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들어오되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시
이승하
등단한 지 40년이 다 되어서 그런지, 학교에 있다가 보니 시인 등용문이나 문학상의 심사를 간혹 하게 된다. 바로 어제 함께 심사를 하던 한 문학평론가가 혼잣말을 했다.
“시를 왜들 이렇게 길게 쓰는 것인가!”
다른 평론가가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할 말이 많으면 소설을 쓰든지 수필을 쓰든지 해야지 이렇게 길게 시라고 써놓고 읽어달라고 하니!”
최근에 어느 문예지에 5쪽에 이르는 긴 시를 발표한 나인지라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두 사람의 대화를 못 들은 척했다.
고교생들 백일장 심사를 해보면 시 부문에 산문시가 아닌 짧은 산문을 써내는 학생들이 있다. 기성 시인들의 산문시를 읽고 흉내를 내보는 것인데, 무르익지를 않아 원고지 2, 3매 분량의 산문을 써서 시 부문에 제출하는 것이다.
박목월 시인이 지금까지 살아 계신다면 우리 시가 지나치게 길어지고 있고 운율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통탄하면서 후배 시인들에게 일침을 놓았을 것이다. 요즈음 시가 왜 이 모양이냐고. ‘시정신’이란 애당초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말의 파편을 모아 의미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정지상의 「송인送人」은 언제 봐도 기가 막힌다.
비 개인 긴 언덕에 풀빛이 푸른데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그 언제 다할 것인가,
해마다 이별의 눈물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인 것, 이를 두고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고려 중기 때의 시가 이러한데, 지금 우리 시는 황금기인가 황혼기인가? 큰 서점 시집 코너에 가보면 바로 알 수 있다. 황혼기이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 것도 같다.
문예지를 봐도 시집을 봐도 시가 워낙 길어지다 보니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데, 그래서 ‘일목요연’을 지향한 시를 몇 편 읽어보고자 한다.
누가 서녘하늘을 자월도紫月刀로 내리쳤나?
달을 바라보다 한 목숨 다 저물어도 좋겠다며
찰박찰박 모래밭을 걸어 나오는
여자
저 바다는 늘 천년 전이다
―박수현, 「자월도紫月島」 전문(『동리목월』 겨울호)
인천 앞바다에 가면 자월도라고 있다. 시인은 이 섬의 이름에 주목하였다. 달과 섬과 바다가 자색으로 어우러진 밤이면 시심이 어찌 동하지 않으랴. 서녘 하늘을 자월도(紫月刀)로 내리쳐 달이 이지러졌다는 상상력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 위에서의 상상력이다. 달은 차면 기울게 마련이다. 달과 해가 혹성과 항성이란 점에서도 다르지만 해와 달리 달은 보름달도 있지만 초승달도 있고 그믐달도 있다. 태양도 바다도 예나 지금이나 그 모습 그대로다. 인간은 유한자인지라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쳐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바다는 내 태어나기 전인 천년 전에도 저렇게 바다였고 내 죽은 뒤인 백년 뒤에도 저렇게 바다일 것이다. 여자의 바다는 자궁일까? 생명체가 모체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놀다가 세상이라는 바다로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출산이다. 이 시의 매력은 자월도(紫月島)에 가서 자월도(紫月刀)로 내리쳤다고 본 상상력에서도 뿜어 나오지만 매력의 핵심은 마지막 연, 마지막 문장에 있다. 섬에서 본 달은 인간의 유한함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하지만 저 바다는 예나 지금이나 바다이고 여자는 예나 지금이나 바다이다. ……이 시를 읽으며 이런 것들을 느꼈다.
일동 차렷!
수용소에선
동장군에게 무장 해제된 포로들의
기상 점호가 한창이다.
이미 수확은 끝났으나
채 거두지 못한 눈밭의
대오를 이룬 빈
옥수숫대들.
이곳 저곳 호각소리만 날카롭다.
