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복늠 氏의 베틀 / 황주현
처음 들었던 베틀 소리엔
마른침이 쿨럭거리며
고명처럼 얹히기도 하였다
늦은 밤 덜커덩,
쏟아지는 잠을 분만하던
적막한 봄날이었다
받아 적을 수 없어 귀로만 배웠던가
눈칫밥으로 배부른 시집살이와
금세 들키고 마는 배곯은 친정 생각은
단 한 번도 삼베 끝에 다다르지 못했다
나는 실이 옷이 되는 것을
어깨너머가 아닌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배웠다
안동 권씨 복야공파 후손인 복늠 씨는 평생
베틀을 타고 반백의 세월을 짜고 누비고 기웠다
한땀 한땀 잇지 않으면
단 한 줄로도 하루를 엮지 못했던 날들,
자다 보면 머리맡 얼굴에
삼 줄기들이 거미줄처럼 엉겨 붙곤 하였다
삼을 찢어 무릎 위에 둘둘 비벼 꼬면
가난은 악착같이 한 벌 옷처럼 맞춤이 되곤 하였다
단 한 번도 북을 놓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베틀은 끝까지 어머니를 실어 날랐다
손바닥으로 쓸어보면
바람의 껍질인 양 거슬리지만
그건, 바람에도
씨줄과 날줄이 있다는 뜻이다
지루하게 늘어나는 길이
자주 끊어지는 곳곳엔 빗소리를 덧대고
삼베적삼 밑으로 숨어드는 얇은 바람을 덧댄 흔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한여름에는 바람이 동패로 여긴
그늘 한 벌을 입고 있는 듯 시원하다
산 사람이 입으면
분주했던 하루인 제 풀의 주름이 잡히고
망자가 입으면 몇백 년 동안에도 반듯하다
속껍질로 짠 수의에는
속울음을 넘친 통곡이 묻어 있지만
영면을 나는 가장 질긴 옷이 된다
안동포 한 필에는 삼째기, 계추리, 생냉이, 삼뚝가지, 매내삼기, 베날기, 곱비벼삼기, 보름새 같은 이름들이 덜컥덜컥 매듭지어 있다
풀풀 날리던 바람을 다듬이로 다져
옷고름 맨 여름을 견디고
한 계절 밤낮으로 짜야 겨우 한 필이 되는 삼베옷으로
평생을 입고 덮었던 복늠 씨의 몸이
삼 줄기처럼 훨훨 옷고름 풀며 날아간
그해 겨울, 낙동강 하구는 유난히 길게 얼어 있었다
그 후 오랫동안
겅중겅중 걸어가는 울음소리를 내던 베틀은
풍산읍 서미리 209번지에서
지금도 늙은 짐승처럼 누워 있다
'제1회 안동문화상'...황주현, 양윤선, 이수진, 김영목 선정
안동시와 (재)한국정신문화재단이 주최하고, 제1회 안동문화상 운영위원회(운영위원장 박덕규)가 주관하는 제1회 안동문화상의 당선작이 선정됐다. 안동문화상은 민선 8기 안동시의 주요 공약사업 중 하나이며, 안동의 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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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간고등어
동해의 푸른 해일이
등짐에 얹혀 안동까지 밀려왔다
안동은 해안이 되었다
등 푸른 파도는 바닷길만 고집하지 않았다
산길, 논길에도 조금씩 비릿한 물이 들고
그 파도의 맨 앞을
미끈하게 쭉 뻗은 고등어 등살이
동해에서 산란한 햇살을 밀치며 육지로 길을 내었다
영덕을 지나 청송을 돌아 안동 구시장까지
꼬박 한 달이 걸리는 소금길이었다
바다가 육지로 드는 설계도를 알고 있다는 듯
간잡이는 겹겹으로 어둑한 온몸에 소금을 뿌렸다
그때부터 안동은 내륙의 바다였다
학가산 너머에 수평선이 항시 대기하고
낙동강을 거슬러 고등어가 죽어서야 살아 돌아오는
바다의 모천이 있었다
국적은 없어도 혈색으로 입맛이 통하는
고등어는 한반도 내륙의 작은 마을에
등 푸른 집성촌을 이루었다
길안 5일장에서 풍천 구담장으로
다시, 풍산 삼팔장을 떠돌던 동해 바다의 노을이
알전구 불빛처럼 사그라들면
저녁 막차가 반짝, 고등어 아가미 같은 빛의 뭉치를 굴리며
입 다물지 못한 집집의 굴뚝으로 모여들었다
검은 봉지에 밀봉된 바다의 숨이 염분을 풀어
마을과 마을 사이로 밀물 들고 있었다
장에서 돌아오는 저녁 풍경은
붉게 물든 바다가 식구 수만큼 동강 난 채
시어머니와 지아비와 어린 자식새끼들 둘러앉은 저녁 밥상에서
급급한 입맛의 경계를 허물곤 하였다
뼈를 발라 먹는 어머니의 옆모습이
살점 뜯긴 등 굽은 고등어를 닮았다는 것을 그때 보았을까
