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이원론적 세계관과 신체에 감금된 이미지 이미지는 영원에 대한 인간의 욕망에서 발생 이미지는 부재의 표상, 죽음을 넘고자 하는 열망의 산물 고대 벽화, 대중문화의 스펙터클 등은 ‘영원성’을 지향하는 이미지 자본주의는 죽음을 억압하고 스펙터클로 영원성 환상을 제공 이미지는 죽음(유한)과 영원(무한)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원론적 구조 안에 있음 이데아 중심적 세계관 = 유한한 인간 존재의 보상심리로 작동 2. 내재성의 구도와 이미지의 해방 인간 중심주의의 초월 이미지(이데아)는 환상 스피노자식 내재성: 자연 안의 신 / 신과 인간 구분 없음 이미지 = 물질 = 운동, 즉 이미지의 실체는 우주적 구성요소 베르그손의 지속(durée): 이미지들은 우주의 지속 중 한 단면 인간은 지속을 온전히 파악 못하고 감산하여 인식 “뇌는 스크린이다” → 지각은 우주로부터 감산된 결과 순수지속: 인간 뇌로는 포착 불가능한 우주의 실재 3. 이미지 체계의 유형과 구조 이미지의 두 체계: 과학의 체계: 모든 이미지가 절대적 의식의 체계: 모든 이미지는 ‘나의 신체’ 중심으로 구조화 베르그손은 이 두 체계를 뇌를 경계로 구분 뇌는 연장과 지연 기능 수행 → 뇌의 이미지 = 우주적 이미지 일부 결론: 인간의 이미지 지각은 전체 중 일부, 인간은 ‘불확정적 중심’ 4. 수학적 연속체와 이미지 존재론 수학적 실수 연속체(정수, 유리수, 무리수)에 빗대어 이미지 구조 설명 이미지 유형: 정수 = 의미 부여된 유기적 체제 무리수 = 비의미적이고 무질서한 크리스털 체제 유리수 = 그 사이 중간지대 이미지의 크리스털 체제 = 가산(역감산)의 결과로 발현된 잠재성의 세계 표현 요약: 유기적 체제: 이해 가능한 의미 질서 크리스털 체제: 무한히 펼쳐진 잠재적 의미들 5. 이미지 감산의 뇌-도식 뇌는 우주적 지속에서 이미지들을 감산하여 의미 부여 인간의 의식에서 이미지가 형성되는 과정 = 뇌의 진화와 기억 구조 김춘수의 ‘서술적 이미지’ → 의미 제거된 상태(절대적 심상) 그러나 ‘절대성’은 때로 초월적 숭고로 귀결되며 다시 이원론에 함몰될 위험 존재 6. 이미지의 새로운 지층과 시적 사유 현대 시인은 뇌 이전의 ‘잠재적인 것’에 도달하고자 함 ‘신체에 감금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우주적 지속의 단면을 포착하려는 시도 비인간주의적 이미지 탐색: 인간 중심을 해체하고 분자적 지각 작용으로 확장 ‘영원에의 갈망’ → ‘이 세계의 잠재성’으로 전환 시적 이미지의 과제: 질서 있는 의미체계에서 벗어나 무한소의 주름들(잠재태)을 펼쳐내는 것 새로운 사유와 감각의 가능성 창출 요약 핵심: 이미지는 더 이상 인간의 신체나 죽음을 초월한 영원의 환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주의 지속 안에서 나타나는 운동적 실재이며, 시인은 이를 감산 이전의 ‘잠재적 이미지’로 복원하려는 사유적 혁명을 수행해야 한다. -------------------------------------------- (본문) <박대현 평론가의 현대시 읽기> 시와 이미지‧1 -내재성의 구도와 이미지의 해방 박대현(문학평론가) 1. 이원론적 세계관과 신체에 감금된 이미지 이미지의 탄생은 영원에 대한 인간의 갈망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지각하는 이미지는 연속적으로 변해가는 것이므로, 고정되고 불변하는 이미지에 대한 갈망은 곧 영원에 대한 것이다. 이미지는 결핍을 무대로 삼는다. 현재 여기에 있지 아니한 것, 즉 부재하는 것에 대한 갈망이야말로 이미지의 기저에 놓인 인간의 욕망이다. 고고인류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고대 벽화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라.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이미지의 형상들은 그들이 갈구했던 삶의 모습이자 사라져가는 형상들의 영원한 각인(刻印)을 함축한다. 그러나 그 각인조차 세월의 마모를 피해갈 수 없으니 이미지는 영원에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왜 닿을 수 없는가? 이미지는 신체에 감금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감각하는 이미지는 신체적인 것이다. 신체에 감금된 이미지는 신체의 죽음 이후 소멸하고 만다. 이미지는 죽음과 영원 사이에 꽉 낀 채 죽음 쪽으로 끌려가면서 영원에 육박하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따라서 오래전에 읽었던 레지스 드브레의 말은 여전히 인상적이다. 이미지의 탄생은 죽음과 결부된 면이 있다. 아무튼 분묘에 나타나는 고대의 이미지란 죽음에 대한 거부이자 영생을 위한 것이었다. 사회생활에서 죽음이 잊혀 지면 잊혀 질수록 이미지의 생명력도 그만큼 덜하게 되고,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요구 또한 덜 긴요하게 된다. 이미지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 부착되어 있다. 