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장석남
눈 오는 날 오후에 할머니는 옻칠한 반상 하나를 펴고 그 위에 노란 콩을
한주먹씩 쏟아놓고 고르곤 하였는데 그 상 위의 소리는 참으로 들을 만한
것으로서 거듭될 때마다 처마 끝으로 눈송이들이 더 모여드는 것이었다.
여문 것들은 상 끝으로까지 저절로 굴러와 닿았는데 자꾸 밖을 내다보는
나를 부르러 오는 것만 같았다. 이듬해 반소매 차림으로나 안 사실이지만
푸른 떡잎 두 개가 솟아나오는 것을 보니 그때의 그 상 위에서의 제 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생긴 것이었으려나? 보태서 창문 밖 눈의 소리도 새겨들었
을 터이니 그 작은 콩 속의 두 귀는 너무나 깊고 크고 밝았던 것이다
—장석남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 (창비, 2025)
_장석남 시인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마당에 배를 매다』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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