어머니에게 고등어 한 손은
한 번도 두 마리인 적 없었다
웃음을 깎는 법
웃음을 깎는 일은 맨 처음 울음을 다치지 않게 그대로 두는 일이었다
울음을 건드리지 않아야 반듯한 사각의 목판에 깊이 박힌 웃음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칼끝으로 도려낸 바람 소리는 수백 년 단련된 무표정들이 있었다 무표정은 숱한 표정이 빠져나간 여백이어서 상상하기 좋은 웃음들만 남았다
한번 웃으면 평생 울 수 없는 길고 긴 웃음을 오리나무 목판에 새겼다 오래 묵은 기와지붕의 무늬 같고 방금 새 떼가 날아간 하늘의 흔적 같은 웃음의 곡선엔 허허실실의 파안대소가 들어 있다 남녀노소 신분에 따라 다른 손때 묻은 여러 종류의 웃음 틀이다
제멋대로인 것 같은 웃음도 사실은 다 제각각의 모양이 있다 세상의 주름을 다 먹어 치운 웃음이 눈가에 손금보다 깊은 눈금을 만들어 놓았다 아무리 큰 웃음이라도 절반으로 접을 수 없다 그렇다고 펼 수도 없는 거라서 웃음을 깎아야 그 웃음을 더듬을 수 있는 것이다
근심을 도려낸 잘 깎은 웃음들끼리 모여 춤을 추는 마당을 일컬어 한바탕이라 한다
웃음에는 색깔이 없다 뒤가 없고 모퉁이와 어둠이 없다 그렇게 잘 깎아 놓은 웃음엔 어깨춤이 깃들고 흥이 달라붙는다
웃음을 깎고 덜어낸 안쪽은 공터로 비워 두었다 그곳은 어떤 얼굴도 꼭 맞는 곳이다
안동소주
희로애락은
그 도수가 다르다
기쁨의 도수는 춤추는 도수이고
슬픔은 점점 가라앉는
무거운 도수다
첫 잔의 도수는 맑고
여러 잔을 비울수록 도수는 붉어진다
대낮에 마신 도수는 낮달처럼 종잡을 수 없고
어둑해질수록 그 도수는
앞에 앉은 사람의 온기를 닮아 간다
도수는 두 사람 사이의 간격,
그 어디쯤에서 수평을 맞추려고
술잔 속 태를 잰다
그런 술의 도수는 말을 들뜨게도 하고
말을 구기기도 하지만 그렇게 구겨진 말을 펴는 것 또한
술의 도수다
안동소주는 들뜬 취기를 다시
차분히 내려받은 술이다
슬픔을 배려하고 기쁨엔 어깨춤을 추는 취기,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벼의 겸손이 똑똑 한 방울씩 모여
겨우 한 병이 되는 술
또 안동소주는 양반과 평민 그 언저리를
어물쩍, 뒤섞는 술이다
추임새가 들어 있는 술
사람을 이해하는 술
어깨춤을 추게 하는 술
두 병 마시면 저잣거리가 되는 술
지금도 안동소주를 마시면 내 습관마다 울 아부지의 불콰한 미간이 좁아진다거나 할배의 말 많은 주사가 있다 안동소주 올린 제사상에는 배차 속구배이로 부친 전도 좋고 오래 삭힌 가오리찜도 좋고 서미골 작은어메가 대친 문어면 더 좋다
풍산 아제요!
재 너머 참꽃들이 지천에 난리났디더
이런 날은 안동소주 한잔 해야 안 될리껴
북애
강 건너를
미래라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붙잡아 둘 수 없는 것들은
돌아가는 여유를 부렸다
일 년에 한 번쯤은 무지개가
하늘과 강물에 아치형 다리를 놓기도 했지만
절벽은 나에게 저항이었다
절벽은 차갑게 등진 모습이었으므로
북애는 언제든 뛰어내릴 태세였다
등성이의 소나무들은 일제히 아래를 향하고
금방이라도 수천 마리의 말들이
북쪽 끝에 올라가 고삐를 당기고
느리게 느리게 하회의 서쪽까지 에워쌀 것만 같았다
흐르는 것만이
자라는 것이라는 걸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는 나의 끝에 다다라서야 알았다
푸른 장딴지로 물속 깊이를 재던 소나무들이
하회의 허리춤 아래인 것도 그때 알았지만
물의 발길질에 조금씩 깊어진
물속은 더 낮게 물의 철로가 놓이고
물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뒷배처럼 무심한 듯 돌아서는 역이 있었고
강엔 노을을 실어 나르는 한 척의 배가 있었다
가난한 말 듣고 북애 앞에서 소리치면
조금 살이 붙은 말이 되돌아오곤 했다
강을 건너가는 말의 절반은
노을이 되었다
등지고 싶은 일을 배후로 삼는 북애에 가면
건너갈 수 없는 강과
넘지 못할 산 앞에 있는 저녁 시간엔
노을만이 집처럼 우뚝하다
[출처] 제1회 안동문화상 / 황주현|작성자 ksujin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