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0회 수필 공모 당선작
버팀목
권순예
어렸을 적 여름날, 저녁 먹을 초저녁이 되면 나는 툇마루에 아버지가 짠 왕골자리를 얼른 폈다. 밥상이 차려지고 온 식구가 모여 맛있게 밥을 먹고 나면, 어머니는 금세 밥상을 치우셨다. 아버지는 모기장을 치고 모깃불을 피우셨다.
자식들은 왕골자리에 누워 밤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금광석을 품에 안았다. 그러다 별똥별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서로 자기 것이라고 우기다가 잠이 들곤 했다.
지금은 다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와 어머니. 게다가 고향 마을도 수몰되어서 마을 근처에 가도 흔적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달이 밝은 여름밤 시골 집의 툇마루 끝에 누워 고개를 늘어뜨리면 보였던, 초가지붕 위 하얀 박꽃은 내 가슴에 지금도 한 폭의 그림처럼 남아 있다. 게다가 몸에 지금까지 감촉으로 남아 있는 아버지의 왕골자리.
아버지가 맨 왕골자리는 볏짚 위에 왕골을 씌워 투박스럽긴 해도 푹신한 촉감이 마치 요술을 부리는 듯했다. 비 오는 날은 더 뽀송뽀송해져 오랫동안 누워서 빗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었고, 더위에 푹푹 찔 때는 저만큼 떨어져 나가 앉아 있어도 시원하게 품어주었다.
주룩주룩 비소리가 들리는 날이면 달그락달그락 아버지의 왕골자리 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버지는 왕골자리를 만들기 위해 논 한 귀퉁이에 왕골을 심고. 노끈을 만들기 위해 칡넝쿨을 끊어다 쇠죽 쑬 때 칡넝넝쿨을 삶아 속대는 빼내고 겉껍질을 벗겨 내고 하얀 속살을 말려 실처럼 잘게 찢어 엄지와 검지로 노끈을 만드셨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사랑방에 자리 매는 틀을 놓고 여러 개의 쇳덩이에 칡넝쿨 노끈을 감아 겨울 농한기 때 본격적으로 왕골자리를 짤 준비를 하셨다.
아버지의 왕골자리 매는 소리를 들으며, 배를 쭉 깔고 숙제하다 잠이 들곤했다. 자는 나를 반듯이 뉘어주시며 머리를 들어 살포시 베개를 넣어주시고 위 저고리를 벗어 덮어주시던 아버지.
젊은 시절, 시집살이가 힘들어 친정에 간 적이 있다. 아버지를 등지고 자리 위에 누워버린 나를 보고 '여식 잘못 키우면 남의 집 망해 먹고. 아들자식 잘못 키우면 내 집 망해 먹는다.'라는 말이 있다며 어깨를 살포시 잡아 주셨던 아버지, 아버지의 떨리던 손길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의 마음을 그때는 몰랐다. 결혼식 날 아버지는 나의 손을 꼭 잡고 '시어른께 잘하고 남편한테 잘하고 잘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때 아버지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을 처음 보았다.
"너 시집가던 날 아버지가 너 예식 올리던 춘천에서 천안까지 오시는 동안 어찌나 차 안에서 우시던지 우리 다 같이 울면서 왔어."
나중에 친척들은 만날 때마다 내 결혼할 때의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강원도 춘천에서 예식을 올렸는데 예식 끝나고 충청도 천안 집까지 오는 내내 아버지가 우셔서 다들 같이 울었단다. 이 말은 장롱 옆에 세워 둔 왕골자리와 함께 내 인생의 '버팀목'이다.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신 뒤 아버지까지 떠나신 다음 세 해 동안 나는 1년에 한 차례씩 비어 있는 시골집을 다녔다. 이 방 저 방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섬돌 밑의 개미집들을 쓸어내고, 윤기 잃은 가마솥에 물을 가득 붓고 3개의 부뚜막에 물이 펄펄 끓어 넘칠 때까지 불을 땠다.
아버지가 왕골자리를 짜시던 사랑방에 들어가 따스한 온기가 올라오는 방바닥에 왕골자리를 폈다. 하나는 색이 누렇게 변해 볼품이 없고, 하나는 거의 새것 같았다. 누렇게 변한 왕골자리 위에 누워 손바닥으로 자리를 쓸었다. 여름이 지나면 그늘에 바람을 쐬어주고, 다시 돌돌 말아 꽁꽁 묶어놓았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새것만 가지고 집에 왔다ᆢ.
무더웠던 여름을 보내며 왕골자리를 넣어두기 위해 먼지를 털어내고 깨끗이 닦아 그늘에서 바람을 쐬었다. 신문지를 자리 사이에 끼워 돌돌 말아 예쁘게 묶어 장릉 옆에 세워 두었다가 다시 쓰기를 40년째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