죽음을 이기고자 하는 불가능한 욕망이. 죽음을 넘어서고자 하는 이미지는 모든 이미지의 전제 군주다. 대중의 열광을 이끌어내는 이미지는 대부분 영원성의 환상을 심어준다. 아이돌 스타의 뮤직비디오는 온통 그런 이미지들의 향연이다. 이데아의 형상이자, 이데아의 강림이다. 그곳에는 어떤 노쇠와 죽음도 멸균 처리되어 있다. 인간을 사로잡는 이미지는 오랫동안 그런 이미지여야 했다. 생명의 빛, 영원의 빛, 황홀경의 빛이 인간 내면을 비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면의 짙은 어둠이 인간의 내면을 장악한다. 어둠 역시 인간을 지배하는 이미지임은 물론이다. 자본주의는 그런 이미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결핍과 절망의 이미지는 억압된 주체가 사적 영역에서 은밀히 감당해야 할 몫이다. 자본주의의 이미지는 기 드보르가 갈파했듯, 정치적 환상의 구현이라 할 수 있는 스펙터클(spectacle)로 총화를 이룬다. 스펙터클은 인간의 죽음을 벗겨내고자 하는 자본의 욕망과 환상이 빚어낸 이데아적 형상이다. 죽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하여, 우리는 도시의 스펙터클 이면에 있는 폐허를 직관한다. 모든 이미지는 사라진다. 시간 축 너머에서 지금 현재의 스펙터클은 이미 소멸하고 있다. 이미지의 운명은 죽음(유한)과 영생(무한)의 길항관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신체에 감금된 이미지는 유한과 무한의 이분법 속에 있다. 기실 이것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 중심주의에서 나온 이원론적 세계관 속에서 죽음/영원, 유한/무한은 인류의 정신사에서 유구한 대립구도를 이룬다. 이 대립구도는 신체의 유한성에 결박당한 결과다. 인간의 필연적 운명인 죽음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과 환상의 생산물이 이데아의 세계다. 세계의 원본인 플라톤의 이데아와 그 복사물로 전락해버린 이 세계. 이 대립구도의 기저에는 영원/죽음이라는 이항대립이 깔려있다. 오로지 죽음 때문에 이 세계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진리가 될 수 없는 불완전한 것이 된다. 진리는 초월 세계의 이데아의 형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하여, (신체에 감금된) 이미지는 무한에 육박하려는 욕망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유한 쪽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나락(奈落)에 빠진 이미지의 운명이다. 2. 내재성의 구도와 이미지의 해방 이미지는 신체에 감금되어 있다. 죽음을 거부하는 인간의 욕망은 영원성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미지에 투여된 영원의 갈망은 결국 인간 자신을 향한 것이다. 따라서 이데아를 향한 욕망은 인간 중심주의의 명확한 증좌다. 유한과 무한의 이분법적 세계관은 신적 초월의 세계(이데아)를 가정하지만, 그것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이 빚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면 인간의 유한성은 허구적 개념이 되고 만다. 생각해보라. 해체되는 것은 인간의 육체적 형상이지, 인간을 이루는 물질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변형된 채로 이 우주 속에 여전히 존재한다. 우주의 모든 생명체들 마찬가지다. 생명체를 이루는 물질은 해체될 뿐 소멸하지는 않는다. 소멸의 기준을 인간 신체에 두느냐, 분자 혹은 원자에 두느냐에 따라 유한성의 페이소스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세계를 파악하는 준거가 한 개체의 형상을 벗어난다면, 이 세계에 유한한 것은 없으며 오직 생성과 해체의 무한한 변주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세계 바깥의 초월 세계를 상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내재성의 구도다. 내재성의 구도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붕괴시킨다. 이원론적 세계관이 붕괴된 지점에서 이미지는 신적 초월(이데아)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내재성의 구도가 ‘인간/신’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폐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이 곧 자연이고 인간은 자연적 생성의 일부이며, 신은 인간의 삶속에도 내재하게 된다. 이로써 이미지는 이데아의 복사본이 아니라 세계를 이루는 물질이자 운동 그 자체가 된다. 이미지의 원본에 해당하는 초월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세계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진리의 실재성, 다시 말해 물질과 운동으로서의 실재성을 획득한다. 