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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이야기

정문正文

작성자전과웅|작성시간26.06.16|조회수29 목록 댓글 0

제240회 수필 공모 당선작
                  정문正文
                                         전혜숙



 

 

아버지 이름은 정正자 문文자이다. 할머니가 아버지 위로 딸 셋을 낳고, 내리 남매를 잃은 뒤, 7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다. 집안 어른들이 장손인 아버지가 오래 살아 학문으로 가문을 일으키길 원해 마을 한문 선생에게 얻은 이름이다. 고모들은 아버지가 신기하고 예뻐 서로 가까이 오려고 했지만, 증조할머니는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귀하디귀한 손자가 나쁜 병균이라도 옮아 잃을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그 후 아버지 아래로 남동생 둘과 여동생 둘을 무탈하게 봤으니, 모두 어여쁜 장손 덕분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집안 어른들의 기대대로 총명했다. 그 시절엔 중학교 입시 경쟁이 대단해 방과 후에 사십여 명이 한 집에 모여 밤공부를 했다. 할아버지는 농사일은 안하고 공부만 하는 아버지가 못마땅해 긴 장대를 들고 공부방까지 쫓아갔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무섭고 야속했지만,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더 컸다. 덕분에 살미초등학교 졸업생 중 명문인 충주중학교에 입학하는 몇 명 안 되는 학생으로 학교장상까지 받았다.
아버지는 가난한 살림에 하는 공부가 귀해 걸어 다니면서도 영어 단어를 외웠다.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셋째 고모는 아버지 학비를 대려고, 텅스텐을 캐는 중석 광산에서 일 년동안이나 머리 짐을 이고 돌을 날랐다. 할머니는 평소 술과 화투판에 빠져 있던 할아버지를 찾으러 밤중에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나 놀라고 말았다. 시름시름 앓아눕는 사이에 그마저 있던 전답이 할아비지의 노름빚으로 하나둘 사라져 버렸다. 중학교는 어찌어찌 졸업했지만,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었다.

얼마 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8남매의 맏이로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다. 다행히 증조할머니가 있어 많은 힘이 되었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하루빨리 결혼해 안정을 찾길 원했다. 중신아비는 식구가 너무 많으면 혼인이 성사되기 어려울 것 같다며, 미혼인 고모와 삼촌 하나씩은 없다고 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혼례를 치른 아버지는 이튿날 20개월 복무를 마저 하러 떠났다. 증조할머니는 근심 많은 손자에게 "정문아, 이 할미는 너 제대 하는 거 보고 눈감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리고 할미가 죽으면 자손도 많이 보고 더 잘 살 겨"라고 했다. 평소 신기神氣가 많았던 증조할머니는 평소에 하던 말처럼 아버지가 제대한 다음 달에 돌아가셨다.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아버지는 우리 마을은 물론이고 이웃 마을 농사일까지 도맡아 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새마을 지도자를 맡아 마을의 크고 작은 일까지 챙겼다 "증문이~ 증문이, 집에 있는가?" 동네 어른들은 수시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와 집안의 대소사나 마을 일들을 상의했다. 30대였던 아버지는 마을의 스타였고, 그런 아버지를 보며 맏딸인 나는 자연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아버지는 못 하는 일이 없었고, 모르는 일이 없었다.

1982년, 충주댐이 착공되며 많은 사람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우리 가족도 그중 하나였다 수몰민 1호로 보상금을 받은 아버지는 마흔에 할아버지까지 여섯 식구를 이끌고 낯선 땅을 찾아 나섰다. 농사만 짓던 아버지는 충주 근처에서 잠시 방앗간을 인수해 살다가, 나와 형제들의 교육을 위해 청주로 이주를 결심했다.

청주로 이사한 지 1년 만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시장 안의 허름한 연립주택으로 다시 이사를 했다. 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어두컴컴한 집에서 우리는 살림과 장사를 함께 꾸렸다. 주위는 늘 사람들과 상인들이 흥정하고 싸우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아버지는 연탄 배달을 했고, 엄마는 과일 가게를 열었다. 밤늦게 돌아온 아버지는 매일 술에 취해 거실에 쓰러지곤 했다. 온몸에 연탄 가루를 뒤집어 쓴 채 인사불성이 된 아버지를 보며. 슬픈 피에로를 떠올렸다. 나의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도 장사를 하며 4남매 뒷바라지와 아버지의 술주정까지 감당하느라 매일 집안은 전쟁터였다. 나는 검은 밤과 검은 연탄이 싫었다. 연탄 가루에 덮인 채 술어 찌들어 잠든 아버지의 굽은 등 뒤에서 인생의 서글픔을 일찍이 알아버렸다. 어서 환한 아침이 오기만을 바랐다.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크게 한 날은 꿈에 고향마을을 찾았다. 나는 마을 주변의 길들과 풍경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또 꿈에서 깨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버지는 어느새 쓰린 속을 안고 연탄 묻은 신발과 함께 일을 나가고 없었다. 아버지의 과로가 술 때문이었는 지 책임감 때문이었는지는 끝내 묻지 못했다.

중학교 1학년 한문 시간에 부모님 이름을 한자로 써 오는 과제가 있었다. 선생님은 아버지 이름을 보더니 "너희 아버지는 공부해야 하는 이름이구나!" 하였다. 그때 아버지는 안정된 직업 없이 여러 일들을 전전하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늦게 귀가한 아버지에게 선생님에게 들은 말을 꺼내니 멋 쩍은 듯' "공부는 무슨.." 하며 말끝을 흐렸다.
한 번은 아버지가 아직도 교복 입고 학교가는 꿈을 꿔. 예전에 학교 그만 두고 농사지을 때 교복 입고 학교 가는 친구들이 참 부러웠어."라고 하길래 다시 공부해 보라고 하니 쓸쓸히 웃기만 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인생의 고비마다 후문을 찾지 않았다. 아버지 이름 처럼 늘 정문正門 으로 들어섰다. 벌목하다 오른손 검지 한 마디를 잃고, 약속한 품삯을 받지 못했지만,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업자가 당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라며 괜찮다고 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이거나 도와야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누구보다 먼저 발 벗고 나섰다. 자식들을 위한 고생은 고생도 아니었다며, 오히려 그때가 좋았다고 했다 10여 년 전, 대장암에 이어 최근 혈액암 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누구보다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
이름은 그 사람을 대변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위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이름은 책임감이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가장의 무게를 혼자 젊어지고 정문으로만 걸었다. 이제야 나는 그 문 앞에 서서. 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 는지 헤아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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