초문왕(楚文王)은 좌우 시녀에게 그녀를 잘 보살피라고 하며 정중하게 초나라로 모셔 갔다.   


나라를 잃고 멀리 여수(汝水)에 안치 된 식후(息候)는 사랑하는 부인이 초문왕(楚文王)에 의해 초나라로 데려 갔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 잃은 고통보다 더 심하게 가슴이 아팠했다, 그는 식규(息?)를 보고은 마음에 심한 우울증을 앓으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식후(息候)는 죽고만다. 이로 식(息)국은 망하게 된다. 


식규(息?)의 절대미에 식(息)나라를 망(亡)하게 하였고, 남편 식후(息候)를 죽게한 식규(息?)는 자책감에 빠져 있었다.   


식규(息?)을 빼앗은 초문왕(楚文王)은 그녀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았다. 식규(息?)는 초문왕(楚文王)과 사이 두 아들을 낳았다. 


(楚)나라 20대 왕인 도오(堵敖: 웅간(熊?) )와 21대 왕인 성왕(成王: 웅군(熊?))이다. 그러나 그녀는 두 아이를 낳았으나 한 번도 말을 3년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까닭을 초문왕(楚文王)이 물으니 나중에 식규(息?)가 대답하기를.. 


 "저는 한 여자로써 두 지아비를 섬겼습니다. 죽은 지아비를 따라 죽지는 못할망정 어찌 또 말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자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섬기던 지아비마저 죽음을 당했으니 말이다. 이후 그녀는 죽어 한양성의 바깥에 묻혔다. 후인들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도화부인(桃花夫人) 묘를 만들었다.


그녀는 사후  많은 문장가들 손에 다시 태어 났다. 청나라 때 조설근(曺雪芹: 중국 사람들은 조설근을 만리장성과도 바꿀 수 없다고 한다.)이 지은  소설 홍루몽((紅樓夢: 중국 4대 소설)에서 그녀를 찬탄하였고, 당나라 때 송지(宋之問)의 시와 두목(杜牧)의 '제도화부인묘', 그리고  왕유(王維)의 '식부인' 등 시대를 초월하여 그녀를 다시 살려내고 있다.


식규의 두아들은 서로 죽이며 왕권 쟁탈에 사활을 걸었다.  21대 초성왕은 기원전 672년 그는 사냥만 하고 종사에 관심이 없는 형 웅간(熊?: 20대 왕, 도오(堵敖))을 살해하고, 스스로 초왕(楚王: 21대)의 자리에 올랐다. 

둘째 아들 웅군(:熊?-초성왕)이 형 웅간(熊?)이 사냥에 나가서 죽었다고 어머니인 식규(息?)에 보고를 하였다. 식규(息?)는 아들 웅군(熊?)을 의심하였지만, 어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둘째 아들이 웅군(熊?)에게 다음 왕위를 이을 것을 명하고 그는 곧 초나라 21대 왕으로 즉위한다.


그가 즉위하자 '자문(子文)'을 임용하여 내정을 정비하고 중원의 제후들과 통호하여 국세를 획기적으로 증대시켰다. 기원전 656년 제환공(齊桓公: 춘추오패 중 한명)이 중원의 제후들을 소집하여 초나라의 국경을 침범해왔다. 초성왕은 장군 굴완(屈完)을 보내 제후군들을 막게했다. 


이에 제후군과 초군 사이에 강화가 이루어져 소릉(召陵)에서 회맹을 행하고 제후군은 물러갔다. 그리고 얼마 후에 초성왕은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허(許)나라와 황(黃)나라를 공격하여 영(英)을 멸했다.


기원전 638년, 그는 다시 북진하여 송양공(宋襄公-20대 군주, BC 650년 - BC 637년)은  군주. 이름은 자보(?父), 춘추 오패의 한 명.송양지인이란`사자성어로 유명하다)이 이끌던 송군을 홍수(泓水)에서 크게 무찔러 송양공의 패권에 대한 꿈을 좌절시켰다. 


기원전 633년 다시 북상하여 진(陳)과 채(蔡) 두 나라를 공격하고 계속해서 송나라를 포위했다. 다음해인 기원전 632년 송나라의 구원 요청으르 받아 출동한 당진군(唐晉軍)에게 성복(城?)에서 크게 패하고 초성왕의 중원 제패의 꿈은 무산되었다.


기원전 627년 그는 태자 웅상신(熊商臣: 목왕(穆王): 22대)이 일으킨 정변에 살해 당한다. 그는 장자이자 태자인 상신을 폐하고 작은 아들 직(職)을 세우려 하다가 이에 반발한 상신이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인 초성왕은 자의반 타의 반으로 목졸라 죽는다. 마자막으로 아들에게 평소 먹든 곰 발바닥 요리를 먹고 싶다던 아버지 성왕의 마지막 소원마저 받아들이지 않은 채 목을 졸랐다.


