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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평론

연기(演技)하는 몸들, 연기(延期)하는 몸들―강금희의 시세계

작성자김수엽|작성시간26.06.13|조회수42 목록 댓글 0

연기(演技)하는 몸들, 연기(延期)하는 몸들
―강금희의 시세계


장석주 (문학평론가·시인)



몸에 대하여



몸은 살갗과 피와 뼈와 심장과 두뇌로 이루어진다. 몸들은 윤곽과 부피를 갖지만 항상 그 이상이다. 몸은 감각하고, 사유한다. 몸들은 움직이고, 닿고, 스치고, 만지고, 비비고, 쓰다듬고, 물고, 빨고, 잡고, 놓아주고, 흔들고, 어르고, 안고, 더듬고, 주무르고, 던지고, 피한다. 몸은 타자, 그리고 세계와 처음으로 만나는 접속점이다. 우리는 몸으로 도래하는데, 이때 몸은 보이지 않는 심연의 화육(化育)이다. “영혼은 몸의 형태이고, 고로 몸 그 자체(확장된 프시케)이다. 그러나 정신은 몸이 스스로를 투신하는 구멍의 비-형태 또는 형태-너머이다. 몸은 영혼 안에서 도래하고, 정신 속에서 스스로를 제거한다.” 몸은 먹는-몸, 말하는-몸, 노동과 수고로 교환된는-몸, 타인과 접속하는-몸이다. ‘나를 만지지 마라’ 할 때 금지되는 대상은 몸이다. ‘나’는 곧 몸-나다. 이렇듯 삶은 몸으로 산다는 함의에로 귀속한다. 사는 한에서 몸의 실존, 즉 몸을 써서 도모하는 일, 그게 삶이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실존 사건도 몸을 통해서만 겪는 일이다. 그러니 삶의 가능성이란 곧 몸의 가능성일 테다.



일찍이 철학자 니체는 몸의 귀환을 예언한다. 니체는 다들 정신과 몸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한 뒤 몸을 정신의 부속물, 영혼의 도구쯤으로 취급하던 시대에 몸이 인간의 전부인 것이라고 선언한다. “감각과 정신은 도구이자 장난감일 뿐이다. 그들 뒤에는 자기라는 것이 있다. 자기는 감각의 눈을 도구로 탐색하며 정신의 귀를 도구로 경청한다. 자기는 언제나 경청하며 탐색한다. 그것은 비교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 ……자아를 지배하는 것도 그것이다. 형제여, 너희의 사상과 생각과 느낌 뒤에는 더욱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다. 이름하여, 그것이 바로 자기다. 이 자기는 너의 신체 속에 살고 있다. 너의 신체가 바로 자기다.”(『차라투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영혼, 정신, 몸 중에서 몸이 가장 앞선다. 정신이 몸을 지배하게 아니라 몸이 정신을 제 도구로 쓴다는 니체의 선언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것이다. 그는 신체, 즉 몸이야말로 명령자이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라고 단언한다. 사상과 생각과 느낌 뒤에 ‘자기’라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몸’이 그 자기라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몸을 창안하고 발명하며, 몸을 부리고 섬기며, 몸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진리로 굳어진다. “몸은 길고, 넓고, 높고, 깊다. 더 크거나 더 작은 저마다의 크기 안에 이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몸은 형태의 형태이자 영혼의 형태”인 것이다. 인간은 몸 그 자체고, 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몸은 옷속에 숨는다. 하지만 무엇으로 가리든 간에 몸이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옷은 제 2의 피부이자, 문명이 입힌 새로운 자아다. 옷은 그것을 입은 이의 직업, 신분, 취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가 누구인가는 그가 입은 옷으로 판단된다. 알몸이 되는 것은 옷의 표상에서 벗어나는 행위다. 아담은 발가벗은 게 아니라 신이 준 순결과 불멸의 몸을 걸친 상태다. 이 태초의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발가벗은 채 지내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금지된 열매를 먹고 죄를 지은 뒤 비로소 신의 눈길을 피하고 은총을 잃은 알몸을 가린다. 죄를 지은 알몸이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발가벗긴 알몸이란 몸과 옷의 분리가 아니라 옷을 상실한 결과다. 알몸은 본성으로 돌아감이 아니라 벗김과 헐벗음으로만 겪는 사건이다. “발가벗음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오늘의 시대에 대중에게 드러내는 알몸은 모욕당하는 몸이다. 조르조 아감벤이 개념화한 호모 사케르가 바로 그것이다. 발가벗긴 채 내쫓기는 몸들, 태어나고 자란 지역을 탈출에서 여기저기로 떠도는 난민들. 난민들은 더도 덜도 아닌 발가벗은 몸들이다. 그들은 자기 보호장치를 갖지 못한 채 떠도는 생명들이다.