내재성의 구도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폐기한다. 이데아는 초월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으며, 이 세계 내에 변화와 생성의 과정으로 존재한다. 베르그손적으로 말하면, 이 세계는 물질이자 운동이며, 그것은 곧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인간의 신체에서 해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지는 베르그손을 통해서 신체에 감금된 이미지에서 우주를 이루는 이미지로 해방된다. 이미지는 물질이자 운동이다. ‘이미지=물질=운동’이라는 등식을 도식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속 속에서 이미지들의 출현> 위 그림에서 중요한 개념은 물론 ‘지속’(durée)이다. 공간 축만을 상정했을 때의 위 그림은 삼차원적 기하학에 해당하겠으나, 시간 축을 설정하는 순간부터 4차원적 기하학이 펼쳐지게 된다. 그러니까 베르그손의 이미지는 시간축의 한 단면을 잘랐을 때의 이 세계의 운동적 양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미지를 다 모은 것, 즉 이미지들의 총체는 곧 우주다. 따라서 위의 그림은 우주적 지속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이미지가 곧 우주적 지속의 한 단면임을 말해준다. 우주적 지속이 곧 이 세계의 실재라고 할 때, “이미지는 지속하는 실재의 흐름에서 나타난 순간적 단면들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각 능력은 세계의 실재에 해당하는 지속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인간은 우주적 지속을 감산의 방식으로 파악한다. 영화의 초당 프레임 수가 24라고 한다면 영화는 실제 사물들의 지속을 그만큼 감산한 것인데, 마찬가지로 인간의 뇌도 객관세계의 지속을 감산하여 파악한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의 유명한 명제인 “뇌는 스크린이다”의 의미다. 베르그손은 인간이 파악 불가능한 지속 전체를 ‘순수지속’이라 명명한다. ‘순수지속’은 감산의 방식을 취하는 인간의 뇌로써는 파악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지금껏 파악해왔던 우주적 실재는 이미지들의 총체가 아니라 그것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파악한 생(生)의 이미지는 인간의 뇌를 통해 감산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들뢰즈에게 인간적 중심은 ‘불확정적 중심들’이다. 중심으로 확정될 수 없는 임시방편의 중심이되 종내는 해체되어야 할 중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불확정적 중심들’로부터 생산된 이미지를 세계의 객관적 실재라고 믿어왔으며, 심지어 이데아의 세계까지 구축한다. 이데아의 세계는 인간의 뇌 속에 이미지로 들어앉은 것이다. 그것 역시 인간적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베르그손의 이미지는 신체에 감금된 이미지를 해방함으로써 우주적 지속으로 확장시킨다. 인간의 신체에 감금된 이미지를 우주적 지속 내에 배치시킨다. 이로써 이미지는 인간의 신체를 벗어나 우주로 확장되며, 이미지의 존재론적 의미는 전혀 달라지게 된다. 영원의 이미지는 인간의 뇌에서 발현된다. 영원의 이미지는 죽음을 인식하기 시작함으로써 내세를 갈구하기 시작한 인간의 의식 작용에서 비롯된 것으로 뇌를 중심으로 한 인간의 신체 내에서 형성된 이미지이다. 다시 말해 영원의 이미지는 영생의 욕망이 지배하는 인간 신체에 감금된 이미지다. 베르그손은 이미지의 개념을 인간 신체로부터 해방시킨다. 이미지의 해방과 무한한 자유. 그의 이미지 개념은 우주적 지속에 해당한다. 인간은 우주의 일부이므로, 인간의 의식작용 또한 우주적 지속에 포함되고 인간의 의식작용에서 형성된 이미지 역시 우주적 지속의 한 단면으로서의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신체를 기준으로 할 때 인간의 의식을 이루는 이미지와 우주적 지속의 객관적 세계를 이루는 이미지는 인간 신체를 경계로 분리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베르그손이 말한 이미지들의 상이한 두 체계다. 그런데 어떠한 철학적 이론도 같은 이미지들이 두 상이한 체계들 안으로 동시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에는 결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 하나는 과학에 속하는데, 거기서는 각 이미지가 단지 자기 자신만을 따르기 때문에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의식의 세계인데, 거기서는 모든 이미지들이 나의 신체라는 하나의 중심적 이미지를 따르며 그것의 변화를 좇는다. 