BC 617년  송나라는 소공(宋昭公-23대 군주, 이름은 저구杵臼)이 군주로 이을 때 였다. 이해 겨울에 "적(狄)"의 침략을 받았다.  적의 침략을 받은 후에 송나라는  초목왕이 채나라(당시의 임금은 채 장공) · 정나라(당시의 임금은 정 목공) · 진나라(당시의 임금은 진 공공)와 함께 연합을 해  '궐맥(厥?)'에 주둔해 송나라를 토벌하려 하자, 송소공은 '화어사(華御事)'의 진언에 따라 초나라에 투항했다. 


'맹제(孟諸)'에서 함께 사냥을 했는데, 초왕이 송소공을 진(進)의 우측을 맡겼다. 그러나 소공이 초왕의 명령을 받들지 못하자 송소공의 말을 모는 사람이 이리저리 나돌리는 모욕을 당했다.


초나라에서 목왕이 죽자 그의 아들 웅려(熊侶)가 왕위에 올라 장왕(莊王: 23대)이 되었다. 목왕이 죽자 보위에 오른 장왕 (楚庄王)은 즉위하고 3년 동안 밤낮으로 향락만 즐겼다. 이에 '오거(오자서의 선조)', '소종'등의 죽음을 무릅쓴 직언을 받아들이며 부패한 신하들을 숙청하고 영윤 손숙오를 중용해 다스리며 두각을 나타내면서 진(晉)과 패권을 다투기 시작한다. 그후 장왕은 여기저기 빌붙은 정나라를 치고 정(鄭)양공에게 배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회군한다. 


아버지 목왕이 사망하여 왕위에 오른 직후,  공자(公子) 섭(燮)이 모반을 일으켜 수도와 왕실을 완전하게 장악하였고  스스로 왕을 자칭했지만 반대 세력의 확대로 신변의 위험을 느껴 장왕을 방에 가두고, 북방으로 도망쳤다. 진(晉)나라와 진(秦)나라, 초나라의 국경 가까이의 상밀(商密)이라는 곳에서 반격을 개시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도중의 노(盧)라고 하는 마을에서 공자 섭은 살해당했다. 장왕은 감금에서 풀려나 다시 왕좌에 앉잤지만 정무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주색잡기에만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이에 고사성어 중 하나인 삼년불비(三年不飛) 삼년불명(三年不鳴)이 나온다. 


초장왕에 대한 고사성어가 많다. '삼년불비(三年不飛) 삼년불명(三年不鳴)',을 비록하여 '문정중원(問鼎中原)', '절영대회(絶纓大會)', '능장선장리(能撑船腸里- 뱃속에서 배를 저을 수 있을 정도의 배포)', '우맹곡마(優孟哭馬)', '혜전탈우(蹊田奪牛)' 등에 많은 고사성어가 다 그에게서 나왔다.  고사성어를 찾아보면서 초장왕의 행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삼년불비 삼년불명(三年不飛 三年不鳴)  

 

초장왕((楚 莊王)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장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선언했다. 


"앞으로, 과인을 간하는 자는 사형(死刑)에 처할 것이오." 


그 후 장왕은 3년간에 걸쳐 국정은 돌보지 않은 채 주색(酒色)으로 나날을 보냈다. 이를 보다 못한 충신 오거(五擧: 오자서의 선조)는 죽음을 각오하고 간언(諫言)할 결심을 했다. 그러나 차마 직간(直諫)할 수가 없어 수수께끼로써 우회적으로 간하기로 했다.

 

"전하, 신이 수수께끼를 하나 내볼까 하나이다." 


"어서 내보내시오." 


"언덕 위에 큰 새가 한 마리 있사온데, 이 새는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사옵니다.(三年不飛又不鳴) 대체 이 새는 무슨 새이겠나이까?" 


장왕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3년이나 날지 않았지만 한번 날면 하늘에 오를 것이오. 또 3년이나 울지 않았지만, 한번 울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오. 이제 그대의 뜻을 알았으니 그만 물러가시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으나 장왕의 난행(亂行)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대부 '소종(蘇從)'이 죽음을 각오하고 이전에 나아가 직간했다. 그러자 장왕은 꾸짖듯이 말했다. 


"경(卿)은 포고문도 못 보았소?" 


"예, 보았나이다. 하오나 신은 전하께서오서 국정에 전념해 주신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알았소. 물러가시오." 


장왕은 그날부터 주색을 멀리하고 국정에 전념했다. 3년 동안 장왕이 주색을 가까이했던 것은 충신과 간신을 선별하기 위한 사전 공작이었다. 장왕은 국정에 임하자마자 간신을 비롯한 부정 부패 관리 등 수백 명에 이르는 반윤리적 공직자를 주살(誅殺)하고 수백 명의 충신을 등용했다. 그리고 오거와 소종에게 정치를 맡겨 어지러웠던 나라가 바로잡히자 백성들은 장왕의 멋진 재기를 크게 기뻐했다. 



- 문정중원(問鼎中原)   


초장왕은 기원전 608년에서 595년에 이르는 동안 거의 매년 중원의 제후국들을 공격하여 패자의 지위를 다졌다. 대부분의 전쟁에서 장왕은 직접 군대를 지휘하였다. 그는 608년에 손수 군대를 이끌고 주나라 수도 부근의 낙수(洛水)에서 열병식을 거행하였다. 초장왕의 의도는 주 왕실에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자는 것이었다. 주 왕실은 황망히 대부 왕손만(王孫滿)을 파견하여 초장왕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주왕이 보낸 사자를 장왕은 오만하게 물었다.