흩어지는 몸들, 주름잡힌 몸들, 펼쳐지는 몸들



몸은 세계와 대면하는 접혀 있음이다. 몸은 접힌 주름들이다. 그 주름 안에 과거의 시간들, 상처, 기억들이 숨어 있다. 주름이 과거, 상처, 기억들이다. 주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것은 입구도 없고 출구도 없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주름들이다. 산다는 것은 그 주름들의 펼침이다. “커튼은 양쪽으로 접혀서 소란스럽고 두 귀 쪽으로 접었던 내 얼굴이, 등에 접혀있던 손들이 다음생의 문을 양쪽으로 부산하게 접고 있다.”(「접힌 것들」) 접었던, 접혀있던, 접고있다와 같은 연속되는 어사를 통해, 시인은 우리의 실존이 몸의 주름으로 접혀 있음을 적시해낸다. 삶이란 접힌 것들을 펼쳐내면서 닫는 일이다.



오늘날 몸들은 어디에 있는가? 몸들은 무엇을 하는가? “몸들은 우선 교통수단을 타고 일터로 가거나 일을 끝내고 돌아오고, 휴식을 기다리고, 휴식을 취했다가 이내 그것을 포기하고, 일하고, 상품 속에 병합되어 상품 그 자체가 되고, 노동력이 되고, 축적되고 축적되는 자본 시장에서 축적할 수 없되 팔거나 소진시킬 수 있는 자본을 형성한다.” 우리 몸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배치되며, 재생산된다. 몸은 재화이고 자본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몸은 그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삶의 종말은 소진되 몸의 종말이다. 다 쓰고 잉여가 되어버린 몸은 삶의 무대에서 퇴출당한다. 명예퇴직, 정년퇴임, 이라는 언어로 포장하지만, 그것은 노동시장에서 더 이상 유통할 수 없는 몸들에게 내려지는 폐기처분 선고다.



강금희 시인은 몸에 대해 쓴다. 그의 상상세계의 중심에 몸이 있다. 몸에 달라붙는 시선은 다분히 임상의학적이다. 사유의 끝-없음을 앞지르는 시선은 차갑고 객관적이다. 시선은 살아 있는 몸, 헐떡이는 몸, 욕망하는 몸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것들에서 발화되는 말들에 귀를 기울이며, 그것들을 가차없이 헤집는다. 시들은 몸을 사유하고 상상하며 그렇게 구축된 몸의 존재론 위에서 활짝 펼쳐진다. 이때 몸은 흐름이고, 의미의 영역이며, 정념들이자 즐거운 히스테리의 장소다. 몸이 장소라면 이것은 당연히 ‘넓이’를 갖는다. 몸의 넓이는 곧 생각의 넓이다. “인간은 가장 넓은 생물”이라고 할 때 그 뜻은 두 겹이다. 넓은 것은 ‘몸’이자 ‘생각’이다.


인간의 넓이/강금희



인간은 가장 넓은 생물.

