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후) 출사표 - 제갈량
<중국 무후사에 있는 전출사표의 탁본, 송의 충신 악비(岳飛)의 글씨>
친구 산계의 글 ‘중국의 3대 명문’이라는 제목에 솔깃하여 호기심에 열어 보았다.
제갈량의 출사표와 이밀의 진정표, 한유의 제십이랑문 등의 글제목과 함께 그 글들을 읽으면 누구나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문구를 곁들여 두었다. 특히 출사표를 읽고도 눈물을 흘리지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나는 제갈량이 삼국지에 나오는 실존 인물로 조조와 쌍벽을 이루는 전술가, 지략가 정도로밖에 알지 못하고 있다. 연전, 중국에서 만들어 웹에 올려 놓은 동영상 ‘삼국지’를 105회인가에 걸쳐 다 보았다. 흰 깃털부채를 천천히 흔드는 제갈량의 모습에서 범접할 수 없는 품위를 찾을 수 있었으나 내용 중에 출사표가 나온 것 같기도 하고 못 본 것 같기도 하여 확실하지 않다.
내친 김에 정말 눈물을 흘리게 되는지 글 전문을 원문과 해석본을 읽어 보기로 하고 웹을 뒤져 여기로 가져와 편집하였다.
편집에 골몰해서인지 눈물은 나지 않았다. 나는 충신이 아니란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명문장이라는 찬사에는 걸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은 출사표가 전, 후 두 차례 쓰여졌다는 것과 출사표의 ‘師’라는 글자가 내가 주로 알고 있는 ‘스승’이라는 뜻 말고도 ‘旅’와 함께 군대의 규모를 나타내는 글자라는 것이다. ‘師團’, ‘旅團’이라는 군부대의 명칭에 이런 글자들이 들어가는 것도 그래서 이해가 되었다.
유비[劉備, 본문의 선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유선[劉禪, 본문의 후주]에게 북벌을 하기 위해 올린 상소문이 전출사표이고 지금까지 그 원문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1차 북벌에서 실패한 후, 전세를 재정비한 뒤 후주인 유선에게 올린 두 번째 상소가 후출사표이다. 내용이 전출사표와 더불어 매끄럽기는 하나 후세 사람의 윤색이라는 평이 있고 심지어 조작된 것이라는 평도 있다고 한다.
읽는 이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참고할 만한 내용을 [ ]안에 주를 넣었다.
읽으시면 눈물이 날 것입니다.
다른 두 명문장 한유와 이밀의 글도 올려볼 요량이다. <편집자>
<前出師表>
臣亮言 신 량은 아뢰옵나이다.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然侍衛之臣 不懈於內 忠志之士 忘身於外者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선황제 폐하께옵서는 창업하신 뜻의 반도 이루지 못하신 채 중도에 붕어하시고, 이제 천하는 셋[위, 촉, 오]으로 정립되어 익주가 매우 피폐하오니, 참으로 나라의 존망이 위급한 때이옵니다. 하오나 폐하[유선]를 모시는 대소 신료들이 안에서 나태하지 아니하고 충성스런 무사들이 밖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음은 선황제 폐하께옵서 특별히 대우해주시던 황은을 잊지 않고 오로지 폐하께 보답코자 하는 마음 때문이옵니다.
誠宜開張聖聽 以光先帝遺德 恢弘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 引喩失義 以塞忠諫之路也。 폐하께서는 마땅히 그들의 충언에 귀를 크게 여시어 선황제의 유덕을 빛내시오며, 충의 지사들의 의기를 드넓게 일으켜 주시옵소서. 스스로 덕이 박하고 재주가 부족하다 여기셔서 그릇된 비유를 들어 대의를 잃으셔서는 아니되오며, 충성스럽게 간하는 길을 막지 마시옵소서.
宮中府中 俱爲一體 陟罰臧否 不宜異同。若有作姦犯科及爲忠善者 宜付有司論其刑賞 以昭陛下平明之理 不宜偏私 使內外異法也。 또한, 궁중과 부중[관아]이 일치 단결하여 잘한 일에 상을 주고 잘못된 일에 벌을 줌에 다름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 만일 간악한 짓을 범하여 죄지은 자와 충량한 자가 있거든 마땅히 각 부서에 맡겨 상벌을 의논하시어 폐하의 공평함과 명명백백한 다스림을 더욱 빛나게 하시고, 사사로움에 치우치셔서 안팎으로 법을 달리하는 일이 없게 하시옵소서.