 

“주 왕실이 가지고 있는 솥(鼎)은 얼마나 크고 무게는 얼마나 되오?”


주 왕실이 보유하고 있는 솥은 예사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왕위 계승을 상징하는 것으로 주 왕조의 보기(寶器)였던 것이다. 왕손만이 대답하였다.

 

“솥의 무게는 솥을 소유하는 사람의 덕망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아, 그렇소? 말하지 않아도 괜찮소. 우리 초나라에 있는 창끝만 끌어모아도 주나라 왕이 소유하고 있는 솥 9개는 족히 만들 수 있을 것이오.”

 

이에 왕손만이 말을 이었다.


“왕실이 보유하고 있는 솥은 순우(舜禹) 임금의 치세를 천하 백성이 기리고 그 덕망을 칭송하여 천하의 제후들이 자진하여 헌상한 각지의 동(銅)을 모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솥을 만들 때 온갖 상서로운 짐승을 새겨 넣고 이것을 만백성에 알리어 그들을 교도하고 또한 그들이 두려움을 알아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왕실의 솥은 왕도(王道)의 산물임을 장왕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夏)나라의 걸(桀)임금이 무도해지자 솥은 은나라에 이전되었고, 6백 년이 지난 후 은나라의 주왕(紂王)이 다시 포악무도 하여 솥은 우리 주나라로 옮겨졌지요. 소유자가 덕을 잃게 되면 솥은 무게에 관계없이 바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주나라 30대 7백 년 동안 솥은 주왕이 소유하였고 비록 지금은 쇠퇴하였지만 천명이 아직 주나라에 있으므로 초나라 군주는 솥의 무게를 물어볼 자격이 없소이다."


이것이 유명한 ‘문정중원(問鼎中原)’ 고사이다. 초장왕은 주나라 왕실을 얕보아 일부러 주왕이 보유하고 있던 주왕실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의도였다. 사실 초장왕의 안중에 주왕실의 권위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


같은 패자이면서도 앞선 제환공이나 진문공이 주왕실을 드높이 받들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라 하겠다. 왕실을 받드는 것이 바로 존왕(尊王)이고, 왕실에 도전적인 오랑캐 이민족을 물리쳐 중원의 정치 질서를 지키는 것이 양이(攘夷)이다. 춘추 시대 정치에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대의명분이 제후들에게는 가장 큰 관심사였다. 공자도 이를 적극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랑캐 민족인 초나라는 애초부터 여기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 절영대회(絶纓大會) 


초장왕 때에 투월초(鬪越椒)라고 하는  영윤(재상)이 있었다. 투월초는 초장왕이 등극한 이후로 점차로 자신의 세도가 줄어들뿐만 아니라 멀리하고 있음을 원통해 하며 이를 갈아오다가 드디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선대로부터 대대로 나라에 공이 많은 명문거족 출신이라 제법 많은 무리들이 반란에 가담하여 장차 초나라를 둘러 엎을 기세였다. 


이때 초장왕은 육혼땅의 오랑캐를 치러 출정한 때여서 도성인 '영'을 지키고 있던 문무대신을 모조리 도륙을 낸 상태였다. 장왕이 제아무리 병법을 동원하고 꾀를 짜내어도 욱일승천 하듯 기세가 사나운 반역군인 '투월초'에게 왕군은 매번 패하여 후퇴를 거듭하다가 청산땅 큰 하천을 경계로 하여, 양군간에 활을 쏘아대며 대치하고 있었다.


이때 초장왕 군에 '악백'이란 장수 휘하에 '양유기' 라는 한 소교가 있었다. '양유기'는 타고난 신궁이었는데 그가 '투월초'와 활로서 맞대결을 하겠노라 자청하며, 양군이 지켜 보는 가운데 서로 강을 사이에두고 화살 세대씩을 쏘는데 몸을 피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먼저 '투월초'가 쏘기로 했는데 일국의 재상이기도 하지만 그는 타고난 무골로서 활 또한 명궁이라 할만큼 소문난 장재(將材: 장군 감)였다. '투월초'는 큰소리로 외쳤다.... 


"양유기와 왕군들은 들으라!  나는 단 하나의 화살로서 너를 죽여 죄를 물으리라!"


첫번째 투월초가 쏜 화살은 '양유기'의 머리를 꿰뚫을 듯이 날아 들었지만 '양유기'는 활로써 쳐냈다. 


두번째 화살은 정통으로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다리와 허리를 굽혀 살이 머리 위로 날아가게 했다. 


세번째는 천둥을 치듯 고함과 함께 총알처럼 날아온 화살은 정통으로 '양유기'의 얼굴에 꼿혔다. 그런데 '양유기'는 이빨로 날아온 화살을 물어 버린 것이다.

왕군의 군사들은 이 광경을 보고 천지가 진동할만큼 함성을 질렀고 반군들은 기가 질려 어쩔줄 몰라했다. 


이번엔 '양유기' 차례였다. 