헛손질과 헛걸음과 헛말을 일삼는 사람은 사실은 참 넓은 사람이다. 행동 들이 무수히 들어있다. 넓은 세계를 좁은 듯 여행하는 발들은 존재의 평수를 넓히는 자尺들이라면 말없이 앉아있는 사람도 사실은 참 넓은 사람이다. 그 는 생각 속에서 수 백 번 리허설을 하고 있는 중이다. 머릿속에서 낯선 무대 를 수없이 설치하고 공중을 날아 구름을 채집하는,

연습이 많은 사람도 참 넓은 사람이다.
단단한 허공에 깃발을 꽂는 자尺들이다

생각이 넓다는 것과 행동이 넓다는 것은 다른 속束 같은 종種의 인간이라는 뜻이다.

과거가 넓은 사람들, 불의 뿌리에서 빵과 감자를 캐어 본 사람, 가시덤불속 에서 붉은 열매를 따고 하늘을 날아 맹금류를 잡아 본 사람은 참으로 넓은 사람이다.

한길 사람속이 만평의 몸을 만들 듯,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지만 넘쳤던 시간이 있었을 것이고 여전히 넘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만평을 넘겼던 사람이나
한 평을 넘지 못했던 사람이나 같은 평수의 관속에서
손짓 발짓이 잠들고 있다.




헛손질과 헛걸음과 헛말을 일삼음, 무수히 많은 행동들, 여행하는 발들, 생각하는 행위, 생각 안에서의 수백 번 리허설, 공중을 날아 구름을 채집하는 상상들…… 따위가 “존재의 평수”를 넓힌다. 그것은 몸의 넓이와 생각의 넓이를 함께 확장하는 행위들이다. “과거가 넓은 사람들, 불의 뿌리에서 빵과 감자를 캐어 본 사람, 가시덤불 속에서 붉은 열매를 따고 하늘을 날아 맹금류를 잡아 본 사람”도 넓은 활동 범주에 속한다. 몸은 무엇보다도 바깥 공간에 연관된다. 몸은 존재 활동을 통해 자기의 경계를 저 바깥으로 밀며 나간다. 삶 자체가 공간 영역의 확장 운동이다. 시인에 따르면 넓다는 것은 인간 보편의 존재를 알아보는 한 척도다.



몸은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도주선을 타고 다른 무엇으로 변주와 변용이 가능하다. 몸과 자아는 분리되어 있다. “내 안에서 나를 기다리는 나”, “내 안엔 나인 적이 없던 내가”에서 보여지는 분리가 그것이다. “한 번도 부르튼 울음 울어본 적 없고 밥에 목줄 맨 흔적이 없는 내가 허기진 나”(「에고Ego」)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그 몸과 자아의 분리는 희미하게 나타난다. 그 몸은 “지구의 중력이 가득했던 몸”(「오만한 척추」)이고,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이로 뭉쳐진” 그 무엇, 속과 겉으로 이루어진, “단추가 뜯어진 옷”에 가려진 몸이다(「인사이드아웃」). 시인은 몸을 전체로써도 보면서도 다시 그것을 혀, 귀, 손, 눈, 뼈, 피, 뇌, 발, 발가락, 척추, 자궁 들로 해체한다. 낱낱으로 해체된 그것을 다시 하나하나 헤집는다. 혀 : “혀는 고독한 존재,/맛만 보는 허기의 상징/혀는 삼키면 삼킬수록 허기를 배운다.”(「물고기 혀」), 뼈 : “흥겨운 뼈들이 들어있는 몸은 춤춘다.”, “유연한 뼈들은 감정의 상형”(「흥겨운 뼈」), 발 : “발에 귀를 대고 밟아온 철벅철벅, 길의 진자리를 듣는 저물녘이었다.”(「발」), 무지외반증 : “내 어머니의 엄지발가락 옆에 툭 튀어나와 있던 무지외반증, 그것을 외가外家라고 조용히 불러본다.”(「무지외반증」), 손 : “두 손이 세상을 더듬다/손에 잡히는 것이 연명延命이고/길이라고 믿던 시절”(「○,△,□의 완성」), 귀 : “비밀하나를 들려주지 않겠다는 귀/세상의 모든 귀를 잊어버리겠다는 약속이라면/주먹은 고막을 감추고 있다.”(「세 번째 귀」), 뇌 : “복잡한 뇌 속으로 내려치는 빗줄기,”(「뜻, 밖」), 척추 : “지지대였던 척추가 무너지면서/중심이 사방으로 흩어져있다.”(「오만한 척추」), 뱃속 : “누구나 뱃속에선 밑바닥이었다가/입덧을 지나 만삭으로 태어난 복병들이 아니겠는가.”(「복」) 등등의 구절들을 보라. 혀, 뼈, 발, 손, 귀, 뇌, 척추, 뱃속 장기들은 제각각으로 분리된 채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몸, 즉 서로 연결되고 조직되는 하나의 유기체다. 시인의 전언은 인간이 몸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상상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몸은 그것의 무수한 주름 속에 열어서 펼쳐야 할 것을 담는다. “펼치는 일은 끝이 없다. 유한한 몸은 무한을 담는다. 따라서 무한은 영혼도 정신도 아니라 몸의 펼침, 바로 그것이다.” 몸은 사회적 실존의 도구-존재다. 몸은 다른 몸들과 접촉하며 관계를 만든다. 우리는 시간의 축적을 통해 만들어진 몸으로 존재한다. 몸을 탐구하고 시적 사유로 옮겨적는 일은 타자의 세계에 접속하고 소통하며,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의 전부다.