―오세영, 「삭풍 2」 전문(『시인세계』 겨울호)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서 겨울에 가장 추운 곳은 최전방 고지와 교도소일 것 같다. 오세영 시인은 삭풍이 부는 어느 겨울날, 수용소의 포로들을 생각해본 모양이다. ‘수용소’ 하면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이나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떠올리게 되는데 “동장군에게 무장 해제된 포로들의/ 기상 점호”이니 체감온도까지 더해 엄청나게 추울 것이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피아니스트><소피의 선택><인생은 아름다워>도 떠오른다. 하지만 시인의 상상력은 범인(이 글의 필자)과는 차원이 다르다. 삭풍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포로들의 모습은 “이미 수확은 끝났으나/ 채 거두지 못한 눈발의/ 대오를 이룬 빈/ 옥수숫대들”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인간세상의 모습에 대한 상상이 자연계에서 마땅한 비유의 대상을 찾았던 것이고, 너무나도 적합한 빈 옥수숫대들에 대한 연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시인의 작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기상 점호 시간에 이곳 저곳에서 울리는 호각소리야말로 삭풍과 다를 바 없다. 더 춥게 한다. 늦가을의 삭풍이 또한 그런 곳의 호각소리를 연상시킨다. 이 시는 1연만으로도 재미가 있지만 2연이 있어서 시적인 재미가 배가되고, 제3연―마지막 연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다. 풍경 묘사 자체만으로는 밋밋할 수 있으므로 겨울 수용소(공간)에 포로들의 기상 점호(시간)를 배치하였고, 여기에다가 호각소리라는 음향을 넣어 「삭풍 2」를 완성하였다. 시의 길이는 짧지만 의미망은 이렇게 크고 촘촘하다.
위층 노인이 떠듬떠듬 또 계단을 내려왔다
일찌감치
가을바람 한 자락이 동호수를 못 찾고
노란 은행잎을 복도에 내려놓고 간다
설마 내게 온 것은 아니겠지
―서상만, 「오한惡寒」 전문(『서정시학』 겨울호)
위층 노인은 몸이 불편한 분이리라. 원래 ‘떠듬떠듬’은 말을 하거나 글을 읽을 때 순조롭게 하지 못하고 자꾸 막히는 모양을 가리키는 부사인데 시인은 말도 떠듬떠듬하고, 몸도 불편한 노인인지라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노인은 몸만 불편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동호수를 못 찾는” 것이 어찌 가을바람 한 자락이랴. 화자가 문을 열어보니 노란 은행잎이 복도에 날아와 있고, 노인은 내려가고 없다(혹은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노란 은행잎은 낙화, 즉 죽음을 상징한다. “설마 내게 온 것은 아니겠지”의 ‘것’은 노인일까 노란 은행잎일까? 아니면 저승사자? 제목이 ‘오한’이니 늦가을 스산한 바람 앞에서 시인은 위층 노인의 불편한 보행을 보며 자기 자신의 병(病)과 사(死)를 생각한 듯하다. 노인을 보고 오한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 나도 언젠가는……. 사람들은 치매 환자도 뇌졸중 환자도 남의 일이라 생각하겠지만 어느 날 문득 내가 그런 신세가 될지 뉘 알리오. 하지만 춘하추동이 자연의 이법이듯 생로병사는 인간의 이법이다. 바로 이것을 서 시인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가을이 모닥불로 왔다
갈순이 이름으로
을순이 이름으로
타는 낙엽들아
타는 살붙이들아
―서정춘, 「가을 다비茶毘」 전문(『불교문예』 겨울호)
우리나라에서 짧은 시를 아주 맛깔스럽게 쓰는 시인이라면 단연 서정춘 시인을 꼽아야 한다. 이번 발표작도 극히 짧다. 다비는 불에 태운다는 뜻으로, 시체를 화장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가을이 오면 쌓인 낙엽이 처치곤란이라 한 자리에 모아놓고 태우게 되는데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시체도 태우면 깨끗하게 처리(?)가 된다. 무덤이 해마다 여의도 크기만큼 늘어난다는 말을 들은 지도 한참 되었다. 근년에 들어 화장하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는데, 불가에서는 예전부터 다비식을 했다. 자연에서 왔으니 자연(재)으로 돌아간다는 불교적 사생관의 결과일 것이다. 사실 살아서 우리 인간이 다른 인간이나 다른 생명체 종(種)에게 좋은 일 한 것도 없는데 죽어서도 땅을 몇 평씩 차지한다는 것은 살아 있는 모든 이에게 죄송스런 일이다. 화자는 별다른 감정의 개입 없이 낙엽을 태우는 그 심정으로 살붙이들(식구)을 태운다. 온기를 위해 모닥불을 지피듯이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막 죽은 식구를 불에 태워 저승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려니.
한국 산문시의 절정은 누가 뭐래도 정진규 시인이다. 행과 연을 나누지 않고도 시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싶다면 정진규 시인의 시를 보면 된다.