'양유기'는 전추태산(前推泰山: 살을 땡긴 손이 태산을 밀듯이..)의 자세로 활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강건너 '투월초'는 겁에 질려 순간 몸을 왼쪽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화살은 없었다. 


"화살이 내손에 있거늘 피하다니 비굴한자다. 네가 그러고도 대 초나라의 영윤 자리에 있었느냐?"라고 놀리며, 


'양유기'는 이번에도 활시위를 팽팽히 잡아 당겼다가 활은 안쏘고 활시위만 놓았다. 역시 놀란 '투월초'는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몸을 비켜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양유기'는 전광석화 처럼 활대가 부러져라 있는 힘껏 화살을 메겨서는 유성 처럼 쏘아 보냈다. '투월초'는 계속된 헛 화살에 속아 움직인 것을 부끄러워 하며, 다시 몸을 옮기려는 순간 화살은 정통으로 날아와 머리를 꿰뚫어 버렸다. '투월초'는 거목이 쓰러지듯이 그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주장을 잃은 반군은 여지없이 무너져 진압되었으며 '양유기'는 일약 그 이름이 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반란을 진압한 '초장왕'은 궁성으로 돌아와 모든 정사를 바로잡고 상벌을 엄격히 했다. 그러던 어느날 '장왕'은 모든 문무백관과 비빈들을 망라한 잔치를 열게 하였다. 그건 전쟁과 반군을 소탕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요 장차 '초나라' 국운을 융성하게 해달라는 소망에서 '태평연(太平宴)'이라 이름하였다. 


잔치는 대낮부터 해가진 뒤에도 계속되어 촛불을 밝히고 술잔을 들었다. '초장왕'은 크게 기뻐 자신이 끔찍하게 사랑하는 후궁 허희(許姬)로 하여금 모든 신하들에게 돌아가며 술을 따르라고 명했다. 


왕명을 받은 허희가 일일이 술을 따르며 잔칫자리를 반쯤 돌았을때였다. 홀연 난데없는 바람이 불어와 촛불을 모두 꺼 버렸고 좌중은 칠흑같은 어둠에 쌓였다. 


이때 한 사나이의 억센 손이 아름다운 허희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이에 놀란 허희는 순간적으로 사내의 가슴을 밀어내고 그가 쓰고있는 관(冠)끈을 끊었다. 그때서야 그 사내는 소스라치게 놀라 허희를 놓아 주었다. 


어둠속에 허희는 즉시 초장왕에게로 급히 더듬거리며 다가가 이 사실을 고하였다. "왕의 후궁에게 흉칙한 마음을 가진자를 가려내어 벌하여 달라"며 관끈을 내밀었다. 관끈이 없는자가 범인일테니 찾아 내기란 식은죽 먹기였다. 아직 환관들이 불을 켜기 직전이었다. 


초장왕은 태연자약하게허힁게 말하기를....


"이는 아녀자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자고로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서 술을 마실 때에는 석잔을 못넘기는 법이며 그것도 낮에만 되고 밤에는 금기로 되어 있노라!  내 이미 모든 신하들과 더불어 그 선을 넘겼는지라 즉, 취하면 탈선하게 마련이다. 어찌 이 좋은 잔치에 나라의 동량(棟樑)을 벌하랴! 모든 대부들은 들으라!  어서 그 거추장스러운 관끈을 모조리 끊어 바닥에 던져라! 그리 않하는 자는 과인과 더불어 이 잔치를 즐기지 않는 자로 여길것이다!"라고 명하였다. 


영문도 모르는 신하들은 모두가 관끈을 끊어 땅에 던졌다. 허희는 물론 그 당사자도 초장왕의 넓은 도량에 감복을 했다. 그로부터 수년 후 초(楚)나라는 이웃 정(鄭)나라를 정벌하기에 이르렀다. 대군의 선봉은 "양로(襄老)"라는 장수였는데 그의 휘하에 "당교(唐狡)"라는 부장이 있었었다. 그는 "양로"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군사 100명을 주시면 대군을 수고롭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정나라 성 아래까지 길을 열어 보겠나이다."라고 했다. 이에 "양로"가 "당교"에게 군사 100명을 주었다. 결사대를 이끄는 당교(唐狡)는 범 같이 무섭고 재빠르게 정나라의 군대를 모조리 도륙을 하며 앞으로 나가고 있는게 아닌가! 이에 "당교"는 단번에 정나라 수백리 길을 확보하고 정나라 도읍 앞까지 교두보를 확보했다.  


뒤에서 대군을 이끌고 오던 초장왕은 몇 백리를 가도 단 한명의 정나라 군사도 보이는 기색이 없어 이상한 일이라 여기며 아무 어려움 없이 정나라 성 아래 까지 이르러 장군 "양노"에게 칭찬 하였다. 


"이렇듯 양장군이 늙어 갈수록 무용이 빛나니 모두 나라의 복인가 보오" 라고 했다.   

'양노'는 정색을 하고 이르기를... 


"아니올습니다, 이는 다 '당교'라는 부장의 공로올습니다" 하니 왕은 '당교'를 데려 오게 하였다. 


