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훌륭한 시인들
오세영
가끔 본질이 현상으로 인해 호도되는 경우가 있다. 나는 그것을 우리 대중 음악계에서 자주 본다. 아니 '자주' 라기 보다는 '보편적' 으로 본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만큼 당연시되어 있다는 말이다. 가수란 물론 무엇보다 노래를 잘해야 한다.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인정을 받아야 하고 대중의 사랑을 받아야 하고 높이 평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필연의 이치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노래는 대충 불러도 된다. 목소리도 썩 좋을 필요가 없다. 음감이 따르지 않아도 괜찮다. 그 대신 얼굴이 예뻐야 한다. 춤을 잘 추어야 한다. 코믹한 연기를 잘해야 한다. 재담에 능해야 한다. 그래야만 인기 차트에 오르고 유명가수로 대접을 받는다. 가수를 만든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립싱크 가수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자신은 오직 춤을 추면서 다만 입만을 벙긋거리고 실제는 다른 가수가 대신 노래를 불러주는 가수이다. 이런 가수가 유명가수로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 이런 가수는 절대 훌륭한 가수가 아니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가수란 무엇보다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를 지칭하는 용어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는가. 그런데도 노래를 잘 부르기보다 춤을 잘 추는 가수가 일반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고 훌륭한 가수로 인정을 받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는 춤을 잘 추는 가수이기는 하지만, 얼굴이 예쁜 가수이기는 하지만 노래만큼은 잘 못 부르는 가수라고 해야 객관적일 것이다. 그것이 정직한 평가이다. 그럼에도 모든 대중이 그를 훌륭한 가수라 하고 나아가서 아예 노래 그 자체도 잘 부르는 가수라고 우겨대니 나는 혼란에 빠진다.
나의 상식이, 나의 판단이 잘못된 것일까. 나의 음악 감식안이 잘못된 것일까. 이런 회의를 거듭하다가 급기야 내 자신도 그 가수가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그 착각이 거듭 반복되면 정말로 그 가수의 노래가 좋은 것처럼 느껴진다. 노래 잘 부르는 가수로 생각된다. 아니 그는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인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 자신도 대중의 집단 최면에 빠져든 결과이다. 그리하여 정말로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숨거나 사라지고 그 대신 노래를 잘 못 부르는 가수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된다. 그러니 노래를 잘하는 가수의 노래는 들을 수 없고 어디를 가나 어느 때가 되나 항상 노래를 못하는 가수들의 노래만 듣게 되는 대중들의 입장에선 어찌 잘 부르는 노래와 잘 못 부르는 노래의 비교가 가능하겠는가. 그 결과 노래를 잘 못 부르는 가수는 이제 마음 놓고 아무런 구애 없이 대중 음악계를 평정하는 상황이 된다. 아이러니하게 그들 스스로도 자신이 훌륭한 가수인 것 같은 착각 속에 살게 된다. 웃기는 일이 아니가.
훌륭한 가수란 물론 노래를 잘하는 가수이다. 예쁘지는 않아도, 춤을 잘 추지는 못해도 노래만큼은 잘하는 가수이다. 물론 멀티미디어 시대인 오늘날 영상 매체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시각적인 효과-아름다운 용모, 잘 추는 춤의 영향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을 터이다. 아름다운 용모와 잘 추는 춤의 영향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을 터이다. 아름다운 용모와 잘 추는 춤이 가수의 인기를 만들어내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기왕이면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얼굴도 예쁘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또한 비록 노래는 다소 떨어져도 아름다운 용모가, 잘 추는 춤이 노래의 미흡함을 어느 정도 상쇄시켜 인기 상승에 도움을 주는 것을 굳이 나무랄 이유도 없다. 노래는 그저 노래로 치고 일반 대중이 아름다운 용모를 보는 것에 의해서, 잘 추는 춤을 감상하는 것에 의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행복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말은 바른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그 가수가 인기를 얻어도 그 인기는 용모 때문에, 춤 때문에 얻은 것이지 노래 때문에 얻은 것이 아니라고-. 그런데도 하물며 그 가수를 가리켜, 춤이나 용모와는 아무 상관없는, 노래를 잘 하는 가수라고 추켜세운다면 어찌 대중을 우롱하는 짓이라 하지 않겠는가.