따라서 실재론과 관념론 사이에 놓인 문제는 아주 명백하게 된다. 즉 이 두 가지 이미지들의 체계가 서로 간에 유지하고 있는 관계란 어떤 것인가? 또한 주관적 관념론은 첫 번 째 체계를 두 번째 체계로부터 도출하는 것으로부터 구성되며, 유물론적 실재론은 두 번째 체계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베르그손은 신체를 경계로 하여 객관적 물리 세계(과학)에 속하는 이미지와 인간의 의식 세계에 속하는 이미지를 구분한다. 먼저, 의식 세계의 이미지를 생각해보자. 영원에의 이미지는 신체의 유한성(죽음)을 인식한 인간 의식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영원의 이미지는 신앙과 무관하지 않으며, 신앙의 능력은 뇌의 진화에서 비롯된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찰스 다윈이 스물아홉 무렵에 신의 관념이 “뇌의 분비물” 혹은 “유전되는 뇌 구조”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신앙과 뇌의 해부학적 진화의 연관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는 과정에 있다. 영원을 향한 갈망과 이미지가 ‘뇌의 분비물’이라면, 그것은 신체 내에 감금된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베르그손은 이미지의 개념을 인간의 의식 바깥, 즉 객관적 물리 세계로까지 확장한다. 인간의 뇌는 ‘지각의 연장’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의식과 객관세계의 이미지들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우주적 지속으로서 내재성의 평면을 이루고 잇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뇌는 외부 세계의 자극을 ‘연장’하고 반응을 ‘지연’시킨다. 그러한 연장과 지연의 결과가 바로 인간 대뇌피질의 밀도 높은 뉴런 체계다. 따라서 연장과 지연을 설치하는 신체기관인 뇌는 “그 자체로 고도로 복합적인 접속들의 결과”이면서도, 인간이 객관세계와 독립된 개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뇌가 생산하는 이미지는 우주 전체 이미지들의 한 부분이고, 베르그손의 어휘를 사용하자면 우주적 지속의 일부다. 이로써 인간의 신체가 점유해왔던 세계의 중심성은 사라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뇌가 생산한 이미지는 인간 중심주의에서 해방되며, 최소한 그 중심이란 것이 ‘불확정적 중심’에 지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3. 우주적 지속과 이미지의 도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우주적 지속으로부터 불확정적 중심들로서의 이미지를 채취해낸다. 감산의 방법으로 말이다. 그리고 우주적 지속에는 인간이 미처 채취하지 못한 무한한 이미지들이 잠재되어 있다. 이것이 들뢰즈가 매우 중요하게 말한 바 있는 ‘잠재적인 것’(잠재성 혹은 잠재태)이다. ‘잠재적인 것’은 우발성과 결합하여 현실적인 것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위의 도식이 중요하게 암시하는 바는 인간이 파악한 이 세계의 이미지가 우주적 지속에 비하면 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우주적 지속의 대부분은 잠재적인 상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들뢰즈의 이미지의 존재론이라 할 수 있는데, 비유컨대 이를 수학적 연속체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수학적 연속체 내에는 자연수, 정수, 유리수(유한소수, 순환소수), 무리수(무한소수)를 포함하여 무한한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 수학적 연속체에는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공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실수의 ‘완비성’(completeness)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우리는 이 수학적 연속체를 자연수와 정수, 그리고 가끔씩 유리수 정도로만 파악한다. 그 사이에 놓여 있는 무리수에는 일상적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다.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자연수, 정수, 유리수, 무리수를 이미지 체계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연수, 정수를 이미지의 차원에 적용하면, 의미 파악이 가능한 이미지의 유기적 체제(régime organique)에 해당하고, 무리수는 크리스털 체제(régime cristallin)에 해당한다. 