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만 모르는 세계
배영옥
찌그러진 주전자를 옆에 두고 한 아이가 웅크려 울고 있다
반나절이 다 익어가도록 흐느끼고 있다
비행기가 머리 위로 낮게 스쳐간다
발등을 타고 오르는 개미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이다가
젖은 눈물자국이 말라가는 한낮의 아이
오랫동안 내 속에서 죽은 아이
지금도 포도나무를 보면 되살아나서
자전거 바퀴를 한 발로 돌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
태양 아래 포도나무 잎사귀만
무성하게 푸르고
포도만 알알이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문학동네. 2019)
_배영옥 시인(1966~2018)
1999년《매일신문》신춘문예 시「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당선
시집 『뭇별이 총총』, 유고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다』(문학동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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