어찌해서 우리 대중 음악계가 이리 되었는지 모르겠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경제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지만 우리 대중 음악계가 바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지 않나 하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오늘 어제의 일이 아니겠으나 언제부터인지 우리 대중 음악계는 음악과 무관한 요소들이 시청자의 감각을 마비시켜 그것이 마치 음악의 본질인양 호도하는 현상이 보편화되었다. 주변이 중심을, 현상이 본질을, 위선이 진실을 왜곡하는 이 같은 대중가요의 현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아이러니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 같은 문화 예술의 왜곡현상은 비단 대중음악계에서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닐 터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 시단 역시 예외가 아니다. 훌륭한 시인이 훌륭한 그 만큼의 시인으로 대접을 받는 시단이라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뒤에 숨어서 소근대지말고, 술집 한구석에서 안주거리로 푸념하지 말고 혹시 무슨 피해를 입을지 몰라 본심과 다르게 뒷북을 치지 말고 한 번 솔직히 이야기해 보라.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오늘의 우리 시 혹은 우리 시인을 평가함에 있어, 대중 음악계가 보여주는 것처럼, 주변이 중심을, 위선이 진실을 왜곡하는 현상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정치를 지향하는 행동이다. 어용도 나름대로 득을 보지만 저항적 행위일 때가 더 그러하다. 우리 시단의 경우 정치 지향 행동에 나서면 일단 그는 평가의 대상이 된다. 정치를 지향하되 특별한 이념을 제시하고 나아가 대중적 선동의 역활도 담당하게 되면 더 큰 평가를 받는다. 여기서 한발 앞서 이제 이 일로 수형생활을 하게 되면 더욱 결정적이다. 나는 이들이 꼭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을 목적 때문에 정치 지향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기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또 이들의 정치 지향 행위가 잘 못된 것이라거나 평가절하 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때로 매우 고귀하고 값진 행동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이로 인해 그의 시가 덩달아 훌륭한 것도, 훌륭하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다만 그러한 시인의 작품을 훌륭하다고 선전하는 비평가나 그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독자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그는 어떤 특별한 경우 정치적으로 매우 정의로운 사람이며 우리 사회를 위해 절대적 공헌을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볼 때조차 그의 시가 결코 훌륭하지는 않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 문학사에서 문제된 이 같은 정치이념의 키워드가 일제 강점기 때에는 '항일 독립' 과 '프로레타리아 혁명' 등이었으며, 해방 이후로는 '유신' , '마르크스주의' , '반독재' , '반미' . '민주' . '민족주의' , '민중' , '통일' , '주체사상' 등이 아니었을까 한다. 가령 일제 강점기 시인으로 임화나 한용운-한용운의 경우 민족운동가로서의 평가는 결코 폄하되어서 아니 되겠으나-이 문학적으로 과대평가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조금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지식인. 문인 교수 등은 이제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아라. 이러한 정치적 키워드로 과거에 '재미 좀 보지 않았나' . 과거에 본 재미로 오늘의 영광을 누리고 있지 않는가.
둘째 문학 저널리즘을 장악하여 평론가들을 수하로 부리는 몇 몇 문학권력 집단의 끊임없는 독자 의식화 작업이다. '의식화' 란 비판적 사고가 불가능한 상황 속의 사람에게 특정한 견해를 일방적으로 반복 주입하여 사실이 아닌 것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믿게 하는 일종의 세뇌작용(brain wash)을 일컬음이다. 지식인이나 독자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이 같은 의식화가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작품과 독자를 매개로 하는 모든 소통 예컨대 문학저널리즘, 언론, 출판, 평론 등을 거머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견이나 다양한 정보 그리고 비판적 견해의 제공이 없는, 이 끊임없는 일방적 주장의 반복 주입이 허위의식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하물며 그것이 조직적으로 생산한, 그릇된 주장이며 특별히 계산된 목적의식을 전제하고 잇는 것이라면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마치 별로 훌륭하지 못한 가수의 노래를 방송사와 연예기획사, 음반회사가 공모하여 인기 차트에 띄우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러한 전차로 훌륭한 시인인 것처럼 대접을 받고 있는 사람이 과연 우리 주위에 없는 것인가.