'당교'가 왕 앞에 이르자 왕이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문신에게 명하여 그 공로를 제1등으로 기록하게 하고 후한 상을 내리라고 하자 이에 "당교" 사양하며 이르기를..


"신은 이미 대왕으로부터 하해 같은 상을 받았사온대 또 무슨 상을 바라리까" 하였다. 이에 왕은.. 


"과인은 그대를 잘알지 못할뿐 아니라 상을 준적이 없는데 언제 받았단 말인가?"라고 물었다. 


"당교" 엎드려 고했다. 


"그 옛날 잔칫자리에서 취중에 감히 허희님을 소장이 껴안은 적이 있었사온데 대왕께서는 대범하시게 신의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제게 준 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사옵니까? 신은 그 때의 왕은을 이때나 저때나 갚을 날만을 기다려 오던 중 다행히 이렇게 작은공이나마 세워, 왕의 수고를 덜어 드리게 되어 천만다행으로 여기나이다."라고 했다. 


"오! 그러한가? 과연 천하에 의로운 장부로다!"  초장왕은 장차 귀국하면 훗날에 그를 높히 등용하려 마음 먹었다. 

헌데, 그날밤 "당교"는 자기 친구에게.. 


"나는 이제야 왕에께 진 빚을 갚았다. 옛 성현의 말씀에 의로운 사람은 대가를 바라고 큰일을 하지 않는 법이라고 했네 그러니 이제 그 은혜를 조금이라마 갚은 마당에야 무엇을 더 바랄것이 있는가!" 라며... 


'당교(唐狡)'는 그날밤 군막에 갑주와 투구, 장검을 가즈런히 놓아둔 채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 이?날 이 소식을 접한 초장왕(楚莊王)은 마치 수중의 보배를 잃은 듯 멍하니 탄식만 거듭했다 한다. 



- 우맹곡마(優孟哭馬):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우맹(優孟)은 원래 초나라의 악인(樂人:음악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키는 8척이고, 입담이 좋았다. 그는 언제나 웃으며 이야기 하면서 풍자를 빗대어 간언했다. 


초나라의 장왕이 타고 다니는 사랑하는 말이 있었다. 말에게 무늬를 수놓은 옷을 입이고, 화려한 집 아래 기르면서, 장막이 없는 침대에 눕게 하고, 대추와 마른 고기를 먹였다. 이윽고 말이 병이 들어 살쪄 죽자. 장왕은 신하들에게 복상하게 하고, 속널과 바깥널을 쓰는 대부의 예로 장사지내려 했다. 

 

왕의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그것은 불가한 일이라고 다투어 간했다. 왕이 명령을 내리면서 말했다. 

 

"감히 말에 대해 간하는 자가 있다면, 죄가 죽음에 이를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우맹은 궁궐 문으로 들어가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이에 왕이 크게 놀라 그 까닭을 물었다. 


우맹이 말했다. 


"말은 왕께서 아끼시던 것입니다. 초나라 처럼 당당한 대국의 위세로써,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대부의 예로써 왕이 사랑하는 말을 장사지내는 것은 너무 박정(薄情)합니다.  청컨대 군주의 예로써 장사지내십시오." 


왕이 군주의 예는 어떻게 치르는 것인지 물었다. 


우맹이 말했다. " 청컨대 옥을 다듬어 관을 만들고, 가래나무에 무늬를 새겨 바깥 널을 만들고, 느릅나무, 단풍나무, 녹나무로 횡대를 만들고, 병사들을 동원하여 무덤을 파게 하고, 노약자들에게 흙을 져 나르게 하며, 제나라와 조나라 사신을 불러 앞쪽에 열을 지어 서게 하고, 한나라와 위나라 사신은 그 뒤에서 호위하게 하시며,  사당을 지어 태뢰(太牢: 고대 중국에서 소, 돼지, 양 각 한 마리씩을 잡아 음식을 준비하여 손님을 접대하거나 제사를 모시는 것을 말한다. 제후들만이 행할 수 있는 주례 중의 하나다.)의 음식으로 받들고, 만호의 세수로 제사를 받들게 하십시오.그러면 주변국 제후들은  대왕께서는 사람은 천하게 여기고 말은 귀하게 여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 전 구절의 조(趙)와 본 구절의 한(韓)과 위(魏) 세 나라는 전국시대의 나라들이다. 기원전 453년 진양성 싸움에서 한위조 삼가는 지백(智伯)이 이끌던 그 당시 가장 강력했던 지가(智家)를 멸망시키고 당진국(唐晉國)을 3분하여 기존의 섬진(陝秦), 초(楚). 제(齊), 연(燕)과 함께 전국시대를 열었다. 따라서 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사이에 활약했던 초장왕과는 그 시대가 맞지 않는다. 사마천의 착오이거나 후세에 어떤 사람이 가필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장왕은 "과인의 잘못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이를 어찌해야 하오?"라고 물었다. 


우맹이 "청컨대, 대왕을 위하여 '육축(六畜: 소, 말, 돼지, 양, 닭, 개)'의 예로써 장사지내십시오! 부뚜막을 바깥널로 삼고, 구리 솥을 속널로 삼아 생강과 대추를 조미료로 넣어, 목란을 향료로 넣어 비린내를 없애고, 양곡으로 제사밥을 짓고, 화광(불꽃)으로 옷을 삼아 사람의 뱃속에다 장사를 지내도록 하십시요!"


