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자 바꾸기는 시각 바꾸기
화자의 유형보다 중요한 것은 화자의 새로운 설정이 시에 생명감을 불어넣어 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시적 전개가 잘 풀리지 않을 때 화자를 바꾸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화자를 바꾸는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시점에서 대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화자의 초첨을 맞추어 다음 시를 읽어 보자.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嬰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김종삼, 「민간인」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앞에서 설명한 극적 화자 중 투명한 화자이다. 마치 신문 기사를 쓰는 듯한 냉정한 시선으로 시적 대상을 다루고 있다. 이 시의 대상은 월남하다가 아이가 울자 보초에게 들킬까 봐 갓난쟁이를 익사시킨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런 비극적인 사건에 화자는 주관적 개입을 전혀 하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런 냉정한 시선이 비극적 사건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지닌다.
∇ 화자의 변화, 그리고 유의점
그런데 김종삼의 「민간인」의 화자를 바꾸어 보면 전혀 다른 시가 될 수 있다. 학생들이 쓴 다음 작품을 보자.
(가) 그러니께 시방 그 때가 1947년 봄이었지라. 밤에 칠흙만치로 컴컴항께, 암껏도 보이지 않았어라. 글씨, 황해도 해주 바다 말이지 그곳이 긍께 용당포, 쩌그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이지라
나는 그띠 고냥이 맨드로 살곰살곰 놀르 젓는디 아 글씨 아새끼가 저그 에미애비 죽는 줄도 모르고 말이시 참말로 간이 쩍 달라붙응께 별수 있나 누구라도 그랬을꺼여
아직 대갈도 덜 여문 아그를 던져뿌맀제 그 물이 어찌나 깊든지 말여… 말하면 뭐햐 벌써 이십년 전 일잉께로 다 잊어 뿌맀지, 다 잊어뿌렸응께 묻지 말드라고
―정문정(학생), 「민간인」 전문
(나) 1947년 봄이었다
황해도 해주의 바다,
그 바다에 납작 엎드려
우리는 남으로 내려왔다
아들아,
왜 하필 그때 울음을 터뜨렸느냐
갓난쟁이 너를 삼킨 것은 바다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를 삼킨 것은 용당포가 아니었다
너를 삼킨 것은 나의 가슴이었다
아들아,
스무 몇 해가 지났어도
너는,
내 가슴 속에 가라앉고만 있구나
―조민영(학생), 「민간인」 전문
이 작품은 「민간인」의 3인칭 화자, 즉 투명한 화자를 각각 다른 화자로 바꾸어 놓고 있다. (가)는 그때 월남민을 실어 나른 나룻배 사공으로, (나)는 그런 비극적 상황의 주인공이 된 아기의 부모로 화자를 바꾸어 새롭게 구성한 작품이다. 이렇게 화자를 바꿈으로써 상황의 비극성을 다른 시점에서 강조할 수 있게 되었다. 화자가 바뀌면서 시의 분위기나 시적 효과 등이 완전하게 달라짐을 알 수 있다.
화자를 특정한 대상으로 바꾸어 그 대상을 발신자로 삼을 경우, 시인 자신의 관념적인 말을 일방적으로 그 화자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로 대상을 억압하는 것이 된다. 최대한 대상의 목소리와 내용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마치 1급 배우가 극의 상황을 가장 자연스럽게 소화하여 전달하듯이. < ‘詩 창작을 위한 레시피(박수현, 울력, 201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