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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이야기

무거워진 봄 한 접시

작성자전과웅|작성시간26.06.08|조회수28 목록 댓글 0


무거워진 봄 한 접시
  /김성자

 

 



 

 

꽃바람이 분다. 겨우내 굳어 있던 대기가 느슨해지며 거리마다 가벼운 기척이 번진다. 얼마 전 요양병원에서 퇴원한 남편과 바람을 쐴 겸 마트에 들렸다 자동문이 열일 때마다 겨울의 잔득 움츠린 냉기와 봄의 나른한 온기가 교차하며 밀려왔다. 계절은 늘 그렇게 모호한 경계 위에 서서 다음 자리를 엿보곤 한다.

 

식품 코너를 지나던 중 '명게 50% 할인'이라는 선명한 문구에 발걸음이 멈췄다. 얼음 걸린 매대 위. 붉은 돌기들이 춤춤한 멍게가 제 몸 안에 바다를 가둔 채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술렁임이 목 언저리에서 차올랐다. 매년 봄이면 반복되던 익숙한 풍경인데. 그날따라 멍게의 붉은 빛깔이 유독 시렸다. 그 멍게의 시간 속엔 늘 어머니가 살고 있었기 때 문이다.

 

어머니는 봄이면 새벽 첫차를 타고 마산 어시장에 다녀오곤 하셨다 땅에서 냉이와 달래가 고개를 내밀 때. 어머니는 가장 먼저 바다의 안부를 물으셨다. 둥근 양은상 가운데 놓인 멍게 한 접시는 우리 집 거실에 당도한 봄의 전령이었다. 초고추장을 곁들인 접시 앞에서 아버지가 젓가락을 들면, 어머니는 자식들의 입속을 먼저 챙기며 조용히 웃으셨다. 어머니의 미소는 멍게 향보다 먼저 식탁 위로 번져 나가 집 안의 공기를 비릿하고도 달콤하게 물들였다.
그때의 집은 비좁았으나 식탁만은 늘 만선滿船의 기운이 감돌았다. 멍게는 단순한 해산물이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 계절이 자리를 잡는 가장 감각적인 방식이었다. 한동안 멍게 앞에서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나를 보며 남편이 물었다. 먹고 싶으면 사지 왜 망설이느냐는 채근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멍게와 낙지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리움이 이미 혀끝까지 차올라 말을 꺼내면 눈물부터 쏟아질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병원 밖으로 나온 남편은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막걸리와 통조림. 간식들이 카트에 차곡차곡 쌓였다. 물건이 높이를 더할수록 정지해 있던 일상의 감각도 조금씩 흐르기 시작했다. 그 가벼운 유희 속에서도 장바구니 밑바닥에 놓인 멍게만은 유독 묵직한 무게로 나를 눌렀다. 집에 도착하자 아들이 마중을 나왔다. 장바구니를 받아 들며 잠시 웃던 아들은 이내 아버지를 살피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퇴원한 아버지를 향한 안도와 여전히 가시지 않은 걱정이 뒤섞인 얼굴. 그 표정 위로 집 안의 적막이 겹치자 바깥의 화창한 봄기운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싱싱함이 사그라지기 전에 멍게를 꺼냈다. 얼음 사이에 몸을 뉘었던 멍게는 아직도 서늘한 바다의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단단하고 거친 껍질을 칼로 가르자 주황빛 속살이 눈부시게 드러났다. 물기를 머금은 표면이 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 색은 봄날의 노을을 가둔 바다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접시에 담아 초장을 곁들이자 식탁에 짧은 활기가 돌았다. "향이 살아 있네." "역시 이게 봄맛이지." 남편과 아들의 짧은 감탄사가 오가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집 안의 공기가 비로소 부드럽게 풀렸다. 음식 하나가 공간의 결을 바꾸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남편과 아들이 맛을 음미하는 동안 나는 정작 멍게를 보지 못하고 창밖 먼 곳을 보았다. 접시 위의 붉은빛은 자꾸만 오래된 기억의 잔상을 불러내었다. 내가 어머니의 복중에 있을 때, 지독한 입덧으로 물 한 모금 넘기지 못 하던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가 퇴근길에 품어 온 것이 명게였다고 했다. 바다 냄새라면 질색하던 어머니였지만, 그 서늘하고 알싸한 한 점이 뒤집힌 속을 가라앉히고 다시 생의 기운을 돋웠다던 이야기. 그 이야기는 내가 자라는 내내 봄이면 식탁 위를 떠다니던 우리 집만의 신화였다.