얼굴에 대하여





사람의 얼굴은 필연적으로 진화상에서 겪은 자연선택의 결과물이다. 인류가 지금 같이 납작한 평면 얼굴을 갖게 된 것은 13만 년 전이다. 그때 처음으로 현생 인류와 닮은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난다. 해부학적으로 보자면 평평한 이마 아래로 코가 돌출하고 넓은 뺨, 두 개의 눈과 입으로 구성된 호모 사피엔스의 얼굴 모양은 현생 인류의 얼굴과 닮은꼴이다. 지금의 아프리카 지역에서 처음 나타난 호모 사피엔스들은 우리들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그 얼굴로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제 감정을 드러냈을 것이다.



얼굴은 내면의 정동을 드러내고 동시에 감춘다. 얼굴에 내면 정동이 다 드러나는 법은 없다. 그것은 항상 감춤과 드러냄 사이에 모호하게 걸쳐져 있다. 우리가 타자를 식별하는 것은 얼굴을 통해서다. 얼굴은 타자성이라는 기호를 드러낸다. “얼굴은 신체 중에서도 특히 영혼이 나타나고 변장하는 장소이다.” 얼굴은 타자가 나타나는 방식을 예고한다. 타자가 예고없이 나타나는 법은 없다. 항상 얼굴로 먼저 온다. 얼굴은 “웃음과 울음이 몸을 섞는 접점”(「12월」)이고, “내 안엔 나인 적이 없는”(「에고」) 그것이고, “흉측하다, 라고 말 뱉고 나니/얼굴이 없다”(「외발뜨기」) 할 때 사라지는 그 무엇이다. 본래의 얼굴은 하나의 흰 벽이다. 우리는 그 흰 벽에 자신의 감정을 쓴다. 얼굴에는 분노, 비탄, 슬픔, 기쁨, 사랑, 동정, 질투, 미움, 경멸 따위의 다양한 표정들이 스쳐지나가듯이 흘러간다. 우리는 얼굴을 태어날 때 부여받는 게 아니라 외부의 요구에 의해 발명되는 것이다. 우리 얼굴은 사회적 현전의 진열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연약해서 깨지기 쉽고 상처받기 쉽다. 얼굴은 몸에 귀속되지만 그것이몸은 아니다. 얼굴은 그것이 가진 권력 때문에 몸에서 독립적 지위를 갖는다. 신체라는 영토를 탈주해 독립된 지위를 갖는 것, 그게 바로 얼굴이다.