이에 왕은 결국 말을 '태관(太官: 왕의 음식을 맡는 요리사)'에게 넘기고는 왕은 세상에 이를 두고 긴 말들이 없도록 하였다. 


- 혜전탈우(蹊田奪牛): 하희의 자세한 자료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33


BC 598년, 진(陳)나라에 하징서(夏徵舒: 진(陳)나라의 대부)의 난(亂: 하징서의 어머니는 춘추시대(중국 자료로 봐서는 개인적으로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미녀라고 생각함) 때 최고의 Sexy녀(색녀)로 유명하였던 하희(夏姬)인데, 수년간 어머니 하희가 진나라 군주인 진영공(陳 靈公)등과 음란한 짓을 계속하고 자신마저 욕보이자, 화가 난 대부 하징서는 가병(家兵)들을 이끌고 집을 봉쇄하고 습격하여 진 영공을 찾았다. 


진영공은 놀라서 달아나다가 담을 넘던중 하징서가 쏜 화살에 목을 관통하여 그자리에서 죽었다. 대부 하징서는 집으로 들어가 어머니 하희를 감금하고 새로 진영공의 아들 공자오(孔子 午)를 군주에 즉위를 오르게 하였다. 그가 진성공(陳 成公)이다.)이 일어나자, 초나라의 장왕은 이를 진압한다는 핑계로 진나라를 치러갔다. 초나라 군대가 진주하자 진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했으므로 장왕은 그들을 안심시켜 말했다.


“소동하지 말라. 우리는 다만 소서씨(少西氏-하징서의 조부)를 치려는 것이다.”


이래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진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하징서를 잡아 죽이고 그 시체를 거열刑(車裂刑)에 처했다.


그리고는 진(陳)나라 왕이 진(晉)나라에 가 있는 틈을 이용하여,진(陳)나라를 없애고 초나라의 현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때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던 대부 '신숙시(申叔時)'가 돌아왔는데, 장왕에게 의례적인 복명만 할 뿐 진나라를 병탄한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하례를 하지 않고 물러갔다. 장왕이 은근히 화가 나서 사람을 보내 나무래서 말했다.


“하징서가 무도하게도 제 임금을 시해했기 때문에 과인이 제후들을 이끌고 가서 이를 쳐 죽였으므로 제후나 관료들이 모두 과인에게 축하하는데 그대만은 아무 말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고?”


이에 신숙시가 왕궁에 들어가 장왕에게 이야기했다.


“감히 말씀드려도 좋겠습니까?”


“좋다. 말해 보라.”


“하징서가 자기나라의 왕을 시해한 것은 그 죄가 큽니다. 따라서 이를 쳐서 죽이신 것은 주군의 의리입니다. 그러나속담에 `소를 놓아서 남의 밭을 망치면, 밭주인이 소를 빼앗는다.'는 말이 있는데 밭을 망친 것은 진실로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망친 밭 값으로 소를 빼앗는 것은 너무 지나친 벌이 아닐 수 없습니다.(抑人亦有言 牽牛以蹊人之田 而奪之牛 罰已重). 지금 많은 제후들이 우리 초나라를 따른 것은 범죄자를 토벌하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나라를 빼았아 우리의 현(縣)으로 만든 것은 범죄자를 토벌한 것이 아니라, 남의 부(富)를 탐낸 것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이겠습니까?”


장왕이 그 말을 듣고 뉘우치며 말했다. “옳은 말이로다. 과인이 미쳐 그 생각을 못했도다.” 하고는 곧 빼앗았던 진나라를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 춘추의 패자가 되다.


장왕은 진(陳)나라의 내란을 틈타 그 나라를 일시에 병합하고, 정(鄭)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와 함께 속국으로 삼았다. 기원전 597년 정나라의 원군으로 온 진(晉)나라군을 격파했다. 이 때 진나라군은 허겁지겁 배를 타고 후퇴했는데, 배가 뒤집힐 것을 두려워한 병사가 배에 매달려 있는 병사의 손을 잘라 떨어뜨렸고, 배 안에는 손가락이 수북히 모였다고 한다.


대승한 뒤, 신하들은 경관(京觀)을 만들 것을 상소했지만 장왕은 물리친다. 초장왕은 "무(武)라는 글자는 과(戈:창 과)를 멈추기(止:그칠 지) 또한 난폭함을 막고, 전을 세우고, 대를 유지해, 공을 정하고 백성을 생각하고, 사람들을 화합하고, 재물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이 한 것은 이 무덕에 들어맞지 않으며, 자신의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한 진나라 병사들의 사체로 경관을 만들 수는 없다, 는 이유에서였다.



- 마지막 싸움


진나라를 패퇴시키고 패업을 이룬 장왕은, 그 다음에 진나라를 따르는 송나라를 표적으로 정했다. 장왕이 제(齊)나라에 보낸 사신 대부 '신주 (申舟)'가 송(宋)나라를 지나가다가 피살 당하자, 전광석화 같이 송나라에 쳐들어가 수도 상구(商丘: 하남성 상구)를 포위했다. 