侍中侍郞 郭攸之費褘董允等 此皆良實 志慮忠純 是以先帝簡拔 以遺陛下。愚以爲宮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咨之 然後施行 必能裨補闕漏 有所廣益。 시중 곽유지와 비의, 시랑 동윤 등은 모두 선량하고 진실하오며 뜻과 생각이 고르고 순박하여 선황제께서 발탁하시어 폐하께 남기셨사오니, 아둔한 신이 생각하건대 궁중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그들에게 물어보신 이후에 시행하시면 필히 허술한 곳을 보완하는 데 크게 이로울 것이옵니다.
將軍向寵 性行淑均 曉暢軍事 試用於昔日 先帝稱之曰能 是以衆議擧寵爲督。愚以爲營中之事 悉以咨之 必能使行陳和睦 優劣得所。 장군 향총[촉의 무장]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치우침이 없으며 군사에 밝은지라 지난날 선황제께서 향총을 시험삼아 쓰신 뒤 유능하다 말씀하시었고, 그리하여 여러 사람의 뜻을 모아 그를 도독으로 천거했사오니, 아둔한 신의 생각으로는 군중의 대소사는 향총에게 물어 결정하시면 반드시 군사들 사이에서 화목할 것이오며,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모두 적재적소에서 맡은바 임무를 성실히 다할 것이옵니다.
親賢臣 遠小人 此先漢所以興隆也. 親小人 遠賢臣 此後漢所以傾頹也。先帝在時 每與臣論此事 未嘗不歎息痛恨於桓靈也。 전한[前漢] 황조가 흥한 것은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탐관오리와 소인배를 멀리했기 때문이오며, 후한 황조가 무너진 것은 탐관오리와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현명한 신하를 멀리한 때문이오니, 선황제 폐하께서는 생전에 신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일찍이 환제[桓帝 후한의 11대 황제], 영제[환제 다음의 황제] 때의 일에 대해 통탄을 금치 못하셨사옵니다.
侍中尙書長史參軍 此悉貞良死節之臣 願陛下親之信之 則漢室之隆 可計日而待也。 시중과 상서, 장사와 참군 등은 모두 곧고 밝은 자들로 죽기로써 국가에 대한 절개를 지킬 신하들이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들을 가까이 두시고 믿으시옵소서. 그리하시면 머지않아 한실은 다시 융성할 것이옵니다.
臣本布衣 躬耕於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 신은 본래 하찮은 포의[벼슬 없는 선비]로 남양의 땅에서 논밭이나 갈면서 난세에 목숨을 붙이고자 하였을 뿐, 제후를 찾아 일신의 영달을 구할 생각은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선황제께옵서는 황공하옵게도 신을 미천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려 세 번씩이나 몸을 낮추시어 몸소 초려를 찾아오셔서 신에게 당세의 일을 자문하시니, 신은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황제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그 뜻에 응하였사옵니다.
後値傾覆 受任於敗軍之際 奉命於危難之閒 爾來二十有一年矣。 그후 (한실의) 국운이 기울어 싸움에 패하는 어려움 가운데 소임을 맡아 동분서주해온 지 어언 스무해 하고도 한해가 지났사옵니다.
先帝知臣謹愼 故臨崩寄臣以大事也。受命以來 夙夜憂歎 恐託付不效 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선황제 폐하께옵서는 신이 삼가고 신중한 것을 아시고 붕어하실 때 신에게 탁고[託孤 고아의 장래를 믿을 마한 사람에게 부탁함]의 대사를 맡기셨사옵니다. 신은 선황제의 유지를 받은 이래 조석으로 근심하며 혹시나 그 부탁하신 바를 이루지 못하여 선황제의 밝으신 뜻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던 끝에, 지난 건흥[발해 10대 宣王의 연호] 3년[225년]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갔었사옵니다.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率三軍 北定中原 庶竭駑鈍 攘除姦凶 興復漢室 還于舊都。此臣所以報先帝 而忠陛下之職分也。 이제 남방은 평정되었고 인마와 병기와 갑옷 역시 넉넉하니, 마땅히 삼군을 거느리고 북으로 나아가 중원을 평정시켜야 할 것이옵니다. 늙고 아둔하나마 있는 힘을 다해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제거하고 대한[大漢] 황실을 다시 일으켜 옛 황도로 돌아가는 것만이 바로 선황제 폐하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드리는 신의 직분이옵니다.
至於斟酌損益 進盡忠言 則攸之褘允之任也。 손익을 헤아려 폐하께 충언 드릴 일은 이제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몫이옵니다.
願陛下託臣以討賊興復之效 不效則治臣之罪 以告先帝之靈。 원컨대 폐하께옵서는 신에게 흉악무도한 역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시킬 일을 명하시고, 만일 이루지 못하거든 신의 죄를 엄히 다스리시어 선황제 폐하의 영전에 고하시옵소서.
若無興德之言 則責攸之褘允等之慢 以彰其咎。 또한 한실을 바로 일으키는 데 충언이 올라오지 아니하거든 곽유지, 비의, 동윤의 허물을 책망하시어 그 태만함을 온 천하에 드러내시옵소서.