얼굴에 감정을 쓰고 있다.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감정이 없는 시간이 고작 33초라고 한다. 어쩌면 그것은 감정이 평생의 표정에 들까 말까를 고민했던 순간일 것이다.



웃는 가면은 피곤하다. 그 피곤한 가면 위에 다시 얼굴 없는 가오나시 가면을 쓴다.



태어났을 때부터 망설였던 그 33초를 찾아내어 얼굴에 쓰고, 그들은 가오나시가 된다. 33초의 그 무표정, 강요된 웃음으로 밥을 먹고 집을 짓고 물건을 판다.



중국 허베이성 한단에 있는 한 서비스 업체, 감정노동자들은 매달 한번 있는 휴식의 날에 가오나시 가면을 쓴다고 한다. 태胎에서 갖고나온 가면위에 다시 얼굴 없는 가면을 써야 편안하다면? 그 가면은 주검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사람다움이 아닌 사람처럼 살기위해 자궁 속에서부터 가면을 다듬기 시작한다. 임신 20주 모차르트의 청각을 표정에 담고 3개월째부터는 바깥의 기미에 응대하는 표정을 새긴다.



얼굴의 기원엔 표정이 없다. 맨 처음 울음의 표정이 생겨나고 ‘척’을 도구로 평생 가면을 다듬는 기술이 늘어갈 분, 기쁜 척, 자는 척, 죽은 척, 버럭, 모난 정을 깎아내고 입이 귀까지 찢어지는 웃음을 꿰맨다.



유명한 조각가의 가면이나 무두질만하다 내팽개쳐진 무지렁이의 가면이나 33초 이전 불귀의 무표정으로 돌아가기 경쟁중이다.



「가오나시」 전문



‘가오나시’란 무엇인가?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얼굴 없는 귀신이다. 얼굴이 없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귀신이다. 얼굴은 감추고 사라진다는 점에서 가면이다. “웃는 가면은 피곤하다. 그 피곤한 가면 위에 다시 얼굴 없는 가오나시 가면을 쓴다.” 가면은 양식화된 얼굴이다. 고대 제의, 고대 그리스의 연극, 일본의 전통연극 ‘노’, 중국의 ‘경극’, 우리의 전통 탈춤 연희 따위에서 배우들은 가면을 쓰고 연기를 했다. 연극에서 ‘가면 효과’는 효율적이고 뚜렷하다. “일단 가면은 등장 인물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줄 수 있다. 가면의 정적인 표정은 기묘하게 매혹적이었고, 움직임이 없는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사는 초자연적인 감흥을 더해 주었다.” 얼굴은 자아의 열린 부분이면서 자아를 감추고 달아난다. 열린 채면서 감춰지는 얼굴들. 우리는 사회적 실존을 위해 가면을 쓴다. 엄마라는 가면, 아버지라는 가면, 딸이라는 가면, 아들이라는 가면, 이웃이라는 가면, 선생이라는 가면, 학생이라는 가면, 살인자라는 가면,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 타자라는 가면. 가면, 가면, 가면들. “태에서 갖고나온 가면 위에 다시 얼굴 없는 가면을 써야 편안하다면? 그 가면은 주검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살아 있는 동안 얼굴은 주검을 숨긴 가면이라고 할 수 있다. 얼굴은 타자성의 기표, 즉 페르소나가 나타나는 표면이다. 사람은 평생 감정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자기 감정을 다치지 않고 그것을 감추려고 평생 수백 개의 가면을 쓰고 산다.