셋째 자신 혹은 가정의 재난을 문학적 후광으로 삼는 경우이다. 가령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을 잃었다든지 자식에게 어떤 큰 불행이 닥쳤다든가 하는 일을 문학화해서-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널리 알리면 더불어 자신의 시도 그와 동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 동반의 지속성이 오래되거나 대중매체의 호응도가 크면 클수록 시인으로서의 입지도 넓어짐이 물론이다. 그런 까닭에 어떤 특별한 시인들-아마도 그 대부분은 상업출판의 부추김 때문이겠지만-이 이제 타산적으로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무언가 이득을 보려는 것을 부꾸럽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생겨나게 되었다. 나는 물론 이들의 불행에 인간적으로 연민과 슬픔의 감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작품이 문학적으로 훌륭하거나 훌륭하게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만일 그들의 작품이 혹시 진정한 의미에서 훌륭한 것으로 평가를 받았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닥친 불행 때문이 아니라 본래부터 그의 문학이 훌륭했거나 그 이후-혹은 그 사건이 인생의 성숙을 가져오는 빌미가 되어서- 시 자체가 훌륭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가 당한 불행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을 당한 시인은 곧 불행 그 자체로 인해 훌륭한 시인으로 평가받는 일이 비일 비재한 것 또한 우리 시단의 현실이기도 하다.
넷째 특별한 기행을 일삼거나 일상적 삶의 규범을 이탈해 사는 경우이다. 물론 여기에도 의도성이 있는 것과 의도성이 없는 것의 두가지가 있다. 전자는 인위적 일탉을 자행하여 문학사회의 주목을 끄는 것에 목적을 둔다. 후자는 처해진 여건이나 상황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시인들이다. 여기에는 물론 개개인의 건강, 경제적 능력, 성격, 계산된 처신, 인생관 등 여러 복합적인 문제들이 혼합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이런 부류의 시인들은 결과적으로 다른 전문적 시인들에 비해서 자주 문학저널리즘이나 비평의 초점이 되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문학 담론에 있어서 남다른 프레스티지를 갖는 것도 사실이다. 나아가 어떤 신비스러운 아우라를 지닌 시인으로 그래서 더 유명해지고 더 평가 받는 시인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알코올 중독이나, 정신 분열증 또는 경제적 무능력이 문단에서만큼 대접을 받는 영역도 아마 없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 시단에서는 작품을 아예 안 쓰는 것도 평가를 받는다. 매년 시집을 내는 것보다 20년 만에 한 권을 내야만 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특별한 기행이, 삶의 일탈이 곧 훌륭한 시작이 아니다. 특별한 기행을 일삼는 사람이, 정상 규범을 일탈해 사는 사람이 쓰는 시가 바로 그로 인해 훌륭한 시가 되는 것은 더 더더욱 아니다.
문학은 문학이다. 시는 시다. 그러므로 그 인생이 어떻든 그의 카리스마나 권력이 어떻든 그의 정치행보가 어떻든 일차적으로 작품이 좋아야 훌륭한 시인이다. 나는 그런 시인인 대접을 받는 문학사회에서 시를 쓰고 싶다. 평가를 받고 싶다.
※ 오세영 시인
1965-68년『현대문학』등단. 시집『시간의 뗏목』『문 열어라 하늘아』『무명연시』『사랑의 저쪽』등. 학술서『20세기 한국시 연구』『상상력의 논리』『우상의 눈물』『한국현대시 분석적 읽기』『문학과 그 이해』등. 현재 서울대 인문대 교수
<2007 여름호 "시인시각" (문학의전당)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