陛下亦宜自謀 以諮諏善道 察納雅言 深追先帝遺詔。 폐하께옵서도 마땅히 스스로 헤아리시어 옳고 바른 방도를 취하시고, 신하들의 바른 말을 잘 살펴 들으시어 선황제 폐하께옵서 남기신 뜻을 좇으시옵소서.
臣不勝受恩感激。今當遠離 臨表涕零 不知所言。 신이 받은 은혜에 감격을 이기지 못하옵나이다. 이제 멀리 떠나는 자리에서 표문[表文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올리니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씀을 아뢰어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後出師表>
先帝慮漢賊不兩立 王業不偏安 故託臣以討賊也 以先帝之明 量臣之才 固知臣伐賊 才弱敵强也。 선황제 폐하께옵서는 한나라와 역적과는 양립할 수 없으며, 황업[皇業]은 천하의 한귀통이로만 안주할 수 없다 하시어 신에게 역적의 토벌을 당부하셨나이다. 선황제께서 그 밝으심으로 신의 재주를 헤아리시니 역적을 벌함에 신의 재주가 얕고 역적은 강함을 아셨사옵니다.
然不伐賊 王業亦亡 惟坐而待亡 孰與伐之 是以託臣而弗疑也。 그러나 역적을 치지 아니한다면 황업 또한 망할 터이니,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린다면 누구와 더불어 역적을 징벌하오리까. 이 때문에 신에게 탁고하시고 의심하지 않으신 것이옵니다.
臣受命之日 寢不安席 食不甘味。思惟北征 宜先入南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幷日而食 臣非不自惜也 顧王業不可偏安於蜀都 故冒危難以奉先帝之遺意。 신은 선황제 폐하의 명을 받은 이래 잠을 자도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했사옵니다. 북쪽을 칠 생각을 하니 우선 남방부터 평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지난 건흥 3년[225년] 5월 노수[중국 운남성에 있는 강으로 양쪽 기슭 봉우리에 살기가 있어 여름에 건너지 못하는데 제갈량이 5월 심한 더위에 이 강을 건너 남만을 정벌함]를 건너 불모의 땅 깊숙이 들어가 하루의 양식으로 이틀을 먹는 고생을 한 것은 신이 몸을 아끼지 않음이 아니라, 황업을 생각하면 촉 땅에서 편안히 지내서는 천하를 통일할 수 없어 위험과 고난을 무릅쓰고 선황제의 유지를 받든 것이옵니다.
而議者謂爲非計 今賊適疲於西 又務於東 兵法乘勞 此進趨之時也 謹陳其事如左。 그런데 따지기 좋아하는 무리들은 이것이 올바른 계책이 아니라고 하나이다. 이제 역적은 마침내 서쪽에서 고달파지고, 다시 동쪽에서 오나라의 군사들과 싸워 지쳐 있사옵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적이 피로할 때를 타 공격하라 하였으니, 지금이 바로 과감하게 나아갈 때라 사료되옵니다. 이에 신은 삼가 몇가지를 아뢰옵나이다.
高帝明幷日月 謀臣淵深 然涉險被創 危然後安 今陛下未及高帝 謀臣不如良平 而欲以長策取勝 坐定天下 此臣之未解一也。 옛날에 고황제[제나라를 세운 황제] 폐하께옵서는 밝으심이 해와 달과 같고 신하들의 재주가 연못처럼 깊었으나 험난한 일을 당하고 상처를 입으며 위태로움을 겪으신 뒤에야 비로소 평안해지셨사옵니다. 이제 폐하께옵서는 고황제에 미치지 못하시고 신료들 또한 감히 장량[한 고조의 신하 호 子房]과 진평[한 고조의 신하]같은 자가 없는데도, 힘을 들이지 아니하고 좋은 계책으로만 승리하여 가만히 앉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니 이는 신이 이해할수 없는 첫 번째 일이옵니다.
劉繇 王朗各據州 論安言計 動引聖人 群疑滿腹 衆難塞胸 今歲不戰 明年不征 使孫權坐大 遂幷江東此臣之未解二也。 또한 유요[후한 말의 정치가]와 왕랑[후한 말의 정치가]은 각각 주와 군을 다스리며 안위와 계책을 말하면 입만 열면 성인을 운운하고 벗속에는 의심이 가득하여 여러 어려움 앞에서는 겁내고 두려워 하였사옵니다. 그리하여 올해도 싸우지 않고 다음해에도 싸우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손책[孫策 후한 말의 군벌로 오나라의 추존 왕]이 앉아서 강동을 차지하였으니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두 번째 일이옵니다.