마음과 몸의 시접을 마무리짓는 무봉無縫의 바느질, 실땀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공그르는 꽃들의 하루하루가 가장자리에서 깊고 아리게 이울고 있다
―정진규, 「석가헌 가을」 전문(『서정시학』 겨울호)
시인은 고향인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보체리에 내려가 집을 한 채 짓고 저녁이 아름다운 난간이라는 뜻으로 택호를 ‘석가헌夕佳軒’이라고 지었다. 시골에 살면 마음 조급할 일이 별로 없다. 도회지에 가을이 오면 길에 떨어져 날리는 가로수 잎을 보며 가을을 옴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석가헌의 가을은 옷을 직접 만들어 입던 그 옛날의 가을이다. 꽃은 인간 세상의 소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하게, 마치 “시접을 마무리짓는 무봉無縫의 바느질, 실땀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공그르는” 것처럼 제 스스로 한 계절을 꼼꼼하게 마감한다. 자연의 것들은 이렇게 자연스럽거늘 우리 인간은 뭐든 속전속결로 하려고 든다. 화자의 가을도 저 꽃들의 가을처럼 마음과 몸의 시접을 마무리짓는 무봉無縫의 가을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한 편의 시를 썼을 것이다. “꽃들의 하루하루가 가장자리에서 깊고 아리게 이울고 있다”고 한다. 시인은 꽃한테서 저런 것을 보아내고 저런 것을 배우는구나. 시가 이렇게 깔끔할 수 있다니.
후다닥!
이쪽 문으로 들어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저쪽 문으로 나가버리는
의리 없는
가시내
―윤향기, 「청춘」 전문(『시와소금』 겨울호)
10대들은 대다수 빨리 성년이 되고 싶어하지만 장년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노년이 오는 것이 싫은지, 사람들은 젊어 보인다고 하면 다들 좋아한다. 내 이 청춘이 언제까지 갈 것만 같았는데 지내고 보니 그 시절은 유수였고 쏜 살이었다. 이 시의 묘미는 “후다닥!”이라는 부사를 도입부로 삼은 데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왔다가 서둘러 가고 만 청춘이 시인에게는 후다닥! 왔다 간 “의리 없는 가시내”로 생각되었다. 그 의리 없는 가시내는 바로 나였다. 시인은 가버린 젊음에 대해 애통해하는 대신 이런 유머로서 시간의 폭력성을 긍정한다. 어쩌랴, 청춘은 이미 가버린 것을. 지금 젊다고 천방지축 까부는 청춘들에게 시인은 말해주고 싶은 것이리라. 시간은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되게 하고, 뽕나무밭에 파도가 치게 한단다. 젊음을 아껴라. 시간은 의리가 없단다. 짧은 시는 이처럼 경구나 잠언의 의미를 지니기 쉽다. 서양의 캐치프레이즈나 아포리즘, 에피그램이 다 짧다.
봐라
서로 껴안고
받아들여야만
길이 되는
바닥을
봐라
깨지고 잘려야
놓일 수 있는
거룩한
구석을
―김현욱, 「보도블록步道block」 전문(『시와경계』 겨울호)
나는 오늘도 아무 생각 없이 보도블록을 걸었는데 김현욱 시인은 같은 모양의 보도블록이 서로 껴안고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가장자리 같은 곳에서는 보도블록이 잘려져서 길과 모양을 맞추고 있다. 그런 곳의 보도블록은 “깨지고 잘려야/ 놓일 수 있는” “거룩한 구석”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욕망 포화의 우리 사회에서도 이태석 신부처럼 이타적인, 혹은 자기희생적인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그중에는 성직자도 있겠지만 장삼이사도 있다. 불구자가 이웃돕기를 실천하는 경우, 이 사회 한구석의 깨지고 잘린 보도블록이 아니고 무엇인가. 시인은 보도블록을 묘사하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과 본받아야 할 것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정일근의 「시인」이라는 시를 읽는다.
마침표를 찍을 것인지
마침표를 지워버릴 것인지
오래 고민하는 시간이 있다
시가 문장부호 하나에
무거워할 때가 있다
시가 문장부호 하나에
가벼워질 때가 있다
그걸 아는 이가 시인이다
―정일근, 「시인」 전문(『시와표현』 겨울호)
이 땅의 모든 시인에게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가 시인이 아니겠냐고. 정일근 시인의 이 시를 보면 말을 횡설수설 내뱉는 이는 시인이 아니다. 마침표 하나를 찍을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이는 이, 쉼표ㆍ물음표ㆍ느낌표ㆍ따옴표ㆍ말줄임표 등 문장부호 하나를 붙일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이는 이가 시인이다. 시어 선택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지만 문장부호 하나도 심사숙고해서 선택하는 이가 바로 시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시인들이 이런 염결성을 갖고 있는가? 정일근의 시를 읽으며 나부터 큰 반성에 휩싸이게 된다. 한눈에 확 들어오지만 그 페이지에 오래 머물게 하는 몇 편의 시를 감상해보았다. 우리는 목월의 「윤사월」 「나그네」 「청노루」 「산도화」를 다시 읽어보아야 한다. 시란 눈에 들어와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야 진정한 시이다.
[출처] 한눈에 들어오되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시|작성자 이승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