유리수(유한소수, 순환무한소수)는 유기적 체제와 크리스털 체제 그 중간쯤에 놓이게 될 것이다. 들뢰즈는 유기적 체제에 대해 합법적이고 인과적이며 논리적인 접속의 체제로서 진리언표적인 속성을 갖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유기적 체제가 감산을 통해 형성된 것이라면 크리스털 체제는 역감산(가산)을 통해 유기적 체제가 상실한 내재성의 평면을 현행화함으로써 구축된 카오스의 세계다. 쉬운 이해를 위해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미지의 유기적 체제는 의미의 질서를 부여받은 체제이며, 크리스털(결정체) 체제는 크리스털이 다면체이듯 의미가 무질서하게 분산되는 체제다. 자연수 혹은 정수 사이에 무한히 많은 무리수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해 가능한 이미지들(이미지의 유기적 체제) 사이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이미지의 크리스털 체제)이 존재한다. 철학자 박성수는 들뢰즈의 이미지 체제를 의미(질서)의 유무에 따라 이미지의 상대적 체제, 이미지의 절대적 체제로 명명한 바 있다. 자연수 ‘1’과 ‘2’사이에 무한한 숫자들이 존재하듯이,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이미지들 사이에는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이미지들이 무한히 존재한다. 이때의 이미지들은 ‘상대적 이미지’와 ‘절대적 이미지’ 사이에서 무한히 펼쳐져 있는 상태다. 다시 말해, 인간의 뇌는 ‘스크린’처럼 우주적 지속으로부터 ‘감산’의 방식을 통해 이미지를 채취함으로써 고 이미지의 절대성에서 상대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우주적 지속과 인간 뇌의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다음과 같은 이미지의 도식을 구상해볼 수 있다. <표 5>의 도식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뇌의 감산 작용이다. 이미지의 유기적 체제는 뇌의 감산으로 이루어진다. 이미지의 상대적 체제는 인간의 뇌를 통해서 형성된다. 오랜 시간의 진화 결과인 인간의 뇌는 세계의 질서에 대한 무의식적 추리를 통해 지각의 애매성을 제거함으로써 질서 정연한 세계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 두뇌의 감산 작용이 개입한다. 인간의 뇌는 우주적 지속으로부터 제한된 정보(감산작용의 결과)를 취하게 되며, 이 제한된 정보로써 통합된 의미체계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 체계에서 떠오르는 이미지와 객관적 실재로서의 이미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이미지들의 상이한 두 체계 속에서 오늘날의 시인들은 시적 분열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전조는 오래 전에 이미 발생했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김춘수와 김준오의 이미지 분류 체계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들의 이미지 분류체계에 대한 이해는 매우 피상적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이미지 분류체계를, 우주적 지속의 한 단면인 이미지(물질, 운동)가 두뇌의 뉴런 체계 속에서 연장과 지연 과정을 거치면서 발생하는 이미지 분류 체계 속에 함입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도식이 나올 것이다. 인간의 두뇌에 지각된 이미지가 상대적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은 주어진 정보를 통합하고 해석하고 체계화하는 무의식적 추리의 자동화를 거쳐 통합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을 만들어낸다. 에델만은 의식을 ‘기억된 현재’라고 부르는데, 의식은 모든 과거의 경험을 현재에 투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적 정보를 통해 지각하는 세계는 결국 의미의 고정점을 확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이미지는 상대적 이미지를 향해 간다. 김춘수는 시의 이미지를 논하는 과정에서 비유적(metaphorical) 이미지와 서술적(descriptive) 이미지로 나눈다. 용어상의 부적절성이 논란이 되기는 하지만, 서술적 이미지는 인간적 의미를 제거함으로써 사물의 실재 그 자체에 집중하는 사물시에 주로 사용된다. 서술적 이미지는 다시 사생적(寫生的) 소박성의 유무(이미지의 대상 유무)에 의해 두 가지로 구분되며, 사생적 소박성을 제거한 이미지가 바로 무의미시를 이룬다고 말한다. 김준오의 분류 체계에 따르면 김춘수의 서술적 이미지 중에서 사생적 소박성을 상실한 것이 곧 절대적 심상이다. 