봄이 무르익으면 어머니는 어린 내 손을 잡고 어시장으로 향하셨다. 젖은 얼음 위로 멍게들이 툭툭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어머니는 늘 같은 자리에 서 계셨다. 붉은 바가지에 쌓여가는 멍게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얼굴은 갓 피어난 진달래처럼 환했다.  멍게의 배를 갈라 속살을 털어내던 단골 가게 아주머니의 투박한 손놀림 속에 바다의 시간과 누군가의 노고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어머니의 눅눅하고 따뜻한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세월은 그 풍경을 아득한 수평선 너머로 밀어냈지만, 봄바람이 실어 온 비릿한 내음은 여전히 나를 그 시절의 어시장 골목으로 데려간다. 이유를 설 명할 수 없지만 특정 계절 앞에서 발길이 멈추는 것은, 그곳에 두고 온 누군가의 마음이 발목을 잡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억에서는 낙지볶음이 익어가며 매콤한 향을 풍겼다. 남편은 멍게가 보약이라며 내 접시로 밀어주었지만 이상하게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대신 낙지 한 점을 입에 넣었다. 혀끝을 자극하는 강렬한 매운맛이 코끝을 찡하게 울렸다. 눈물이 차올랐다. 매운 양념 탓인지, 아니면 멍게의 붉은 색감에 가려져 있던 그리움 탓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저 오랫동안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들이 뜨거운 낙지처럼 울컥 올라왔다.


동동주를 반 잔 따랐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지나가자 소란스럽던 마음이 잠시 가라앉았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스쳤다. "부모가 자식을 너무 걱정하면 그 자식이 더 힘들게 산다더라." 그 말을 하던 어머니의 눈동자 속에 담겼던 깊은 바다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머니는 늘 나를 걱정하셨고, 그 걱정은 때로 나를 지탱하는 닻이 되었으며, 때로는 벗어날 수 없는 무거운 추가 되기도 했다. 돌아보면 나는 어머니라는 거대한 바다에 가장 오래 머물던 작은 섬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 척박한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우고 계셨다. 부족 했던 끼니, 흔들리던 살림, 자식이라는 마르지 않는 근심. 그 모든 것이 어머니의 하루를 구성하는 파도였다. 이제는 그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도, 거친 손을 맞잡을 수도 없다. 내게 남겨진 것은 식탁 위에 놓인 봄 한 접시뿐이다.


창가로 봄 햇살이 길게 드리워졌다. 멍게 접시 위에 내려않은 빛이 주황빛 속살을 더 깊게 투과한다. 바다의 짠 내와 거친 파도를 견디며 제 몸을 완성한 저 작은 생물처럼, 어머니의 삶도 그렇게 겹겹이 쌓인 고통을 단맛으로 치환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말로 다 하지 못한 날들이 더 많았겠지만, 그 속에서도 분명 멍게 한 점처럼 짧고 달콤한 봄날의 순간들이 있었으리라 믿고 싶다.


나는 접시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그 위에 놓인 것은 음식이 아니라 어머니가 건네준 한 조각의 시간이었다. 봄은 다시 오지만 어제의 봄과는 다르다. 멍게의 붉은 빛이 식탁의 그림자와 섞여가는 것을 보며, 나는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입안 가득, 어머니가 부르던 바다 냄새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김성자 sungja109@hanmail.net 한국수필, 세종수필사랑 회원 제3회 119문화상 수필 소방안전원장상, 제19회 전국장애인과 함께하는 문예글짓 기대회 행정안전부장관상 제7회 아산문학상 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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