曹操智計 殊絶於人 其用兵也 彷彿孫吳 然困於南陽 險於烏巢 危於祁連 逼於黎陽 幾敗北山 殆死潼關 然後僞定一時耳 況臣才弱 而欲以不危而定之 此臣之未解三也。 조조는 지모와 계책이 남달리 뛰어나 그 용병술은 손자와 오자[吳子병법을 지은 사람]를 닮았으나 남양[중국 허난성 남서부의 현]에서 어려움에 처하고 오소[황하 동부에 있는 지명]에서 험한 일을 겪고 기련에서 위태로움에 처했으며 여양[하남성의 한 지역]에서 핍박을 당하고 북산[길림성의 한 지역]에서 거의 패배하고 동관에서는 죽을 뻔한 뒤에야 비로소 한때나마 거짓으로 천하를 평정했는데도 재주도 미약한 신하들이 어찌 위태로움을 겪지 아니하고 천하를 평정하려 하니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 번째 일이옵니다.
曹操五攻昌覇不下 四越巢湖不成 任用李服 而李服圖之 委任夏侯 而夏侯敗亡。先帝每稱操爲能 猶有此失 況臣駑下 何能必勝 此臣之未解四也。 조조는 다섯번이나 창패[중국 동해군의 지명]를 치고도 항복을 받아내지 못하였고 네번이나 소호[중국 5대 담수호의 하나]를 건넜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복을 등용하였으나 오히려 배반당하고 하후연에게 일을 맡겼으나 하후연이 패망하였사옵니다. 선황제 폐하께서 항상 뛰어난 인물이라고 칭찬하신 조조조차도 이렇게 실패하곤 하였는데 하물며 신같은 아둔한 사람이 어찌 쉽게 이기기만 바라겠나이까.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네 번째 일이옵니다.
自臣到漢中 中間期年耳 然喪趙雲 陽群 馬玉 閻芝 丁立 白壽 劉合 鄧銅等 及曲長屯將七十餘人 突將 無前 賓 靑姜 散騎 武騎一千餘人 此皆數十年之內 所糾合四方之精銳 非一州之所有。若復數年 則損三分之二也 當何以圖敵此臣之未解五也。 신이 한중에 온지 이제 1년 남짓 되었사오나, 그 동안 조운, 양군, 마옥, 염지, 정립, 백수, 유합, 등동 등 70여명의 곡장[골짜기를 지키는 군장]과 둔장[성을 지키는 장수]을 잃어 선봉장으로 앞장설 사람이 없사오며 종수, 청강, 산기, 무기 등 1천여 명을 잃었사오니 이는 모두 수십 년 동안 사방에서 모아온 정예병이지 익주 한 주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니옵니다. 만약 또 다시 몇 해를 보내면 셋 중 둘을 잃게 될 터이니 그때는 무엇으로 역적을 도모하겠사옵니까. 이는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다섯 번째 일이옵니다.
今民窮兵疲 而事不可息 事不可息 則住與行 勞費正等 而不及早圖之 欲以一州之地 與賊持久 此臣之未解六也。 바야흐로 백성은 궁핍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사오나 대사를 그만둘 수 없사옵니다. 그만둘 수 없다면 지키고 있는 것이나 나아가서 싸우는 것이나 그 노고와 비용은 같은데도 속히 도모하지 아니하고 오직 한 주에만 머물러 역적과 더불어 오랫동안 대치하고 있사오니 이는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여섯 번째 일이옵니다.
難平者 事也 昔先帝敗軍於楚 當此之時 曹操?手 謂天下已定。然後先帝東連吳越 西取巴蜀 擧兵北征 夏侯授首 此操之失計。而漢事將成也 然後吳更違盟 關羽毁敗 ?歸蹉跌 曹丕稱帝。凡事如是 難可逆見。 무릇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나 천하의 일인지라, 옛날 선황제 폐하께옵서 초 땅에서 패하셨을 때 조조는 손뼉을 치며 천하는 평정되었다고 좋아했사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선황제께옵서는 동쪽의 오월[吳越]과 손을 잡으시고, 서쪽으로는 파촉[西蜀이라고도 함]을 취하고 군사를 일으켜 북쪽을 쳐서 하후연의 목을 베셨사옵니다. 이는 바로 조조의 실수로 한나라의 대업이 이루어지려 하였사오나 동오[東吳]가 맹약을 어겨 관우를 죽이고 선황제께옵서는 자귀에서 패하시오니 조비가 황제를 참칭했사옵니다. 이렇듯 일은 미리 헤아리기가 어렵사옵니다.
臣鞠躬盡力 死而後已 至於成敗利鈍 非臣之明所能逆竟睹也。 이제 신은 엎드려 몸을 바치고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일할 뿐이오니, 일의 성패와 이해에 대하여서는 신이 미리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