당시 송나라는 송문공 때였다. 약소국인 정나라의 공자 귀생이 초나라의 강압에 못이겨 초장왕의 명령을 받고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당시 송나라나 정나라와 같은 약소국은 초나라에 쥐여사는 형편이어서, 시키는 대로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송나라에서는 "화원(華元)과 악려"가 장군이 되어 군사를 지휘하여 적을 방어했는데, 지휘자를 포함하여 250여명이 정나라에 사로잡히고 전차 460대를 빼앗기는 대패를 하고 만다.  


국가 사이의 전쟁이라고는 하여도 국운을 건 대규모 전쟁도 아닌데, 최고 지휘자가 적에게 사로잡히는 경우는 드물다. 화원이 적에게 사로잡힌 데에는 다음과 같은 웃지못할 사연이 있다. 


전쟁을 하기 전에 송나라 장군 '화원'은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서 양고깃국을 끓여서 먹였다. 모두 배불리 먹었는데 마침 '화원'의 전차를 조종하는 '양짐(羊斟)'만이 이 고깃국을 먹지 못하였다. 


'양짐'은 몹시 비위가 상하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신은 그래도 장수의 전차를 조종하는 사람인데, 유독 자신에게만 고깃국을 주지 않다니, 자신을 챙겨주지 않는 장수가 원망스러웠다. 양고깃국 한 그릇 때문에 원망하는 마음이 가슴에 쌓인 '양짐'은 막상 '화원'을 전차에 태우고 보니 더 화가 났다. '양짐'은 마음속으로 


‘어젯밤 양고깃국은 당신이 마음대로 하였지만, 오늘 이 전차는 내 마음대로 다룰 것이오. 어디 두고 보시오. 내가 죽더라도 내가 받은 모욕을 꼭 보복을 하고 말 것이오.’ 


라고 다짐을 하였다. 공격의 신호가 내리고 쌍방이 한창 어우러져 싸우자, '양짐'은 느닷없이 전차를 몰고 적진을 향해서 돌진하였다. 놀란 '화원'은 '양짐'에게 전차를 세우라고 호령하였지만 '양짐'은 귀머거리가 되어 무작정 전차를 전속력으로 몰고 정나라 군진을 향해서 달렸다. 


정나라 군진에서는 전혀 뜻하지 않는 일에 처음에는 놀라서 얼떨떨하였지만 어찌되었든 절로 굴러들어온 적장을 그냥 놓아 보내 줄 수는 없는 일이니, 손안대고 코푸는 격으로 송나라 장군 '화원'을 사로잡았다. 


군대를 총지휘하는 장수가 제 발로 적진에 뛰어들어 사로잡혔으니, 싸움이 제대로 될 수가 없는 일이다. 송나라 군사들은 정나라 군사에 대패하고 말았다. 이 일을 두고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양짐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전쟁을 패망의 길로 이끌고, 수많은 군사와 백성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세상에 이자보다 더 불인한 사람이 또 있겠으며, 형벌을 받아야 할 일 중에 이보다 더 큰 일이 또 있겠는가?”


전쟁에 진 송나라는 정나라에 전차 백 대와 잘 꾸민 말 4백 필을 주고 '화원'을 되돌려 받았다. '화원'이 살아서 송나라로 되돌아오자 '양짐'은 노나라로 도망을 갔다. 


도성을 개축하는 공사를 하는데, '화원'이 공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공사 현장을 순시하는데 인부들이 자기를 풍자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눈알은 툭 솟아 있고 배는 불룩 나왔는데,  갑옷을 버리고 돌아왔다네. 수염 많은 털보가 갑옷을 버리고 돌아왔다네.”


영락 없이 '화원' 자신을 두고 하는 노래였다. 노래를 듣고 무안한 '화원'은 수레에 참승한 부하에게 


“소가죽이 아직도 지천으로 있고, 무소와 외뿔소도 아직 많은데, 갑옷을 버린 일이 그렇게 대수이냐?” 


라고 하니 부하가  “비록 갑옷 만들 가죽은 있다 하더라도 갑옷에 칠할 붉고 검은 칠은 어떻게 구합니까?”


부하조차도 인부들의 노래에 동조하는 말을 하니 '화원'은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되자 '화원'은 얼버무리면서 


  “가자, 중과부적인데, 저 많은 입을 내가 상대할 수 있느냐.” 하였다고 한다. 화원은 죽을 때까지 이일이 항상 가슴에 걸리며 살았다.


 이후 초장왕(楚莊王)은 제나라를 예방하러 가는 대부 신주(申舟)'에게 “제나라로 가려면 어차피 송나라를 지나야 할 것이오. 송나라를 지나가면서 길을 빌린다는 인사를 하지 마시오.”


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진나라를 예방하러 가는 공자 빙에게는   “진나라로 가려면 정나라를 지나가야만 할 것이오. 정나라를 지나면서 길을 빌린다는 인사를 하지 마시오.” 라고 명하였다. 


