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기와 예술 예부터 광기와 이성 사이에는 언제나 사회적 금기가 있었다. 언제부턴가 금기는 인간에게 '~을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 금지조항은 인간에게 정념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을 넘어섰을 때 광기가 나타났다. 금기는 언제나 그것을 어겼을 때 가해질 무서운 형벌에 대한 공포와 그것의 경계선을 넘어섰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공포는 형벌에 대한 자각으로서 이성의 행위이며 호기심은 정념의 느낌으로서 감정의 행위이다. 이 양가성은 금기의 경계선에서 양방향으로 갈라진다. 종교는 언제나 공포를 자극하여 금기를 유지하고자 했으며 예술은 금기의 위반을 통하여 광기를 체험하고자 했다. 종교가 이미 체험된 과거의 시간을 금기조항에 묶어서 사회의 질서유지에 기여하고자 했다면 예술은 언제나 그것의 경계선을 넘어서서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아직 체험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고자 했다. 이성은 광기를 바라보며 "저것은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고 비정상적인 것이야! 따라서 우리는 저것을 멀리 해야만 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아직 체험되지 않은 지식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광기는 이성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 이점에서 광기는 이성보다 한수 위에 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 제목이다.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은 원래 친구 사이였으며 젊었을 때 신부가 되기 위해 양자 모두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골드문트는 신의 울타리가 자신의 삶을 던지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신학교를 떠나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갔다. 그는 세상에서 신의 금기를 넘어서는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예술가가 되었다. 이에 반해 나르치스는 신학을 공부하고 난 다음에 신의 금기 안에 갇힌 채 한 성당의 신부로 성서의 진리를 지키며 일평생을 보냈다. 인생을 마감할 노인이 되어 두 사람은 서로 만나게 되자 나르치스는 친구 골드문트에게 성모상을 조각해줄 것을 부탁했다. 마침내 완성된 성모상을 바라보며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에게 광기가 신의 진리를 파악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이성 보다 한수 위라는 걸 인정했다. 오늘날 자본주의 예술은 어떠한가? 이 광기를 알고 있는가? 광기의 상품화는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대중화되지만 거기에 예술성은 없다. 예술가 역시 먹고 살기 위하여 자신의 예술성 보다는 상품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마르크스가 인식했듯이 자본주의는 예술가를 그의 노동과 작품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자신으로부터도 소외시킨다. 더 나아가 루카치가 마르크스를 뒤따라서 인식했듯이 더욱 심각한 것은 자본주의가 예술가로 하여금 이 사태를 자각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자본의 마력이 사회구조를 집어삼키면서 예술계마저도 점령한 것이다. 예술가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상품성이 예술성보다 위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작품을 창작할 때 자기도 모르게 상품성에 맞춘다. 예술가의 이러한 무의식적 사고는 자본의 막강한 힘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예술이 자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예술을 지배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예술가도 작품도 아니며 자본을 관리하는 기획가다. 예술은 자본을 얻기 위해 이벤트로 변화된다.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보다 행사를 준비하는 기획가가 더 중요해진다. 성공과 실패는 많은 자본의 확보에 따라 결정된다. 이 구조 속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성을 유지하기는커녕 그렇게 했다가 먹고 살기도 어려운 처지가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예술 작품들 속에는 획일성의 폭력을 통한 인간성의 삭제가 숨어있다. 온갖 세련된 화려함으로 형식을 채우지만 공허한 내용뿐이다. 이것은 예술의 생명인 형식마저도 경박하게 만든다. 허울 좋은 형식 속에 인간 예수도 슈퍼맨으로 변화된다. 인간의 본성을 삭제한 형식과 내용의 붕괴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술적 대가를 기대하긴 어렵다.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에 대한 각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서 샌델이 더 유명한가? 가다머가 더 유명한가? 유럽의 분위기는 확실히 다르다. 그대들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들의 지성의 문제이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 구조에서는 단지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만 있을 뿐 창조적 광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서양 예술에서 대가들은 모두 광기를 체험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배가 고파서 지원을 아쉬워한 적은 있지만 자본의 부족 때문에 자신의 예술성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일평생 저술 활동을 하고 그림을 그렸지만 살아생전 작가로서 명성을 얻지 못한 대가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자신의 예술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자들이 진정한 대가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놀음 빚을 갚기 위해 헐값에 팔아치워야 했고 니체는 자신의 대부분의 작품들을 살아생전 각각 일백권도 팔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집필하면서 자식의 죽음과 생활고를 동시에 겪어야 했다. 고흐는 살아생전 예술 세계에서 빛을 보지 못했고 고갱은 그보다 예술적 명성을 갖고 있었지만 원초적 광기를 찾아서 타히티 섬으로 떠났다. 이점에서 고갱은 레비스트로스보다 더 일찍 구조주의를 이해한 예술가였다. 이 모든 대가들의 예술적 삶의 초점은 언제나 자본이 아니라 그들의 예술성에 맞추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은 그것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예술가와 다른 점이다. 모든 예술은 예술가의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이 경험의 극단에 이성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광기가 있다. 여기에는 예술가의 지성, 감정, 감각, 지각, 심정, 느낌, 직관과 같은 총체성이 포함되어 있다. 광기는 이성을 알지만 이성은 광기를 알지 못한다. 단지 그것을 멀리할 수 있을 뿐! 그러나 광기는 인류의 문화 속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광기를 흡수한 자연 속에 숨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광기는 인간의 원초적 본성인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이다. 불안은 태곳적부터 인간의 이성을 사로잡고 있는 원죄의 존재론으로서 언제나 이성에 앞서 있었다.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 역시 구조주의의 광기가 사르트르와 후설의 이성에 앞선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광기는 예술가로 하여금 시대를 앞질러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는 결코 광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표현했다. 위대한 예술가는 광기의 체험을 통하여 시대의 고정관념을 깨트렸고 각 시대보다 앞서 자신의 예술성을 널리 알렸다. 역설적이게도 고흐보다 더 이성적이었던 고갱의 작품들 속에 고흐의 광기가 숨어있다. 관객들은 그것들 속에서 드러나는 구조주의의 원색 속에서 그의 친구의 광기를 느낄 수 있다. 이성은 언제나 자기도 모르게 광기를 드러낸다. 인간의 본성은 양자 사이의 차이를 퇴색시킨다. 차이는 없다. 단지 종교적 구별만 있을 뿐! 예술가들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예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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