이를 다시 들뢰즈의 이미지 분류에 적용하면, 표면적으로는 이미지의 절대적 체제(이미지의 크리스털 체제)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준오의 절대적 심상이 내재성의 세계관을 획득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절대적 심상에서의 ‘절대적’은 이미지의 의미를 해석하기 힘들수록 인간에게 어떤 무력감을 안겨주는 단어다. 그것은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파지할 수 없는 거대하면서 압도적인 대상으로서 인간에게 숭고미를 유발한다.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하고 신비로운 대상은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 즉 신의 자리를 점유한다. 절대적 이미지는 해석불가의 영역, 또는 비인간의 영역으로서의 신의 숭고미와 관계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인간과 신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반 하는 것이 아닌가. 4. 이미지의 새로운 지층과 사유 <표 6>의 도식에서 중요한 것은 뇌를 통과하기 전후의 이미지들의 관계다. 뇌를 통과하기 전의 이미지(물질, 운동)는 뇌를 통과하면서 감산 작용을 거치게 되며, 세계(우주)의 실재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다. 베르그손과 들뢰즈가 말해주듯이, 현대철학의 이미지론은 감산 이전의 이미지를 지향한다. 그것이 바로 지속의 세계이자 내재성의 평면을 이루는 세계다. 그것은 이미지의 유기적 체제에 감산이 아닌 역감산(가산)을 충격함으로써 현실화될 수 있는 이미지의 크리스털 체제다. 이미지의 크리스털 체제를 수학적 연속체에 비유하자면 무리수의 세계다. 들뢰즈는 이를 ‘잠재적인 것’(the virual)이라 불렀다. 현대시의 이미지에서 보다 관심있게 봐야 할 것은 바로 인간의 뇌 이전의 이미지의 세계다. 물론 인간의 뇌를 통해서 그것을 다시 이해해야 하는 한계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재성의 평면 즉, 내재성의 구도에서는 새로운 이미지가 발현될 수밖에 없다. 내재성의 이미지가 단순히 인간의 시점을 배척하는 비인간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중심성이 인간 신체를 벗어나 보다 확장되는 결과를 낳는다. 중심 없는 중심이다. 앞서 언급했던 내용을 재활용하자면, ‘불확정적 중심’의 확장이다. 이것은 인간의 신체를 내재성의 구도로 바라보는 결과로서의 이미지가 아닐 수 없다. 내재성의 구도에서는, 인간의 외부 감각의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지각작용이 우주 내에 존재하는 분자적 지각작용으로 이해된다.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만 지각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분자적) 지각작용 중에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지각작용은 뇌의 뉴런 체계 속에서 지각의 연장과 반응의 지연을 통해 자아의 의식을 발생시키며, 이로써 인간 신체의 중심성이 야기되는 것이다. 내재성의 구도로 인한 이미지는 인간 신체의 경계를 벗어나 분자적 지각작용으로 이행하는 이미지이며, 초월과 영원에의 열망을 이 세계의 잠재적인 것을 향한 열망으로 바꾸어 놓는다. 현대시의 이미지는 잠재적인 것을 지향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현대 시인들의 시적 경향도 잠재적인 것에 맞닿아 있다. 질서(의미)가 부여된 이미지(물질, 운동)에의 정박을 거부하고 무한소(the infinitesimal) 사이에 주름 접힌 이미지를 향한 불가능한 사유를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신체에 감금된 이미지가 아니라 신체의 경계를 벗어난 우주적 지속의 단면들, 즉 내재성의 평면을 탐색하거나 신체의 열망에 결박당한 이미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유를 드러내는 시인들. 이들의 시적 이미지는 신체의 한계 내에 감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넘어 우주적 지속 내에 주름 접힌 잠재적인 것을 펼쳐내고자 한다. 그것은 곧 영원을 향한 신체의 열망을 벗어나 이 세계의 내재성을 탐색하고자 하는 이미지이다. 세계의 오래된 이미지를 벗겨내고 새로운 이미지의 지층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이미지의 사유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박대현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평론집 『우울한 것의 추락』, 『혁명과 죽음』, 『황홀한 아파니시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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