신주(申舟)'는 송나라 고위 인사들로부터 미움을 사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래서 신주는 초장왕에게 말하기를  

“정나라는 사리에 밝고, 송나라는 귀머거리와 같은 인사들이니, 진나라로 가는 사자는 무사하겠지만 소신은 반드시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초장왕은 


 “그대를 죽이면 내가 송나라를 그냥 두지 않겠소.” 라고 하였다. 


초장왕은 더 이상 자신이 내린 명령에 대해서 물러설 뜻이 없음을 분명하게 하였다. 신하는 임금이 내리는 명령에는 절대 복종이다. 그렇지 못하는 신하는 역심을 품었다고 의심을 받는다. 지금의 왕은 초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을 만큼 영특한 군주이다. 누가 이 군주에게 감히 도전의 뜻을 품거나 반대 의견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신주는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고 아들 '신서'를 초장왕에게 보여서, 앞날에 대한 보장을 암묵적으로 요청하고는 길을 떠났다. 


송나라에 당도하여 도성을 지나가게 되자 도성을 지키는 군졸이 '신주'를 가로막고는 '화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화원'은 초나라 사람 '신주'가 사전에 허락을 받지도 않고 송나라를 지나가려다 붙잡힌 사실을 알고는 격분하였다. 


 "초나라 사신이 길을 빌린다는 인사를 하지 않은 채로 우리나라를 지나가는 것은 우리나라를 자기 나라의 영토로 여기는 행위나 다를 바가 없다. 이토록 무시당하는 일은 우리나라가 망한 것과 같다. 우리가 이 일로 초나라 사자를 죽인다면 초나라는 반드시 우리나라를 정벌할 것이고, 초나라가 우리를 정벌하면 우리는 반드시 망할 것이니, 망하기는 마찬가지다. 모욕을 당하고도 참고 지내는 것보다는 우리의 기개를 보이고 죽는 것이 더 낫다.”


라고 하고는 '신주'를 죽였다. 


'신주'가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초장왕'은 격분하여 그길로 바로 군사를 소집하여 송나라 공격에 나섰다. 


기원전 593년 가을에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송나라 도성 수양은 이듬해 기원전 594년 5월이 되어도 무너지지 않고 버텼다. 지구전에 지친 '초장왕'은 공격을 포기하고 떠나려 하자, 죽은 '신주'의 아들 '신서'가 왕이 탄 말 앞에 꿇어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의 아비는 죽을 것을 미리 알고서도 감히 왕명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온데, 왕께서는 그때 저의 아비에게 하신 말씀을 어찌 이렇게도 쉽게 저버리려 하십니까?” 


아비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울면서 땅바닥에 엎드려 탄원하는 '신서'의 말에 왕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 때 왕을 보필하던 '신숙시'가 왕에게,,, 


“지금 물러서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입니다. 도성 근처에 집을 짓고 경작을 하면서 지구전에 대비하시면 송나라는 반드시 항복할 것입니다.”


라고 건의하였다. 


초장왕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도성 근처에 군사들이 머물고 살 임시 막사를 짓고, 군사들에게 교대로 논밭을 경작하면서 군량미를 충당하도록 장기전 대비를 하였다. 


이렇게 되자 송나라 도성에서는 민심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언젠가는 초나라 군사들이 물러갈 것이라고 믿고 고통을 참고 견디고 있었는데, 물러가기는커녕 끝장을 볼 차비를 차리고 있으니 힘 약한 송나라로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게 되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어 가는 백성들이 많았고, 자식을 서로 바꾸어서 잡아먹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다. 


보다 못한 '화원'은 밤에 몰래 성벽을 타고 내려와 초나라 군사를 총지휘하는 '공자 측'을 만나러 갔다. '공자 측'의 막사에 들어간 '화원'은 자다가 일어난 '측'에게 간곡한 말로 다음과 같이 하소연하였다. 


“주군께서 저에게 괴로운 일을 말씀드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자식을 양식과 바꾸어 먹고, 해골을 쪼개서 밥을 지어 먹고 있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도성 아래에서 항복하는 일은 나라가 망하는 일이 있어도 따를 수 없습니다. 초나라 군사가 30리만 물러간다면 오직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측'은 곧 '장왕'을 만나 사실대로 보고하였다. 


'초장왕'은 송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공격한 것이 아니고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인간적인 면에 약한 '초장왕'은 이 말을 듣고 송나라 백성들이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곧장 송나라 도성에서 30 리를 물러나 진을 치게 하였다. 


송나라는 제후의 작위가 공작이다. 같은 제후국이라도 군주의 작위가 그 어느 제후국보다도 높다. 그런 만큼 군주의 자존심도 높다. 그러한 제후가 백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초나라 군주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는 일은 죽기보다 힘든 일일 것이라는 점을 초장왕은 이해하였다. 


정나라 군주가 웃통을 벗고 자기 앞에서 항복한 일과는 또 다른 일이다. 이렇게 하여 송나라와 초나라의 화평은 성립되고 송나라 도성의 백성들은 죽음의 질곡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화원'은 인질이 되어 초나라로 잡혀 갔다.


초-송과의 전쟁 3년후인  기원전 591년 춘추 오패중 한명인 초장왕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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