무엇보다도 얼굴은 “감정을 쓰고” 있다. ‘쓴다’는 말은 중의성을 품는다. 그것은 덮고 가리려고 가면을 쓰는 것이고, 아울러 문자로 씌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시인은 앞서의 의미로 쓰지만, 독자는 양의적으로 읽는다. “사람다움이 아닌 사람처럼 살기위해 자궁 속에서부터 가면을 다듬기 시작한다.” 이슬람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는 차도르, 성인 남자들이 기른 콧수염이나 턱수염, 눈을 가리는 선글라스 따위는 가면의 바리에이션이다. 사람은 왜 가면을 쓰는가? 여러 이유가 있다. 철학자 니체가 말한 “모든 심오한 영혼에는 가면이 필요하다. 아니, 더 심하게 말하면, 모든 심오한 영혼 주위에는 끊임없이 가면이 자라난다.”라는 언술 속에 그 한 측면이 암시된다. 얼굴-가면은 감정이 출현하는 곳이고, 표정이 나타나는 장소다. 얼굴은 울고, 찡그리고, 웃고, 미소짓는다. 감정이 짓는 다양한 표정들은 삶의 여러 층위들에 대한 반향이다. “얼굴의 기원엔 표정이 없다. 맨 처음 울음의 표정이 생겨나고 ‘척’을 도구로 평생 가면을 다듬는 기술이 늘어갈 뿐, 기쁜 척, 자는 척, 죽은 척, 버럭, 모난 정을 깎아내고 입이 귀까지 찢어지는 웃음을 꿰맨다.” 얼굴이 늘 진실만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얼굴은 ‘척’의 표정들을 짓는다. ‘척’은 타자가 요구하는 것에 내 감정을 맞추는 것이다. 다시말해 갈등이나 대립을 피하려고 가짜 감정을 드러낸다. 얼굴은 ‘버럭’과 ‘모남’을 깎고 버리면서 “입이 귀까지 찢어지는 웃음”을 걸치며 감정노동을 수행한다.



얼굴은 말하는 표면이면서, 윤리성을 선취하는 그 무엇이다. 얼굴은 표면이되 정동의 방출로 심연화가 이루어지는 장소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그것은 얼굴을 아는 것이다. 그 앎은 누군가와 감정을 공유하면서, 타자의 자아에 대한 잠재적 전유를 뜻한다. “우리는 새로운 종족,/한 가족이지만 서로의 얼굴을 몰라요/얼굴을 익힌다는 것은/감정늘 나눠 갖는 일이죠/얼굴 없는 호칭으로 모여/일회성의 관계로 사라지는 탑승객들,”(「더미dummy」) 얼굴의 타자의 현현(顯顯)을 알린다. 얼굴은 우리 앞의 타자다. 얼굴이 없다면 사랑도 없다. 사람은 얼굴을 익히면서 감정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한다. 몸이 그렇듯이 얼굴 역시 수많은 감정 신호와 눈짓들을 주고받는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면서 ‘나’와 타자 사이의 교섭과 소통을 하면서 우리는 이 세계의 실존에 참여한다.





아바타에 대하여



아바타는 텅 빈 얼굴, 몸 바깥에 있는 몸이다. 아바타는 몸의 확장, 자아를 길게 늘어뜨린, 헛-몸이다. 그러니까 ‘아바타’란 몸 없는 몸, 나이되 내가 아닌 ‘나’다. 그것은 가면이고, 도플갱어이며, 나와 닮은 그림자다. 아바타는 ‘나’를 대신해 어떤 일들을 수행한다. 시인의 아바타는 ‘가방’이다. 시인은 바깥으로 나갈 때마다 가방을 메고 나간다. 가방은 시인의 아바타, ‘나’를 대신하는 물건이다.







집을 나선다. 아바타를 메고,



도시는 온통 모서리 진 네모꼴이다가 가끔 둥글게 굴러가기도 하는 커다란 가방이 되어 삼킬 수 있는 것은 다 삼킨다. 위장된 캐릭터들, 과장되고 부풀려진 표정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부딪쳐 멍이 든 가방의 지퍼가 빽빽하다. 요란한 발소리만 담고 돌아온 외출, 가방 안에서 소음과 부패된 공기만 꺼낸다.





오늘의 발자국을 세어본다.

왼발 오백이십, 오른발 오백이십일

몰아치는 회오리나 천둥 번개가 묻어있는

헝클어진 발자국들

괜찮아, 내일은 또 새로운 발자국이 있으니까

노을은 소음에 퇴색되고

어둠엔 매일 매일의 가방이 가득 담겨 있다.





담을 수 없는 것을 좇다가 낡아가는 텅 빈 가방들의 안감엔 오, 지저분한 단절과 절해고도의 풍랑





내 어깨는 한쪽으로 기울었다

다시 아바타의 오늘의 흔적을 제거하고

내일을 수리해야한다.

「아바타」 전문





시인이 외출할 때 어깨에 메고 나가는 가방은 가죽으로 되어 있는 것일까? 가죽 가방은 몸과 다를 바가 없다. 몸은 온갖 장기(臟器)들을, 그리고 욕망들을 담은 가죽 푸대가 아닌가. ‘나’의 아바타인 이 가죽 가방은 거리에서 활보하는 삶, 부풀려지고 과장된 표정을 연기(演技)한다. “요란한 발소리만 담고 돌아온 외출, 가방 안에서 소음과 부패된 공기만 꺼낸다.” 가방은 누군가와 부딪쳐 멍이 들고, 소음과 부패된 공기만을 담은 채 돌아온다. 소음과 부패한 공기는 문명이 분비해내는 가장 흔한 폐해들이다. 이 문명의 폐해 속에서 살아가는 게 제대로 된 삶일 리가 없다. 이 삶의 부정적인 행적은 “헝클어진 발자국들”이 암시한다. 헝클어진 발자국들에 좌절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내일이 있으니까. “괜찮아, 내일은 또 새로운 발자국이 있으니까” 들고 나간 ‘나’의 아바타인 가방은 흠집이 생기고,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닌 어깨는 한쪽으로 기운다. 한쪽으로 기운 삶, 그게 ‘나’-가방의 삶이다. 그것은 흠집들은 제거하고 수리해야 할 무엇이다. 그것은 삶을, 그리고 몸을 연기(延期)하고 은유한다.





시집을 빠져나오며



몸은 발화한다. 시인은 그 발화를 따라간다. 몸을 주의깊이 바라보고 그것들이 내는 소리를 경청하면서. 몸은 덩어리진 형태를 유지하고, 그 안을 땀, 침, 피, 거품, 액(液)들로 채우며, 바깥으로 넓게 펼쳐지고, 여기저기로 흩뿌려진다. 몸은 신과 영혼의 화육, 현존으로의 도래다. 몸은 알 수 없는 곳에서 지금 여기로 와서 삶을 연기(演技)하고, 동시에 더 나은 삶을 위해 오늘의 삶을 연기(延期)한다. 내일이 있잖아. 내일은 더 좋아질 거야. 몸은 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어느 사이에 간다. 몸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 걸쳐져 있다. 그 사이에서 오고-감을, 열고-닫음을 연기한다. 시인은 그 몸의 우연하고 다양한 궤적을 통해서 삶의 흔적들을 추적한다. 시인의 시선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이 시집에서 연기하는 몸들이 살아낸 흔적을 따라 펼쳐지는 삶, 삶, 삶들, 그 삶의 표정과 기미들을 만난다.


장석주, 시인


1954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를 통해 등단.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본격적인 시작 활동 시작.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입선되어 평론가로도 활동 中. 저서로는 시집으로 『햇빛사냥』, 『그리운 나라』,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어떤 길에 관한 기억』,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크고 헐렁한 바지』 등과 『한 완전주의자의 책읽기』 등의 평론집과 『낯선 별에서의 청춘』 등의 소설이 있음. 제1회 애지문학상(문학비평 부문), 2010년 제1회 질마재문학상 등을 수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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